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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모더니티 비판의 노선들 II. 현대 생태주의 비판 I.1. 니체적 비합리주의로의 회귀 II.1. 심층생태운동: 녹색 신비주의 I.2. ‘이성과 다른 것’으로 철학하기 II.2. 에코페미니즘: 학문인가, 강령인가? I.3.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로의 길 II.3. 사회생물학: 생물학적 환원주의 I.4. 동양의 지혜술에 호소하는 길 IV. 사회비판적 생태관의 세 가지 원칙 III. 유토피아와 에코아나키즘 IV.1. 에코아나키즘의 사회비판적 생태관 III.1. 역사적 유토피아 IV.3. 희망의 원칙 III.2. 에코아나키즘의 기대지평 IV.4. 필요의 원칙 |
I. 모더니티 비판의 노선들
현대는 이성 불신의 시대이다. 이성을 미워하는 정신이 고상한 취향인 양 칭송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던 저술가들, 여성주의자들, 생태주의자들의 집요한 공작(工作)으로 이성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뜬구름 같은 것으로 비판되고 있으며, 모든 유형의 이성 옹호는―설령 그것이 고전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세계화와 다문화주의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독단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철학과 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이와 같은 이성 불신에는 다양한 조류가 있는데, ① 이성철학 때문에 감정이 억압당하고, 육체가 배제되고 있다는 불평, ② 이성만으로는 인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으며, ③ 이성 때문에 인류문명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대안을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 이성을 해체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은 다음과 같은 노선을 걸을 것이다: (1) 무작정 비합리에로 뛰어드는 방법, 즉 니체적 비합리주의로의 회귀, (2) 다른 것(Das Andere. 관념에 대한 사유라는 의미의 이성철학에 반대되는)으로 철학하기: 몸의 철학, 감정의 철학, 자아의 철학, (3) 이성의 파괴와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의 길, (4) 명상이나, 참선, 요가, 주술, 신비에 뛰어 드는 방법, 이른바 동양의 지혜술 등이 그것이다.
I.1. 니체적 비합리주의로의 회귀
니체는 기독교와 형이상학에 기대어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고상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고 보고, 서양의 철학적 사유전통과 거기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전반에 만연된 주체의 자아확대라는 질병을 비판한다. 그는 객관적 진리에 근거한 전통 철학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성이란 영리한 동물들이 발명한 하찮은 별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성의 발견이라는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거짓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무참히 매도한다. 니체의 노골적인 인간 경멸과 이성 모독, 은유적 진리관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사상을 지탱해주고 있는 이성 경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성 경멸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퇴폐를 낳기 때문이다!
그는 19세기의 어떤 사상가보다도 탁월한 솜씨로 상대주의―진리의 확실성을 고민하지 않는 주관적·언어적인 상대주의―를 요리하여 자기 사상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진리를 언어적 전통으로, 사실을 해석으로 환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진리와 사실을 철저히 주관화하고 어떤 객관적인 역사 개념도 거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I.2. ‘이성과 다른 것’으로 철학하기: 몸-, 감정-, 자아의 철학
이는 이성 대신에 비합리, 실재 대신에 비실재, 도덕 대신에 악덕, 논리적인 것 대신에 아이러니, 한마디로 이성의 반대편을 주목함으로써 이성의 위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들은 인간의 몸, 환상, 욕망, 감정에 충실함으로써 인간을 이성보다는 자연에 더 가까이 서게 할 수 있으며, 이성의 자율과 자결이라는 계몽주의적 결론과는 달리, 이성은 이성 그 자체로서는 규정될 수 없고, 언제나 다른 것과 구분, 대비, 논쟁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몸-, 감정-, 자아의 철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확실히 이성에 머물 수 있으며, 행위의 능동과 수동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철학은 자신의 사고와 느낌을 주체에게 내 맡기지 않으며, 몸-의존적, 감정-의존적인 주체(자아)를 자각하고자 한다. 데카르트 이래로 인간을 지배해 온 확실성에 대한 사고라는 집단적 정신착란, 자연파괴를 돕는 자연과학, 고도한 기술문명이 양산해 놓은 소외된 문화에 직면하여, 이들은 이성의 범주를 확대함으로써 이성 인간의 자기 도취적인 인간상을 허무는 새로운 인류학적 이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들은 차이(Differenz)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다른 것에만 주목한다. 차이―그리스어의 디아포라(diafora)에서 왔다―를 인정하지 않고도, 달리 있음(Anderssein) ―이는 그리스어의 토헤테론(to heteron)에서 왔다―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성철학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반쪽 철학이며, 이성적 논증구도에 의지해 있다.
I.3.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로의 길
이성에 대한 공격 중에서 가장 학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환멸과―그것은 1차 대전기의 독일 제국에 대한, 그리고 실패한 사회주의 운동이다―시대의 우울―생기에 찬 산업화 이전의 사회로부터 창백하고 음울한 상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문화적 과도기에 대한 우울이다―을 대변했던 니체와 하이데거를 대부(代父)로 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관계를 해체하는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반동적 경향에 대한 똑같은 환멸과 우울의 표현이다.
