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노목사
우리는 지금 우리네 목회인생을 시계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과연 시계에서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당신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아이들을 6시 새벽의 인생이라면, 청년은 9시, 장년은 12시, 중년은 3시, 노년은 6시 인생이 아닐까요? 주님은 당신을 어느 때 부르시고, 어느 때 써주셨습니까? 아직도 기다리고 계십니까? 많이 힘이 드시고 답답하시고, 고통스러우시지는 않습니까? 지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도 한 일 년만이라도 이 목회 내려놓고 예년에 데리고 있던 직원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이제는 예전을 생각해서 말석이라도 한 자리 달라고 해서 일이천이라고 벌어서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도 내려놓고 싶으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이미 포기하신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주님을 기다리시다가 다행히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이 쓰시는 일터까지 가시고 주님의 농장에서 마음껏 일하신 분에게는 마음 가득 모아 박수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성공한 목회인생이라도 그 성공목회인생을 자랑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성공인생도 기회도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네 인생을, 우리의 목회를 포기할 권리는 더더욱 우리에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권리가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도 아니면서 부르신 자가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내가 먼저 나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분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외면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3년을 기다렸다고 내려놓습니다. 어떤 분은 십 년을 기다리셨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합니다. 뒤늦게 부름 받아 이만큼 했고, 기왕 태어난 한 세상 목사로 세워졌으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다독거리며 내려놓으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전에 몇 번의 개척을 하셨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셨던 분들도, 개척교회에 뚝 끊겨버린 성도들의 발걸음에 한숨지으며, 너무도 애절하고 아픈 마음으로 대형교회만을 찾는 이 현실 앞에 한숨을 지으시면서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하시고 포기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무너지고, 목회자들이 목회를 내려놓으시면 나라가 망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어둠 속에서 신음할 날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점쟁이가 목사보다 네 배가 많고, 절에 중들이 두 배가 많다는데, 목사 한 사람이 적어도 귀신의 종노릇하고, 생명을 도둑질하는 도둑들을, 거짓선지자를 7~8명은 상대하고 맞장을 떠야 하는데 그렇게 한 분, 두 분 떠나시고 목회하기 힘들다고 떠나면 주의 일은 누가합니까? 지원자도 턱없이 줄었습니다. 몇몇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신학교 교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을 신학강단에 섰던 수많은 탁월한 영성의 지도자들이 설 곳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너무 어려우니까 그것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시고도 내가 신학교에 오겠다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분들이 너무도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를 욕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대형교회로만 성도들이 모여든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대형교회 당신들의 미래가 더 암담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대형교회 하나가 세워지기 까지 30개 교회가 문을 닫고 50여 교회가 본거지를 떠나 유랑해야(의지가 약한 것이 결코 아니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전해야 하는) 한다면 이 나라, 삼천리금수강산의 미래도, 교회도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전방에서 굳세게 개척목회, 복음 목회, 회개목회, 밤을 새우고, 눈물로 강을 이루던 통성기도목회부대의 산실이었던 군소신학교마다 지원자가 없습니다. 텅텅 비어있습니다. 놀라시기 바랍니다, 탄식하셔야 합니다. 나라에 아이들을 안 낳아 아이들이 줄고 노인들이 증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한국개척교회를 살려야 나라가 삽니다. 한국을 살리고, 한국을 받쳐줄 신학생이 가뭄에 콩나물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오고 있는 선지생도가 예전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 불행하게도 감히 제가 판단하기에 우리나라 교회의 미래도, 나라의 미래도,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너무도 어둡습니다.
