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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박조준목사/누가 나를 위로해 줍니까? (욥 2:1-13)
오늘 우리에게 주신 욥기는 구약 성경 중에서도 유명한 책입니다. '욥기'하면 누구나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욥은 여러 가지 면으로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귀한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
다. 아무튼 욥이 누리는 복을 사단이 시기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욥은 성실했습니다.
이렇다 할 흠이 없었습니다. 그는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욥에 대해서 사단에게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
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때 사단이 하나님께 뭐랬는지 아세요?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사단이 하나님께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에게 돌아오는 어떤 이권과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
긴다는 이론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적인 축복도 주시고, 물질적인 축복도 허락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깁니까? 여기에 대해서 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내게 아무 조건 없이도,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 모두 사라졌어도, 하나님은 나에게
찬양과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기
의 초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는 시험을
욥은 당했습니다. 욥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사단의 공격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욥기 1장 21절에 욥의 승리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
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
습니다. 욥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사단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으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두 번째 시험을 시도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 이하를 보세요.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
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
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
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순전'이란 말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integrity'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일반적으로 '지조, 순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인격의 지조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 세상적인 모
든 것이 사라지고 떠나 버린 현장에서도 나를 향한 신뢰와 성실성을 버리지 않고, 나를 향
한 찬양과 경배의 자세를 잊지 않았느니라. 이처럼 자기의 인생을 걸고 신앙의 순전과 지조
를 지킨 욥을 내가 보았노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사단이 뭐랬어요? 4∼5절을 보세요.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
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
하며 주를 욕하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 그의 소유물은 다 없어졌지만 그의 몸은 아직 까
딱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거지요. 한 번 그의 생명과 관련된 몸을 쳐
보세요. 아마 자기 몸에 병까지 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날 것입니다"하는 말입니다. 그래
서 하나님이 그것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 사단
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갑작스런 불행이 닥칠 때 '잘 믿는
사람도 저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거야'라고, '예수 잘 믿어도 저런
아픔을 겪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믿는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이 이
의심스러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모순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득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것이 욥기의 가장 심오한 메시지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현세적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 때
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고, 권력 때문도 아니고, 건강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두 번째 시험은 욥의 건강을 친 것입니다. 욥의 건강이 어떻게 나빠졌습니
까? 오늘 주신 말씀 7∼8절을 보세요.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피부가 얼마나 가려웠으면 손으로 긁다 못해 기와 조각으
로 긁고 있습니다. 긁은 데서는 피가 흐릅니다. 피가 흐르는 상처가 난 데는 아프고, 다른
부분은 가려워 또 긁어 피가 흐르게 합니다.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온 몸이 터져 나가는 고통과 신음으로 밤
을 지새는 욥, 고열에 시달려 검게 타 버린 가죽과 뼈만 남은 욥, 이런 심각한 질병을 끌어
안고 사투를 거듭하면서 욥이 어떻게 이 어려움을 대처했는가를 보세요.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재물이 없어지고, 건강을 상실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까? 사단은 욥의 모든 건강을 앗아갔습
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아서 한 가지 도구를 더 사용했습니다. 바로 욥의 아
내를 사용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
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은 사실 사단
이 시킨 말입니다. 욥기 1장 11절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에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
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2장 5절에
도 사단이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했습니
다. 사단이 노린 것은 바로 욥이 주님을 대면하여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욕하라는 말이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왔습니까? 바로 그 아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사단의 이용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
다. 사단의 작전은 이렇게 교묘하고 악랄합니다. 세상에서는 욥의 아내를 3대 악처 중에 하
나로 꼽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인이 그렇게 악한 여자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나
쁜 여자였다면 욥의 모든 재산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먼저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IMF
체제에 들어서면서 직장 잃고, 사업체가 부도 나고, 생활 대책이 막연해졌을 때, 그 동안 함
께 살던 남편을 별 볼 일 없다고 버리고 나간 아낙네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
까? 욥의 아내는 비록 남편더러 차라리 죽으라고 말했을망정, 잿더미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는 남편의 고독한 현장에 최후까지 남아 준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도 사단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말이 누구의 입술을
통해서 흘러 나왔습니까? 그것은 바리새인의 저주도 아니요, 사두개인의 조롱도 아니었습니
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반석이라고 믿었던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
온 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마십시오. 어떻게 주님께서 그것을 지실 수 있습니까?" 이
것은 대단히 감정적이고 동정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면
인류 구속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마저 사단의 도
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내 신앙을 후퇴시키고, 흔들리게 만들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일에 사단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마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이 시험을 맞았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0절에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
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
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이 두 번째 사단의
시험에서도 욥은 사단을 패배시켰습니다. 욥기의 기자는 욥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치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초점과 시선을 항상 하나님께 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신앙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주머니가 넉넉할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는 삶과 신앙을 이야기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
머니가 비워진 가난함 속에서도 내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병들어 침상에 누웠어도 하나
님이 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욥은 첫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을 이겼습니
다. 이제 사단은 욥의 세 친구를 통해서 다시 욥을 그 곤고함 속에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사
단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욥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훌륭한 위로자로 욥에게 다가섭니다. 그들은 친구가 재앙 당하는 소식을 듣
고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고난 당하는 현장에까지 그들은 달려왔습니다.