이성이 진리를 확정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성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이성은 단지 사회의 인위적 구성물일 뿐이며, 단순히 사회적 책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역사마저도 부정함으로써, 현존하는 윤리적 준거와 사회적 의미를 송두리째 박탈해 버린다. 이들에 의하면 문명은 더 이상 이성적 성취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와 인간의 경험을 합리적이고 자유롭게 만드는 이성, 과학, 테크놀로지의 힘에 대한 믿음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와 상대화의 이데올로기이다.
이성, 논리적 정합성, 역사의 의미를 폄훼(貶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에게 비판적 시각을 제시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 변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 줄 수가 없다. 이는 상대주의를 만연시키고 이성철학자들이 착수한 보편주의적 기획을 해체함으로써 사회적 근시안을 산출할 뿐이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받고 소외된 문화 집단이 겪는 좌절감에 대해 개인적인 저항 수단을 주는 (약간의 지적 사기술을 함축한) 나르시시스적 모험일 뿐이다.
I.4. 동양의 지혜술에 호소하는 길
이들은 서구 문명의 과도한 이성중심주의, 합리성-우선주의로는 현재의 문명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서구의 위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동양적 전통이 대안적인 세계관과 일련의 가치를 준비해 놓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동양사상은 병든 서구를 치유하는 아주 이국적인 지적(知的) 특효약이라는 동양적 반이성(半理性)주의는 동양 종교에 대한 서구적 신비화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관과 느낌에 귀 기울이라 하고, 세계에 대한 신비의 감정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라는 합리적인 분석을 초월한 신념에 호소한다.
이성 혐오적인 유신론적인 주장은 인간의 자기진보의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이성의 권능을 비웃는다. 이런 어중간한 욕구불만과 불평하는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성을 경멸하고, 빈정거리는 태도를 나는 신비주의(mysticism)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성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이 모든 신비주의적 경향은 직관과 영성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한 합리적 탐구가 불가능한 유사-종교철학이며, 동시에 인간성 자체를 거부하고, 원시 자연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반인간주의이다.
II. 현대 생태주의 비판
II.1. 심층생태운동: 녹색 신비주의
최근 급격히 부상하는 심층생태운동은 스스로 합리적 분석을 초월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사유보다는 유사-종교적 믿음에 호소한다. 이들은 자연에 초자연적인 것을 부여함으로써 노골적인 신비주의적 속옷에, 심층적인 화장을 하고, 가짜-생태학적 예복을 차려 입고 나온다. 이들의 시야는 너무나 지구적이고, 너무나 우주적이어서 성스러움을 넘어, 자연은 범신론적인 하나(梵我一如)로 이해된다. 얼핏 들으면 자연에 대한 관대함처럼 들리지만, 자연 진화의 결정판인 인간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은 원시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전면 거부하고, 휴머니즘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인간 멸시의 유사-종교이다.
심층생태운동은 추종자들에게 숙고를 요구하지 않는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메시지 덕택이다. 간명한 설교와 은유로 제시되는 그의 직관적·선험적 개념들은 ‘막연히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심층생태운동은 사상이라기보다는 직관적 정서에 가깝다. 또한 신좌파가 몰락하면서 이어진 직관적·신비적인 관념을 선호하는 미국의 이념적 풍토 탓이기도 하다. 신좌파의 소멸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에서는 반문화적 신비주의가 유행했는데, 도가, 불교, 이교주의, 주술, 그리고 신비적인 관념에 젖은 캘리포니아의 분위기가 초자연적이고 컬트적인 절충물을 만들어 냈다.
이는 서구 문명의 정치적·지적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편승하여 급성장 하였다. 하지만 현대 문명에 침전되어 있는 반인간주의, 신비주의, 인간 혐오주의는 심층생태운동 때문이 아니라, 무수한 직관과 비합리적 신념이 세기말에 다시금 전면에 나서고 있는 이 시대의 사회성의 쇠퇴(Verdrng- ung der Gemeinschaftlichkeit)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은 사회성의 쇠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심층생태운동이 순전히 주관적·개인적이고 때로는 반동적이기도 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퇴행적인 추세에 일조(一助)하였다.
근거 없는 개인적 신념으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드볼과 세션즈(두 사람은 심층생태운동을 미국에 퍼뜨린 장본인이다)는 인간에게나 가능한 심층적인 물음과 명상을 통해 얻은 결론이라며, 인간을 모든 다른 종들의 지배자/주인이 아니라 생명공동체의 평범한 시민으로 격하시킨다. 인간이 생태계의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다면 곰은 곰-중심적, 늑대는 늑대-중심적이듯이 인간도 철저히 인간-중심적으로―인간 자신의 생존과 안락과 안전에만 몰두해야 한다―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자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신비화하고 인간만의 고유한 용어가 지니는 풍부한 내용을 무화(無化)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적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심층생태운동은 인간 정신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자기들의 교의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 때는 강력한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다.
