성관사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남덕유산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 금산사 말사
장수 나들목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무주방향으로 비탈을 오르면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주변 지형은 백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덕유산 지맥인 깃대봉에서 수많은 학이 몰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곳에 성관사가 들어서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어렵게 오르면 장계면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 온다.
성관사 대각선원에서는 결제 동안 가까운 산으로 등산조차 금지될 정도로 계율이 엄격하다고 한다. 오신채는 물론 초콜릿, 우유, 빵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사사로운 음식에서 나오는 인연법도 허투루 여기지 않을 정도로 선원의 청규는 서릿발 같다고 한다.
투철한 참회.계행으로 수행근기를 내세우시며 상상을 초월하는 절수행-염불정근-화두선 정진으로 그 경계를 낱낱이 밝히고 있는 숨은 도인, 월성스님의 흔적을 찾아 오르막 고갯길을 오른다.
성관사"라는 명칭은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데서 따온 것으로, 수행자는 어둠을 밝히는 별처럼 고고하게 수행정진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법등을 이어온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시대의 유물이나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향토
사학자인 오치황씨 고문서 중에 고려 시대 문인이 이곳에 들러 유람하고 요양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1943년, 정묘호란 때 소실로 인해 끊어졌던 법등을 이어 사찰명을, 금덕사"라 개칭,
월성선사가 1994년 이후 불사를 시작하면서 사찰명을 "성관사"라고 하였다.
절집을 지키고 있는 요놈의 백구들도 월성 큰스님과 함께 생활하던 녀석들이다.
월성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숨을 내건 정진을 강조하신다. “옛날에는 조계 가풍에서도 염불은 기초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업연(業緣) 많은 중생은 머리를 깎아도 망상이 많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아만심이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절을 통해 참회하고, 계행을 철저히 닦아 수행의 근기를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스님의 경험에 따르면 절은 망상을 제어하기에 가장 좋은 방편이다. 수천 배를 하다보면 망상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지고, 저절로 하심(下心)이 된다.
월성 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정근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배추밭 김매기’에 자주 비유한다. 배추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된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이다. 다겁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힘든 고행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한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타파된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을 수 없다.
스님은 45세가 되기 전까지 20여년간 하루 1만2천배 기도를 5∼6년씩 3회에 걸쳐 실시하는 등 거의 매일 3천배 절하기를 한 초인적인 원력을 보여주었다. 100일씩 나눠 300일씩 하는 1만2000배 기도를 통해 망상을 제거하고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1만2천배 기도는 반야심경 221편, 천수경 121편 독송, 참회의 절 3천배, 신도를 위한 절 3천배 등으로 진행되었다. 스님은 보리를 한 말 빻아놓고 보릿가루 한 컵을 마시며 24시간을 견뎠다. 한 말이면 100일을 먹을 수 있었는데, 소변과 대변은 열흘에 한번만 보아도 몸에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3천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래도 상(相)이 남아 못된 스님의 가사자락만 보아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1만2천배 정진에 들어갔을 때는 무아지경에서 업장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습니다. 눈은 아래를 보고 있어도, 등 뒤에서 엄청난 용광로와도 같은 불덩어리가 내 몸을 관통하더군요. 이 불구덩이가 지나갈 때 탐진치 삼독과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찾아드는 걸 체험했습니다. 여기서 혜안(慧眼)과 식(識)이 열리는 것이지요.”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 참된 ‘기도’는 그대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주변환경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한다.
즉 ‘절 수행’은 제불보살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수행방편이었다. 엄청난 절 수행과 염불, 독경으로 수행력을 얻게 된 스님은 어느 절에 가도 조실 스님들로 부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은 스님을 꼭 끌어안고 옆에 앉히시면서 상좌들에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 눈깔 먼 놈들아, 절해라.”
無地堂 月星 大宗師 行狀
무지당 월성 대종사께서는 1935년 5월 7일 충북 보은에서 출생하셨다.
청화스님을 은사로 하여 1955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운기스님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지하셨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 계룡산 갑사에서 수행정진하시다가 마지막 해인 1962년에는 삼각산에 입산하여 용맹정진 하셨다. 그 후 통도사 극락암, 봉암사, 운문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셨다.
1965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시고, 1975년에는 서울 영등포에 성관사를 창건하셨다.
1985년 태안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1986년 경기도 송탄에 성관사를 창건하셨다.
1991년 서울 양재동 정중선원에서 도심포교에 전력을 다하시다가, 1992년 태안사 부조실로 추대되셨다.
1993년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에 성관사를 창건하시고, 1995년에는 성관사의 대각선원을 개원하셨으며, 1997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에 성관사를 창건하셨다.
이후 장수 성관사 대각선원 조실스님으로 계셨다.
계사년 2013년 10월 12일 오후 1시 성관사 중화당에서 법납 55세, 세납 79세로 원적에 드셨다.
성관사 8각9층석탑
높이 15m, 기단부 1층은 팔부신장을, 기단부 2층은 네 분 부처님과 보살님을 모셨다.
대중에게 이르는 글
(성관사 대각선원 조실 무지당 월성 대선사)
—. 온 세상 일체 만물은 모두 하나이고, 나라고 내세울 만한 것 없으니
모름지기 행자(行者)는 무행무착(無行無着) 평등공양(平等供養) 하라.
—. 행자(行者)의 한 생각에 백세가 일어나고 백세가 물러나니
행자(行者)는 원망하는 마음을 돌려 아름다운 생각을 낼지니라.
—. 만생의 아름다운 삶도 한 찰나의 깨달음에 비교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행자(行者)는 도 닦음에 방일함이 없게 하라.
—. 계행은 보리(菩提)의 근본이니 자는 것, 입는 것, 먹는 것을 정결히 하라.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2016년 오월
전북 장수군 성관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