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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재 진행형인 완악함의 성분 분석>의 줄거리 :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이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괴롭히기에 효과적인 재앙을 임의로 골라내신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완악함 안에 포함된 성분을 있는 그대로 하나씩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인간을 내려다보면 영적으로 이렇게 열 가지 재앙으로 비유될 수 있는 상황이 뒤범벅이 된 인격 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완악함은 모든 인간에게서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완악함의 성분 분석
(출애굽기 7:14~8:15)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22.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3.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24.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25. 여호와께서 나일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3. 개구리가 나일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4. 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오늘부터 며칠간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바로와 애굽에 임하고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7장 20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나일강이 피로 변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독성이 강한 구정물로 변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장 2절을 보면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필이면 개구리가 대량으로 발생해서 바로의 왕궁과 침실로부터 모든 애굽 사람들의 집안 구석 구석까지 있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악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바로가 완악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우주 만물에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게 된 것입니다. 있게 됨은 우주적 방향성입니다. 한편 인간은 우주 만물 중에서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티끌 같은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이상한 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되는 우주적 방향성을 띠고 있는데 인간만은 이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원하는 것을 있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있는 자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만이 다른 것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삶에서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없게 하려 함이란 스스로 있는 자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완악함입니다. 있게 됨의 방향성은 우주 만물에 임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산도 바다도 모든 동식물도 있게 됨의 방향성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물건조차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분자와 원자 혹은 미립자 단계에서 보자면 고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있게 됨의 방향성을 따라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양자역학 같은 과학이론을 언급하며 있게 됨을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얼굴과 오장육부와 신체 구조까지도 모두 있게 된 방향성을 따라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내 인격에서만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완악함을 보실 때 어떻게 여기실까요?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은 완악함의 열 가지 성분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괴롭히시기 위하여 임의로 일으키신 사건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당신의 있게 하심의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 완악함 속에 들어있는 열 가지 성분을 순서대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은 3,5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있게 됨이라는 우주적 방향성을 의식에서 잊어버리고 무엇인가 삶에서 있게 하려고 한다면 완악한 것입니다. 그러한 완악함 속에는 열 가지 재앙으로 상징되는 성분들이 들어있어서, 인격과 뒤범벅이 된 상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은 모든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 성향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바로만 완악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바로의 완악함은 점점 강화됩니다. 이러한 완악함은 우리가 바로의 위치에 있다면 똑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완악함이란 열 가지 재앙으로 상징되는 요소가 인격과 뒤범벅이 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악함의 열 가지 요소 중에서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으로 상징되는 두 가지 성분을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열 가지 재앙을 살펴봄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3,500년 전에 있었던 전설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게 됨이라는 우주적 방향을 거스를 때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으로 상징되는 완악함의 요소가 인격 안에 뒤범벅이 되어 나타납니다.
완악함의 첫 번째 성분은 생명의 소멸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단순히 나일강의 물만 피로 변한 것이 아니라 그릇에 있는 물까지도 다 피로 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외를 두셨는데 24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강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파서 구하는 물은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에, 애굽 사람들은 물이 피로 변한 일주일 동안 마실 물을 구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물이 다 피로 변해서 애굽 전체가 일주일도 못되어 몰살 당한다면 열 가지 재앙이 더 일어날 수도 없기에 이러한 예외를 두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피 재앙의 의미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피는 살아있는 생명체 안에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피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했다는 것은 목숨은 살아있으나 생명이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목숨은 있는데 생명은 없다는 말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사람이 인격적 존재임을 전제합니다. 생명(生命)은 문자 그대로 살아있음을 명령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인격적으로 내가 살아있어야 될 이유를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피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악한 사람은 자기가 살아야 될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의 첫 번째 성분입니다.
완악한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됨이라는 방향성에 저항합니다. 그럴 때 있게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는 차단됩니다. 그러므로 있게 됨의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 속에서는 내가 살아있어야 할 진짜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나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에게서 있게 됨의 방향성이 끊어졌기 때문에 내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죽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유명한 축구 선수가 다리 관절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축구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유명한 외과 의사가 수술을 집도해야 할 오른손에 수전증이 왔습니다. 이제 외과 의사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수가 연구를 할 수 없게 되면 교수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판사와 검사가 정의로움에 대한 기준과 양심이 사라졌다면 판사와 검사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사업가가 사업이 망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사업이 살아야 할 이유였는데 사업이 망하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로부터 완악함에 의해 생명이 끊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완악함은 있게 됨이라는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게 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내가 스스로 있는 자라도 된 듯이 행동합니다. 축구 선수는 축구가 자기 생명이라고 여깁니다. 외과 의사는 수술이 자기 생명이라고 여깁니다. 문학가는 상상력이 자기 생명이라고 여깁니다.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다 가짜 생명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성분인 생명의 소멸입니다.