2백년에 걸친 휴머니즘과 합리주의의 계몽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대중은 이른바 제2의 중세(프리드리히 엥겔스)로의 회귀라 할만한, 초자연적인 신앙으로 급속히 퇴보하였다. 초과학적 영역에 대한 숭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고, 수상쩍은 도덕 관념을 지닌 근본주의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신비주의 숭배는 미국인의 사과파이처럼, 프랑스인의 폼뿌리(Pommes frites)처럼, 독일인의 소시지처럼, 아니, 어쩌면 모든 현대인들의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현대인의 일상이 되고 있다. 사교적인 숭배 집단이 얼마나 손쉽게 진지하고 보편주의적인 종교로 탈바꿈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우리는 로마나 중세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말일성도교회(Church of Latter-Day Saints)가 유타주를 넘어 미국 전역과 해외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것을 보면, 생명과 물질의 비밀을 밝혀내고, 인간을 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남의 말에 현혹당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건강한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아니라 사교(邪敎)를 숭배하는 세계, 숙고된 신념이 아니라 경박한 통념의 세계, 그리고 반신반의하면서 쉽사리 받아들였다가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불합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사회적·기술적 불투명성의 반영하는 이런 심리적 불안정은 개인에게 사회적 권력과 제도의 공격을 통제할 권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심층생태운동의 인간의 탈중심화 기획은 결국 인간에게 자유와 자율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함으로써 문화적·사회적 야만의 길을 연다.
II.2. 에코페미니즘: 학문인가, 강령인가?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의 여성지배를 자연지배와 등치시킴으로써 생태계 문제 전반을 ‘남성 때문’으로 환원하는 여성주의의 한 부류이다. 이는 포괄적인 세계관적 기획인 바, 생태계 위기와 여성 억압을 동일한 문제로 이해한다. 에코페미니즘은 1970년대 중반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프랑수아즈 도본느(Franoise d’Eaubonne)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원래는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이었지만, 최근에는 과학의 지위를 넘보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 지배와 자연 지배 사이에 모종의 필연적인 유비적 연관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정치·경제제도,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지구 생명-유지체계(life-support-system)를 위협하는 최종적인 근원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세계체제를 지목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남성중심적인 사회·경제체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환원주의적인 전략 때문에 에코페미니즘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운동의 강령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성해방의 실천적 강령으로서 에코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스트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할만큼 너무 다양하다: 발 플럼우드(Val Plumwood)는 이론의 내용과 성격에 근거하여, 문화적-에코페미니즘/사회적 에코페미니즘으로 구분하고, 엘리자베스 켈러쎄르(Elizabeth Carlassare)는 이를 본질주의(문화적-에코페미니즘)와 구성주의(사회적/사회주의적-에코페미니즘)으로, 이네스트라 킹(Ynestra King)은 동일한 이론적 구도 하에 급진적-에코페미니즘/사회적-에코페미니즘으로 구분한다.
미국에서 이 용어는 1976년 머레이 북친이 버몬트에 세운 <사회생태연구소>가 생태-기술, 생태-농업, 생태-페미니즘 등의 시민강좌를 개설하면서 쓰이기 시작하여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 개념은 1980년 메사추세츠 암허스트에서 열린 <여성과 지구적 삶: 80년대의 에코페미니즘 전망>이라는 회의의 주된 테마가 되기도 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의 약속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존재와 인식 둘 다를 불러들이는 ‘이성적인 재마법화’라는 말에 잘 함축되어 있다. 자연과 문화의 대립구도를 거부하고, 양자의 변증법적 종합을 주장하는 킹은 에코페미니즘을 급진적 문화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통찰을 결합한 변형된 페미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고전적인 이론가들을 들자면, 이네스트라 킹, 도본느, 플럼우드,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 등이다. 플럼우드와 프레야 메튜즈(Freya Mathews)가 에코페미니즘과 사회생태론, 심층생태론의 상관관계를 구체화시켰다면, 킹과 캘러쎄르는 다양한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간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국에서 이 용어는 90년대 중반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운동의 신이론으로 받아들이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여성과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한 개발(1995)가 번역되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적 전개를 개괄하고, 캐롤린 머천트 등 초기 여성 생태사상가들의 사유에 기초하여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다음 해에 나온 다시 꾸며보는 세상: 생태여성주의의 대두(1996)는 십 수명의 외국 논자들의 논문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반다나 시바/마리아 미스)의 공저, 에코페미니즘(2000)은 종래의 페미니즘 이론을 비판하고, 여성의 시각에서 개발 대신에 생존(자급)의 관점을 옹호하는 한편, 여성=다양성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하여 생명공학 기술을 비판하고, 주부 중심의 소비자해방을 통한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한 대안을 주장한다.
