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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회진은 장흥 유치행 직행버스의 종점 면소재지였다. 횟집들이 늘어선 해변 도로를 따라 어깨를 펴고 또박또박 걸었다. 아무도 간섭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모처럼 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상큼한 해풍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해풍은 부드럽고 축축하고 감미롭게 목덜미를 스쳐 젖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젖가슴이 한 치나 더 부푼 느낌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 식사하고 가라며 말을 거는 여인들. 회진 사람들에게 신화는 낯선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신화에게 낯설지 않고 따뜻한 고향처럼 아늑하게 마음을 붙잡는다. 아주머니들의 사투리가 귀에 설지 않다.
정희는 자연스럽게 토박 사투리를 잘 구사했다. 표준말을 쓰지 않아도 될 때, 특히 단둘이 있을 땐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를 써서 신화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면 정희는 자신이 쓴 사투리를 자신이 통역해서 신화를 웃겼다.
그들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동료 선수지만 한번도 의견 충돌이나 언쟁을 한 적이 없는 찰떡궁합 단짝친구였다. 상대의 약점을 서로 이해하고 감싸 주었다. 운동을 하고 나서 상대방의 땀에 젖은 팬티를 서로 바꿔 입을 만큼 허물없는 관계. 상대방이 씹는 검을 빼앗아서 씹고 밥그릇의 밥을 함께 먹는 건 보통이었다. 식당에서 한번도 따로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장난을 거는 쪽은 정희였다. 신화는 얌전을 빼고 정희의 어리광을 언니처럼 받아 주었다. 나이는 정희가 칠 개월 위였다.
난 너하고 똑같이 밥을 먹는데 왜 달리기에서 꼭 너한테 뒤지지? 누가 위고 아래랄 것 없이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자기를 낮추고 신화를 추켜세우는 정희였다. 신화가 인신매매범들의 소굴에서 강제로 매춘을 하고(그녀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없었다) 탈출하고 싶다고 정희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때 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한동안 몸져 누웠다고 했다.
정희는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에서는 성의를 가지고 수사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일이 흘러도 신화는 풀려나지 않았다. 이번엔 유흥가가 아닌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되어 교도소에서 4개월 간 복역했다.
인신매매범들은 재판에서 ‘혐의 없음’ 무죄로 풀려나고 신화만 불법 매춘으로 4개월 징역형을 받은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나오니 봉칠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한테 진 빚을 어떡할래? 신화가 억울하다고 울부짖자 억울하면 민사재판을 신청하라고 놀렸다. 그들은 법에 자신만만했다.
신화는 다시 그들의 소굴로 끌려갔다. 정희는 그 사실을 차마 신화 부모님들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신화가 가족에게 알리지 마라고 신신부탁했다.
그뒤로 정희는 청와대, 정부종합청사, 검찰청에 있는 법률보호센터에 수차 호소했으나 그 호소문은 처음 그 경찰서로 되돌아오고, 신화는 경찰서에서 조사만 받고 훈방으로 풀려났다. 처벌하지 말고 훈방해 주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신화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범법자,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신화야 힘내. 신도 종교도 날 구제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도와 주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이 신이 되라는 임 코치님의 말씀 생각 안 나니? 넌 죄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탈출하는 길밖에 없어. 넌 단거리 국가 대표 선수 아니니? 경기할 때처럼 힘을 내서 달리란 말이야. 이 시련을 달리기 시합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렴.
정희는 갈 곳이 없으면 자기 고향으로 가라고, 회진에 홀로 사는 어머니의 집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는 정희 말이 귀에 닿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회진이란 이름이 신화를 끌어당겼다.
회진에 가면 잃어 버린 꿈도 되찾고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그녀는 국가 대표 육상 선수로 복귀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임 코치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단 소문은 모함이었다. 신화는 임 코치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마음 속으로 흠모했다.
