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답사의 날이 밝아왔습니다~
유독 매우 설레는 이유는?
바로!
두둥!
답사 장소가 한양이기 때문이죠~!!!
그도 그럴 것이
남한산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유산을 보러 가는 길인데요
우리는 이것을
"삼전도비"
((가로열고)) 대청황제공덕비 ((가로닫고))
라고 부르지요~
바로 삼전도비로 향하지 않고
석촌호수의 동호(동쪽 호수)에 있는
송호정으로 향합니다
송파의 호수에 있는 정자
라는 의미인데요
송파는
송 = 소나무 송
파 = 언덕 파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소나무 언덕이네요!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나 봅니다~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조선 초,
이곳에 살던 노인이
어느 날 소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던 중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이곳을 송파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송파는 남한산성과 연관이 매우 깊은 곳인데요
조선 시대엔 송파가
너른고을 광주(廣州)에 속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송파진이 있었죠!
송.파.진
"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나루 "진(津)"과 진압할 "진(鎭)"이라고 합니다
나루이면서 군대 주둔지였기 때문인데요~
조선 전기까지는 행락객이 적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치욕의 기억이 샘솟는(?)
삼전도와 삼전 나루에서
송파나루로 사람과 물자가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삼남지방과 관동지방의 물자가 바로 이곳으로 모두 집결했다고 하네요~
광주에서는 어떤 것이 많이 운반되었을까요?
바로 숯입니다!
조선조 말엽
숯을 구워 한양에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해서
지금의 탄벌동(炭洞)이 있을
정도니 말이에요~
또한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이 군사요충지로 자리매김하면서
도성 방어 체계에 송파나루도 포함되게 됩니다
광주시의 읍치였던 남한산성이
바로 이어지는 나루였기 때문에
결국 이곳을 군이 관리하게 되죠
읍치의 수령인 광주목사가
부윤이 되고
수어사로 승격되었다가
유수로 올라가면서
송파진의 행락객은 더욱더
UP UP UP!!
이러한 배경은
송파장을 조선 10대 상설장으로 만들게 되고
송파산대놀이라는 유명한 문화유산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송파장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배를 기다리며 즐겼던 볼거리 놀거리가
예술로 완성되었다고 하니
이런 것이 진짜 역사가 아닌가 싶네요!
TMI로
송파장은 한양과 달리
광주유수의 권한으로 관리되어
금난전권과 같은 독점 판매권이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대부들과 결탁하는
폐단도 적었다고 하네요~
종국엔 송파장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결정적 계기는
을축년 대홍수였습니다
거의 송파 전체를 싹쓸이했다고 할 정도로
홍수의 위력은 거대했다고 해요~
(삼전도비는 끄떡없었다는 거...)
이후 도로가 생기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송파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삼전도비를 보러 가볼까요?
송호정에서 삼전도비로 바로 직진하지 않고
동호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석촌호수가 너무나도 아름답네요~
봄에는 벚꽃축제,
가을에는 한성백제문화제를 하는군요~
생태와 문화, 역사 등 다양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진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너른 고을 광주시도 화이팅!
(도와주세요 광주시장님~)
잠실호수교 밑을 건너면
석촌호수의 서호와 롯데월드가 보입니다
바로 삼전도비로 가는 이정표가 나왔는데요,
음...
본래는 좀 더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자리를 옮기면서 이정표가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이곳 분들에게 여쭤봐도 삼전도비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헤매지 않고 잘 찾았습니다~
광주시 해설사들에겐 모를 수가
없는 비석이니까요~
정말이지...
엄청나게 컸습니다..
만주어, 몽고어로 채워도 충분할 만큼요!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은 너무나도 유명하죠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한 달 반간 버티던 조선은
결국 청에게 항복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게 되고요
청은
조선이 명을 생각하며 내세웠던 재조지은을
자국을 위한 논리로 되갚음 합니다
왕조를 존속시켜준 은덕을 기리라며
큰 비석을 세우게 하죠
바로
대청황제공덕비,
우리가 삼전도비로 부르는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남아 있는 것은
저 거대한 비석 하나뿐이지만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이야기는
그 거대함을 넘어섰는데요
이 큰 돌덩이에는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조선은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했습니다
청의 요구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실랑이를 했죠
하지만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대부들도 비석 만들기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이 비석에 자신의 글이나 글씨가 들어가게 된다면
명나라의 의리를 주장했던 사대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꼴이 되죠
선비의 명예에 먹칠,
내 얼굴에 먹칠,
내 후손들에겐 주홍 글씨...
내로라하던 명문가들이
갑자기 글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는 둥
아파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둥
아예 글을 엉망으로 써 올리는 등
자신에게 온 폭탄을
남에게 돌리기에 급급했습니다
결국 그 폭탄에
최종 당첨된 사람은?
