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뛰어난 우암의 문인 '신응태' 사서제요-천명태주도 저술
아주신씨(鵝州申氏)
호장 신영미(申英美)의 현손(손자의 손자)이자 판도판서 신원유의 아들인 신우(申祐)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효자로 유명하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장령과 전라도안렴사를 역임했다. 그는 효행이 뛰어나 아버지가 죽자 여막에서 3년 간 조석으로 호곡해 무덤 앞에 쌍죽이 돋아났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불렀으며 효행을 돌에 새기고 ‘삼강행실록’에 기록했다. 신우는 이성계와 일찍부터 친구간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자 의성군 다밀면 망경산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검암서원과 상주의 속수서원에 제향됐다.
신우의 7세손 신원록(1516-1576)도 조선의 효자로 뛰어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팔공산 수백리 길을 찾아 약초를 구해 밤잠을 안자며 8년 간이나 간호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성묘(省墓)하는 등의 효행으로 조정에 의해 효자문이 세워졌다.
조식에게서 학문을 닦다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자 문하생이 됐다. 동료들과 함께 장천에 서원을 세우고 김안국을 제향, 장천서원이란 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벼슬은 교수를 지냈다. 호조참의에 추증, 의성의 장대서원에 제향됐다.
신원록의 손자인 신달도(1576-1631)는 조선의 문신이다. 조목과 장현광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정계가 혼란하므로 벼슬을 단념했다. 1623년(인조1년) 정시문과에 장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척화를 주장, 윤황과 함께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력 배격했다. 이듬해 지평이 됐으며 도승지에 추증됐다.
신열도(1589-1647)는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에 호종했다. 이듬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울진현감, 1648년에 장령을 거쳐 능주목사가 됐다.
군기시정 신광귀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신희신은 통훈대부로 단양군수를, 차남 신희충은 하동현감을 지내고, 막내 신희경은 어모장군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삼강록에 행실이 기록된 신지익의 손자 신응태는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사서제요’와 ‘천명태주도’등의 저서를 남겼다.
관향(貫鄕)이 아주현(지금의 경남 거제군)이나 세거 기록은 없다. 3세에서 6세까지 관직으로 보아 개경에서 거주하다 이태조가 등극하자 5세 신우가 지금의 경북 의성군 단밀면 망계산하로 세거지를 옮긴 듯하다.
1930년대 이후 아주신씨는 의성군 일원과 충북 청원군, 중원군, 경북 영천군, 영일군 등지에 세거하고 잇으며 1980년대에는 충북 괴산, 경북 안동 등지에도 세거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신달도(申達道, 1576 丙子生) : 문과(文科) 인조1년(162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홍망(申弘望,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인조17년(1639) 별시 병과(丙科), 신유(申瑠, 1606 丙午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병과(丙科), 신면주(申冕周, 1768 戊子生) : 문과(文科) 순조5년(1805) 별시 병과(丙科), 신면횡(申冕鐄, 1794 甲寅生) : 문과(文科) 헌종3년(1837) 별시 을과(乙科), 신정모(申正模,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숙종45년(1719) 증광시 병과(丙科), 신지제(申之悌,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선조22년(1589) 증광시 갑과(甲科), 신열도(申悅道,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증광시 을과(乙科), 신규(申圭, 1611 辛亥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식년시 을과(乙科), 신면직(申冕直, 1795 乙卯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34년(1834) 식년시 이등(二等) 등 모두 40명이 있다. 문과 9명, 사마시 31명이다.
현대 인물은 신석호(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장), 신친구(국방부차관), 신진욱(국회의원), 신진수(국회의원), 신달섭(경북도의원), 신기훈(대전시장), 신두순(단국대교수), 신만련(의학박사, 우석대교수), 신영목(대한잠사협회장), 신윤식(육군준장), 신재욱(서울교대교수), 신태성(의학박사), 신희진(전매청 감사실장), 신재걸(교장), 신형진(교장), 신연식(예비역준장), 신대진(예비역소장), 신영진(서기관), 신석정(인천검역소장), 신원집(전북대교수, 농학박사), 신원욱(목포공대교수), 신용정(초등교장), 신재형(코오롱뉴욕지사장), 신수길(세종대교수), 신봉길(주일대사관사무관), 신재호(대전백화점회장), 신원화(한의원장), 신기효(토건회사대표), 신기완(군청건설과장), 신윤식(부군수), 신태당(충북보건연구소장), 신석련(예비역준장), 신건식(충남농촌진흥원장), 신영(대전시청 주택과장), 신진수(대전시청 민방위과장), 신기악(제주도부지사), 신재영(마포구청장), 신병철(한국과학기술대교수), 신경림(시인), 신상일(방송평론가)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19世 교(敎), 20世 원, 21世 한(漢), 22世 상(相), 23世 섭(燮)환(煥), 24世 재(載)이다. 주요파는 ▲읍파(부령공파) ▲귀파(봉주공파) 등이다.
본관 아주(鵝州)는 경상남도 거제군(巨濟郡)에 속했던 지명으로 본래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일부였던 독로국(瀆盧國)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거적현(居績縣 또는 巨績)이었으며 청주(菁州: 晉州)에 속했다.
677년(신라 문무왕 17) 거제에 처음으로 상군(裳軍)을 뒀는데 삼속현(三屬縣)의거로현(居老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거제군(巨濟郡) 아주현(鵝洲縣)으로 개칭하고 성을 쌓았으며 감무(監務)가 다스렸으나 1271년(고려 원종 12) 왜구의 침범으로 거창현(居昌縣)의 속현인 가조현(加祚縣)으로 현민 모두 피난갔다가 1422년(조선 세종 4) 거제현(巨濟縣)의 옛터로 돌아왔으며, 1432년(세종 14) 거제현을 사등성에서 고현성으로 옮기고 관하에 7면을 뒀는데 이운면(二運面)이라 개칭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했다. 1769년(영조 45) 방리(坊里) 개편으로 아주방(鵝洲坊)이라 했는데 1889년(고종 26) 상아(上鵝)와 하아리(下鵝里)로 나눴으나 1915년 6월1일 아주리(鵝洲里)로 됐으며 1942년 5월1일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장기(場基), 탑곡(塔谷), 내곡(內谷), 용소(龍沼)의 4구(區)를 1969년 5월15일 전래의 고유지명으로 바꿨는데 1989년 1월1일 장승포시(長承浦市) 설치에 따라 아양리(鵝陽里)와 아주리(鵝洲里) 지역을 아주동(鵝州洞)으로 됐다.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읍 지역이다. 아주(鵝洲)는 용소(龍沼)의 늪에 거위가 서식해 이름했다.
집성촌은 경북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 경북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하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도경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아주신씨는 1985년에는 총 6,338가구 26,297명, 2000년에는 총 8,807가구 27,84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4,385명, 부산 1,916명, 대구 6,115명, 인천 501명, 경기 1,547명, 강원 591명, 충북 1,906명, 충남 797명, 전북 304명, 전남 318명, 경북 6,908명, 경남 889명, 제주 119명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경북과 대구 지역에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4,080명, 부산 1,839명, 대구 7,414명, 인천 786명, 광주 38명, 대전 666명, 울산 653명, 경기 3,263명, 강원 327명, 충북 1,996명, 충남 299명, 전북 87명, 전남 67명, 경북 5,587명, 경남 693명, 제주 48명이다. 대구, 경북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