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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제쳐놓고 대안 찾는 악습>의 줄거리 :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죽을까 두려움에 휩싸여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스라엘의 현재 분위기는 최고조였습니다. 새롭게 사람 왕을 선출하였고, 그 왕의 지휘 아래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대승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왕의 즉위식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밝은 미래를 향하여 희망찬 발걸음이 시작되려는 순간인데,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사무엘의 설교 한 편이 이렇게 잔칫집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그 설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하나님 제쳐놓고 대안 찾는 악습
(사무엘상 12:1~25)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1.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제쳐놓고 대안 찾는 악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을 앞선 11장 마지막 부분과 비교해 보면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나온 배경을 보면 현재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자연스럽지 않고 너무 이상합니다.
11장 14절을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후 기뻐하고 감격하며 마음이 들떠있었습니다. 제비뽑기로 뽑힌 사울의 지휘 아래 암몬 족속에게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사무엘의 외침에 모두가 응답하여 길갈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즉위식을 마치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로부터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라는 내용으로 11장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12장에는 사무엘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백성의 반응은 11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백성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하니 백성은 들뜬 마음으로 길갈에서 사울 왕의 즉위식을 마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설교가 이어지는데 그 설교를 들은 모든 백성은 죽을까 두려워하며 왕의 즉위식을 해놓고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회개를 합니다. 왕으로 선출된 사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백성의 고백에 난감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 된 것을 모든 죄에 악을 더한 결과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도대체 왜 이러한 고백이 나와야만 했던 것일까요?
사무엘의 설교는 모든 백성이 왕을 기뻐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설교의 첫 부분에서 새삼스레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을 문제 삼습니다. 이미 즉위식까지 끝났는데 왕을 요구한 것을 문제 삼아서 뭘 어쩌자는 것일까요? 이미 사무엘은 8장에서 백성이 왕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일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 왕을 뽑아서 하나님 왕을 대체할 때, 백성 각자가 어떠한 부담을 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새삼스럽게 또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을 문제시했던 것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8장과는 사뭇 다릅니다. 백성이 왕을 요구했다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주제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왕을 요구한 사건 자체는 사울의 즉위식을 통해 끝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무엘이 문제시한 것은 하나님 왕을 제쳐놓고 사람 왕을 요구한 백성의 태도입니다. 꼭 왕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도 이와 같은 태도가 삶에서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구하는 것이 달라지더라도 태도만은 반복될 것인데, 그것이 계속된다면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하나님 왕을 제쳐놓고 사람 왕을 요구했다. 다만, 너희가 요구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왕을 제쳐놓고 사람 왕을 요구하는 그 태도가 삶에서 반복된다면 너희는 죽는다. 너희가 아무리 선민이라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버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왕을 제쳐놓고 사람 왕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8장 7절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태도가 반복된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게 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서리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경고가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팔았던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을 보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무엘 시대의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요구한 선민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실 왕의 자리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해서, 그 악을 행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실 것을 계산에 넣고 형제가 형제를 파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왕 대신에 사람 왕을 요구한 것은 결국 하나님 대신에 세상적인 대안을 찾은 것입니다. 엄연히 살아계시고 주권자로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제쳐놓고 이 세상적인 대안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 대안을 찾으려는 태도를 계속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끝장날 것이라 경고합니다.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을 통해 백성을 각성시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왕을 요구한 것이 벼락 맞을 태도였구나! 지금 왕을 세웠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라는 심정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이어진 사무엘의 설교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기에 백성이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먼저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사람 왕을 요구했던 상황을 상기시키며 반문합니다. ‘너희는 하나님 왕을 제쳐놓고 사람 왕을 요구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 왕을 버린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상황에서 사무엘을 사사로 세우셨는데, 사무엘이 잘못했기에 백성이 하나님 왕의 인사권을 믿지 못해서 사람 왕을 요구하게 되었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은 사무엘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하나님이 출애굽 때부터 사사 시대 전체를 거쳐 이제까지 관계하셨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지 않으셨던 적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어도 암몬은 야베스를 침략하기 전에도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우리에게도 사람 왕이 있어야 되겠다’라는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점을 콕 집어내며 이스라엘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 왕의 대안으로 사람 왕을 요구한 백성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를 통해 백성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사무엘의 설교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관계하시며 구원하시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방식을 싫어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관계하시고 이끄시고 구원하셨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빗나가는 죄,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을 맛있어하는 저주받은 마음의 입맛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저주받은 입맛을 유지하기에 하나님을 맛있게 여기지 않고 세상 것들을 맛있게 여깁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을 빗나가는 죄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썩은 입맛의 상태를 기반으로 마음을 땅에 붙입니다. 마음을 땅에 붙이고 이방인들이 좋다고 하는 풍요와 다산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쫓아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발동하십니다.
