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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20세>
1881년(光緖7) (1세)
9월25일(음력 8월 3일)浙江省 紹興縣 城內 東昌坊口 新台門 周家에서 출생. 父 周鳳儀, 母 魯瑞의 長男. 幼名은 豫山 本名은 樟壽 자는 豫才 1898년 南京水師學堂에 入學할 때 이름을 樹人이라 함. 집안은 기울어가는 士大夫家. 모친은 獨學으로 讀書能力을 깨친 이로 노신에게 일생토록 영향을 끼침.
1885년(光緖11) (5세)
1월에 동생 周作人 출생
1887년(光緖13) (7세)
家塾에 들어가 叔祖 玉田老人에게 鑑略을 배움.
1888년(光緖14) (8세)
여동생 瑞 태어나 10월에 죽음.
1889년(光緖15) (9세)
동생 周建人 출생(生物學者)
1892년(光緖18) (12세)
2월에 三味書屋 書塾에 들어가 壽鏡吾 先生에게 배움. 이 무렵 《맹자》등의 經書와 '野史', '筆記'등을 읽었고 民間木刻, 繪 를 좋아했고 그림을 수집하기도 함.
1893년(光緖19) (13세)
2월에 증조모 사망하여 淸朝관리로 北京에 있던 祖父 介孚公이 3월에 귀향했는데 수뢰 혐의로 투옥되고 아버지 伯宣公도 중병에 걸려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함. 이 때문에 이후 수년 동안 魯迅은 전당포와 약국을 다님. 겨울에 城밖의 외가에 맡겨짐. 이 때에 농촌 사회에 접하게 되어 당시의 생활은 직접적으로 그의 훗날의 창작에 영향을 주게 된다. 동생 椿壽 출생.
1894년(光緖20) (14세)
봄에 집에 돌아와 다시 三味書屋에 나감.
淸日戰爭(∼1895) 발발.
1896년(光緖22) (16세)
10월에 父親사망(37歲). 계속 전답을 팔아 집안은 더욱 공궁해짐. 父親은 여러차례 鄕試를 쳤으나 불합격. 이 해부터 日記를 쓰기 시작하여 대략 1902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 중지. 이 때의 일기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음.
이 해 時務報(∼1898), 蘇報(∼1903) 창간됨.
1898년(光緖24) (18세)
5월에 南京에 가 江南水師學堂 機關科에 입학. 11월에 퇴학. 12월 고향에서 縣試를 침. 동생 椿壽 급성폐렴으로 사망. 이 해에 〈 劍生雜記〉, 〈蒔花雜記〉등 단문을 지음.
(6월에 康有爲 등 維新派에 의한 光緖帝의 戊戌變法이 단행되었으나 9월에 西太后와 袁世凱의 戊戌政變으로 붕괴). (이 무렵 嚴復의 譯으로 헉슬리의 天演論(Ethics and Evolution)이 출판됨)
1899년(光緖25) (19세)
1월에 江南陸師學堂 부설 鑛務鐵路學堂에서 採鑛을 공부함. 이 學堂은 洋務派 관료의 富國强兵 정책으로 생긴 교육기관으로 여기서 漢文, 外國語, 物理외에 생산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地質, 鑛物등의 자연과학을 배움. 동생 周作人의 회상에 의하면 魯迅은 이 때 嚴復의 譯書로 天演論을 읽었고 林 가 번역한 듀마의 〈巴黎茶花女遺事〉(〈椿姬〉)를 읽었다고 함. 이 때 '과학'과 '民主'에 접하게 되었는데 다아윈의 進化論은 그의 前期의 反帝 半封建의 주요한 思想的 武器가 된다.
1900년(光緖26) (20세)
義和團 事件 발발. 이 해 〈別諸弟〉〈庚子送 卽事〉〈蓮蓬人〉등 舊體詩를 지음.
<21세 ∼ 40세>
1901년(光緖27) (21세)
9월에 周作人 江南水師學堂에 입학 〈惜花四律〉등 舊體詩와 〈祭書神文〉지음.
1902년(光緖28) (22세)
1월에 鑛務鐵路學堂 졸업. 3월 江南督練公所에서 파견되어 일본에 유학. 4월에 東京 弘文學院(中國人 留學生 예비학교)普通速成課에 입학. 許壽裳과 알게됨. 〈自願小象〉한 首 지음. 이때부터 국민성과 인간성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醫學이 일본에 維新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고 생각, 의학을 공부할 생각을 가짐. 梁啓超가 東京에서 〈新小說〉(∼1904)을 창간하여 이 창간호에 쓴 〈論小說與群治之關係〉에 魯迅은 영향을 받았다. 비록 梁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입었으나 章炳麟(中國革命同盟會의 지도자의 한사람. 1903년 蘇報 사건으로 투옥, 1906년 6월 출옥함)의 영향으로 梁啓超의 政治運動에 비판적인 눈을 갖고 있었음.