그러나 생태계 위기를 포함하여 현대의 모든 위기가 여성, 자연, 제3세계의 식민화에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이런 토양 위에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문명이 주도적으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라는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세계체제의 확대에 여성이 얼마나 기여했는가? 라는 물음 앞에 무기력해진다. 북친, 엘리슨 예거(Alison Jagger)나 자넷 빌(Janet Biehl) 등은 비교적 에코페미니즘에 호의적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기모순을 적절히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즘이야 말로 지구인들의 마지막 구명선”이며, “대립적인 페미니즘들을 화해시키고, 의식적으로 중재하고, 역사의 배후를 재인식하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여성들의 보이지 않고, 소리없는 실천에 관한 사상, 이론과 실천의 연계성과 총체성에 관한 사상, 중층적 지배체계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위계적 문명 하에서 훼손되고 거부된 모든 억압받은 자의 복권”이라는 주장은 설득적이긴 하지만 논증적이지는 않다.
에코페미니즘이 현대 페미니즘의 운동강령 수준을 넘어, 우리 시대의 주류 생태학적 담론이 되려면 에코페미니즘 내부의 비일관성을 극복하고, 심층생태론과 사회생태론 등 근본생태주의의 다양한 목소리와 대결하기보다는 이들을 결합하여 생태-사회‘이론’의 역동성을 제고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II.3. 사회생물학: 생물학적 환원주의
인간 고유의 가치를 잠식해 가면서 과학임을 자처하는 두 학설이 있다: 둘 다 197O년대 중반에 출현하였는데, 인간의 행위가 오직 유전적 요인에 좌우되며, 인간의 지성을 이기적 유전자의 부산물로 환원하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한 부류인 사회생물학(sociobiology)과 인간을 어머니 대지의 순결한 몸에 기생하는 지성을 갖춘 벼룩으로 간주하는 지구 가이아-가설(Gaia-hypothesis)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윌슨(Edward O. Wilson)과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사회생물학만 검토한다: 윌슨(그는 하버드대학의 교수로서, 사회적 곤충에 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은 1975년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7O년대 초 쇠퇴해 가던 신좌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윌슨의 책은 환경운동 내부에서 사회비판적 입장과 생물학적 입장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등장하여 환경운동가들로 하여금 환경적 재앙의 원인으로 비사회적-비정치적인 것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윌슨의 저작은 인간의 행동을 유전적 선택에 좌우되는 단순 동작으로 환원하고, 그것이 인간조건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환경문제를 편협한 생물학적인 문제로 단순화시켰다. 동물의 행동이 종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된다는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본성이 유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냐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에 새로운 방향, 즉 유기체보다는 유전자에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유전자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사회생물학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유기체는 스스로 생존하지 않는다. (···) 유기체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유기체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것이며 유기체는 일시적인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 유기체는 단지 DNA가 더 많은 DNA를 만드는 방법에 불과하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자기 목적을 따로 가지고 있는 분자의 집합으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생물학은 복잡한 유기체를 DNA 분자에 종속시키는 편협한 생화학적·유전학적 목적론이 되어 버린다. 3년 뒤 그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로 퓰리처상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도 유기체에 대한 극히 단순한 관점을 고집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목적론적 편견은 단순한 분자적 인과율로 된다. 물리학적 환원주의가 모든 현상을 소립자로 분해하듯이 인간의 유기적 진화와 발달이라는 총체적 차원이 DNA로 해체되어 버린다.
“우리를 포함한 어떤 종도 유전의 역사에서 창조된 명령 이외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종들은 물질적·정신적 진보에 대한 무한한 잠재성을 지닐 수 있지만 분자 구조가 자동적으로 몰고 가는 직접적인 환경이나 진화상의 목표 이외의 어떤 내재적인 목적이나 지침도 가질 수 없다.”
윌슨의 공식과는 정반대로 ‘정신과 뇌의 기능을 강화시켜 주는 유전자는 가혹한 유전적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며, 인간이 충분히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자유의지와 지향성, 사변적 통찰, 도덕적 기준을 진보시켜 감으로써, 인간의 행동적 특성을 기계적으로 조종하는 ‘분자 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인간적이다. 만약 인간의 지성이 원자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인간 유전자의 생존을 촉진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면, 인간은 분자 구조를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성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숙고를 통해서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도록, 그리고 분자 구조의 존속과는 무관한 예술과 철학을 창조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는 주어진 종의 기능에 이바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종은 유전자의 상태와 성장을 보살피고 영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서 일차적으로 유전적 진화의 매개 수단”이다.
같은 해에 출간되어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위 인용과 같은 조야한 환원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생물학과 윤리학 분야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의 제목부터가 이미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학술적으로 이기심이란 심리학적 지향성이지, 단순히 생물학적인 자기 보존에 대한 은유로 쓰일 수 없다. 도킨스가 바라보는 세상에서 유전자는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가끔은 속임수마저 쓰는 데,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무자비한 이기심이야말로 성공적인 유전자가 갖추어야 할 주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런 유전자의 이기심이 개체의 행동에서 이기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살아 있는 존재의 독립성이 허용되지 않는 ‘분자적 이기심’에 뿌리를 둔 유전자의 도덕성과 단순한 일대일의 관계를 가진다.”