그들을 동거하게 만든 것은 육상연맹이었고 선수권 박탈이란 잘못된 처벌의 결과였다. 사랑과 불륜이 어떻게 같겠는가? 그점을 꼭 중앙부처인 체육부에 따지고 싶었다. 국가 대표 선수권 박탈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체육부였기 때문이다. 불륜과 참사랑의 차이, 그 진위를 매스컴을 통해 가리고 싶었다.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
이렇게 적들의 마수에서 탈출하여 남쪽의 작은 포구 회진이란 마을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터벅터벅 걷고 있으면서도 국가 대표 선수란 긍지를 아직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건 내 삶이 아니야. 내가 원했던 생활도 아니고. 한참 트랙에서 비지땀 흘리며 훈련하고 있을 중요한 시기에……
내가 원하는 생활은 육상 선수로서 국가를 위해 뛰고 내 한 몸 바스러질 때까지 국가에 이바지하고 싶은 일념뿐. 나 하나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다. 임 코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 육체 내 정신은 국가의 한 부분이라고. 난 국가의 부속품이라고. 내가 무너지면 국가의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거라고 그러셨죠.
신화는 실망하지 않겠어요. 다시 시작해서 또 신기록을 세워야죠. 그게 운동 선수의 임무 아닌가요? 나는 달릴 거예요. 회진에서 잠시 쉬며 다음 계획을 세우겠어요. 이제 자유를 찾았으니 쿠알라(초식동물)처럼 유칼리투스 나무에서 20시간을 푹 자며 6개월 간 주머니에 담고 다녔던 새끼를 꺼내야죠.
새끼주머니에서 꺼내어 또 6개월 동안 등에 업고 키우면 쿠알라 새끼는 어미가 된대요. 그 새끼가 뭔지 아세요? 바로 저 자신이예요. 임신한 건 아니고요. 저는 또 하나의 새끼가 제 자신 속에 있다는 걸 베웠어요. 그걸 깨우쳐 준 봉칠이에게 감사해야겠어요.
돈 아끼려고 어제 저녁밥부터 굶어서 아랫배에 힘이 없었다. 자연히 다리가 터벅거리고 두 손이 아랫배 쪽을 향했다. 정희 어머니의 집은 찾기 쉬웠다. 육상 국가 대표 선수로 매스컴에 알려져서 김정희 어머니의 집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정희는 이 시골 마을의 스타였다.
“아, 유명한 육상선수 김정희. 저 길 모퉁이를 돌아서 해송이 한 그루 서 있는 비탈길로 한참 쭉- 올라가면 산동네가 있고, 바닷가에서 보자면 그 동네 오른쪽 끝에 황토 밭뙈기들이 있는 시누대밭 안쪽에 숨바꼭질하는 조개 껍데기같이 아담한 집 한 채가 있제. 그 집이여. 내가 먼데서 손님 왔다고 정희 어매한테 전화해 줄까?”
“아녜요 괜찮아요. 제가 찾아가겠어요. 친절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화는 식당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언덕 마을로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7
썰물이 빠진 갯벌엔 어선 몇 척이 조는 듯이 선착장에 매어 있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먹이 찾아 포구를 한 바퀴 휘돌고는 수평선 쪽으로 훠이훠이 날아갔다. 갈매기는 비행에 지친 모습이었다. 혼자 날아가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신화는 한참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갯벌에서 캔 바지락이 제법 묵직했다. 바구니엔 소라와 고동도 들어 있고 어미낙지도 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소라와 고동은 물이 썬 직후에 밀물에 밀려온 것을 쉽게 잡을 수 있었고 낙지는 깊은 곳에 들어가야 잡을 수 있었다. 정희 어머니가 낙지 파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이젠 낙지 구멍만 보이면 놓치지 않고 모두 잡았다.
낙지란 놈은 미끄럽고 날쌔서 그 서식지를 발견해도 얼른 붙잡지 않으면 구멍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서 숨어 버렸다. 찰흙 같은 갯벌이 낙지의 집이었다. 포획한 낙지는 죽지 않게 물주머니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갔다. 별 양념 넣지 않고 삶거나 국을 끓여 어머니와 함께 먹는 낙지 맛은 고급 요리 못지않았다.