1903년 (光緖29) (23세)
浙江系 留日學生들이 낸 「浙江潮」8호(1903.10)에 〈中國地質略論〉을 寄稿. 天演論(進化論)의 입장에서, 당시 중국의 위기가 심화되면 결국 중국은 장차 자연 도태되어버릴 것이라고 하며 중국의 살길은 富國强兵, 殖産興業이라고 함. 그 외 〈斯巴達之魂〉(스파르타의 혼), 〈라디움論〉, 〈設金日〉등을 기고했고 줄 베르느의 과학소설 〈月界旅行〉, 〈地底旅行〉을 日譯에서 重譯하여 章回體로 실음. 또한 顧琅合과 함께 「中國鑛産志」를 編하기 시작.
1904년(光緖30) (24세)
4월에 弘文學院 졸업. 당시 東京에 있던 많은 中國人 유학생들은 文明開化, 維新, 自由를 떠들면서도 이것들을 자신의 문제로서 主體化, 內面化하지 못했는데, 이런 사이비 維新論者들 속에서 고독을 느낀 魯迅은 의학을 배워 중국민족을 혁신하리라 하고 8월 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 여기서 藤野先生을 알게됨. 露日戰爭(∼1905)발발, 7월에 조부사망. 이 해에 〈北極探險記〉, 내용 미상의 〈世界史〉를 번역했으나 출판되지 못하고 失傳됨.
1905(光緖31) (25세)
孫文 중심의 中國革命同盟會 결성.
1906(光緖32) (26세)
露日戰爭 中, 강의시간에 미생물을 幻燈을 사용하여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 있던 時事畵面중 중국인이 러시아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장면이 있었다. 魯迅은 이를 박수와 갈채로 환호하는 日本人 동급생들과 함께 보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평소 魯迅을 친절히 대했던 藤野先生의 해부학강의에서 魯迅은 60점 이상 받았다. 이 때 일본인 동급생들은 '중국은 弱國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당연히 저능아이다. 저능아인 중국인이 60점이상을 받았다는 것은 제실력이 아니다'고 하며 魯迅의 노트를 검사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여 魯迅은 仙臺醫專을 3月에 중퇴해 버리고만다. "의학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릇 어리석고 나약한 국민에게는...... 첫째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다"고 하며 文藝가 바로 사람들의 정신을 치료하고 변혁시키는 利器라고 여겨 의학을 버리고 東京으로 돌아가 文藝에 종사한다. 즉 중국인의 국민성을 치료하기 위하여 地質學으로부터 의학으로 전환했으나, 魯迅은 의사인 자신이 실은 역시 환자인 것을 고통스럽게 발견한 것이다. 5月에 《中國鑛産志》《中國鑛産全圖》출판, 7월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뜻에 따라 朱安과 구식 결혼함. 그러나 곧 동생 周作人을 데리고 東京으로 되돌아감.
1907년(光緖33) (27세)
周作人, 許壽裳과 文藝誌 〈新生〉(Vita Nuova)의 발간을 계획했으나 流産 12월 〈河南〉창간호에 〈人間之歷史〉발표. 이 당시 러시아, 폴란드 등 東歐 弱小民族의 문학에 傾倒. 가장 애독하던 작가는 고골리, 폴란드의 셴케비치, 日本의 夏目漱石, 森鷗外 등.
1908년(光緖34) (28세)
光復會에 가담. 周作人, 許壽裳 등과 함께 마리아 콘티夫人에게 러시아語를 배우는 한편 民報社에 가서 章炳麟에게 〈說文解字注〉, 〈爾雅義疏〉등 文字學 강의를 받음. 또 許壽裳과 함께 獨逸語學校에도 다님. 계속 〈河南〉誌에 〈麻羅詩力說〉(악마파 시인론 : 2∼3號), 〈科學史敎篇(5號)〉, 〈文化偏至論〉(7號), 〈破惡聲論〉(8號)등을 발표. 이 무렵 章炳麟으로부터의 人格的 感化는 魯迅의 思想形成에 큰 계기가 되었고, 魯迅은 그 후 章炳麟을 敬愛하여 평생 師弟의 友宜를 지킴.