세상 만물은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완악함을 가지고 이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가 살 이유를 내 안에서 의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살아야 하기에 스스로 살 이유를 만들고자 합니다. 혹은 세상이 가르쳐주는 이유를 안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상징하는 피의 재앙이 뜻하는 바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렇게 완악한 상태로 살고 있는 인간을 내려다볼 때 마치 피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고 여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세상 만물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그 우주적 진리의 방향성을 거스릅니다. 스스로 있게 하려는 삶을 삽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있게 하신 의도를 놓칩니다. 그럴 때 삶은 그야말로 죽음의 피바다가 됩니다. 평범하게 가정에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피바다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죽음이 지배하는 피바다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고 여길 것입니다. 손을 움직여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피로 떡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죽음이 묻어납니다.
21절을 보면 “나일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는 완악함을 유지하는 것은 우주적 방향성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관계하는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나의 죽음의 바닷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죽음의 바닷속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있게 됨의 방향성을 의식하여 인정하고 순응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서 완악함이 나타나 우주적 방향성을 거슬러 마치 스스로 있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마다, 죽음의 피바다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완악함이 제거되고 우주적 방향성이 방해받지 않고 막힘없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이로부터 모든 것은 분명해집니다. 내 마음은 몸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좋음을 만족과 감사로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나의 일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면 왜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있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단체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완악하여 스스로 있게 하려는 위치에 서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이 죽은 것이고, 피바다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피바다에 덮인 세상에서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우주적 방향성을 통과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서 피바다가 밀려 나갑니다. 자동차 세차를 할 때 강한 바람으로 물기를 밀어내듯이 십자가에서 우주적 방향성을 받아들이면 내 주변을 덮고 있던 죽음의 피바다들이 다 밀려 나갑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주적 방향성을 받아들이면 성령은 바람이 되셔서 나를 중심으로 생명이 죽은 피바다를 밀어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모습입니다.
완악함의 두 번째 성분은 가짜 생명을 붙잡음입니다. 이것이 개구리 재앙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이 작동할 때 살아야 될 이유를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완악함이 작동하든 하지 않든 똑같이 채움을 원합니다. 채움을 위한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채움을 위해 삽니다. 여기에서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에 대한 차이가 생깁니다. 있게 됨이라는 우주적 방향성을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채움을 바라는 마음을 쓸 데가 없습니다. 세상은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채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제자리를 찾아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피가 상징하는 죽음이란 생명의 소멸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임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완악함의 증상은 생명을 자기가 만들어 냅니다. 있게 하시는 분으로부터 살아야 될 이유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야 될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의 문제점이 개구리 재앙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애굽의 나일강은 6월부터 10월까지 정기적으로 범람합니다. 이때 상류에 있던 기름진 흙이 흘러와서 하류에 쌓여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12월경에는 삼각주에서 수없이 많은 개구리 떼가 올라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서 올라온 개구리 떼를 징그럽게 여기기보다는 풍요와 다산으로 연상했습니다. 애굽의 신 중에는 ‘헤카’라는 여신이 있습니다. 이 여신의 형상은 머리가 개구리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아세라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여겨졌듯이, 애굽 땅에서는 헤카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여신의 머리가 개구리였다는 점에서 애굽 사람들의 개구리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요한계시록 16장 13~14절을 보면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의 공통된 유전자는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개구리 같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개구리 재앙 또한 이러한 인식과 일맥상통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개구리를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은 결국 부자가 되는 것이고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여 결실이 많아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풍요와 다산은 세상 사람들이 예외 없이 갖는 보편적 바람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표현을 염두에 두자면 개구리는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에 속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은 거짓말을 일삼는 마귀의 입에서 나오는 영을 개구리로 묘사했습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마귀의 영은 온 인류를 향하여 거짓말을 합니다. 바로의 왕궁 침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집안까지 개구리 떼가 들어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거짓말에 속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마귀는 온 세상을 향해 풍요와 다산의 거짓말을 뿌리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가 하는 일이 형통하여 결실이 많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 마음의 유일한 채움이다. 이것이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는 개구리로 덮여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깁니다. 풍요와 다산을 위해 삽니다. 