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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가 없어진 실제 상황의 해부도>의 줄거리 :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님이 선민과 함께하심의 상징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상징이지요. 이곳에서 일어난 제사장들의 사역은 선민 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전혀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성소와 지성소의 기구들은 하나님과 함께함이란 무엇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저주가 없어진 실제 상황의 해부도
(히브리서 9:1~10)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해부도는 신체 내부의 각 장기의 구조와 연결을 세밀하게 나타내기 위해 해체한 상태를 말합니다. 의사는 온전한 상태의 해부도를 기준으로 환자의 내부를 살펴보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주가 없어진 실제 상황의 해부도를 기준으로 잘못된 신앙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저주가 없어진 상태와 비교하여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주는 죄로 인해 우리에게 임해 있는 불행이고 재앙입니다. 이 불행과 재앙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과 연결됨의 끊어짐입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사는 것이야말로 저주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9장에서는 성소와 지성소가 언급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소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하는 역할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밝히신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소와 지성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저주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저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주 속에 있고, 저주로 오염되어 있고, 저주라는 재료로 만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우리 또한 그 생각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기란 저주받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경향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인기가 많고 잘 나간다고 해서 기뻐할 일은 아닙니다. 저주가 더 깊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바탕이고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저주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저주받은 상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가 없어진 상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서 호흡을 맞추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꼭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10절까지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사람이기에 육체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상태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 년에 단 한 번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서야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의 죄를 속하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법궤의 뚜껑은 속죄소라 불렸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소에 자신의 죄를 위해서는 수송아지의 피를 뿌렸고, 백성의 죄를 위해서는 숫염소의 피를 뿌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제사 과정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의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속죄의 제사가 동반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민들에게 주어진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이었습니다. 이는 곧 선민이 하나님과 함께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소와 지성소의 기구들을 나열하며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히브리서 9장 전체의 내용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허락하신 성전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사역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활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1절 이하에는 구약시대의 엄밀한 규칙과 규정들이 언급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이 규칙과 규정들을 따라 사역했지만, 백성들은 각자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서 실패했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그 일을 성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황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바로 저주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실패한 구약의 성전 이야기는 바로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실패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이름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실제로 가리키는 존재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둔 성전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먹었던 만나를 넣은 항아리가 있었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었고,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는 곧 내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줍니다.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누구냐?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법궤 안에 담겨있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돌판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심이 나와의 관계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나갔던 광야는 물 한 모금 없고,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땅에서 250만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을 먹고 입고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만나가 가리키는 나와 관계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합니다. 저주가 없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심으로 나타납니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태의 반대입니다. 육체가 있어서 필요한 상황들을 스스로 조달하려고 하는 시도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죄이고 저주받음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육체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조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하여 돈을 버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저주 속에 있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광야처럼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는 육체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알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등 육체가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스스로 얻으려고 행동하며 사는 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특징이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넣은 항아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 안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또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고라 자손이 아론의 대제사장직에 반기를 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왜 대제사장직을 아론만 하느냐?’라고 불만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셔서 각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를 모으게 하십니다. 열두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가 놓여있는 가운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 가문의 자손들에게 대제사장으로 정하셨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 안에 넣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위해 나와의 관계 안에 들어오시면 주권적으로 무엇을 하실까요?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거나 스스로 바람이나 비전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내 인생이 가야 될 매일 매일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삶에서 매일 다양한 변수나 문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든 여정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앞길을 생각한다든지 방향을 결정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서는 일어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지팡이가 없는 저주 속에 빠진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한편 법궤 속에 들어있는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저주에서 빠져나와 살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신들처럼 내가 정한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육체의 삶을 위해 필요한 일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내가 얻으려는 것을 정하고, 목표로 하는 인생의 길을 정합니다. 