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15. 아라한/벽지불과 부처님의 차이점, 경지의 다름, 깨달음의 차이
불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 중에 하나가,
아라한/벽지불과 부처님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가......바로 이것 입니다.
또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들 역시나,
과연 부처라는 분이 과연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보통 범부 중생들의 수준으로는 아라한이 어떤 수준인지 꿈에서조차 알 수 없고,
그 아라한조차도 부처님의 수준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라한의 성취는 단 한 생에도 가능하지만,
부처님의 되려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무량한 세월이 걸립니다.
이러니 차이가 없을 수도 없고, 또 그 차이가 무지막지하다는 것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대지도론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문] 아라한이나 벽지불들도 음욕/성냄/어리석음을 깨뜨리는데 부처님과 무엇이 다른가?
[답]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비록 3독(毒)을 깨뜨렸으나 그 기분(氣分)은 다하지 못했으니, 비유하건대 향 그릇에서 향을 이미 비웠으나 향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또한 풀/나무/섶을 불로 태워 연기가 났으나 숯과 재는 다하지 않은 것과 같나니,
불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3독이 영원히 다하여서 남음이 없나니, 비유하건대 겁(劫)이 다하여 불이 수미산을 몽땅 태우면 모두 타버려 연기도 숯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사리불은 성내는 습기가 남았고,
난타(難陀)는 음욕의 습기가 남았고,
필릉가바차(必陵伽婆磋)는 교만한 습기가 남았으니,
비유하건대 사람이 오라에서 풀려나면 걷기는 하되 매우 불편한 것과 같다.
- 대지도론/용수보살/구마라집 한역/김성구 번역/동국역경원
용수보살께서는 아라한/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이 비록 3독(毒)을 깨뜨렸으나 그 기분(氣分)은 다하지 못했으니, 비유하건대 향 그릇에서 향을 이미 비웠으나 향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아라한/벽지불(辟支佛)은 탐진치 삼독 번뇌는 깨트렸으나그 기분을 다하지 못했다라는 것은 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벽지불(辟支佛) 산스크리트어 pratyeka-buddha 팔리어 pacceka-buddha의 음사. 홀로 깨달은 자라는 뜻. 독각(獨覺)·연각(緣覺)이라 번역. 스승 없이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자.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깨달은 자. 홀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주시하여 깨달은 자. 홀로 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네이버 지식백과] 벽지불 [辟支佛]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곽철환)
습기란 습관을 말합니다. 번뇌의 향기....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이 있는데, 번뇌장(煩惱障)은 깨뜨렸지만, 소지장(所知障)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소지장(所知障)이란 앎을 방해하는 장애를 말하지요.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걸 아시는 일체지자 입니다.
왜냐면 앎을 방해하는 소지장(所知障) 즉 번뇌의 습기 역시 모두 없애셨기 때문입니다.
아라한/벽지불에게는 모든 걸 다 아는 일체지가 결코 없습니다.
일체지는 오로지 부처님께만 있는 것이니까요.
또한 풀/나무/섶을 불로 태워 연기가 났으나 숯과 재는 다하지 않은 것과 같나니,
불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3독이 영원히 다하여서 남음이 없나니,
비유하건대 겁(劫)이 다하여 불이 수미산을 몽땅 태우면
모두 타버려 연기도 숯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위 내용은 참 중요합니다.
아라한/벽지불과 부처님과의 깨달음의 차이에 관한 내용입니다.
또 만약 보살이 공덕자량(功德資糧)과 지혜자량(智慧資糧)이 구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불을 시도한다면,성불은 결코 불가능하고 2승, 즉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되고 맙니다.
위의 말씀처럼 깨달음의 불이 완전하지 타오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공덕자량(功德資糧)과 지혜자량(智慧資糧)이 충족/구족된 후에야 성불을 시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그런 구족되어야 할 사항들 역시 모두 다 알아야 할 사항입니다. 꽤 많지요.
사리불은 성내는 습기(習氣)가 남았고, 난타(難陀)는 음욕의 습기(習氣)가 남았고,
필릉가바차(必陵伽婆磋)는 교만한 습기(習氣)가 남았으니, 비유하건대 사람이 오라에서 풀려나면 걷기는 하되 매우 불편한 것과 같다.
아라한들의 번뇌의 향기,
즉 습기(習氣), 습관의 힘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리불 존자의 화내는 습기(習氣)는 다음 편에 나올 것이고,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였는데, 신혼 때 엉겁결에 출가를 한 분이시지요.
그 난다 존자는 성욕이 강한 사람이였던지라,
부처님께서는 천상계의 초미녀를 보여주고 그 미녀를 얻으려면 수행해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열심히 수행해서 결국 아라한이 됩니다만,
아라한이 되고 나서도 그 습관의 힘 때문에 아라한이 된 후에도
이쁜 여자만 나타나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게 습기(習氣)죠.
필릉가바차 존자 얘기는 불경 중에서 가장 웃기고 재밌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아함경에서 이 내용을 볼 때 배꼽 빠졌던 생각이 나네요.
필릉가바차 존자가 어느 강을 지날 때마다 그 강의 여신에게
"이 계집종아, 어서 내가 지나갈 수 있게 강물을 막아라."
그럼 어쩔 수 없이 그 강의 여신은 하루 두 번 강물을 딱 쪼개서 (모세의 기적입니다)
필릉가바차 존자가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만들었는데...
매번 하인을 대하듯이 명령해서, 그 여신은 화가 나서 부처님께 꼬아 바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 모인 상태에서 필릉가바차에게 그 여신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역시나 또 하인 대하듯이 그런 말투로 사과를 해서
온 청중이 떠나갈듯이 크게 웃었다는 내용입니다.
어찌 사과를 하면서도 저렇게 하대하듯이 하냐고 말이죠.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필릉가바차는 이미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기에,
너에게 삿된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수많은 전생이 아주 높은 신분이였기에
그런 거만함이 아주 지독한 습관이 돼서
아라한이 되고서도 역시 그 습기(習氣)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게 아라한/벽지불과 부처님의 큰 차이지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통력이나 지혜의 차이 역시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불을 하기 전의 10지 보살들도 역시,
부처님의 경지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보면 딱 맞습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이런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일부러 안 보이셨습니다.
왜냐면 이런 엄청난 모습을 중생들이 보면,
도닦을 마음을 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중생이 어찌 저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겠냐면서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지 않나 싶습니다만,
그걸 보고 부처님의 수준을 평가절하 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지요.
[출처] 대지도론 15. 아라한/벽지불과 부처님의 차이점, 경지의 다름, 깨달음의 차이|작성자 마하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