인간의 문화와 도덕성은 유전적 조건을 넘어설 수 없다는 주장에 관한 한 윌슨은 도킨스보다 훨씬 덜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높은 도덕적 가치가 문화적으로 진화하여 스스로 방향과 추진력을 얻게 되면 유전적 진화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라고 묻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전자는 문화를 제어한다. 통제의 사슬은 아주 길지만 다양한 가치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억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 (···)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유전적 요소를 고스란히 보존해 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존할 하나의 우회적 기술이다. 이것이 도덕의 기능이다.”
이타심은 이기적 개인을 만들어 내는 이기적 유전자(윌슨도 도킨스처럼 이 말을 사용한다)의 활동과는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전자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간을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자들에게 ‘이타심’이라는 문제는 아주 성가신 테마이다. <웹스터 사전>의 이타심 항에는 때로는 윤리적 원칙에 따른, 다른 사람의 이익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고려, 배려, 또는 헌신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는 개인적인 동정으로부터 사회적 이념에의 헌신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이타적 행위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인간의 본성은 이타심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는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서, 완전히 이성적일 수도 있고, 자동적·무의식적일 수도 있으며, 의식적이기는 하나 내재적인 정서적 반응에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
윌슨의 논지는 공동선을 위해 극단적인 희생을 치를 줄 아는 생물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자신들의 유전자를 대물림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자기 희생적·이타적인 곤충은 번식력이 더 큰 형제자매들이 번창할 수 있게 해주는, 이른바 현명한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영속적인 이기적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이타적 유전자가 어떻게 자연선택이라는 가혹한 숙명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일까? 윌슨은 친족선택이라는 개념에 호소하면서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데, 친족선택이란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를 모두 지니고 있는 개체가 친족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유전적으로 제어된 행동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친족선택을 통해서 이타심의 능력을 함께 진화시킨 것인가? 윌슨은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인간의 사회적 진화는 유전적이기보다는 명백히 문화적”이며, 동시에 “모든 인간 사회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근원적인 감정은 유전자를 통해 진화한다”
는 주장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타심이 유전하는 다른 감정과는 다르다: 수많은 사상가와 사회혁명 운동은 친족선택이 이니라, 위대한 이념(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자유, 평등, 박애 등등)에 의해 움직였다. 유전자나 멤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위대한 사회이념들은 철저히 문화적인 동기에서 이상주의자들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사회적 변동을 초래하였다.
월슨의 유전자 중심주의는 ‘이기심’이나 ‘이타심’같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가 있어야 하고, 원초적인 ‘근원적 감정’이 사회 속에서 활성화되게 해주는 도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생명체 집단만 있고, 변화 가능한 제도로 조직된 사회가 없다면 우리는 문화를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생물학은 이름과는 달리 전혀 ‘사회적’이지 않다. 사회생물학자들은―부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인간을 ‘유전자 기계’로 환원하고, 외삽 추리(extrapolation)를 통해 사회, 정신, 위대한 사회적 이념을 철저하게 유전자적 관점에서 다룬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에는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끼어 들 여지가 없으며, 인간 정신의 고결함에 대한 신념도, 위대한 사회적 이념과 생태학적 통찰을 위한 자연주의적 근거도 없다. ‘유전자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하려는 거창한 기획을 펼치는 사회생물학에서 ‘이성’은 기괴하게 해석된 생화학으로 대체된다.
III. 유토피아와 에코아나키즘
III.1. 역사적 유토피아
400만년전의 루시(lucy)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원시 인간중심의 세계에서야 동물적인 절망과 불안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원시 채집인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등장한 기독교는 인간도덕의 궁극적인 권능은 이승에서 낙원을 이룩하는 것이며, 만인 평등, 사후 구원, 금욕과 같은 강력한 유토피아적 희망의 카드를 내 보였다. 이 카드에는 타락한 영혼을 인도하는 신의 섭리와 조화에 대한 확신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1500여 년이 지난 후 종교개혁가의 희망은 개인과 자기 확신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였고, 이 정신은 그 후 300여 년간의 계몽주의적 희망으로 확장되었다. 무신론자 디드로, 자연신교주의자 볼테르, 변증론자 헤겔, 순수 유물론자 라메트리(Julien de La Mettrie) 이들은 모두 이성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었다. 세상은 오직 과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은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한 이들은 자유의 존재로서 인류의 진보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이는 단순히 영광된 미래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 아니라, 볼떼르의 말로 하자면 세상은 필연적으로 유용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에 찬 희망이었다.