구원의 역사 첫 번째 단계는 세상에 밀착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편치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방 민족을 막대기로 쓰십니다. 막대기로 쓰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삶의 터전이 통째로 흔들리기에, 세상 삶에 밀착한 마음이 안정될 수가 없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무섭고, 짜증이 나고, 불만스럽고, 우울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붙인 상태가 불편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붙은 마음이 불편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구원의 역사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막대기를 통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이윽고 마음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 회개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마음을 다른 곳에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빗나가는 죄악 속에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좋아하는 썩은 입맛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겠습니다.’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사사 시대까지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사무엘의 통치 마지막 무렵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은 제자리걸음 순환의 고리를 끊으려고 아이디어를 하나 냅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내는 태도가 기괴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막대기로 쓰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빗나감의 죄이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저주받은 입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와 저주에 끌려가는 것을 막으시려고 이방 민족을 막대기로 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제로와 마이너스 사이를 맴도는 제자리걸음을 빠져나와서 플러스 쪽으로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르익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마음 드리는 일을 일관되게 결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들은 마음을 세상에 밀착시킨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막대기로 쓰시는 상황 자체를 벗어나야 할 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반발해서 ‘이런 식으로는 못 살겠다!’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왕으로서 직접 다스리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사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를 치는 모든 이방 민족들은 신도 있고 사람 왕도 있습니다. 우리만 왕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신이시니까 이제 다른 민족처럼 우리에게도 사람 왕도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결국 선민은 하나님이 신과 왕을 겸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사람 왕이라는 세상적인 대안을 찾았습니다.
애초에 이방 민족이 쳐들어온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을 하는 대신 세상적인 대안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지 않고 살아도 이방 민족이 쳐들어올 때 퇴치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은 것입니다. 사무엘이 볼 때 이러한 태도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에 판 형들의 악행을 통해 기근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시는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왕을 구한 이스라엘의 악행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을 행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 대안을 찾는 태도가 반복되었다가는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악한 태도를 콕 집어서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며 천국에 올라가 아버지를 마주한다면, 몸에 어떤 상황이든 무슨 문제가 생기든 마음은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염려가 생기고, 불만이 생기고,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평강이 깨지는 이유는 마음이 세상에 밀착한 것을 하나님이 두고 보실 수 없어서 막대기로 치시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과 밀착한 세상 사이에 막대기를 쑤셔 넣으시는 것이 삶의 문제이고, 난관이고, 어려움이고,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삶에 문제가 생겼다면 얼른 깨달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불편함이 생긴 것은 주권자 하나님이 보시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삶에 발생한 문제는 내 마음과 세상이 밀착한 사이에 하나님이 끼워 넣으시는 막대기다. 내 마음을 떼라고 하시는 신호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과 밀착되어 있던 나를 죽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과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각종 문제와 사건과 난관을 막대기로 삼아 그 사이를 찢으려고 하십니다. 그럴 때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기에 사람 왕을 찾았듯이 세상적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가 있으면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건강상의 적신호가 발견되더라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내 몸이 아픈 것도 내가 지금 천국에서 마주 보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아픔을 염려하고 걱정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하실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도 내가 아픈 것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짐도 주장하시는 분이 내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주장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의 태도입니다.