저는 부흥을 이루신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영성과 경륜을 늘 배웁니다. 간절히 부흥을 사모합니다. 기회를 달라고 주님께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행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습니다. 부흥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교회당을 부풀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가 선한 일로 나라의 약한 교회들을 외면하고 그렇게 몸집을 부풀려 자의든 타의든 다른 개척의 현장에 수많은 목회자들을 떠나게 하고, 돌려세우고서도 자신들의 미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고 자신의 눈에 자신이 안 보이니까 자신이 없다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지금의 1세대, 혹은 1,5세대 목사님이 가시고 나면, 그래서 1세대 목사님들의 흔적이 다 지워지고 나면, 그 즉시 100년도 못가 당신들에 의해 높이 세웠던 교회들이 재산으로 분쟁하고, 교권으로 분쟁하여, 서로 난도질을 하고, 송사를 일삼고, 결국은 그들은 술집이 되거나, 이단들의 온상이 될 것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의 성도들의 다수가 어려움을 겪지 않은 온실의 화초 같아서 자기중심적이고, 자립심과 사명감이 약하고, 대형지상주의가 될 것을 인정하시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가르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누릴 것이지만 개척목회 현장에서 성장한 믿음과 어찌 그들의 믿음이 같다고 하시겠습니까? 개척교회에 한 생명이 약한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귀합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들을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를 함께 하며 눈물로 주님의 교회를 사모하면서 약함을 이기고자 싸웠던 싸움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면서 세웠던 강인하고 잘 연단된 신앙을, 아무리 잘 가르쳤다 해도 대형교회의 그 지성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연단의 고난이 없이 쓰임 받는 자를 보셨습니까? 주일만 얼굴 내밀고 십일조를 하든 안 하든, 봉사를 하든, 안 하든, 증인된 삶을 살든 안 살든, 간섭 받지 않고, 편하게만 신앙생활하려는 분들이 어찌 다음 세대를 지킬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개척의 몸부림 속에서 성도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며, 담임으로서 심방도 하고, 작정하여 금식하며 저들의 바르고 건강한 신앙고백의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시다가 견딜 재간이 없어, 지금 눈물로 목회를 떠나시고 계시는 주님의 종들은 대형교회의 성도님들 100보다, 1,000보다 귀합니다. 개척의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며, 한 눈 팔지 않고 눈물로 기다리면서 교회를 지키시는 사명자 한 사람이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하게 필요한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누가 여러분의 형제라고 하셨습니까? 초라한 뒷모습으로 떠나는 그들은 주안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한 몸이요, 동역자요, 함께 명을 받은 같은 협력자요, 굳세게 연합해야할 믿음의 용사입니다. 저들이 떠나면 모두가 망합니다. 전방위 목회자, 저들이 약한 것 같아도 저들이 없으면 대형교회도 물론이며, 나라도, 후손들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우리도 당신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형교회에서는 가난한 교회를 위해 얼마나 부르짖고 기도하시는지 모르지만 우리 최전방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당신들을 향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힘이 있으시다면 그들이 떠나지 않도록, 또 본연이고 본질인 목회로 돌아오시게 부디 나누시고, 섬기시고, 동참해 주십시오.
제가 이 앞에 드린 말씀에서 일당십, 일당백을 감당해야할 목회자들이 목회의 현장을 떠나고, 또 목회하시는 분들이 목회가 주가 되어야 하는데 돈 벌이에 치우치시는 것이 안타까워 장사꾼 목사란 글을 올렸는데 어떤 목사님께서 신학교 교수하는 것이나, 택시를 운전하는 것이 무엇이 차이냐? 물으시면서 오해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목회현장에 한 분이라도 더 버텨주고, 기다려주는 목사님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썼던 글이니 부디 용서하시길 바라면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사랑하는 개척교회 최전방의 홀로 교회를 지탱하고 계시는 목회자님들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는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포기하지 않으심을 몸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포기하신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은 포기하기로 하는 결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가 만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드시길 바랍니다.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일찍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은 자나, 인생의 끝자락에 선 마지막 순간의 시간, 그 시간에도 일을 가지고 주님은 여전히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부름 받은 일꾼과 한 푼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대가를 지불하실 것입니다.