여이징 - "대청 황제 공덕비"라는 비액 글씨
이경석 - 비문
오준 - 글씨
이렇게 세 사람이 되죠
여이징과 오준, 이경석은
앞으로의 인생이 가시밭길일 것임을 알고도
비문에 참여하게 됩니다
치욕스럽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오준
붓을 꺾었다 하나
글씨만 썼기 때문에
비교적 상황이 괜찮았습니다
후엔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도
더러 있고요
여이징
인조와 동서지간이었습니다
부인의 동생이 인열왕후(인조의 비)
였던 것이죠
왕의 측근이었기에
여이징도 이 상황이 조금은 견딜만했습니다
이경석
이경석은 왕실 종친임에도 불구,
동료들의 비난을 받습니다
그중 특히 참기 힘든 일은
자신이 여러 번 천거한 후배 송시열에 의해
절의를 버린 자로 비꼼을 당한 것이었죠
이 갈등은 집안싸움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하네요
효종 재위기
북벌을 눈치챈 청의 압박에
대신 책임을지고
압록강 근처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는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만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꽤 오랫동안 이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
비를 만드는 일에
엄청난 고생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일단 큰 돌부터 구하기가 어려웠죠
끝내 32톤의 돌을 충주에서 캐냈다고 합니다
다음은 옮겨야 하는데..
이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큰 배를 띄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맛비를 기다렸지만
징하게 오지 않았다네요-_-
결국 늦장마를 이용해 돌을 운반했고 비각까지
옮기는데 군인 400명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자신의 신도비를 만들고 싶어도
비용과 운반 문제로 잘 만들지 못했는데요
이 삼전도비는
사대부의 신도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선례가 없는 크기의 비였습니다
그마저도 한번 반려돼서
더 크게 만들어야 했다는 사실..
(비어있는 귀부의 이유)
이 비석 만드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후 삼전도비는 청나라 사신들의
방문 필수 코스가 됩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 사신들이 비를 보고
바로 남한산성을 시찰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죠...
그래서 사신들에게 비만 보고 돌아올 수 있도록
풍성한 접대를 해야 했다고 하네요
(나중엔 탁본만 가져가게 했다는ㅋㅋ)
네 번째
묻었다 세웠다 엎어졌다 칠했다 지웠다
다시 세웠다.. 이설까지..
치욕스러운 물건은
빨리 내 눈앞에서 치우고 싶죠
실제로 삼전도비는 고종 때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마자 뽑히게 된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가 오자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지만요..
그러다 다시 이승만 정부 시절 땅에 묻혔다가
홍수로 비신이 드러나게 됩니다
(한국전쟁도 견딘 삼전도비..)
위태한 모습에 강에 유실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인양하게 되고요..
(이 당시에도 난공사일 정도로 비가 무거웠....)
이후 2007년 유명한 락커 낙서 사건도 있었죠..
삼전도비는 보물 지정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민 정서상 이를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역사적 가치는 높지만
존재 자체가 괘씸한 죄로
결국 사적으로 남았다고 하네요
비석은 지역의 강한 반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됩니다
논의 끝에 위치한 곳은 원위치에
가장 가까운 이곳
석촌호수 구석 언덕에 설치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이 많은 명소임에도 불구하고
삼전도비는 인적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
찾기 어려운 곳이지만 찾으면
칠지도 도장 찍을 수 있당~~
숨기고 싶은 치부로 여겨지는
삼전도비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의 얼굴만 보지말고
속 사정까지 봐라
그리고
"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
오늘도 답사 무사히 마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너른고을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역량 강화 활동의 일환으로, 해설사가 직접 찾아간 문화유산 답사 리뷰입니다 :)
답사를 준비하신 선생님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리마인딩용으로 남기고 있는 기록입니다
혹여 잘못된 기억의 기록으로 선생님들께 누를 끼칠까 걱정됩니다
정정해야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늘 잘 보고 있습니다.
열정에 응원을 보냅니다.
"폭탄돌리기"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도 될만한 '옥의 티' 하나가 보여 옆구리 툭치고 지나갑니다. ㅎ
<수어사>는 수도 한성 방어를 위한 군사조직의 관직으로 <유수>나 <부윤>과는 별개였습니다.
지방관청인 <광주유수> 또는 <광주부윤>의 지휘를 받지 않는 군사조직 우두머리 <수어사>가 남한산성에 함께 부임되어 마찰이 잦자 나중에는 겸직을 시켰다고 해요.
<광주부윤 겸 수어사> 또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말이지요.
그래서 한성부윤과 동급으로 승격되었고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하셨습니다. 별꽃님 멋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