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문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으로 몰아가기를 즐기시는 분이신지 아니면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다 사용하기를 즐기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선교사 훈련생님들이 나누어주셨던 간증들처럼 저 역시도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외동아들로 자랐습니다. 으레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라는 환경일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저를 낳기 전부터 이미 알콜중독으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신 적을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알콜 중독이 정말 무서운 것은 본인 스스로의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폭력을 일삼으셨습니다. 어린시절 집안에 있는 가구나 전자제품들은 늘상 부서지기 일수였고, 집안 바닥에는 늘 어머니의 핏자국이 흥건했습니다. 온전치 못한 정신이다보니 잘못된 보증으로 인한 빚은 눈두덩이처럼 불어났고,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시절 병저 누우셨습니다. 복수가 차올라 거동을 할 수 없으신 아버지를, 학교를 마치고나면 그 어린 초등학생이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냈습니다. 그렇게 2년여를 병수발을 들어드리고, 제 나이 열 세살에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렸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둘이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저는 저희 집안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놀이터가 좋았던 여섯 살 어린 꼬마인 제게 친구가 말을 했습니다. ‘야! 교회가면 과자준데’ 저는 그 말을 듣자 마자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날 처음 받았던 딸기잼이 가득 묻은 ‘후렌치 파이’ 덕분에 교회를 단 한 주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게 과자로 복음을 전해준 친구는 그 이후 교회를 한 번도 안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친구를 다시 전도해 지금은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다니던 교회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저의 믿음은 콜라를 잔에 따르고 나면 넘치듯 솟구치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품처럼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교회를 나가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때 교회를 빠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얼마나 재밌고 즐거운 일인지 느꼈습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자란 아이들의 가장 큰 반항은 술, 담배, 도적질이 아니라 그저 교회를 안나가는 정도의 소심한 반항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목사님 딸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 때 다시 하나님이 저를 깊이 있게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고나서 다시는 교회와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교회로 전도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열심히 어머니를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시느라 바쁘시고 피곤하셨던 어머니는 교회 한 번을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망은 교회를 거절하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바뀌게 되고 전도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 다투고 화를 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제 고집에 못이겨 한 번 교회를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함께 기도해주시던 작은 개척 교회내의 집사님들께서 너무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도 바빠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었던 야윈 어머니를 보고 집사님들은 한약을 지어주시겠다며 열정적으로 환영을 해주셨습니다. 그 때 변에서 피가나서 한약은 안된다며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셨습니다. 단순히 치질 정도의 이상이 있으니 그것을 핑계로 과한 대접을 거절하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한 집사님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 당장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삶에 큰 지장이 없이 살아왔는데 이렇게 대뜸 화를 내며 병원을 가보라는 집사님의 독촉에 어머니는 당황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불같은 성격으로 몰아붙이시는 집사님 때문에 어머니는 더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 병원에서 간단히 검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의사는 조직검사를 권유했고, 더 큰 병원으로가 조직검사를 하고 대장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때 이미 초기를 넘어 중기 이상으로 진행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입원 후 수술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술 전날 밤 저를 따로 불러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유일한 보호자였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저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술을 시작하고 개복을 한 이후에 본인이 바로 나오면 생존 가망이 없는 것이고, 수술 시간이 길어지면 그래도 해볼만 하다며 본인도 장담할 수 없는 수술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만약 어머니께서도 계시지 않는다면 정말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다는 그 불안함과 두려움이 막막한 마음 가운데 밀려 왔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약 어머니를 살려주시면 제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수술은 여덟시간가량 진행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어머니는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cm만 더 대장을 잘라내었다면 인공항문을 달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도 피할 수 있었고, 회복력도 빨라 두 달만에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강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저 역시도 그 날 하나님께 고백했던 그 서원대로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역자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그 약속 따라 사역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소외되고 연약한 저와 어머니를 부르시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이 쉽지는 않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는 그 순간이 너무도 괴롭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어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제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부르심의 흔적이 저와 어머니의 삶 가운데 깊이 있게 자리잡았음을 찬양하며 이 간증을 마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