이것은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적하신 교훈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우리의 이웃을 피한 채 그대로 지나가
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로는 함께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고난
받은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파하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 상처받은 이웃들의 한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함께해 주는 것, 이것이 위로의 첫 번
째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함께 느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눈
을 들어 멀리 보면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했습니다. 욥의 친구
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게 된 친구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제히 소리
지릅니다. 이것은 친구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본 세 친구의 솔직한 공감의 모습이었습니
다. 위로는 함께 느끼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아도 배고픈 사람을 볼 때
배고픔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아픈 사람을 볼 때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심
리학자들은 이것을 '감정이입'(empathy)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감정과 감정이 상통하는 것
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복음서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 말씀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
고 불쌍히 여기시더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심히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
들의 감정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감정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위로는 헛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훌륭한 위로자였습니다. 그들은 욥과 더불어 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욥의 친구들은 함께 침묵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칠
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했습니다. 이 참담한 고난을 당하는 친구를 보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
래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곁에서 침묵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침묵은 좋은 위로의 방법입니
다. 침묵은 서투른 변론이나 값싼 위로의 말보다 훨씬 능력 있는 위로의 방편입니다. 그들은
함께 있었고, 함께 느꼈고, 함께 침묵했습니다. 사실 이런 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조문을 가면 상을 당한 유가족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조문을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슬픔 당한 사람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가정 이야기를 해서 죄송
합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아버님이 열여덟에 가정을 이루고 스물세 살 때, 그러니까 제가 세 살 때 아버님이 심장마
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 할아버님에게는 아들 형제, 딸 하나를 두셨는데 맏아들이 가
고 나니 아들 하나만 남았었습니다. 제 삼촌은 일제 때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만 가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함경도 북청에 가셔서 교사 일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만주에서
내려오는 전염병에 감염이 되어 한 주간 동안 고열로 고생하시다가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
을 떠나셨습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제 눈에 선히 기억나는 것은 제 할머님이 뜰에서 무
슨 일을 하고 계시다가 전보를 받으시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시면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그저 땅에 데굴데굴 구르시던 모습입니다. 자랑스럽던 아들 형제가 20대에 다 떠났습니다.
아들들이 살아 있을 때는 동네에서 '저 집은 예수 잘 믿어서 저렇게 복 받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 형제 다 가고 나니까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는 말이 동네에 돌
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우리 교회 목사님이 거의 매일 오셔서 위로하셨습니다. 그
런데 그렇게 교회를 성실하게 섬기시던 할머님이 한동안 교회를 못 나가셨습니다. 부끄러워
서, 무슨 죄를 지어서 벌받는 것처럼 여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얼마 후에 할머님 말씀이 그
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목사님이 위로의 말씀을 주셨는데 귀가 맹해서 말씀
이 들리지를 않으시더래요.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해석이나 설교는 사실 별 의미를 갖지 못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가장 설득력 있는 자세는 차라리 침묵입니다. 정직한 침묵입
니다.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울고, 함께 침묵하는 것이 차라리 힘있는 위로라는 것을 욥의
세 친구의 모습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을 함께 고난을 짊어졌습니다. 왜
욥의 친구들이 침묵을 지켰습니까? 아마 이 침묵은 친구의 고난을 말없이 짊어지는 속죄자
의 행위였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난을 내 몸에 짊어지는 사람마다 그 아픔에 눌려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침묵이 이런 침묵이었을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이
사야 선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는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행진하셨습니다. 우리의 아픔
을, 우리의 눈물을, 온 세상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침묵하시며 빌라도의 법정에서 계신 예수
님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 침묵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형제
가, 우리의 가족이 고난을 당할 때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아파하고, 침묵으로 지켜보십시다.
이처럼 욥기 2장까지는 좋은 위로자로 있는 세 친구에게 욥은 자기의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쏟아 내기 시작합니다. 욥도 사람인데 그에게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당하는
처지에 대한 설움의 감정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욥기 3장에 보면 욥의 내심이 터지기 시작
합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앙금처럼 깔려 있는 분한 마음이 막 터져 나옵니다. 3장 1절 이
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에 말을 내
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
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
지 말았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
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었다면 이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삶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욥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카타
르시스'(catharsis), 그러니까 감정의 정화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에
서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싶은 때와 곳이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친구,
함께 울어 주는 친구, 그리고 함께 침묵으로 내 하소연을 들어 줄 수 있는 친구들 곁에서
욥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비로소 인간의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마음속에 있던 분노를 쏟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다른 큰 아이한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만있다가 엄마가
나타나면 그때 엄마를 붙들고 우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꾹 눌러 참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슴이 답답하시면 답답한 가
슴을 여세요. 그리고 기도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아픈 감정을 주님 앞에 말씀드리세
요. 그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고난 당하는 이웃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수요기도회 후 목사의 기도를 받기 원하시는 분들이 강단 앞으로 나오시는데, 모두가 딱한
사정에 처해 계신 분들이십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웃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을 어떻게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제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책하곤 합니다. 누가 나를 위로
해 줄 수 있습니까?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내가 성경을 좀 안다고 해
서 쉽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해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 생활을 한 지 오래되
었다고 해서 그를 향해 설교하려 하지 마세요. 이 설교, 이 해석이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
을 오히려 더 무겁게 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
지 마세요. 바로 욥의 세 친구가 사단이 놓은 이 함정에 걸릴 것입니다. 고난 당한 자와 함
께 있어 주면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함께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켜 주어도 됩니다. 그리고
고난 당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주님께서 그를
위로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고린도후서 1장 4∼5절을 보세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
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원인을 알 수 없는 환난을 당하신 분
계십니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모르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말할 수 없
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쏟아 놓으세
요. 주님이 나를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