골프에서 대부분의 경기가 정규 홀에서 우승자가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연장전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경험이 없는 선수, 훈련이 되지 않는 선수는 벙커(모래)에 빠지기도 하고, 헤저드(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혹 몇 타가 뒤지고 있는 상태의 18홀 마지막 홀이라도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어쩌면 앞서가는 선수가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인생도 많은 경우 연장전에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축구경기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승패가 결정되지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본 경기 전후반 45분씩, 90분의 경기가 끝나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연장전이 있고 연장전 전후반 30분에도 경기가 결정이 안 되면 승부차기의 기회가 옵니다. 마지막 순간 나는 팀이었고, 수비수였더라도 최선을 다해 방어하다보면 이기지는 못했어도 나에게 승부를 결정짓는 승부차기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농구경기에서도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공이 손을 벗어나 그물이 출렁이며 경기가 완전히 뒤집어지기도 하는 버즈비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 순간에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승부가 나지 않고,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주님은 반드시 부르심에 합당하게 기회를 주시고, 써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없이 설교들을 하셨을 것인데 교만하다 마시고 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태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20장 6-9절에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 일했습니다. 주인은 다시 제3시, 제6시, 제9시, 그리고 제11시에 나가서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합니다. 제3시는 우리시간으로 9시, 제6시는 12시, 제9시는 오후3시, 11시는 요즘 시간으로는 오후5시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우리 주님의 참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침6시에 와서 일해야 할 일꾼들은 놀랍게도 이미 늦은 9시에도 쓰시기 위해 찾아가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해가 중천에 머문 하루가 반이 지난 정오에도 나가셨습니다. 더 나아가 일할 시간에 4분의1인 오후3시에도 주님의 일할 자를 쓰시려고 찾아서 나가셨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이 해가 저물 때까지 일꾼을 찾으셔서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주님은 오후5시 해가 저무는 그때, 마지막 한 시간을 쓰시기 위해서도 일꾼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나이 많은 노 목사님들이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주님을 만나시기 위해 마지막 한 번! 그 한 번을 간절히 기다리시는지 당신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그냥 제3시면 아침 9시니 이미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조금 늦은 아침이니 일찍 새벽에 온 사람과 아침에 온 사람만 일을 시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 온 종일 일을 제대로 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아침 아홉 시가 지났는데도 또 데리러 가십니다. 정오에도, 오후 세시에도,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도, 주님은 일꾼을 찾으려 나가셨습니다. 마지막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은 그때에도, 우리 주님은 일을 맡기시려고 부르셨던 우리들을 쓰시길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영국의 성경번역자이며 설교가인 필립 브룩스 목사님은 “나는 급해 죽겠는데 하나님 도무지 급하지 않은가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급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목숨과 힘과 능력과 마음을 다 걸 때까지, 일을 맡겨도 망치지 않을 때까지, 당신의 자녀의 고귀한 생명을, 당신의 몸된 교회를 맡길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부르셔서 쓰시다가는 주님의 일도, 자녀들의 영혼도 다 망칠 것이기 때문에 서두르시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주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인내에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대가이십니다. 그런데 주인이신 주님이 포기하지 않고 11시까지 몇 번이고 계속 찾아오시는데 일꾼으로 뽑혀서 쓰임 받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먼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논리는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고 연단 받은 것도 다 계산하십니다. 공평하신하나님은 상처와 고난 속에서도 연단을 이루고 끝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모든 과정을 계산하십니다. 사역은 첫째도 기다림이요, 둘째도 기다림입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왔든 노동시간에 따라, 결과에 따라 임금이 주어집니다. 일찍 온 사람이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1시간이나 10시간이나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시간에 비해보면 우리의 일과 시간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신 그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실 그 자리에 있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는 포도원에 들어와 일꾼이 되었다는 존재 자체가, 주님이 찾아오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늦어버린 시간에 늙은 우리라도 쓰시려고 찾으려 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한 사람이 포기한 지점에서 나는 시작한다.”라고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그가 발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웃을 때도, 포기할 때도 아닙니다. 성경은 마지막에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승자는 최후에 웃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웃을 때도 아니지만 우리가 슬퍼하고 울면서 포기할 때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맡기시고 부르신 목회로 끝장을 봐야 합니다. 끝장을 보기로 요단에 발을 담글 때까지 우리를 기다리셨다가 부르셨는데 돌아갈 수 없습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에 상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한 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목회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상이어야 한다.”고 매튜 헨리는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을 맞으시면서 오늘을 지금까지 보내온 모든 날들의 끝이라고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하루를 보내시고 한 달을 보내시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써주실 것을 믿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들, 지난날들의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오는 하루의 시작 앞에 저와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한 해의 남은 시간들을 잘 사용하기 위해 그 첫 시작 앞에 서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매일매일은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들의 고귀하고도 소중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을 기회의 시작입니다. 아름답게 쓰임 받은 노 목사로 맞을 새로운 시작입니다. ‘남은 인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주님이 쓰시겠다고 찾아오셔서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날마다 오늘이 다시 올 수 없는 소중한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차별하지 않으시고 뒤늦게 부름 받은 나도 똑같은 상급과 똑같은 면류관으로 예수님의 씌우실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종말적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다니엘 12:13에는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라고 부르셨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령입니다. 우리 목회자이 스스로 포기하고 기다림의 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보다 어리석을 일은 없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 나타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왜 어리석습니까? 신랑이 올 것을 소망하면서도 준비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시므온과 같은 목회자가 되셨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을 성경은 ‘누군가 간절히 오기를 바라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에서 ‘보다’를 묘사하는 단어인 ‘프로스테코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시므온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 시므온은 불만이나 초조함이 없이 믿음으로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님이 오시길 간절히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안고 축복하고 아름답게 삶을 마친 사람으로 우리의 본입니다.
