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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사도행전 7장 44-50절에 “증거의 장막이 우리의 조상들에 있었으니, 그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께서 그것을 만들게 명령하신 것에 따라서며. 우리의 조상들이 예수와 함께 이방인들의 소유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라. 다윗이 야곱의 집에 그 하나님께 거주소를 발견하기 위해 요구하였으나. 솔로몬이 그에게 집을 세웠으나(built him a house).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 안에 거주하지 아니하시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나에게 보좌나 땅은 나의 발의 발판이므로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이나 나의 휴식의 어떤 장소를 나에게 세울 것이냐? 나의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고 하시노라’고 말하는 것에 따라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44절부터 50절까지는 ‘성막과 성전’에 대한 것입니다.1)
그 증거의 장막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행 7:44).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들게 명령하신 것에 따라서입니다.
“장막”이라는 말은 “천막”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차에다 싣고 가서 텐트를 치는데, “텐트”는 영어고 한국어로는 “장막”이나 “천막”이라고 합니다.
“증거의 장막”이라고 하는 이유는 “증거의 궤”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의 궤”라고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십계명”의 돌판 두 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 2개에 기록하신 10개의 계명들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십계명이 들어 있는 궤, 즉 상자가 “증거의 궤”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한자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트교가 종교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절대적으로 승복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 점에 있어서 계속 어긋나게 빗나간 것입니다.2)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금송아지를 섬겼고,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크리스트 안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3)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원하지 않으셨고 장막을 원하신 분이십니다.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명령하셨지 성전을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聖)”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붙는 말입니다. “성막”도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장막이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부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하늘에 있는 참 성막의 “모형”으로 만든 것입니다.
희생 제물이 없이는 결코 성별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동물들이 피는 예수님의 피를 미리 표현한 것입니다.
“성막”의 특징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황야에서 40년 동안 살던 때에,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때에 성막도 같이 이동하였습니다.
그 조상들이 이방인들의 소유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 증거의 장막인데, 그 조상들은 증거의 장막을 예수와 함께 가지고 들어갔습니다(행 7:45).
“이방인들의 소유”는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뜻하는 말인데 그들은 증거의 장막을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그 땅에 성막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 땅에는 이방인들,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 그들이 성막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그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성막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그리스어로 “예수”입니다.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데리고 들어가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끌고 들어가실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에 항상 그들에게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고 2번째 왕의 이름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주변의 나라들과 전쟁하고 웬만큼 평정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거주소를 발견하기 위해 요구합니다(행 7:46). 다윗은 하나님이 거주할 성전을 짓기 위해 요구한 것입니다.
다윗의 왕의 집, 즉 왕궁에 살고 있을 때에 자격지심이 생겼습니다. 다윗은 자신은 왕궁에 편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증거의 궤는 천막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큰 집을 “전(殿)”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인 “성(聖)”자를 붙여서 “성전(聖殿)”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소원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서 결실하였습니다(행 7:47).5)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에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이 성전으로 바뀌게 되고 천막이 집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건축할 것인데, 다윗은 자신의 자손을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건물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언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참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성전의 의미, 성막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었을 때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 건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지 않으면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계셨기 때문에 그것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만 이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70년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이 제2성전이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었고, 그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두 번째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제2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할 때에 너무나도 초라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제2성전을 증축합니다. 그 성전은 46년째 증축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3일 만에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헤롯 가문이 증축하고 있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한 죄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스테판 집사도 이렇게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과 죄로 잡혀서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든 건물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행 7:48). 그는 건물 안에 계시지 아니하시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거부했고 참된 제물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1948년에 가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땅을 사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가짜 유대인들은 제3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 장소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소원을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여기 “손으로 만들어진(made with hands)”이라는 말은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이교 신전을 가리킵니다(행 17:24, 7:41).6) 이 “손으로 만들어진”이라는 단어는 우상과 이방인의 우상 성전에게 사용된 말입니다(레 26:1, 사 46:6). 하늘조차 하나님을 위해서는 불충분하지만 하나님의 거소는 하늘이며 이것이 스데반의 진술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7)
어떤 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여 말하였습니다(막 14:57). 그 거짓 증언의 내용이 복음서들에 기록되었습니다.
“‘내가 손으로 만들어진 이 성소를 헐고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른 것을 내가 3일간 세우겠노라’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우리가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막 14:58, 마 26:6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 증언과 비슷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8) “손으로 만들어진”이라는 말은 성전이 우상이 되었음을 뜻합니다.9)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성전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거짓 종교가 가진 특징은 항상 건물이 예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성전을 예배한 자들입니다.10)
“손으로 만들어진” 성전은 하나님의 항구적 처소가 아니었습니다.11)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성전은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12)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요시하였으나 성전이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주하지 아니하신다면 그 건물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겔 11:23).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거주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건물을 지어 놓고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 3천억을 들여서 건물을 짓고 그것을 “성전”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우상숭배자들의 “맘몬” 우상일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을 떠나서는 예배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13) 그들은 성전 건물을 예배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막과 건물 성전은 모형일 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부자라서 조그마한 모형 자동차를 몰고 놉니다. 하지만 그 모형 자동차가 필요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성장하여 운전면허증을 따고 진짜 자동차를 몰게 되면 더 이상 모형 자동차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참된 성전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성전이십니다. 참된 성전이 임하셨을 때에 모형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고 가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인류는 정신을 돌과 건물로 바꾸고 자기가 만든 것을 예배합니다.14) 예배당을 크게 짓고 그 건물을 은연중에 우상화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명분으로 고가(高價)의 악기를 사는데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사람이 듣기에 좋기 위한 것인지가 의문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을 수억 원이나 수십억 원으로 설치하여서 연주하여야만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는 찬양이 된다고 생각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사마리아로 가셨는데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긷기 위해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배할 때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므로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지 예배하는 자가 값비싼 악기를 연주하여 예배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값비싼 금송아지를 만들고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상숭배자들과 인본주의자들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고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원하므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고요. “사람들이 원하니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분이셔서 하늘이 그의 왕좌고 땅은 그의 발판이니, 사람이 하나님께 지을 집과 그 휴식 장소가 없습니다(사 66:1, 행 7:49). 하나님의 손이 모든 이것들을 만들었습니다(사 66:2, 행 7:50).