정희 어머니는 병앓이를 많이 해서 연세에 비해 늙고, 힘든 일을 하지 못했다. 집 앞의 채전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보리밭도 마찬가지였다. 신화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날마다 보리밭의 잡초를 매고 채소를 가꾸었다.
보리는 배동을 해서 금방 보리이삭이 팰 것 같고 유채밭은 황금빛 꽃으로 꽃물결을 이루었다. 강낭콩도 푸른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신화 덕분에 집에 화기가 돌고 사람 사는 것 같다며 정희 어머니는 희희낙락 좋아하셨다.
마흔 세 살에 늦게 낳은 막내딸이 육상 국가 대표 선수가 되어 텔레비전에 그 얼굴이 나올 때 제일 기쁘다며, 막내딸이 시집가서 잘 사는 걸 보고 죽어야 편히 눈을 감겠다고 했다.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그 소망이 어머니의 건강을 지탱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정희 어머니 집에 와서 얹혀 산 지 두 달 동안 회진에 정이 들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며칠 간 묵고 떠나려던 생각을 접은 것은 어머니 건강이 너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화가 처음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밥 지을 힘도 없어 보였다. 버스 타고 읍내 보건의료원(도립병원)에 통원치료 받으러 가는 것도 힘겨워서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병은 약 없으면 살지 못하는 심장판막증이었다. 아픈 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 없어 하루 이틀 체류를 연장하고 있다.
신화는 총명하고 부지런해서 금방 어촌 생활에 익숙해졌다. 집안이 가난해서 정희처럼 부엌데기 일은 어려서부터 달달하지만 갯벌에서 조개 잡는 일은 처음이었다. 정희 어머니를 졸라서 터득한 갯일이었다.
예전처럼 갯벌에 조개 낙지가 많이 잡히지 않아서 바지락을 캐서 돈벌이하는 장사는 거의 포기하고 밭농사만 겨우겨우 가꾸는 어머니였다. 너댓 마지기 논은 남의 손으로 삯을 주고 가꾼다고 했다.
신화가 잡은 조개 낙지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신화는 돈을 마련하려고, 잡은 걸 면소재지 시장으로 가서 팔았다. 부끄러움도 잊고 하루는 농사일, 하루는 바다일 하며 정희 어머니 약값도 보태 드리고 여행비도 조금 모았다.
서울 정희와 가끔 통화를 해서 가족들 근황도 알고 체육계 소식을 들었다.
오늘도 전화를 건 쪽은 정희였다.
“부모님들은 건강히 잘 계시니까 걱정 안해도 돼. 네 건강이나 잘 챙겨라. 육상연맹 회장은 아직도 그 사람이 계속하고 있으니까 네 국가 대표 자격 상실은 당분간 지속될 모양이야. 한 가지 희소식이 있어. 우리 대학교 총장님의 친구가 체육부장관 바로 밑에 있는 무슨 국장으로 승진하셨대. 우리 감독님께 말씀 드려서 네 선수 자격을 꼭 회복시키도록 노력할게. 희망을 갖고 체력 관리 잘해라 잉.”
“고마워. 그게 그렇게 힘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네 힘으로 될 일도 아니란 걸 알아. 희망은 버리지 않지만 기대는 안한다. 자격 회복보다도 임 코치와 나와의 관계가 매스컴에 추악하게 비쳐진 것만은 해명하고 싶어.”
“나도 알아. 네 마음. 네가 처음부터 임 코치님과 동거한 건 아니잖아? 매스컴에서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거지. 임 코치님과 넌 매스컴과 부패한 체육계의 피해자야. 힘들어도 참고 힘내야 해. 좋은 날이 꼭 올 거야.”
“임 코치님 소식 알면 내게 꼭 알려 줘.”
