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묘사를 통한 예술가와 수용자의 만남
한국인의 예술사랑은 지극하다. 인사동에 넘쳐나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 전시회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매년 신춘문예는 물론 수많은 잡지를 통해 많은 작가가 배출된다. 혹자는 너무 시인이, 화가가 많다고 하지만, 필자는 전 국민이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술가나 수용자(독자/관람자) 모두가 예술작품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벽두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과 <불멸의 화가 반 고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水墨別美: 한⸱중근현대 회화>를 만날 수 있었다. 네 개의 전시 모두 평일인데도 방학 중이어서 그런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넘쳐났다.
고흐 작품 전시장 출입구에 “그림 그리는 일이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라고 1887년 여름에 썼다는 고흐의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예술은 작가는 물론 독자/관람객에게도 구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에곤 실레(1890~1918)는 1911년에 그린 <시인>에서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詩人)으로 표현했다. 머리는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고, 눈썹을 치켜든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은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1898년 그린 <수풀 속 여인>에서, 우거진 수풀을 배경으로 세련된 모자를 쓰고 소매가 풍성하게 부푼 블라우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파란 눈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1853-90)는 인물화 그리길 좋아했다. ‘인물을 미화시키거나 정형화시키는 것을 거부했으며 매춘부, 농부, 시골 아낙 등 각양각색인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1610년경에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서, 다윗이 들고 있는 골리앗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으며, 소년 다윗 얼굴도 어린 시절의 카라바조 자기 모습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카라바조가, 살인자가 된 현재의 카라바조를 죽인다는 뜻을 이 작품에 담아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이숙자(1942~)는 1980년 그린 <작업>에서 밭에서 모내기를 하는 세 명의 여자 농부를 아주 세밀하게 그렸다. 보리밭을 많이 그린 이숙자는 채색화 기법으로 세부적인 묘사와 다양한 색채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클림트의 아름답고 관능적인 인물묘사, 실레의 고통에 뒤틀린 자신의 모습, 모델의 감정과 분위기를 화폭에 담으려 했던 고흐, 이숙자의 세밀한 묘사 등 화가마다 인물화에 다양한 특징을 담고 있다. 예술심리학적으로 볼 때, 화가들이 인물을 나름대로 독특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각 화가의 심리, 시대적 배경,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문학작품에서도 인물묘사에는 작가의 내적 심리와 창작 의도가 녹아있다. 작가의 무의식이 투사된 결과다.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투사(projection)는 개인이 자신의 내면적 갈등, 무의식적 욕망, 혹은 두려움이나 결핍을, 타인이나 외부 대상에 전가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다. 프로이트는 예술 창작이 억압된 욕망이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과거의 트라우마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으며, 이는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기제를 통해 개인이 내적 갈등을 처리한다고 보는데, 작가가 사용하는 다양한 인물묘사 기법은 이러한 방어기제의 표현일 수 있다. 이상화(Idealization)의 경우, 작가가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 이는 작가가 현실에서 경험한 좌절을 보상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분리(Splitting)의 경우, 어떤 인물은 완전히 선하고, 다른 인물은 완전히 악하게 묘사된다면 이는 작가가 양가감정(ambivalence)을 처리하기 위해 인물을 양극단으로 나누는 방식일 수 있다. 승화(Sublimation)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이나 충동이 예술창작으로 전환된 경우로, 인물의 행동이나 대화를 통해 세련된 방법으로 표현된다.
예술가가 인물묘사에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다. 예술가
의 무의식, 방어 기제, 내적 갈등 등을 반영하기 때문에 작품이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작가 자신과 독자나 관객이 심리적 경험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세상이 암울하거나 무의미하게 생각될 때, 예술작품 속 인물들과 대화를 통한 치유의 경험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