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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것을 잡아야(대하16장 1-10)
성경본문:역대하16: 1-10
1. 아사 왕 제 삼십육 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5.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6. 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화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 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니리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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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기도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바쁠 때는 일기를 쓸 시간이 없다.
그러나 일이 없는 날은 쓸 내용이 없다.
바쁘고, 힘들 때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
평온할 때는 기도할 내용이 없다.
착각!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사 왕 제 삼십육 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이러한 전쟁은 지난주에 함께 묵상했던 여로보암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북이스라엘에는 늘 약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갑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이냐면 ‘라마’를 요새화하는 것입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 8km 지점 곧, 벧엘 근처에 있습니다.
남북 왕국을 잇는 아주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나면 남북으로 잇는 길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못 가게 할 뿐만 아니라 유다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아사 왕이 얼마나 다급해졌는지 모릅니다.
그가 택한 방법이 무엇인가요?
본문 2~5절입니다.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5.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당장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강력한 힘이 있던 아람 왕에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 ‘은금’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방법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아사의 말을 듣고 쳐들어와 바아사가 라마 건축을 포기하고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히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한 홍 목사가 쓴 책 중의 아주 걸작이 있습니다.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라는 책인데, 오늘 말씀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 연합국들은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될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널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
그만큼 당시 상황은 급했습니다.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잡지 말아야 할 소련의 스탈린과 손을 잡았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고,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는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무렵 이미 영국의 처칠 수상은 스탈린의 공산주의의 야욕이 히틀러의 파시즘 못지않게 무섭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철의 장막’이라는 말로 그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경고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순식간에 동유럽과 중국, 중남미 곳곳에 공산 정권을 확산시켰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레닌이 예언한 대로 세계 지도의 3분의 1이 공산주의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미국과 영국이 2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산 정권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새로운 냉전 시대에 세계가 안고 가야 했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습니까?
착각의 결과였고, 이미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우
리 인생에는 잡지 말아야 할 손이 있고, 잡아야 할 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착각의 결과입니다.
아사는 유다의 세 번째 왕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역대하 14~16장까지 무려 석 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이 그의 실수에 대하여 기록하지만, 더욱 많은 부분인 14~15장에는 ‘믿음의 사람’ 아사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처음의 아사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방 신상과 산당을 없애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개혁을 단행합니다.
에디오피아 100만 대군이 공격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승리를 맛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니 선지자가 아사에게 나타나 한 이야기 중 8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또 역대하 15장 13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백성으로 하여금 잃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자 그는 그 우상을 찍어 가루로 만든 다음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리고, 그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해버렸습니다(대하15:16).
이처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라를 다스리자,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5년까지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역대하 14장과 15장에 나오는 아사 왕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왕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관성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radical’을 부르짖는 이유인 듯합니다.
늘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우리의 삶에서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사 왕이 안타깝게도 그의 삶의 기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왜 이렇게 곤고해졌는지를 말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되고 삶이 꼬이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이 기본에 서 있는지를 말입니다.
아사가 통치하던 나라가 35년까지 평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게 되자, 그의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적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불의한 것을 잡게 되었을 때, 그 불의함이 그의 삶에 커다란 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큰 억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나니 선지자가 7절과 8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아사 왕에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더 큰 어려움이 있을 때, 왕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더 큰 적을 이기게 하셨는데, 그보다 작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손을 잡았으나, 이제 그 세상이 왕을 짓누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왕이 아람을 사용한 것 같으나 이제 아람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았으나, 커다란 문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바닥을 드러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순간에 세상 것이 더 크게 보입니다.
어렸을 적 많이 듣던 예화가 생각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에서부터 흘러오는 강물입니다. 처음에는 평온한 강이지만, 폭포 쪽으로 가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 파선합니다. 물이 폭포 쪽으로 흘러갑니다. 조금 있으면 폭포에 떨어져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 생명줄이 던져집니다.
그런데 바로 옆으로 커다란 나무가 흘러내려 옵니다.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아무리 커다란 나무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것은 붙잡으면 함께 폭포 아래로 떨어집니다. 생명줄은 아무리 얇아 보여도 붙잡으면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김범곤 목사의 [생명의 떡 오직 예수] 서울역 마당쇠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흔히 기도할 때 “주여!”라고 해 놓고는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하나님은 헬퍼가 아니십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기가 뭔가 해 보려다가 잘 안 되면 사후 약방문 식으로 뒤치다꺼리나 하는 하나님처럼 만들지는 않습니까?