모세를 배척함으로써 그 예배가 신성모독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처럼,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그 예배는 신성모독의 성격을 가지었습니다.15)
열왕기상 8장 27절에 “하나님께서 땅에 거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까, 하늘들의 하늘도 당신을 포함하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3장 15절에 “성별(聖別)과 아름다움의 높은 처소에서 보소서, 당신의 열정(your zeal)과 당신의 권력들(might)이 어디에, 당신의 동정심의 풍부가 자신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참된 성전은 하늘에만 존재한다고 강조합니다.16)
성막이 완성된 때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것처럼(출 40:34-35), 하나님의 집이 완성되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였습니다(왕상 8:11).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높은 하늘을 이 땅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솔로몬은 “높은 처소의 집”, 하늘의 집을 지었다고 말합니다(왕상 8:13). “높은 처소”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높은 하늘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성소와 아름다움의 높은 처소에서 보아 주실 것을 구합니다. 지성소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늘 성전과 하나님의 왕좌를 뜻합니다. 스테판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이사야 66장 1절로 대답하였습니다.17)
1. 우상숭배는 그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1-53절에 “마음들과 귀들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너희의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께 대항하노라. 그 예언자들에서 누구를 너희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그들이 그 올바른 자의 도래에 관하여 예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그 올바른 자는 지금 너희가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이 되는 바라. 너희가 천사들의 명령들 안으로 율법을 받았고 준수하지 않았노라”고 스테판 집사님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이 굳고 고집 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예배하는 금송아지를 닮아서 목이 굳고 완고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님께 대항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우상숭배자들은 목이 단단해져서 성령님의 음성에 저항합니다(행 7:51).
유대인은 할례를 받고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데, 산헤드린은 명목상 유대인일 뿐이고 실제상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불신자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에 은혜를 받으나 다른 사람들은 감동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반응이 좌우됩니다.18)
육에 속한 사람은 머리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복음을 깨닫는 본질적인 기능과 능력 자체가 이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에 귀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까닭에 깨달을 수 없습니다.19)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의 일을 깨닫는 능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을 좋아했고 참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20)
예레미야 6장 14절에 “하찮음을 받은 것에 나의 백성의 파괴를 고치고 ‘평화, 평화’를 말하기에 그러하고 평화가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인기 있는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지를 전하여 신기 있는 설교를 하여야 합니다. 잘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잘 알았지만 그 메시지는 알지 못하였는데,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21)
인류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지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의지의 영역에도 문제가 생겨서 목이 뻣뻣해지고 고집 세게 되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들을 능력뿐만 아니라 들을 마음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처음부터 적대적인 태도로 저항할 작정으로 접근합니다.22)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반응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성적으로 언제나 진리에 대항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반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23)
그들은 성령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믿으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반발심은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고의로 왜곡하게 만듭니다. 아담의 죄 및 타락이 인류의 마음에 끼친 영향은 무섭고 놀랍습니다.24)
불신자들이 진리를 대하면 짜증이 생기면서 불쾌감이 일어나게 되고, 미운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일정한 형태나 모양의 폭력으로 귀결됩니다. 그들은 크게 소리치며 귀를 막고 듣고 싶어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25) 사람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2. 그들은 스테판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끝에 “그들이 그 치아를 그에 대해 이를 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마음들에 성났고 그에 대해 치아들을 이를 갈았습니다.
여기 “성나다”(디아프리오)는 “조각조각 톱질하다”를 뜻하며, 스테판의 변론을 듣던 자들은 성내고 이를 가는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만들어진”이 “우상”의 관용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스테판이 성전을 우상이라고 하자 그에게 이를 갑니다(행 7:54).
큰 음성에 소리 지른 그들이 그들의 귀를 억압하였고 돌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바깥으로 쫓아낸 그들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행 7:58).
1) F. F. Bruce, 『NICNT 사도행전』, 김정복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194.
2) D. M.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설교 5, 정상윤 옮김 (복 있는 사람, 2007), 396.
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97.
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99.
5) G. K. Beale, 『성전 신학』, 김성일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91.
6) Beale, 『성전 신학』, 301.
7)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200.
8) Evans, 『마가복음 8:27-16:20』, WBC 성경주석, 689.
9) Evans, 『마가복음 8:27-16:20』, WBC 성경주석, 690.
10)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91-393.
11) Beale, 『성전 신학』, 184.
12) Beale, 『성전 신학』, 297.
1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91.
1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91.
15) Beale, 『성전 신학』, 292.
16) Beale, 『성전 신학』, 292.
17) Beale, 『성전 신학』, 292-293.
18)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10-413.
19)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14.
20)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15-416.
2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17.
2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19.
2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20.
2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21-422.
25)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