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밀한 공간, 우연한 인연
해운대로 이사하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것은 집 바로 가까이 '시네마테크 부산'이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상영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남포동 극장가로 영화 보러 가곤했다. 마땅히 같이 볼 사람이 없을 때에는 혼자서도 갔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았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 영화 같은 것을 보고 운다는 것을 우습게 여겨었는데, 그날은 중간 부분 오정해가 심청가를 부를 때부터 시작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울었다. 아마 그때도 혼자 극장에 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보고 싶은 영화가 아예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멀티플렉스의 상영관을 다 뒤져도 보고 싶은 영화 한 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비극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터덜터덜 그냥 돌아오는 일이 많아졌다.'시네마테크 부산'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친구들 점심 먹는 모임에서 누군가가 영화를 한 편 보자고 제안해서였다. 여자들 대여섯 명이 분승해서 차를 타고 그야말로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때 본 영화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꿈을 접은 아내가 평소에 가고 싶어 한 곳을 순례한다는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가슴을 저미는 듯 했던 그 느낌은 그대로 시네마테크의 이미지로 남았다. 그러나 자주 올 수는 없었다. 집에서 너무나 먼 거리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영관
언제든지 가기만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넉넉한 품을 벌려 안아주는 느낌이다 · 걸어서 가는 영화관
'시네마테크 부산'은 국내의 시네마테크로서는 유일하게 전용 상영관과 자료실을 갖추고 있고, 수준 높은 예술 영화를 연중 상영한다. 관람료도 일반 상영관의 절반 수준이어서 부담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관객이 20%에서 25%를 넘지 못한다고 하는 안영수 프로그램팀장의 말처럼 특별한 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언제나 관람석이 절반은 비어 있다.
집 가까이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한가한 때면 나는 상영 프로그램을 따져보지 않고 편하게 걸어서 시네마테크로 간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같은 특별한 때가 아니고 정기 휴관일인 월요일만 아니면 무슨 영화를 상영하든,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보통 오전 11시에서 낮 12시에 첫 상영을 시작해서 오후 7~8시에 마지막 상영을 시작한다. 게다가 다른 상영관과는 달리, 매회 다른 영화가 상영된다. 그 때문에 그날 상영작을 모두 보기 위해 작심하고 날을 잡아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마니아들도 있다.
· 마주치는 영화광들
가끔 부인을 대동한 소설가 김성종 선생님, 조갑상 교수를 만나기도 하고 낯익은 시인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여기는 혼자서 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영관이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온다. 역시 혼자 온 스님 한 분을 만나, 가지고 간 간식을 나누어 먹은 적도 있다. 스님은 오전에 할 일을 다 마치고 영화 보러 오느라고 새벽부터 숨 쉴 틈도 없이 바빴다고 웃으시며 이왕 왔으니까 그날 상영작을 다 본다고 했다.
전용 상영관이 있는 1층 벽면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국내외 영화인들의 핸드 프린팅이 사인과 함께 붙어 있다. 커피향이 진하게 풍기는 카페테리아의 원탁에 앉아 영화상영 시간을 기다리면서 나는 그것들을 보고 있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손바닥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왼쪽 맨 위쪽에서 뜻밖에도 제레미 아이언스의 사인을 본 것이다. 그의 손바닥 프린팅에 내 손바닥을 겹쳐본다. 아, 그는 손이 좀 작은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면 내 손이 지나치게 큰 건가…. 원로배우 황정순, 최은희의 손바닥도 있고 신상옥, 김수용,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같은 전설적인 감독의 손바닥과 사인도 보인다. 장이머우, 서극의 손바닥과 함께….
· 명작의 영원한 감동
연중 상영되는 영화는 일정 기간 동안 테마별로 상영되는 기획 상영 시리즈가 있다.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홍상수 전작전, 알랭 들롱 이브 몽땅 특별전, 하는 식으로.
올해 초에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데이비드 린'의 특별전에서 그의 기가 막힌 작품들을 연이어서 감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 '콰이강의 다리' 같은 대작들 속에서 1945년 제작된 흑백 영화 '밀회'도 볼 수 있었다. 한 시대 전의 아름다운 로맨스와 그 시대 영국의 시골 풍경 속에 중년 여성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내가 '닥터 지바고'를 처음 본 것은 대학 다닐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20대의 그 풋풋한 나이에 보았던 영화를 이렇게 나이 들어서 다시 볼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오마 샤리프의 감수성 넘치는 연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시베리아의 겨울 풍경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한 편의 시와 같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평범한 일상적인 삶이 붕괴되고 기존의 질서가 발밑으로부터 무너져 나가는 것은 여전히 충격이었다.
