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그리스의 영원한 나신(裸身) 위에 투명한 베일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게 쉽게 천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라서 좋아한다. 그것만큼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꿈과 현실의 구분은 사라지고 아무리 낡은 배의 돛이라 해도 가지가 뻗고 과일이 익는다."
소설 '희랍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 한 '희랍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도 압권이다. 바다와 깊이 교감하면서도 적멸로 가는 듯한 그리스인의 춤, 에게 해가 낳은 것이리라.
풍경은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것을 놓쳐 언제나 실망하고 만다. 에게 해라 할지라도 실제 그것은 옅은 회색빛이 감도는 청색의 바다로서 동해의 억센 푸른 빛보다 청랑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이 '연못 주위에 있는 개구리들'이라고 말한 에게 해의 400여 개 섬들도 하롱베이보다 경이롭지 못하리라. 바다를 향해 마음을 연 사람들에만 섬은 언제나 눈부신 유혹으로 다가온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갈망하듯이, 길 위에 있는 나그네의 마음 속 섬은 그래서 늘 아름답다.
2013년 3월 26일, 통영 비진도에 간다. 비진도는 통영시에서 남쪽으로 10.5㎞ 해상에 있으며, 매물도와 소매물도, 한산도와 이웃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의 해전에서 승리한 보배로운 곳이라는 뜻에서 비진도(比珍島), '진주 보배에 견줄만 한 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걷기 열풍에 발맞추어 한려해상국립공원 해상 바다 백리길이 만들어졌는데, 비진도 산호길은 그 둘레길 중 일부가 된다.
통영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한려수도 남해 바다와 섬들을 끌어안고 있는 이 통영 포구에서 한번 쯤 잠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리라. 특히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내게 통영은 고혹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통영은 수려한 자연 외에도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통영 낯선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토지' '김약국의 딸들'을 쓴 소설가 박경리, 청마 유치환, '꽃'의 시인 김춘수의 생가와 기념관 동상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김상옥 거리를 걸으며 시조 '봉선화'를 읊으며 초정(草汀) 김상옥 선생을 생각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통영 미륵산에 올라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전혁림미술관을 둘러 보고, 통영 밤바다에서 '아리아 심청'의 작곡가 윤이상의 떠도는 넋을 만날 수 있으리라. 특히 알프스 산우회가 여행하는 이 기간에 윤이상을 추모하는 2013 통영국제음악제(3.23~28)가 열리고 있다. '자유로운, 그러나 외로운'이라는 음악제의 올해 주제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이국 땅에 묻혀야 했던 천재 음악가의 비극적 삶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오전 11시, 통영-비진도-소매물도를 운행하는 여객선이 통영항을 떠나 바다로 나아간다. 섬에 다가갈수록 녹두빛 바다가 푸른 빛으로 변한다. 배가 물살을 가르고 손을 뻗치자 우리를 유혹하던 섬들은 잡힐 듯 뱃전을 스쳐간다. 배가 섬을 쫓는 것인가, 섬이 배에 잡히지 않으려 달아나는지 그렇게 숨바꼭질을 한다. 섬에 이르기 위해 배는 필사적으로 스크류를 돌려대고 희디흰 거품이 비상하는 날개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의 고물쪽으로 갈매기가 따라 춤춘다. R. 바크는 '갈매기의 꿈'에서 갈매기 조나단처럼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지만, 새우깡을 향해 달려드는 갈매기도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웠다. 성과 속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 삶은 이렇듯 치열하고 성스러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날개를 지녔지만 살과 내장을 가진 바다새이기 때문에 바람을 견디고 날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저렇듯 처절한 비상을 해야 한다. 삶은 어쩌면 허기를 달래야 하는 숙명과 하늘에 떠있을 만큼의 가벼움, 그 중용의 자리를 모색하기 위한 모순성의 줄타기가 아닐까?
내항선착장에 내려 마을 회관과 비진 분교를 향한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敵意)가 활시위처럼 팽팽했던 임진년 정유년 봄날과 달리 2013 계사년의 바다와 섬은 화해롭기만 하다. 모두들 소풍 나온 초등학교 개나리반 학생이 되어 모모사랑 반장의 구호에 따라 4열 종대로 안섬을 반바퀴 도는 트래킹을 한다. 알프스 산우회의 씩씩함에 비진도 안섬 촌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비진도산호길 2.1km 외항마을 1.9km 이정표가 보인다. 안섬을 서쪽으로 반바퀴 돌아 바깥섬 마을에 가는 거리가 약 2km가 된다.