계몽의 바다를 건너, 프랑스 대혁명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등장한 사회주의는 기독교 이래로 가장 과격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대표되는 조국이 없는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는 메시지는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유토피아의 실천지침으로 모든 계급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희망이었다. 위계 없는 공산사회에 대한 염원은 역사 속에 명멸해 간 다양한 유형의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소비에트를 향한 볼셰비키 혁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21년 사이의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 절망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에의 희망, 결국 미래에 올 공산사회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현실적 변용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지난 세기말 이래로 아무도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다. 어쩌면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CNT의 실패, 그리고 1968년 학생봉기의 실패는 그런 희망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리는 예심공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질풍노도와 더불어 등장한 포스트모던(이는 우리 시대의 ‘희망 없음’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신비적인 반인간주의(유사-종교적 영성에 호소하는 심층생태론), 아무래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식의 인식론적 아나키즘에서 충분히 감지될 수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질서에서 희망을 미덕으로 삼을 수 없을 때, 절망이 미덕인 양 둔갑시키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한치의 예외도 없다. 그것은 과격한 유토피아 다음에 오는 일종의 문화적 후유증이다. 엄청난 물질적 안녕과 자유시간, 육체적 행복, 자연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져다 준 기술진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삶과 자연세계의 통합이라는 기술의 최초 목표를 위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생태계 위기시대의 인간들은 생각하고, 고안하는 인간의 저 권위가 얼마나 자기-파괴적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모더니티 비판의 구호를 교양필수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의 조건에 무력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사회적 기약에 상실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사람들은 더욱 냉소적으로 되고, 현존 질서의 포로가 되는 것을 미덕인 양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패러독스이다. 기술진보는 전 인류의 희망이었지만, 산업혁명기 노동자계급에겐 처참한 절망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은 ‘인민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희망을 주었지만, 그것은 오직 문화적 편협성, 인종적 증오를 통해서였다. 도시화, 무역과 거래의 확대는 자본주의가 내 보이는 희망이었지만, 자연과 대지의 약탈에 절망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적절한 이기심, 관용,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신의 눈밖에 난 ‘개인들’의 희망이었지만,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이라는 ‘자연 미덕’의 상실은 절망이었다.
이토록 치명적인 절망은 뭐니 뭐니해도 20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 때문인 듯하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이런 절망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던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황폐한 전후의 지성들에게 반현대(Antimoderne)의 정서를 공급하였다. 니체가 살던 세상은 생기에 찬 산업화 이전의 사회로부터 창백하고 음울한 상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문화적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이들의 절망은 1차 대전 직전 유럽사람들이 느꼈던 위기의식을 대변하는 것이고(니체), 19세기와 2O세기초에 형성된 반현대의 전통 위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자본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운동 둘 다가 ‘혐오스러운 대안’으로 보았던 데 기인한다(하이데거). 이 절망은 1차 대전을 주도한 독일 제국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볼셰비키 혁명 운동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 그래서 하이데거는 결국 치명적인 선택(나치즘)을 하지 않았던가!
III.2. 에코아나키즘의 기대지평
생태계 위기가 결국 인간의 문제라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빌미로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자 거나, 동양적·신비주의적 세계관을 원용하여 생태계 위기를 유사-종교적 주술로 해결하거나, ESSD(지속가능한 발전) 논리로 제3세계, 여성, 유색인을 폄하하고, 억압하는 환경적-신자유주의로는 ‘생태학적 효율성의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 생태효율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경제활동 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에너지 문제의 경우 에너지 가격을 올려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을 유도하고, 기업과 소비자에게 환경세를 부과하며, 복지정책에서도 ‘풍요로운 삶’이라는 산업사회적 개념에서 ‘문명적 삶’이라는 생태사회적 복지개념을 도입하고, 거대-복합기술을 환경기술로 분산시키는 등 사회시장경제의 수정을 통해 문제해결을 의도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가 급속하게 지구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할지 우려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시장 논리에 대항하는 민주적, 도덕적 균형 추를 강화하고, 세계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영역을 보장함으로써 지구화의 부작용에 대항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더욱 견고한 연대성을 가지게 될 시민 네트워크는 민주주의의 잠식을 방어하는 좋은 기제이다. 그래서 전지구적인 통치가 보편화하더라도, 국민국가와 초국가적인 권력의 조화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며, 지구인으로서의 삶의 영역과 국민, 시민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자연, 사회 이 삼자 중에서 어느 쪽을 편들지 않고, 현재의 문명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위기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을 얻으려는 시도를 ‘에코아나키즘’이라 이름붙이고자 한다. 에코아나키즘은 생태계 위기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제도화한 사회의 기본구조가 위계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재의 대의정치, 삼권분립적인 권력구조, 생산관계에 의한 위계적인 사회질서로는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자연-재생산-활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에코아나키즘은 맑스의 철학이 그러했듯이 사회혁명의 기대지평일 뿐, 현실적 목적지평 위에 있지 않다. 맑스에게 맑스주의란 하나의 현실적 운동이었지, 제도 정치의 틀을 마련하는 체제나 이념은 아니었듯이, ‘에코아나키즘 역시 현실적인 사회운동이다.’ 포스트모던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전일적인 세계 설명원리란 없다. 그 어떤 웅장한 담론도 더 이상 ‘희망의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에코아나키즘은 상호부조에 의한 자주관리 사회가 국가없이도 가능함을 주장한다. 국가와 국가의 폭력독점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국가가 없다면 살인, 강도, 강간이 더 많을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생기는 전쟁, 권력에 의한 착취, 추방, 소유권 박탈, 민족살해,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좀도둑은 있지만, 대규모 자연파괴는 없는 아나키 공동체인가, 체르노빌과 히로시마, 아우슈비츠가 있는 중앙집중적인 거대국가인가는 그리하여 선택의 문제로 된다.