난 곧 이곳을 떠날 것 같아. 생각해 보니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야. 김정희가 내 단짝이란 걸 봉칠이가 모를 리 없고, 내가 서울을 떠난 걸 알면 회진에 한번 찾아올 걸. 그놈들은 냄새 맡는 데 형사 이상이야. 차라리 낙도 같은 먼 섬으로 가야겠어. 회진과는 방향이 다른 이름 모를 먼 섬으로……
정회와 통화하면서도 신화는 봉칠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봉칠이는 유독 신화에 집착했다. 봉칠이는 신화를 좋아했다. 그녀의 육체를. 너같이 멋진 여자는 처음 봤다고 하며 신화가 도망치면 지구 끝까지라도 뒤져서 찾아내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그 얼굴, 그 숨결만 생각해도 치가 떨리지만 봉칠이는 신화를 포기하지 않을 놈이었다. 돈을 떠나서, 인간 관계를 넘어 마치 악마와 노예의 관계같이 운명적으로 신화를 소유히고 능욕하려고 태어난 놈이었다.
8
빨간 승용차 한 대가 횟집 도로변에 멎었다. 승용차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두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양쪽에서 내렸다. 선착장엔 밀물이 밀려들고 있었다. 조업을 위해 출항하는 고깃배들이 하나 둘 선착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신화는 차양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빨간 승용차의 번호판을 읽었다. 조개 캐러 바다에 갈 때도 허름한 추리닝을 걸치고 차양이 긴 모자를 썼고, 잡은 조개를 시장에 팔러 올 때도 시골 아줌마처럼 일부러 털털하게 차려 입었다. 일을 하거나 쉴 때에도 올빼미처럼 눈을 빛내며 항상 주위를 살폈다. 유흥가에서 떠나려고 탈출을 시도하면서부터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빨간 승용차의 빛깔과 초록 번호판은 눈에 익어서 금방 알아보았다. 봉칠이는 잔머리를 쓰지 않는 놈이라 승용차의 빛깔도 번호판의 숫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마치 신화가 잘 발견하고 도망치란 듯이.
봉칠이와 신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차양이 긴 모자를 써서 못 알아볼 법도 한테 봉칠이는 신화를 놓치지 않았다. 봉칠이는 긴 입을 삐죽거리고 약간 웃는 듯했다. 옆에 있는 거인을 돌아보고 뭐라고 명령했다.
두 사내가 옷자락을 날리며 신화를 향해 달려왔을 때 신화는 골목으로 내닫고 있었다. 두 사내의 걸음도 빨랐다. 골목은 주택가를 지나서 마을 뒷등으로 이어졌다. 정희 어머니의 집과는 반대쪽이었다. 신화는 산으로 도망쳤다. 세 사람 모두 어찌나 몸놀림이 가볍고 빠른지 단거리 경주를 보는 것 같았다.
산은 높지 않고 밋밋했다. 산 중턱에 이르자 뒤쫓는 사내들의 몸이 무거워 보였다. 두 사내는 양쪽으로 갈라져서 지름길로 추격했다. 신화는 눈여겨봐 두었던 지름길로 산등성이를 넘어 대덕 쪽으로 달아났다. 대덕은 회진면에서 엎지면 코닿을 곳에 있는 큰 읍이었다.
회진과 드넓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펑퍼짐한 산 아래 늘어선 대덕의 집과 건물들이 보였다. 신화는 보리가 패기 시작한 들판을 가로질러 대덕 뒷산으로 달렸다. 오소리처럼 산타기에 자신 있는 신화. 임 코치의 훈련 방식이 산길을 평지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연습이었다.
빨간 승용차가 신화보다 먼저 대덕으로 와서 신화를 기다렸다. 그곳은 보성 쪽 도로였다. 신화는 방향을 바꾸어 장흥 쪽 도로로 달렸다. 도로 옆은 잡목이 우거진 산이었다. 물논을 지나야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 모내기 앞둔 긴 물논들.