내가 애쓰는 이 일을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도우시는 수준에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사시고, 그 하나님이 직접 일하신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일하면 내 수준에 그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면 하나님의 수준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믿음은 꾀를 쓰거나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는 것이 신앙의 착각입니다.
아사 왕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씁니다. 그리고 그 뇌물의 효과는 즉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세요.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뇌물의 효과가 대단합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아람과의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동안 화친을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람 나라에 대하여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 유다를 견제하기 위해 라마에 성을 건축했던 것이죠. 북이스라엘이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쪽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유다 왕 아사의 처지에서 보면 외교적인 노력으로 성공한 듯 보이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수완이 좋은 외교가요 뛰어난 정치가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착각은 착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언급했지만 아사 왕의 행동에 대하여 선견자 하나니가 찾아와 옛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역대하 14장 11절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야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쩌면 북이스라엘 군대보다 아람 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한 10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했던 그의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궜던 승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여화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니리다 하매”(9절)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You have done a foolish thing, and from now on you will be at war.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입니다.
“망령되이 행하였은즉”이란 “바보 같은 일을 행한 사람”입니다.
도움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는데 사람에게 손을 내민 것이 바보 같은 행동이요, 망령된 행동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방법을 강구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말인가요?”
여기에서 아사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것은 기도 외에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한 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방법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 유다를 위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였을 때,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죠.
어리석은 그의 행동은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사 왕을 심판하시려 했다면 그냥 심판하시면 될 일입니다.
왜 하나니 선지자가 아사 왕에게 이전의 일을 기억나게 했을까요?
만일 질책하려 했으면 그냥 질책하면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셨던 것은 아사 왕이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제는 그의 문제를 지적받고 난 후에 나타난 아사의 행위입니다. 본문 말씀 10절을 보세요.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참 비극적인 것은 인간이 한번 착각을 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서며 좀처럼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한 후에 어떻게 행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실수를 덮기 위해 더 큰 실수를 하는 듯합니다.
착각이 착각으로 끝나지 않고 비극으로 흐른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한 후에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10절에 보면 아사가 “노하여”라고 되어있는데, 대개 인간이 죄를 지으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냅니다.
그것은 수치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얄팍한 태도입니다.
이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강수”를 씁니다.
강하게 나오는 인간들의 특징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강하면 이제 부러질 일만 남은 것이죠.
자신을 아프게 하는 하나님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혹시 백성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까 두려워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이 ‘착각’으로 끝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의 착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째, 그가 아람 왕에게 손 내밀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3년 후에 그는 발에 병이 들어 죽습니다.
메시지 성경에 보면 역대하 16장 11절~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에 대한 기록은 ‘유다 왕 연대기’에 남아 있다. 아사는 왕이 된 지 삼십 구년이 되던 해에 발에 균이 감염되어 중병이 들었다. 그러다 왕이 된 지 사십일 년이 되던 해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 자신을 위해 다윗 성에 마련해 둔 웅장한 무덤에 묻었다.…”
하나님은 아사 왕의 잘못에 대하여 “질병”으로 물으셨습니다.
역대하 16장 12절의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 역대기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이 말씀 가운데 아쉬움이 묻어나지 않나요?
만일 아사가 하나님께 구하였더라면. 끝까지 버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사에게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발이 어떻게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발이 병들게 하심으로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번 빗나간 인생이 끝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사 왕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요?
‘이웃 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으면 안 된다?’
‘병이 들었을 때는 의사를 찾아가지 마라!’
뭐 그런 일인가요?
아닙니다.
이유와 근원,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라면 하나님께 찾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화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화친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함께하는 이웃들과 잘 지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한 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병들어 의사를 찾아가는 것, 약사를 찾아가는 것, 지혜가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면 근본적인 문제가 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1장 1절에서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근원이 치유되지 않는 미봉책은 문제의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잡을 것을 잡아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느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대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결단코 내버려 두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맺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내미십시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상에게 가서 구걸을 하다니 말입니다.
중국 가정교회 이야기와 윈 형제 이야기를 담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이다”
긍정적 사고를 이야기한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를 붙잡은 당신의 손을 하나님의 손안에 넣으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성패는 우리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붙잡느냐에 있다는 것이죠.
잡을 것을 잡으십시오!
잘못 잡았다면 놓고 다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스케이트를 배우면서 참 귀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자세가 잘못되면 억지로 타지 마십시오. 힘이 빠져 있을 때 역시 억지로 타지 마십시오. 그때는 잠시 쉬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좋은 자세를 다시 잡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