대의정치와 시장자본주의가 아닌 아나키 공동체에서는 권위와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의하지 아니하고도 자율적 사회질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아나키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탈개성적이고, 기계화(합리화)된 관계로부터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인간관계를 복원할 것이다. 개인은 욕망으로 가득 찬 사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이 된다. 경쟁과 계약에 대한 책임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보다는 연대와 결속이라는 공동체주의적 가치가 존중된다. 결국 관용과 인권 보장에서 친밀성의 확대로의 도덕의 구조변동을 초래한다.
IV. 사회비판적 생태관의 세 가지 원칙
IV.1. 에코아나키즘의 사회비판적 생태관
<II>에서 비판한 현대 생태주의의 공통점은 반인간주의이다. 반인간주의란 사회와 인간의 경험을 합리적이고 자유롭게 만드는 이성, 과학, 테크놀로지의 힘에 대한 신뢰를 뒤엎는 일반적인 경향을 말한다. 위의 세 사조는 세기말, 세기초에 확산되고 있는 아노미와 절망을 반영하고 있다. 허무에 지친 현대 생태주의는 현존 사회의 정당성을 쉽사리 용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조건 내에서 별 탈 없이 지내도록 방조한다. 진보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상실하면 할수록, 진리의 객관성, 역사의 실재성, 세계를 변화시키는 이성의 힘 역시 상실된다.
에코아나키즘은 사회비판적 생태관에 기초해 있다. 이는 성장과 이윤극대화라는 야만적인 자본주의의굴레로부터 이 세계의 인간·자연·사회를 동시에 배려하는 공생체-문화(symbios-culture)를 진작시키고, 이런 생태관에 기초한 자유사회(libertarian society)는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상호의존과 직접적인 교환관계로 복원함으로써 익명성을 해소하고, 이기적인 시장공동체보다는 자연계에 대한 배려와 관심, 책임을 실천할 수 있는 생명중심적 공동체를 대안적 사회모델로 생각한다.
사회비판적 생태관은 ‘지구의 자연자원이 풍족하지 못하고, 산업생산물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경쟁은 필연적일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적 인간 개념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재화는 각자의 욕망을 채워 주기에는 ‘항상’ 모자라지만,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언제나’ 충분하다는 긍정적 인간 개념을 설정한다.
사회비판적 생태관은 인간의 폄훼는 상대주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 사회적 정적주의(quietism), 그리고 결국에는 퇴폐적인 허무주의를 거부한다. 이런 태도로는 대중적 저항의 방향성도, 반생태적인 세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맞설 지적 수단을 제공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계몽에서 시작된 현대성의 보편주의적 기획을 해체함으로써 사람들을 사적인 삶으로 퇴행시키고, 결국에는 사회적 근시안을 낳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대 생태사상의 특징이라 할 이런 이념은 억압받고, 소외된 문화 집단의 좌절에 대해 소박한 개인적 저항의 형식일 뿐, 진지한 저항 세력들의 건강한 이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비판적 생태관은 고전적인 의미의 사회적·사회주의적 이념을 따른다.
생태계 위기는 인류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임이 분명하다. 이는 전지구적, 심지어는 우주적인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로운 세기 삶의 조건을 더욱 절망적으로 몰아가는 위기 시대에 우리는 도무지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에코아나키즘은 휴머니즘의 원칙, 희망의 원칙, 필요의 원칙―욕망의 원칙이 아니라― 등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시대적 절망’에 답하고자 한다.
IV.2. 휴머니즘의 원칙(Prinzip Humanitt)
현대의 선지자들은 인류 문명이 명백히 치유 불가능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 이유는 생태, 환경의 위기 때문이며, 이런 위기는 근본적으로 문화적, 문명적 불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현대는 이들 현자들의 위기설 유포와 공포분위기에 가위 눌려 있다. 이들은 새로운 천년의 시간을 맞이하여 휴머니즘의 역사적 진화를 저주하는 엄숙한 메시지를 선포한다: (1) 과학, 기술, 자본의 진보를 믿지 말라! (2) 어떤 고상한 도덕도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3)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계를 지배하는 특별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불치의 오만함 때문에 도덕은 인간을 자연과 결합시켜 주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악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4) 그래서 모든 도덕을 타도하라!, 스스로의 능력을 불신하라!, 인간은 자연의 티눈이거나 암세포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의 충동을 버리고 벌레처럼 사소해지라! 한마디로 휴머니즘을 포기하라!
이들이 경고하는 ‘위기’는 인간과 자연의 잘못된 관계 때문이 아니라, 인간 종이 지닌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창백한 믿음 때문은 아닐까? 다시 한번, 에코아나키즘은 인간의 힘이 악마적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을 통제 불가능한 파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암세포’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 때문으로 본다.