뒤에는 봉칠이, 양 옆은 물논. 앞은 아스팔트 도로.
빨간 승용차가 신화를 쫓아왔다. 신화가 아무리 육상 국가 대표 선수라고 해도 빨리 달리는 승용차를 이길 수는 없었다. 빨간 승용차는 곧 신화를 따라와서 신화와 나란히, 신화를 붙잡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거인이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조수석 차창문이 열리고 봉칠이 능글맞게 헤헤 웃었다.
신화는 먼 거리를 정신없이 달려서 지쳐 있었고 추리닝 차림이어서 긴 바지가 걸치적거렸다. 정희 어머니가 작업할 때 입던 옷이었다.
“신화, 헛고생 그만하고 이제 좀 쉬어라. 그렇게 달리면 힘들지 않아?”
“퉤!”
신화는 봉칠이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바람이 봉칠이 쪽으로 불어서 봉칠의 얼굴에 딱 떨어졌다. 손을 뻗히면 붙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봉칠은 소매로 침을 닦고 여유만만하게 신화의 성난 얼굴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쓰다듬는다고 했는데 신화는 그곳에 없었다. 신화는 돌아서서 물논을 첨벙첨벙 건너 산으로 달렸다. 산은 가파르고 차가 뒤따를 수 있는 도로가 없었다.
“빨리 쫓아가 이 새끼야!”
봉칠이의 욕설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전에 날아왔다.
신화는 산등성이에 서서 그녀가 달려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쉬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온 멀고 험한 길이었다. 신화의 체내에 그 길을 달릴 수 있는 힘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쯤 봉칠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얻어맞고 있을 것이다.
기를 쓰고 가파른 산으로 달려가는 신화를 보고 봉칠이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고래고래 소리치던 말이 신화에게 새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신화야아 이제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마음놓고 행복하게 살아라. 너한테 사흘 동안 굶기고 똥 섞은 개밥을 준 걸 사과한다아. 신화 너를 좋아했다아. 이 말을 해 주려고 전라도 먼 땅까지 찾아왔다아아.
그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이 아니래도 좋고 거짓이래도 좋다. 봉칠이는 무지막지하기만 했지 잔머리를 굴릴 놈이 아니니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 것 같다. 신화는 감옥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그녀를 구속할 사람도 신도 없다. 없다고 믿자. 그리고 웃자. 신화 너는 운이 좋은 거야. 봉칠이같이 무지몽매한 인간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그것도 신의 은총이지.
9
신화는 지도읍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체력 단련을 하고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달리기를 가르쳤다. 처음엔 한두 명 따라 하던 아이들이 모이고 모여 삼십여 명이 되었다. 신화가 전 국가 대표 백 미터와 이백 미터 신기록 보유자란 걸 알고 모여든 아이들이었다.
신화는 국가 대표 선수란 위치에 연연하지 않고 자라나는 이세들에게 그녀가 알고 있는 새로운 단거리 주파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방법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체력과 폐활량, 그것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부단한 연습과 노력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부수적인 첨가물이랄 수 있는 생각의 여유와 삶의 리듬.
임 코치가 신화에게 그 시디플레이를 선사하지 않았다면 더 힘들고 무미건조한 선수 생활을 보냈으리라. 힘들고 외로울 때 옆에서 지켜준 한 사람의 사랑이 있었다. 쇼팽의 왈츠 ‘고별’엔 그 사랑이 담겨 있었다.
외로울 때나 울적할 때 버릇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었던 그 음악. 신화는 임 코치와 함께 그가 뇌리에 입력시켜 준 그 음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음악이 곧 임 코치였다. 임 코치는 어디 계실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살아 있다면 그 그림자라도 한번 다시 봤으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 몇이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신화와 다른 또 한 코치가 그 학교에 있었다. 신화가 가르치는 곳은 해변 한쪽 공터 모래밭이었다.