1909년(宣統1) (29세)
3월 러시아 및 東歐 被壓迫民族의 短篇小說譯集인 《域外小說集》 제 1集을 周作人과 함께 編譯하여 東京에서 출판. 7월 제 2集 출판. 8月 歸國. 杭州의 浙江兩級師範學堂에서 生理學과 化學을 담당함.
1910년(宣統2) (30세)
여름에 師範學堂을 그만두고 귀향. 9월에 紹興府 中學堂 監學 겸 生理學 先生을 함. 여가에 《類書》중에서 散見되는 唐朝 이전의 古小說을 輯錄함. (뒤에《古小說鉤 》이라 함)
1911(宣統3) (31세)
여름에 紹興中學堂 사직. 10월 10일 武昌起義(辛亥革命)로 淸朝붕괴. 紹興 광복 후 山會初級師範學堂 校長에 선출됨. 이 때 杭州의 광복이 紹興에 전해지자 민중대회가 열려지고 魯迅은 의장에 선출됨. 魯迅은 人民武裝을 주장하고 "武裝演說隊"를 조직하고 혁명을 선전함. 12월에 단편소설 〈懷舊〉를 習作(뒤에 周 이란 필명으로 1913년 4월 〈小說月報〉4권1호에 발표). 당시 革命이 地主나 豪族의 권력을 전혀 동요시키지 못함을 보고 魯迅은 실망함.
1912년(民國1) (32세)
1月 中華民國 臨時政府가 南京에 수립됨. 敎育總長이 됨 祭元培의 초청으로 南京에 가 敎育部 部員이 됨. 여가에 龍蟠里 도서관에 가서 唐·宋 단편소설 자료를 모음.(뒤에 계속 수집하여 校勘한 후 《唐宋傳奇集》이라 함). 5月 교육부가 北京으로 옮김에 따라 北京으로 移住. 社會敎育司 第一科長이 됨. 宣武門 밖 南半載胡同 紹興會館內의 藤花館에 기거함. 5月 5日부터 다시 日記를 쓰기 시작함. 6월 21일 교육부 夏期강연회에서 《美術略論》講述시작. 6月 28日, 7月 10日, 17日 계속 강연함. 7月 10日 각별했던 친구 范愛農 사망. 7月 22日 〈哭范愛農〉3首作. 8月 僉事에 임명됨. 여가에 《謝承後漢書》를 수집 校勘함. 이 때에 중국의 장래에 희망을 가짐. 袁世凱가 臨時大總統에 취임하고 孫文은 國民黨 조직.
1913년(民國2) (33세)
2月 교육부 讀音統一會會員으로 초청됨. 3月 27日 《謝承後後書》완성. 10월 明朝 吳寬叢書堂 本의 《稽康集》을 校勘. 日本 上野陽一의 論文 〈兒童之好奇心〉번역. 反袁世凱軍 蜂起(제2 혁명)실패. 孫文과 黃興 日本으로 망명.
1914년(民國3) (34세)
이 해부터 여가에 佛學經典 연구 시작. 11月 日本 上野陽一의 論文 〈兒童觀念界之硏究〉번역. 1次大戰 발발. 日本軍 山東에 出兵.
1915년(民國4) (35세)
1月에 〈百喩經〉飜刻 완성. 6月 編輯한 《會稽郡故書雜集》출판. 7月 明刻 善本을 바탕으로 《稽康集》교정. 이 해에 袁世凱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佛典·金石拓本·造象 및 墓誌拓本 등의 수집에 沈滯. 日本 '新中國 21個條'요구. 袁世凱, 帝制를 음모. 帝制案 통과.
1916년(民國5) (36세)
5月 藤花館에서 會館內의 補樹書屋으로 移居. 袁世凱 사망.
1917년(民國6) (37세)
4月 周作人을 北京으로 불러 옴. 7月 張勛이 復 運動(帝制復活)을 개시하자 분노하여 敎育部의 직을 사직. 얼마 후 다시 복직함. 孫文 廣東에 軍政府 조직. 南北 對立 격화. 각지에서 軍閥간에 爭鬪. 러시아 革命 발발. 이 때 〈新靑年〉에 胡適의 〈文學改良芻議〉와 陣獨秀의 〈文學革命論〉발표됨.
1918년(民國7) (38세)
1月 조직 개편된 〈新靑年〉편집위원회에 참가. 4月 〈狂人日記〉를 창작, 5月 〈新靑年〉제 4권 제5호에 발표함. 이 때 처음으로 魯迅이란 筆名을 사용. 이 소설은 中國社會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폭로. 5·4운동 思想革命과 文學革命의 첫 나팔 소리이자 中國 新文學의 첫 創作이 됨. 新詩 〈夢〉〈愛之神〉〈桃花〉를 唐侯라는 筆名으로 발표. 7月 雜文 〈我之節烈觀〉을 지어 8月 〈新靑年〉제 5권 제2호에 발표. 9월 〈新靑年〉제 5권 제 3호에 隨感錄 欄에 雜感 발표시작. 이 해 겨울 소설 〈孔乙己〉씀.