· 기적처럼 만난 추억의 영화
기획상영 시리즈 중에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반복해서 기획되는 테마들이 있다.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 상영되는 '오래된 극장'과 그 다음 기간, 즉 12월 중순부터 새해 1월 중순까지 연말연시를 기해 상영되는 '아듀 20○○! 사랑 혹은 상실의 기억들' 같은 것들이다. 이 반복 기획물은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빼놓지 않고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본다.
2008년부터 시작한 '오래된 극장'은 올해로 세 번째를 맞았다. 늦가을의 쓸쓸한 대기 속에, 마음속 깊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겨주었던 추억 속의 영화, 20세기 고전 명작들이 연이어 상영된다. 2008년 '오래된 극장Ⅰ'에서는 1944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던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카사블랑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어 더욱 소중하고, 추억 속에만 간직된 그런 영화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스칸디나비아 하늘에 부는 바람'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젊고 기품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나를 매혹시킨다. 외롭고 외로워서 보는 사람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가슴을 적셨던 윌리엄 허트 주연의 '우연한 방문객'도 그 기획 시리즈였다.
어김없이 찾아온 올해의 '오래된 극장 Ⅲ'에는 쓰라린 비애와 우수가 담긴 1946년 걸작 '멋진 인생'을 비롯해 '목로주점' '제3의 사나이' 같은 흑백 영화가 4편 있었다. 그리고 '대부'가 있었다. 마리오 푸조의 기가 막힌 각본에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연출, 남우주연상을 받은 말론 브란도의 명연기가 결합해 만들어진 175분짜리의 이 대작에서 당시 서른 두 살이었던 알 파치노는 꽃처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1965년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쓸었던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세기의 연인으로 사랑받은 전성기 오드리 햅번의 청순한 모습은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요정 같다. 올리비아 핫세의 미소가 눈부신 '로미오와 줄리엣', 마릴린 먼로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 '돌아오지 않는 강',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가 나오는 '허공에의 질주', 그리고 '지붕 위의 바이올린'과 '비포 선라이즈'까지. '오래된 극장 Ⅲ'은 아직 상영 중이다.
· 사랑 혹은 상실의 기억들
'오래된 극장' 못지않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듀 20○○! 사랑 혹은 상실의 기억들'이다. 지지난해의 '아듀 2008! 사랑 혹은 상실의 기억들'에는 일흔을 넘긴 동갑내기 영국의 명배우 주디 덴치와 매기 스미스가 자매로 출연했던 '라벤더의 연인들'이 있었다.
결혼을 해 본 적 없이 황혼을 맞은 동생이 소녀처럼 젊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섬세하고 우아하게 그려져 아름답고 애잔한 여운을 남겼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영국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조슈아 벨의 바이올린 연주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사라지는 내 마음의 오아시스
'시네마테크 부산' 상영관의 가장 큰 강점의 하나는 음향 시설이다. 일본 고지마 마사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에서 그런 강점은 확연히 드러났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감동적인 피아노 선율을 우리에게 쏟아 붓는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장한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극장마다 넘쳐나는 이 시대에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우리 삶의 청량제와 같다.
그러나 내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는 시점이 되면 해운대 센텀시티에 새로 개관하는 영상센터로 시네마테크 부산이 옮겨 간다고 한다.
"시설은 더 좋아지고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관객이 늘겠지만 저는 좀 아쉽죠. 여기에 정이 들었는데." 안영수 팀장은 서운해 한다. 나도 물론 많이 아쉽다. 언제든지 가기만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넉넉한 품을 벌려 안아주던 마음의 오아시스를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차를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바람 없는 날이면 배드민턴을 치고, 자전거로 드넓은 요트경기장 안을 달리다가 영화까지 보고 돌아오는 그런 아름다운 저녁시간을 누군가가 뺏어가 버리는 것 같다.
올 가을 내내 꿈같은 향기를 내뿜고 있던 백리향 꽃그늘이 드리운 상영관 앞에서 나는 적막하다.
김일지 소설가
◇약력: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작품집 '타란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