모래밭에서 달리기를 연습시키면 지구력이 더 향상되었다. 발바닥과 지면이 부딪치는 흡수력이 체중을 증가시키고,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달릴 때 느리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모래밭에서 뛰다가 딱딱한 트랙에서 뛰면 같은 체중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모래밭에서 13초에 달리면 굳은 트랙에서는 2, 3초가량 속도가 단축되었다. 산길도 마찬가지. 연습장을 평지가 아닌 산이나 모래밭으로 한 것은 임 코치한테 배운 주파법이었다.
꼬마들의 지도교사는 신화가 이 섬에 오기 전부터 육상을 지도했고 방과후에만 가르치는 걸 보니 정식 교사가 아닌 듯했다. 특별활동 강사나 기간제 임시 교사일 게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판에 박은 방법으로 답답해 보여서 신화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합쳐 둘이서 함께 가르쳐 보지 않겠냐고 상의하려다가 외람된 짓 같아서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본 그 남자는 꼬챙이처럼 마르고 아이들을 가르칠 힘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꼽추처럼 허리가 굽고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녁 늦게 그 학교 교무실에 음식을 배달할 일이 있어서 가까이 그 남자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연습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 남자 말을 잘 듣지 않고 진짜 선생님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열심히 지도했다.
그 방법은 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지도법이었다. 연습하고 싶으면 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제멋대로 뛰노는 거와 같았다. 그것은 지도가 아니고 함께 노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벤치에서 쉬고 있을 때 신화는 그 남자의 등뒤로 다가가서 아이들이 제멋대로 달리는 걸 한참 구경하다가, 그 말을 꺼내려고 기침을 킁킁 했다. 남자가 돌아보았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선글라스 속으로 불타는 눈빛이 보였다. 모습과 눈빛이 딴판이었다. 예리하고 뜨겁고 인자하고 불 같은 정열이 그 눈빛 속에 있었다. 울컥한 것이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선생님!”
신화는 크게 외쳤지만 그 남자에게는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으로 들렸다. 남자는 신화의 말을 잘못 들었단 듯이 일어서서 아이들 있는 곳으로 갔다.
“오늘은 그만한다. 내일 또 보자!”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흩어졌다. 남자도 아이들을 따라 교문으로 어정어정 걸어갔다. 꼽추는 아니고 너무 말라서 허리가 휜 것이었다. 신화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임 코치님! 신화입니다. 서신화입니다.”하고 거듭 외쳤지만(중얼거렸지만) 남자는 들은 척 만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임성태 코치였다. 그는 살아 있었다. 신화는 그를 따라가면서 계속 신화입니다란 말을 반복했고 임 코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길가에 쉼터가 있었다. 임 코치는 걷기가 힘드는지 쉼터 벤치에 앉더니 눈물 고인 눈으로 신화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말한 육 개월 시한부 기간을 넘기고 나는 병을 이겼다. 이젠 약도 먹지 않고 달리기도 할 수 있다. 내가 세웠던 기록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걸음마일지라도 달릴 수는 있다. 기적 같은 그 의지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한국 단거리 신기록 보유자, 이백 미터 신기록을 네 번이나 갱신한 불멸의 주자, 서신화였다. 못난 코치를 살리려고 몸을 팔고 경기장 외 실제 생활에서도 암흑 같은 유흥가에서 탈출하려고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지. 선수 자격은 박탈됐어도 그 기록은 그 누구도 깰 수 없었다.”
신화는 꿈속에서처럼 임 코치의 희미한 중얼거림을 들었다. 마치 남의 일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움과 설움이 한데 몰려와서 그의 몸을 껴안고 흐느꼈다. 너무 야위어서 힘주면 바스러질 것 같아 마음껏 안을 수도 없는 귀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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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서신화(23)……전 육상 단거리 국가 대표 선수,
인신매매범들에게 속아 매춘을 강요당한다
임성태(33)……육상 코치, 페암 선고를 받고 신화와 결별한다
김정희(동료 선수)
봉칠이와 거인
정희 어머니
어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