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민수(敏修), 자는 눌보(訥甫), 성은 안씨(安氏), 관향은 순흥(順興)이다. 안씨는 고려에 현달(顯達)하였으며 판사(判事) 휘 준(俊)에 이르러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당파였다고 하여 영남(嶺南)으로 유배(流配)되셨다가 조선이 개국되어 예천(醴泉)으로 옮겨 그곳에서 돌아가셨으니 호는 노포(蘆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현감(縣監) 휘 담수(聃壽)는 서애선생(西厓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세세로 절행(行)이 저명하여 소문이 났다. 또 7대를 내려와서 공에게 이르게 되었으니 그 학문은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는 우애로 더불어 하며 종족(宗族)을 대우함은 은혜가 있고 벗을 사귐은 도(道)가 있었다.
그러나 병곡공(屛谷公)을 받들며 경(敬)과 겸(謙)과 서(恕)의 세 글자로서 내면에 부신(符信)을 삼으며 벗어나지 않았다. 일찍이 '수오(守吾)'로 서재(書齋)의 이름을 삼고 명(銘)을 짓기를, “나의 흰 것을 지켜 검음에 물들지 않고, 나의 질박함을 지켜 세속에 더럽히지 않고, 나의 졸렬함을 지켜 사물과 다투지 않고, 나의 입을 지켜 주머니를 졸라매듯 하고, 나의 마음을 지켜 옥(玉)을 잡은 듯이 하리라.” 하였는데, 역시 일찍이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의 친구인 권상우(權尙佑) 공에게 발각되어 벽에 걸었더니 사람들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시(少時)에 과거공부를 하다가 그리고는 포기하였으니 당시에 나이가 39세였다. 병(病)에 걸리니 집안사람들이 둘러앉아 울기에 부인을 손짓하여 들어오게 하여 손을 당겨 두건을 가지런히 하게 한 것이 두세 번이더니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바르게 임종하였으며 병곡공(屛谷公)이 돌아가실 때도 대개 일찍이 이와 같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공의 증조(曾祖)의 휘는 몽상(夢祥)이요, 조(祖)의 휘는 필창(必昌)이며, 고(考)의 휘는 정서(井瑞)요, 비(妣)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시니 사인(士人)인 용석(錫)의 따님이다. 공은 의릉(懿陵) 갑진년(1724) 모월 모일에 태어나 경술년(1790) 모월 모일에 돌아가셨으며 장지는 안동(安東府) 서쪽 이개리(耳開里) 계좌원(癸坐原)에 있다.
배(配)는 풍산유씨(豊山柳氏)이시니 흡(潝)의 따님이며, 이남 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택(爾宅)과 이정(爾定)이고 딸은 이종택(李宗宅)에게 시집갔다. 이택은 이남 일녀니 장남은 원(愿)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이정도 아들과 딸이 있으나 모두 어리다.
가환(家煥)이 공의 사적(事蹟)을 들었더니, 계모(繼母) 김부인(金夫人)에게도 끝내 환심을 얻었으며 만년(晩年)에 그분의 병환을 봉양하며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으니 부인이 그가 늙었는데도 조금도 쉬지 않고 권함을 가엽게 여기자 문득 몸을 등잔 뒤로 숨어 부인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게 하였다. 집안의 제사에는 반드시 미리 목욕재계하였으며 제기(祭器)는 질서가 있고 술은 깨끗하고 정결하였다.
두 동생과 더불어 재산을 나누었으나 있거나 없거나 함께 공유하였으니 사실은 나눈 것이 아니었으며 일가가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게는 집을 지어 살게 하였으며 평생 사귄 사람은 잊지 않았으며 사귄 사람도 죽을 때가지 변하지 않았으니 대개 떳떳한 윤리를 지키며 덕(德)을 감추고 빛을 숨겼던 분이었다.
공이 살았을 때 자신을 견지함은 이와 같았고 그가 돌아가셨으니 가히 밝혀서 알리지 않을 수 없기에 드디어 줄거리를 모아 명문(銘文)을 지었다.
명(銘)을 한다.
온화하면서도 굳세고
실하면서도 허(虛)한 듯하였네
옛날 수기(修己)의 학문을 하던 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도다.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여주(驪州) 이가환(李家煥)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