이처럼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유체이탈의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은 마음이 땅에 내려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우선 병원부터 갑니다. 이것은 병원이나 의사를 찾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병원을 배제하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병원에 가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가라는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생겨서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이 되면 먼저 ‘내 마음이 몸에 붙어 있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몸에 붙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편해지기 위해 세상적인 대안을 찾습니다. 병원에 가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건강에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을 제쳐놓습니다. 경제 문제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세상적인 대안을 찾아 나섭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악습이 지속된 결과는 멸망과 죽음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편, 16~17절을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밀을 추수하는 시기였습니다. 밀을 베는 시기에는 보통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2~3월에 보리를 수확하고, 4~5월에 밀을 수확했습니다. 이때는 늦은 비가 끝나고 건기에 들어갈 때입니다. 이때 우레가 치고 비가 온다는 것은 순리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를 마친 사무엘은 하나님께 우레와 비를 요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비가 오는 시기가 아닌데도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너희 마음이 세상에 밀착한 상태가 문제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불편하도록 상황을 흔드신다. 그런데 너희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세상적인 대안을 찾는다. 그러한 인생은 순리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곡식을 베어야 하는 건기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같이 순리에 역행하는 일들만 생길 것이다. 손대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하는 일마다 결실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세상적인 대안을 찾는다면, 삶에서는 순리에 어긋나는 일들이 툭툭 불거질 것이다. 이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불편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 세상적인 대안을 통하여 마음이 편할 때까지 상황을 바꾸고 개선하려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적인 대안으로 왕을 세우면 인생이 다 잘될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각계 분야에서 인류를 위하여 대안을 찾은 사람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합니다. 노벨상을 수여하기 시작한 지 벌써 120년이 넘었습니다. 끊임없이 대안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각계각층과 각 분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대안을 만들어도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이 그러하고 우리나라 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은 매번 대안을 제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 아귀다툼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극도로 사랑하심으로 끝없이 세상에 밀착한 마음들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없습니다. 전부 세상에 마음을 붙인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기쁨을 위한 대안을 찾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습관입니다. 19절의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는 이스라엘의 고백을 우리에게로 옮기자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대안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안을 구하는 것이 인류의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시고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을 결정하시고,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들을 다 주관하고 계시는 중이십니다. 하물며 나의 건강 상태, 경제 상태, 인간관계, 가족관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지 않으실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대신 세상적인 대안을 찾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어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마음이 아버지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내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들이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몸에 이상이 와도 병원에 달려가는 것이 버릇입니다. 30분, 한 시간이라도 기도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나 난관이 발생할 때마다 인터넷을 뒤지고, 방법을 찾고, 대안을 구합니다. 요즘은 AI가 생기는 바람에 무슨 문제만 생기면 AI에게 묻습니다. AI가 더 가깝습니까? 하나님이 더 가깝습니까? 물론 AI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을 허락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AI가 우리에게 무슨 대답을 줄 수 있을까요? 왕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권능을 주지 않으시면, 왕이라는 존재 자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살아계셔서 시퍼렇게 두 눈을 뜨시고 주권자로서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 대안을 찾을 것입니까?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지체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내려와 세상과 밀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으니 주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죽음이 내 마음을 지배하여 이 세상에 밀착함이 떨어져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부활 승천을 따라가 기어코 제 마음을 아버지께 다 드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쉬지 않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제쳐놓고 대안을 찾는 악습이 오늘부로 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더 이상 악습을 이어가면 안 될 줄로 압니다. 이 악습이 나타나는 적재적소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아버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내 마음 전부를 아버지께만 다 드리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오직 이 세상은 아버지의 뜻으로만 진행되는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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