1919년(民國8) (39세)
4月 新靑年 제 6권 제 4호에 〈孔乙己〉발표. 4月 소설 〈藥〉을 쓰고 5月 新靑年 6권 5호에 발표. 8月 日本 武者小路實篤의 戱劇〈一個靑年的夢〉번역 연재. 10月 雜文 〈我們現在 樣做父親〉집필, 11月 新靑年 6권 6호에 발표. 11月 宣武門 밖 紹興會館에서 西直門內 公用庫 八道灣 十一號로 이사. 어머니를 北京으로 모셔옴. 5·4運動 일어나 전국에 파급.
1920년(民國9) (40세)
6月 小說 〈明天〉을 써 〈新潮〉 제 2권 1호에 발표 7月 〈一件小事〉를 써 北京 〈晨報副刊〉에 발표. 10月 〈頭髮的故事〉를 〈時事新報〉의 副刊 〈學燈〉에 발표. 또 〈風波〉를 新靑年 8권 1호에 발표 이 달 러시아 작가 아르찌바셰프 作 中篇小說 〈노동자 셰후이로프〉번역. 이 해 가을 학기 개학부터 北京大學과 北京高等師範學校 강사 겸임. 연말에 人生을 위한 예술을 슬로건으로 하는 사실주의 문학단체 文學硏究會결성. 후에 魯迅은 이를 적극 지원.
<41세 ∼ 사망>
1921년(民國10) (41세)
1월 소설 〈故鄕〉집필, 5月 新靑年 9卷 1號에 발표. 2月∼3월 稽康集 교정. 12月 4日부터 社會革命으로 나아가지 못한 辛亥革命의 欺瞞性을 지적한 〈阿Q正傳〉을 巴人이란 筆名으로 北京 〈晨報〉의 副刊 〈開心活〉난에 연재 시작. 뒤에 제 2장부터 〈新文藝〉난으로 옮겨 1922년 2월 2일까지 모두 9회에 걸쳐 연재함. 또 被壓迫民族의 文學을 文學硏究會 기관지가 된 「小說月報」에 번역 연재. 中國共産黨 성립. 孫文 廣東에 中華民國 정부를 수립. 예술을 위한 예술을 슬로건으로 하는 낭만주의 문학단체 創造社 결성.
1922년(民國11) (42세)
日本에서 추방당하여 來華한 러시아童話作家 에로솅코 초청, 함께 생활. 1月 에로솅코의 童話 9편을 번역하여 《愛羅先珂동화집》이라 하여 7月에 上海에서 출판. 2月《稽康集》교정. 5月 에로솅코作 童話劇 〈桃色的雲〉번역(1923.7.北京서 출판), 6月 小說 〈端午節〉(9월 「小說月報」13권 9호), 〈白光〉(7월 「東方雜志」19권 13호), 10月 〈兎和猫〉(10월 北京「晨報」副刊), 〈鴨的喜劇〉(12월 「婦女雜志」8권 12호), 〈社戱〉(12월「小說月報」13권 12호), 11월 〈不周山〉(뒤에〈補天〉으로 改題:12月「晨報」4周年 紀念增刊)등을 창작 발표. 12月 〈狂人日記〉부터 〈不周山〉까지 모두 15편의 창작소설을 모아 《 喊》이라 題하고 '自序'1편 씀.
1923년(民國12) (43세)
6월 周作人과 함께 번역한 《現代日本小說集》을 上海에서 출판. 8月 2日 동생 周作人과의 不和로 八道灣 11號에서 塔胡同 61號로 이사. 이 달 《 喊》을 北京 新潮社에서 인쇄, 富社의 文藝叢刊에 넣음. 《 喊》은 辛亥革命에서 5·4前後에 이르기 까지의 中國社會의 廣闊한 畵面을 反映, 帝國主義와 封建主義의 중압 하에 점차 파산되어 가는 낡은 농촌과 市井의 서로 다른 계급의 인물, 심리를 그려 내었으며, 또 出路가 막힌 지식인과 城市의 貧民의 形狀을 묘사함으로써 5·4時代의 철저히 비타협적인 反帝 反封建精神을 집중적으로 表現하고 있다고 評價받고 있다. 12月 《中國小說史略》上卷 제 1편에서 제 15편까지 인쇄, 北京 新潮社에서 발행. 이 해 北京師範大學·北京女子師範大學·世界語(에스페란토)專門學校 강사 겸임.