프랑스의 속담에는 “기다림,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고, 웨일스 시인 토마스는 “의미는 기다림 속에 있나니”라고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패는 가장 큰 실패의 이유는 바로 성공하기 직전에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얼마나 기다림에 인색한지 모릅니다. 우리 목회자 모두에게 부름 받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기다림입니다. 그렇지만 목회는 기다림입니다. 사명은 기다림입니다. 저 천국도 기다림입니다. 열매도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란 믿음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은 성령충만입니다. 기다림 없는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없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커집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란 힘이 들지만 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목회, 슬프도록 가난해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살아계신 우리 주님이 듣고, 보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마지못해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려고 오실 그때를 확실히 믿고, 상을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소망을 붙들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코 주님의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부흥이 아닙니다. 부흥을 이루고, 안위를 누리고자 하신다면 우리 주님은 목회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의 본질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부르신 목회의 그 자리, 그 현장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흥을 이룬 분들에게 주님의 마음이 다 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우리보다 낮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보다 못한 곳에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섬김에 있고, 저와 여러분보다 못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이들, 소망을 다 잃어버려 생사의 갈림길에 선 방황하는 영혼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그들에게 우리 마음과 우리 눈이 머물 때, 그때가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일하라하실 때입니다.
거부가 된 탁월한 세일즈맨 해리 콜린스에게 “당신도 고객에게 거절당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하지요. 아주 많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하면 당신은 몇 번 만에 포기합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기 전까지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우리는 콜린스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니가 죽든, 내가 죽든 해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란 책에도 보면 실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끈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섬기느라 공예배의 시간과 새벽기도 시간을 제외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여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이번에는 저도 전도에 매달려보려 합니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성경도 간단히 읽고, 운동도 간단히 하고 오전부터 해질녘까지 전도에 매달리려 합니다. 저도 콜린스의 말처럼 주님을 전하기 위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예수를 소개해서 지옥이 아닌 천국에 함께 가고 싶습니다.
누군가 당신은 할 만 하니까 그렇겠지, 나처럼 자식들로, 질병으로, 나이 많아 어렵고 힘들지 않아서 그렇겠지 하신다면 감히 제가 사십 층 나락으로 떨어져 지켜야할 아비의 자리마저 지키지 못해 자식도 잃고, 한 쪽 눈도 잃어 장애를 입어 파산하고, 세상 친구 다 떠나보내고 늘 눈물로 회개하며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목사로 세워져서 주님의 성도들을 무릎으로 섬길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는 작은 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내가 목회를 내려놓는다면 주님도 나를 외면하실까봐 결코 나는 이 자리를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 주님이 나를 세우신 목적의 본질은 좋고, 나쁘고, 부흥하고, 부흥하지 못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인정받고, 존경받는 자리는 가고 싶어 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두가 가기 싫어하고, 모두가 외면하는 그 자리에서 섬김을 감당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옷 한 벌로 사시면서도, 모두가 원하는 유대인의 왕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온 나라가 호산나하고 왕으로 추대해도 죽을 자리로 가시면서도 죽음마저도 가장 천한 죄인들의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 그 주님의 냄새나고 악취가 풍기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처럼 기다리다 못해 그 낮은 자리로 나를 찾아오신 주님처럼, 나도 헐벗은 길로, 십자가의 길로, 냄새나서 아무도 원치 않는 그 섬김의 길로 나가고자 합니다.
목회의 현장에 부름을 받아 쓰임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목사가 목회를 내려놓는다면 이미 목사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목회마저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한 사람을 부름에 쓰임 받기 위해 기다려야하고 그 한 영혼 때문에 세워진 달랑이 목사가 된다고 해도 사명을 감당한 것은 감당한 것입니다. 그도 부끄럽지 않는 목회를 한 것입니다. 0과 하나와 둘의 차이가 똑같이 하나 차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가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0~1의 거리가 1~2거리보다 의 거리가 훨씬 멉니다. 일을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1시간 한 것과 12시간 한 것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함은 일의 양보다 부르심을 입은 대로 일꾼으로 있는 그 존재 자체입니다. 무엇인가 성과에 매이기보다는, 일하는 자로, 준비된 자로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하는 시간대로, 열매대로 임금을 지불하는 세상과 하나님께서 지불하는 대가의 다른 점입니다. 마지막 한 시간을 일했어도 전혀 부끄럽게 하시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먼저 온 자와 똑같이 셈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7에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꾼입니다.