그리고 내가 시키는 일을 들어줄 대상으로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심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내가 정한 일을 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살았습니다.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조달하려 했고, 내 인생의 여정을 스스로 결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저주 속에서 할 일이기에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열 개의 계명이지만 사실은 첫 번째 계명 하나입니다. 첫 번째 계명이 지켜지지 않을 때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계명은 바로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가짐으로써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 욕구는 누구에게나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비어있어서 채워지고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신으로 모시라는 것은 하나님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다른 신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들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될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상들입니다. 돈을 벌어서 만족하고자 한다면 돈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건강하고 장수해서 만족하고자 한다면 건강과 장수가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자녀가 잘돼야 만족할 수 있다면 자녀의 형통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될 마음의 공백은 채움의 자리입니다. 이 채움의 자리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이 다른 신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나의 상대자로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상대자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에 이어 성소를 언급합니다.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향을 피워서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기구입니다. 향기로운 연기는 선민들의 기도를 뜻합니다. 분향단은 24시간 항상 타올랐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들은 하루에 두 번씩 향의 재료들을 분향단에 넣었습니다. 향이 항상 타올랐다는 것은 기도가 항상 지속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향기로운 연기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24시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곧 추구함이고 간구이며 바람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이 하나님만을 상대자로 하라는 것이었기에 24시간 바랄 대상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지게 해주세요. 하나님과 더 친해질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저주 속에 있는 상태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24시간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됩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돈을 섬기고, 자녀의 형통을 섬기고, 건강을 섬기고, 여행을 가고, 이런 일 저런 일을 합니다. 24시간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상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저주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이와는 다릅니다. 비어있는 마음은 채워져야 합니다. 이 채움을 가리키는 것이 떡입니다. 마음을 채울 떡은 바로 십계명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내 육체를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스스로 조달하려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주체적인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조달하실 일이고 창조주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이끌어 가실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마음 채움을 위한 욕구가 생길 수 없는 나 자신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상대자로 삼아서 하나님만으로 배부를 수 있기를 24시간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내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상황과 여건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필요한 것을 다 조달하실 것입니다. 직업이 없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자녀가 없고, 지식이 없고, 명예가 없고,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이끌어 가시는 중에 지금은 없어도 되기 때문에 없게 하셨을 뿐입니다. 없는 상태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허락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없음을 느낀다면 내가 판단의 주인이 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고 없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분향단의 불이 24시간 꺼지지 않게 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으로 배부르도록 24시간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란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4시간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직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나의 모든 말과 행동과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발산됩니다. 성소에 있는 등잔대가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24시간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24시간 기도하는 중에 하게 되는 말과 행동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소와 지성소의 기구들을 마음속에 기억하다 보면 스스로 죄와 저주 속에 빠져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를 잊는 순간 마음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근심에 사로잡힙니다. 인생의 노후 문제나 자녀의 진로 문제 등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의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24시간 하나님만을 상대하여 하나님만으로 배부르려고 하는 기도가 지속되지 못합니다. 자꾸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다른 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내 말과 행동 또한 하나님의 생각이 발산되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어둠 속에 묻히게 됩니다. 이러한 나를 발견하였다면 번제단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기구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될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나를 번제단에서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주가 체질이 되어버린 나, 죄가 체질이 되어버린 내가 어린 양과 함께 죽습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에서 번제단에서 어린양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에서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사역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할 때 그 내막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 드러내는 해부도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지성소와 성소와 번제단이 뜻하는 바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저주가 없어진 상태의 삶에 실패했지만 구약의 이야기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상세한 해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인체를 해부해서 속에 장기들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듯이 우리에게 저주가 없는 삶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해부도를 통해서 생활 현장에서 무엇을 행동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내가 저주 속에 있는 것인지, 저주에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등졌는지를 진단해낼 수 있습니다.
지성소의 법궤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있었고 바깥뜰에는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의 구조와 기구들의 역할을 기억함을 통해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진단하는 청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청진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진단하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실제 생활 현장에서 함께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선민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이 무엇인가를 해부도를 보듯이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 해부도를 기억하며 실제 생활 현장에서 나를 점검함으로써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