권력을 추구해도, 명예를 추구해도, 인기를 추구해도 결국 풍요와 다산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큰 목회를 원하는 이유가 결국은 풍요와 다산에 대한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이 침실에 누워서 ‘돈을 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하는 일이 좀 잘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하늘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시면서 어떻게 여기실까요? 여러분의 침실에 개구리 떼가 득실거리는 모습을 연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완악한 삶에서 개구리로 상징되는 풍요와 다산에 대한 추구가 가득함을 보시고 개구리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임의로 개구리 재앙을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 결실을 바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내가 전하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서 큰 결실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는다면 개구리로 상징된 거짓 영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면 제 마음과 머릿속에는 개구리들이 득실거리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자신을 갖기를 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일이라도 개구리 떼에 의해서 머리와 마음이 다 점령이 된 상태입니다. ‘나는 풍요와 다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작은 것이라도 원한다면 그것을 있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그럴 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개구리가 상징하는 거짓말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바로를 내려다보실 때 그 완악함 속에는 첫 번째 피바다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온갖 거짓말의 영인 개구리 떼가 득실거리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실제로 눈에 보이게 열 가지 재앙으로 드러내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이것이 우주적 방향성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이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며 자기로부터 있게 하려는 방향성을 보입니다. 이로부터 있게 하신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신 본래 이유와 의도를 모릅니다. 이것이 피 재앙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소멸입니다. 한편 사람은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잃고 나니 마음 채움에 문제가 생깁니다. 거짓 영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 대신 풍요와 다산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인기, 성공, 형통, 권력, 건강, 장수 같은 가치들을 있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개구리 재앙으로 상징되는 가짜 생명을 붙잡음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큰 유행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외국까지 나가서 맛집을 찾습니다. 오직 입에 느껴지는 훌륭한 맛이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마음이 거짓 영인 개구리에 의해서 점령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고 할 때 그것은 삶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생명입니다. 마음에 가짜 생명을 추구하는 상태는 내 전신에 개구리가 뒤덮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완악함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볼 때 바로의 마음에는 거짓 영인 개구리가 덮인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눈에 보이게 개구리 재앙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열 가지 재앙은 옛날이야기가 아닌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싶고, 잘못된 것은 없어지게 하고 싶다면 개구리 떼가 몰려와서 개구리를 밟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본문 8장 8절을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피 재앙은 아랑곳하지 않던 바로가 개구리 재앙에서는 괴로워하며 모세에게 개구리를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부탁을 따라 다음날 개구리가 없어지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다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3~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지라 /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죄악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개구리를 치우듯이 방을 깨끗이 닦고 도배를 한다고 새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 합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이 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집이 깨끗하고 멋져 보여도 개구리 떼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바로가 왕궁에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거짓 영인 개구리로 꽉 차 있는 상태입니다. 개구리를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겼듯이 세상 것을 원하면서 그것을 있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 거짓말일 뿐입니다. 생각을 해도 개구리가 튀어나오고, 말을 해도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있게 됨이라는 우주적 방향성이 나를 통과하게 됩니다. 내 몸이 놓여있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왜 나를 지금 이곳에 있게 하셨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완악함이 제거되면 풍요와 다산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가치들을 있게 하려는 가짜 생명을 붙잡는 삶이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과 모든 삶의 현장에서 내 몸이 있게 된 이유가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가지라고 내 마음을 있게 하셨습니다. 이 마음을 몸 속에 가두어서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믿음으로 육체의 물리적 세계를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아들다운 모습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있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 하늘에 머물면 몸도 우주적 방향성의 바람을 타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현장에 있게 하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 왜 있는지 모르는 이유는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내려다보시며 완악함에 뒤범벅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열 가지 요소를 열 가지 재앙으로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 재앙은 바로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장자답게 되어야 할 약속의 명단 안에 있는 교인이자 선민들에게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악함 가운데서 내 인격과 범벅이 되어버린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에 대해 알았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만큼이라도 십자가를 통하여 이 완악함이 말끔히 제거될 수 있는 은혜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