1924년(民國13) (44세)
2月 小說 〈祝福〉(3月「東方雜志」21권 6호), 〈在酒樓上〉(5月「小說月報」15권 5호) 3月 〈幸福的家庭〉(「婦女雜志」10권 3호), 〈肥 (비누)〉(「晨報」副刊 3월 27, 28)등을 발표. 5月 25日 塔胡同 61號에서 阜成門內 西三條胡同 21號로 이사. 6月《稽康集》교정하고 序言 1편 씀. 이 달 《中國小說史略》下卷(제 16편∼28편)인쇄, 완성. 7월 西北大學과 陜西省 敎育廳의 초청에 따라 7日부터 西安에 가서 강의. 8月 12日 北京에 돌아옴. 9月 散文集〈秋夜〉등을 지어 12月부터 〈語絲〉에 발표함. 10月 日本 廚川白村作 文藝論文集 《苦悶的象徵》번역. 11월 17일 〈語絲〉周刊 創刊, 동인이 됨. 제 1차 國共合作. 〈現代評論〉창간. 이즈음 5·4運動 退潮期에 苦悶彷徨하면서도 "學衡"派, "甲寅"派, "現代評論"派와 싸움.
1925년(民國14) (45세)
2月 小說〈長明燈〉씀. 3月 〈示衆〉(5月〈語絲〉22회)씀. 3月 11日부터 北京女子師範大學 學生인 許廣平과 서신왕래 시작(훗날《兩地書》라 하여 출판). 許廣平과의 만남은 魯迅의 個人史에서 일대 轉機가 됨. 4月 〈莽原〉을 편집 발간. 동시에 〈國民新報〉副刊을 편집. 이 무렵 現代評論派 및 復古派와 격렬한 논쟁 전개. 5月 〈高老夫子〉(〈語絲〉26회)씀. 8月 許廣平이 在學 中이던 北京女子師範大學에서 校長 楊蔭楡를 반대하는 사태 발생. 교육총장 章士釗에 의해 학교가 불법 해산되자 그 반대운동에 가담. 校務維持會에 참가하여 委員을 맡음. 이 때문에 敎育部 僉事職에서 쫓겨남. 平政院에 提訴하여 勝訴. 10月 〈孤獨者〉지음. 11월 〈兄弟〉(26년 2월 〈莽原〉제 3호), 〈離婚〉(〈語絲〉제 54호)씀. 1918년부터 24년사이의 雜感(評論)을 모아 《熱風》이라 題하여 北京 北新書局에서 발행. 연말에 李霽野, 臺靜農, 韋素園등 청년 문학자들과 함께 未名社 결성. 12月 일본 廚川白村의 文藝論文集 〈出了象牙塔〉번역. 《未名叢刊》에 넣음. 한편 《野草》의 여러 작품을 「語絲」에 계속 발표. 이 해 孫文 사망(1866∼1922) 5·30事件 발생.
1926년(民國15) (46세)
1月 敎育部 僉事에 복직. 北京女子師範大學회복. 論 "費厄潑賴"〈應該緩行〉(〈莽原〉26년 제 1호) 발표. 2月 〈狗·猫·鼠〉등의 回億散文창작 시작, 〈莽原〉에 발표. 3月 北京政府의 對外屈服에 항의하는 市民集會가 軍警과 충돌한 3·18事件 발생. 張作霖의 군대가 北京에 入城하여 大學敎授들의 체포령을 내려 魯迅도 이때 도이치醫院·프랑스醫院 등으로 피신하였다가 5月 初旬 歸家함. 6月 제 2雜感集 《華蓋集》출판. 7月 齊宗 와 함께 荷蘭望 覃作 童話〈小約翰〉번역. 8月 編輯한 《小說舊聞 》를 출판. 8月 26日 許廣平과 함께 北京을 떠나 南下. 許廣平은 廣州로, 魯迅은 厦門으로 향함. 9月 4日 도착. 厦門大學 文科 교수가 됨. 이 달 제 2 小說集 《彷徨》을 北京 북신서국에서 출판, 〈祝福〉부터 〈離婚〉까지 11편 수록. 또 역사소설 〈眉間天〉(뒤에 〈鑄劍〉이라 改題)을 집필. (27년 4∼5月 〈莽原〉2권 8·9호) 12월 〈奔月〉(27년 1月 〈莽原〉2권 2호)집필. 또 자서전 〈朝花夕拾〉을 〈舊事重提〉라 題하여 〈莽原〉에 연재. 北伐개시. 國共對立 격화.