휴머니즘의 힘은 명백히 자유의 확대를 이끌어 냈으며, 정직과 신뢰에 기초해서 이웃, 마을, 공동체 간의 친밀성을 강화하는 공적(公的) 도덕을 진보시켜 왔다. 근대의 합리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긍정적인 부분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신화로부터의 인간의 탈마법화(Entzau- berung)라는 계몽의 입지점에서 역설적으로 이성의 재마법화(Wiederzauberung)가 필요하다. 과학-기술적 문명화로 인한 생태계 위기는 인류를 치명적인 조건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이는 부단히 새로운 양상으로―초국가적, 초인종적, 초문화적(cross-cultural)으로―문제를 제기하는 하나의 도덕적 도전이다. 우리는 휴머니즘의 권능이 자유를 확대해 온, 저 이성의 역사에 기대어 그렇다 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사회비판적 생태관을 적극적인 사회이념으로 작동시키는 제1원칙이다.
IV.3. 희망의 원칙(Prinzip Hoffnung)
반인간주의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조류가 되었다. 지구촌 곳곳을 파고드는 자유 시장경제가 자기파괴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우리의 선택이 도무지 합리적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물음에 회의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들의 허전함을 비집고, 저런 허무주의, 신비주의, 지독한 상대주의가 독버섯처럼 우리의 영혼을 침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의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불합리한 현실적 증거를 들이대며 항변하는 반인간주의에 대항해서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보다는 있어야 하는 바를 숙고하기 위해 이 현실적 불합리의 배후를 통찰한다. 맑스의 말로 하자면, 관념이 현실을 추종하여야 할뿐 아니라, 현실 또한 관념을 따라야 한다. 희망의 원칙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한다.
첫째; 희망의 원칙은 비판적이고, 재구성적이며, 참여적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은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은 냉혹하고,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한갖 양족 동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든 또 한번의 아우슈비츠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의 원칙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전면적으로 새로 수립하기 위하여 이성이 필연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다는 권능을 인정한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사회는 상품생산, 시장, 자본을 넘어서는 자유지상주의적(libertarian)-공동체적 꼬뮌이어야 한다: 이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연방적 네트워크, 직접 민주주의, 지역위원회와 지역 대표위원회가 행정적으로 통합된 탈중심화된 공동체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특수한 이익관심에 의해 이끌리는 민족, 인종, 젠더 집단과 구별되는, 보편적인 인간적 이익관심으로 통일되어 있는 자유 시민의 대면적(face-to-face) 결사체를 말한다.
셋째; 희망의 원칙은 이성 인간이 노동시간(필연의 영역)을 줄이고, 여가시간(자유의 영역)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관점을 지지한다. 기술과 과학은 여하튼 진보되어야 하며, 필요는 합리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생활양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유가 결여되어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강제된 궁핍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결국 절망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배적인 시장사회 시스템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모든 인간다움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희망은 절망으로, 자연스러움은 부자연스러움으로! 그러나 이 모든 음울한 미래조망과 수상쩍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IV.4. 필요의 원칙(Prinzip Bedrfnis)
에코아나키즘은 탈중심적, 권력분산형, 자유분방형 사회를 선호한다. 생산을 협동적으로 조직하고, 권력을 급진적으로 탈중심화함으로써 자주관리되는 사회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욕망과 필요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욕망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식, 정보,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통제란 국가 권력에 의한 기술통제가 아니다. 얼핏보면 국가의 기술 통제는 정당화된 공권력 같지만, 실상은 자본가의 지령에 의한 대리 개입이다.
생태계 위기 시대에 있어서 기술의 선택은 언제나 자본주의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술의 선택은 오늘날 더욱 신중해져야 하며, 어쩌면 노동의 구원이라는 기술 본래의 목적보다도 우선해야 된다.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야 된다는 주장은 사회적 개인(gesellschaftliches Individuum)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는 공히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런데 결핍 때문에 생기는 충돌이 멈추는 곳은 분명 사적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더 이상 무의미해 질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풍족한 조건하에서는 결핍된 물품을 위한 사적 개인들의 경쟁은 일어나지 않게 되고,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경쟁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지구 자원이 풍족하지 못하고, 산업생산물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경쟁은 더욱 만연할 것이고, 경쟁이 있는 한,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에코아나키즘에서 개인은 상호의존적인 필요와 이익에 기초한 사회적 개인이기 때문에, 필요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의 매커니즘을 통해 충족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개인의 필요와 욕구는 ①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② 과도한 소비를 부추기는 잉여생산이 없기 때문에, ③ 의사결핍(상대적 빈곤감)을 조장하는 과잉생산에의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욕망이 아니다. 이런 아나키적 경제공동체에서 노동의 목표는 생산의 극대화도 아니며, 규모의 경제는 불합리, 비효율적인 것으로 되고, 의사결핍을 조장하는 잉여 생산과, 이를 통한 자본의 증식을 위해 기술과 설비를 무리하게 투자하는 자본의 자기확대가 사라질 것이다.
에코아나키즘의 사회비판적 생태관이 제시하는 세 원칙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0년 전에 보아라,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리라!(요한묵시록, 21.5)던 어떤 선지자의 실패한(?) 예언이 실현되는 진정 합리적인 사회의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