요한복음 15:1에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농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가운데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는 일꾼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90%를 평범한 노동자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적은 시간만 제자들과 함께 공적 사역에 참여하셨습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은 일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외치다가, 설교하다가, 글 쓰다가 죽고 싶습니다. 전도하다가, 설교하다가 죽어도, 내 삶이 설교이고 내 삶이 죽음이 설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목사의 본질인 목회현장을 지키면서 주님이 시키실 그 일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일을 맡기시면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쉴 수 있는 금요일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인 월요일, 일할 수 있는 월요일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TGIF란 말처럼 ‘Thank God It's Friday(하나님, 감사합니다. 금요일부터 주말인데 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닌 ‘TGIM’ 즉 ‘Thank God It's Monday(하나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작의 월요일입니다.)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의 날씨가 청명하든, 어둡고, 비가 내려 눈물이 마르지 않으셔도 목회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힘이 드셔서, 내려놓고 싶으실 때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죽어가는 영혼들을 더 사랑하십시오, 위를 올려다보면 힘이 없고 약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애써 용기를 내어보아도 우리의 말이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 아래를 보시면 다릅니다. 지금 주님의 눈이 머물러 있는 그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리면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병들고, 넘어지고, 가난하고, 소외되어 외로운 자들을 사랑하십시오. 두세 명의 약한 교회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 사랑하십시오.
혹시 살며시 목회를 내려놓고 양심에 부딪힘에 남몰래 눈물을 지으시고 계신다면 기다림의 자리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주님이 쓰시려고 목회의 현장으로 지금 오고 계실지 모릅니다. 왔다가 없으면 주님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아무런 대가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낮은 곳을 찾아가고, 외로운 자를 찾아가 죽기까지 당신의 자리를 지키셨던 주님처럼, 죽기까지 일하시는 주님처럼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목회자에게 과거는 없습니다. 지난날에 할 만큼 했다, 지난날의 상처가 너무 크다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영의 것을 추구하고, 영의 것을 소망하는데 영의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무엇을 했다는 것이고, 주님의 것을 소망했다면서 세상 것으로 상처는 무슨 상처입니까? 내 것을 추구하고, 내가 움켜쥐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상처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목회를 할 수 있음에,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많은 선배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무지한 주님의 성도들을 돌보시다가 내일 먹을 양식이 없어 굶기를 먹는 것보다 더하고, 옷이 없어 단 벌로 사계절을 다 입으시느라 동상에 시달리고, 무좀이 시달리면서도, 교인들이 헌금이 없어 늘 걸어 다니느라 세미나 한 번 못 가셨어도, 끝까지 본분을 다하셨던 분들은 단 한 분도 쓰임을 받지 못한 분들이 없고, 중도에 세상길로 나간 분들치고, 후회하시지 않는 분이 없었습니다. 목회를 떠난 목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텅빈 가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 길만이 생명이요, 소망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아름다운 노목사가 되십시오, 주님이 잘했다고 하시면서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그 자리까지, 그 자리가 숨이 끓어지는 자리요, 죽음의 자리요,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눈물의 자리일지라도 내 본분, 내 자리 지키는 목사가 가장 아름다운 목사입니다. 석양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날 때 그래 너 참 멋진 목사였어!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맞으실 것입니다.
끝으로, 저 역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답답하고 막막한 개척교회 목사입니다. 그저 씨 부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른 비, 늦은 비 내리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사람입니다. 개척 멤버가 10여 명인데 전도에 함께 해주시겠다는 성도도 없고, 또 몇몇 분에게 교회가 어려우니 여건이 되면 수고하시고, 애쓴 대가를 나보다 먼저 배려하고 나보다 급여도 먼저 책정하겠다고 우선 기름 값 정도로 섬겨드리겠노라고 청도 해보고, 전개연에 광고도 해보았는데 글을 보시고 딱 한 분의 여목사님이 오셨다가 가셨을 뿐이고, 가신 후에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정새벽기도 재단을 두 달을 쌓고, 삼월부터는 집사람하고 둘이 길거리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최소 주5일은 나가서 만나고, 찾아가고, 니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하나가 죽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주시고 행할 만한 끈기도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만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 중에 목회자를 잘 훈련시키라는 사명을 직접 주셨기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유달리도 싫어하는 제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낮은 마음, 섬김의 마음으로 몇 번의 글을 올린 것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고 작은 글들에 부딪힘이 있으셨다면 다시 한 번 양해와 관용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밝은빛교회 유 지명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