1927년(民國16) (47세)
1月 16日 廣州로 떠나 18日 도착. 2月 中山大學 文學科 主任이됨. 뒤에 敎務主任 겸임. 이 때 許廣平이 助敎를 함. 제 3雜文集 《華蓋集讀編》출판. 3月 제 4雜文集 〈墳〉출판. 4月 장개석의 "4·12" 反共쿠데타 발생 (武漢政府). 國民黨이 각지에서 학생 및 노동자, 共産黨員 학살. 廣州에서도 15일 학살 시작. 당일 中山大學에서 긴급회의, 체포된 학생들을 구제하려고 했으나 효과가 없자 29日 사임. (이 때의 일이 《而已集》에 수록됨) 5月 〈小約翰〉번역 원고정리, 序文 씀. 7月 散文詩集 《野草》북경에서 발행. 8월 《唐宋傳奇集》편찬시작. 9月 27日 廣州떠남. 10月 3日 上海도착, 許廣平과 함께 閘北景云里 23號에 기거. 이후 上海 生活은 그의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새로운 것은 옛 것에 반드시 승리한다", "청년은 老年에 반드시 승리한다"는 초기의 진화론적 사상에서 계급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12月 《唐宋傳奇集》상권 출판.
1928년(民國17) (48세)
1月 《小約翰》을 출판. 2月 《唐宋傳奇集》下卷 출판. 또 日本 板 鷹穗의 〈近代美術史潮論〉번역. 〈語絲〉가 上海로 옮겨져 그 主編을 받음. 프롤레타리아文學을 제창한 創造社·太陽社로부터의 공격에 격렬한 논전을 벌이면서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6月에 郁達夫·白微·林語堂 및 未名社 同人들과 〈奔流〉창간. 이 달 日本 鶴見祐輔의 수필 〈思想·山水·人物〉번역 출판. 9月 回憶 散文集 《朝花夕拾》출판. 10月 雜文集 《而已集》출판. 魯迅의 雜文은 모두 詩와 政論, 古代 散文의 우수한 傳說과 時代精神의 結合으로서, 고도의 사상성과 完美한 예술성이 결합된 典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해 北伐軍 北京入城. 張作霖 폭사.
1929년(民國18) (49세)
1月 柔石·王方仁·崔眞吾 등과 朝花社 조직. 〈朝花周刊〉, 〈朝花旬刊〉발행. 《세계단편소설집》출판. 木版畵의 復刻〈藝苑朝花〉를 내어 近代繪畵의 소개에 노력. 2月 日本 片上伸의 〈現代新與文學的諸問題〉를 번역, 이 해 4월 《文藝理論小叢書》에 넣음. 4月 루나찰스키의 〈藝術論〉을 升曙夢 日譯에서 重譯하여 6月 출판, 《藝術理論叢書》에 넣음. 이 달 번역한 예술 논문집 《壁下澤叢》출판. 또 《科學的藝術論叢書》의 編輯을 맡음. 9月 長男 海 출생. 10月 루나찰스키의 《文藝與批評》을 藏原惟人의 日譯本에서 重譯발행. 11月 헝가리의 동화 《小彼得》번역 출판. 이 해 프롤레타리아 文學派와 論戰을 벌이는 한편 藝術至上主義의 新月派와도 論戰을 폄.
1930년(民國19) (50세)
2月 自由運動大同盟에 참가. 3月2日 上海에서 中國左翼作家聯盟(左聯)결성에 준비인으로 참가. 成立會上에서 〈對於左翼作家聯盟的意見〉연설. 이 달 〈萌芽月刊〉제 3호에 論文 〈"硬譯"與"文學的階級性"〉발표. 5月 景云里에서 北四川路 路底건물 3층으로 移居. 이 달 플레하노프의 〈藝術論〉을 外村史郞의 日譯本에서 重譯하여 《科學的藝術論叢刊》의 하나로 7월에 출간. 8月 소련 야고브레예프의 〈十月〉을 井田孝平의 日譯에서 重譯, 33년 2月 《현대 문예 총서》의 하나로 출판. 9月 17日 "左聯"이 당시 法祖界 네델란드 서양 요리집에서 魯迅의 50회 생일 紀念會를 염. 10月 日本 刈米達夫의 〈藥用植物〉抄譯. (36년 6月 출판, 《중학생 자연연구 총서》에 넣음) 10月 4∼5日 內山完造와 版畵展 개최, 版畵運動 시작. 11月 《中國小說史略》수정.
1931年(民國20) (51세)
4月 "左聯"이 비밀리에 출판한 〈前哨〉창간호 〈戰死者를 추모, 기념하기 위한 號〉에 〈中國無産階級革命과 前衛의 피〉를 발표하여, 이 해 2月에 國民黨 政府가 柔石등 5명의 革命靑年作家를 암살한 것에 항의함. 이즈음 美國人 스모트레이 女史를 통해 美國의 잡지 〈新群衆〉에 〈黑暗中國的 文藝界的現狀〉을 기고함. 7月 20日 上海 社會科學硏究會에서 〈上海文藝之一瞥〉연설. 11月 〈 康集〉다시 교정. 이 해 소련 파졔프의 〈壞滅〉을 藏原惟人의 日譯本에서 重譯하여 三閑書屋의 명의로 自費인쇄. 또 馮雪峰과 잡지 〈十字街頭〉편집. 또 民族主義文學派의 御用文學을 비판. 滿洲事變발생.
1932年(民國21) (52세)
1月에 上海事變으로 피난. 모친의 病으로 北京에 여행. 4月에 1927∼29년 사이의 雜文을 모아 《三閑集》이라 題하여 9月에 上海서 출판. 또 1930∼31년의 雜文을 모아 《二心集》이라 題하여 10월에 上海에서 출판. 5月 〈北斗〉誌 제 2권 2호에 〈我們不再受騙了〉발표. 9월 소련작가 20人集을 編譯, 上冊은 《竪琴》이라 하여 33年 1月《良友文學叢書》의 하나로, 下冊은 《一天的工作》이라 하여 33년 7月 같은 총서의 하나로 상해서 출판. 11月 〈現代〉誌 2권 1호에 〈論第三種人〉발표. 12月〈文學月報〉1권 5∼6호 合刊에 〈祝中俄文學之交〉발표. 이 해 〈連環畵辯護〉를 써서 文藝大衆化論爭에 가담. 滿洲國건국.
1933年(民國22) (53세)
1月 宋慶齡·楊銓 등과 함께 中國民權保障同盟에 참가. 집행위원에 추대됨. 이 달부터 〈申報〉副刊, 〈自由談〉에 각종 필명으로 社會短評을 발표. 2月 柔石등 5人의 革命作家를 기념하는 〈爲了忘却的記念〉씀. 이 달 중국에 온 버어나드 쇼오와 회담. 日文으로 〈ShawとShawわ見に來た人人わ見る記〉를 〈改造〉에 寄稿. 3月 《魯迅自選集》을 상해서 출판. 4月 北四川路 路底건물에서 施高塔路(현재 山陰路)大陸新村 9號로 이거. 이 달 許廣平과의 書信集《兩地書》상해서 출판. 7月, 이 해 1月부터 5月까지 〈申報〉, 〈自由淡〉에 발표한 雜文을 묶어 《僞自由書》(일명 《不三不四集》)라 題하고 後記를 써 10月 上海서 출판. 7月 瞿秋白編 〈魯迅雜感選集〉을 출판. 9月 宋慶齡과 함께 상해 주재 독일 영사관을 방문, 노동 운동 지도자, 지식인에 대한 파시스트의 탄압을 항의하는 항의서 전달. 또 세계 帝國主義戰爭 反對委員會 極東會議에 참가, 명예회장이 됨. 또한 〈小品文的危機〉를 써 林語堂의 유모어 小品運動에 반대. 木版畵展 개최.
1934年(民國23) (54세)
2月, 1932∼33年의 雜文을 묶어 《南腔北調集》이라 이름하여 3月 上海서 출판. 10月, 1933년 6月∼11月에 〈申報〉 〈自由談〉에 발표한 잡문을 묶어 《准風月談》이라 題하여 12月 上海에서 출판. 이 해에 해외문학 소재지 〈譯文〉(∼1936)을 창간, 편집 담당. 고골리의 〈鼻〉번역. 청년 예술가의 創作木版畵集 《木刻紀程》출판, 그 광고를 씀. 전통적인 木版技術 보존을 위해 鄭振鐸과 《北平箋譜》출판. 역사 소설 〈非攻〉발표.
1935年(民國24) (55세)
1月 독일 Maria Einstein 의 獨譯本인 러시아 L. Panteleev 의 童話 〈表〉를 重譯, 7月 《譯文叢書》에 넣어 上海에서 출판. 이 달 《小說舊聞 》를 재교정하여 출판. 2月 上田進의 日譯本과 Otto Buek의 獨譯本을 참고하여 고골리 作 〈死魂靈〉重譯, 11月 출판. 3月 高橋晩成의 日譯本에서 고리키의 〈俄羅斯的童話〉를 重譯하여 8月 출판. 이 달 Alexander Eiasberg의 獨譯本으로 체홉의 단편소설 8편을 重譯, 9月에 編定하여 《壞孩子和別的奇聞》이라 하여 36년 출판. 5月 楊霽雲의 編으로, 1903∼1933년 사이의 잡문을 모은 《集外集》출판. 9月 《門外文談》출판. 11月 歷史小說 〈理水〉作. 12月 〈采薇〉〈出關〉〈起死〉를 써 앞서 쓴 〈不周山〉등과 함께 一集으로 묶어 《故事新篇》이라 함. 이것은 古代의 역사와 신화를 제재로 하여 당시의 투쟁과 밀접하게 조화시켜 놓고 있으니, 곧 옛것을 빌어 현재를 풍자한 것임. 이 달 1934년의 短評을 모아 《花邊文學》이라 題함. 또 1934年의 雜文을 一集으로 묶어 《且介亭雜文》이라 하고, 이 해 지은 雜文은 一集으로 묶어 《且介亭雜文二集》이라 題함. 이 두 책은 생전에 출판 안 안 됨. 이 해에 瞿秋白의 遣箸《海上述林》을 편집 출판. 또 《文字改革論集》출판.
1936年(民國25) (56세)
1月 역사소설집 《古事新編》출판. 1月 28日 《凱綏·珂勒惠支 版畵選集》의 序와 목록을 씀. 2月 〈死魂靈〉제 2부 계속 번역. 3月 持病인 결핵에서 갑자기 喘息 일어남. 5月에 재발, 6月에 겨우 회복. 《花邊文學》출판. 8月에 늑막에서 물을 빼다가 각혈. 9月에 〈死〉〈女弔〉집필. 10月 16日 曹靖華 譯 《蘇聯作家七人集》의 序言을 씀. 17日 〈因太炎先生而想起的二三事〉를 썻는데 이것이 絶筆이 됨. 18日 병세 악화, 19日 오전 5시 25분 大陸 新村 9號에서 永眼. 10月 22日 宋慶齡·矛盾 등의 葬儀委員會에 의해 上海 市民들이 바치는, 흰 바탕에 '民族魂'이라 쓴 旗를 棺에 얹어 萬國公墓에 埋葬. 毛澤東은 훗날 그의〈新民主主義論〉(1940)에서 魯迅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魯迅은 中國文化의 旗手이다. 그는 위대한 文學家였을 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위대한 혁명가였다. 魯迅은 氣骨이 참으로 강하고 추호의 비굴이나 아첨의 기질이 없었으니 이는 植民地, 半植民地 민중이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性格인 것이다. 魯迅은 文化戰線에서 전민족의 대다수를 대표하여 敵軍을 향하여 가장 정확하고 용감하고 굳세고 충실한, 가장 열정적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로 敵을 쳐부순 空前의 民族英雄이었다. 魯迅이 나아간 방향은 바로 中華民族新文化의 方向이었다."
魯迅이 서거하자 그 비통함 속에 '魯迅에게 배우자', '魯迅精神을 發揚하자'는 구호가 제기되었고 이에 대다수의 문인이 공감함으로써 문단의 左右翼 통합의 계기가 됨. 이 해에 쓴 雜文의 一部分은 生前에 이미 편집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且介亭雜文末編》임. 一部分 모아지지 않은 것은 許廣平이 편집하여 附集으로 만들어 함께 편집. 《且介亭雜文》《且介亭雜文二集》과 함께 37年 7月 三閑書屋명의로 출판.
1938年(民國27) (死後2년)
6月 魯迅先生紀念事業會에서 許廣平主編《魯迅全集》20卷 출판. 이 때 未完稿인 《中國文學史略》을 《漢文學史綱要》로 제 10권에, 《古小說鉤 》은 제 8권에 수록함. 번역 작품은 許廣平이 《譯叢補》로 編하여 스페인 巴羅哈의 〈山民牧唱〉과 함께 16, 18권에 각각 넣음. 毛澤東의 延安政權에서 魯迅藝術學院 창립. 漢口에서 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결성, 문단 통일됨.
1946年
書信 800여 통(不完全)을 許廣平이 收集하여 《魯迅書簡》으로 編하여 上海魯迅全集出版社에서 출판.
1951年
1912年 5月 5日∼1936年 12月 18日(1922년의 一冊 散失)의 日記 上海出版公司에서 影印 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