안섬에서 바깥섬으로 가는 트래킹 코스는 콘크리트 혹은 보도블럭으로 된 길이라서 정감은 덜하다. 하지만 섬마을의 분위기와 이국적인 남도섬의 나무들, 그리고 쪽빛 바다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전주에는 동백이 아직 일러 피지 않았는데, 비진도 동백은 피어나고 또 속절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봉준이 목 뎅강 떨어지듯' 송이째 담장 너머에 뒹글고 있는데, 동백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새의 음색은 맑기만 하다. 이충무공이 남해의 섬들, 즉 사지(死地)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 숲, 새들은 결코 오늘처럼 가볍지 않았으리라. 그는 이 바닷가에서 세상이 견딜 수 없이 무섭고 가여워 식은 땀을 흘리며 잠 못 이루었으리라. '칼의 노래'에서 김훈은 이렇게 적는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캄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채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目測)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안섬 대통산(219m)을 끼고 도는 트래킹을 마치고 바깥섬을 향한다. 고추 농사를 하기 위해 바람막이를 설치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남도의 마늘과 시금치들은 겨울바람 속에서도 싱싱하게 자라났다. 안섬 산자락에 있는 더 씨 펜션(The Sea Pension)이 눈길을 끈다. 비진도 바깥섬 문필봉을 올려다 보고, 바다와 소나무 솔숲을 굽어보고 있는 하얀 건물로서 비진도에서는 가장 좋은 숙박 시설이다. 야자수가 도열해 있는 담장 안 쪽으로 남도의 꽃나무들이 석물들과 어울려 있는데, 작은 연못 주변에 청보라 빨강, 분홍 히야신스꽃이 피어 있고, 노란 수선화가 무더기 무더기 벙글어 서 있다.
안섬과 바깥섬을 잇는 사주를 지난다. 남쪽 몽동해안 바다와 통영 방향 북쪽 바다의 물살이 이곳에서 힘이 다해 모래와 자갈을 길게 쌓은 퇴적 지형으로 두 섬을 아령 모양으로 이어주고 있다. 외항 선착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산행을 시작한다. 선유봉은 직진해서 오르면 1.7km, 우회하면 3.2km가 된다. 바깥섬을 북서쪽으로 도는 수포 탐방로로 들어서니 동백나무 군락지가 우리를 반긴다. 섬은 작고 높지 않지만 가파른 해안은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 바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다.
동백나무 군락지 - 비진암 - 용머리바위에 이르는 길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비진도산호길 구간으로 해상바다 100리길 가운데 제3구간에 해당하는데, 이 숲에 팔손이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버스 속에서 산악대장이 들려준 팔손이나무 전설을 생각하며 잎을 세어 보기도 했다. 인간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탐욕이 빚은 비극을 생각하며 숲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내려 놓는다. 한때는 비진도가 팔손이나무 북방한계선이었고, 팔손이나무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국립공원 사무소에서 매달아 놓은 표찰을 보면, 이곳에는 굴피나무, 당단풍, 나도밤나무, 때죽나무, 구실잣밤나무와 같은 나무 외에도 천남성 등의 풀들이 자란다.
비진도 산행 가운데 키작은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마른 풀을 비집고 작은 봄꽃들이 앙증맞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회장님은 풀섶을 헤치며 카메라들 연신 들이대고 있고, 들국화님은 우리에게 꽃이름을 알려주며 꽃들에게 말을 건넨다. 김춘수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현호색, 산자고, 찔레, 자운영, 장다리꽃의 이름을 부르다 보니 그의 향기와 빛깔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생을 걸고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리라. 냉이꽃, 벼룩이부자리꽃처럼 작은 생명일지라도 각각 우주를 품고 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오후의 시간에야 꿈꽃이 보인다. 작디 작아 외롭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 꽃이. 봄날, 길섶 발치에 핀 야생화는 나직이 앉으라 한다, 더 작아지고 더 외로워지라 한다.
비진암에 들른다. 숨은꽃처럼, 산책로를 비껴 있는 작디 작은 암자다. 여느 절의 칠성각 크기만한 자그마한 암자지만, 한려수도 시린 바다를 절마당으로 차경하여 빌려쓰고 있다. 법당은 굳게 잠겨 있고, 수행자도 없다. 해조음에 실려오는 봄꽃 내음만 나그네를 맞는다. 잠시 절마당에서 바다가 들려주는 해조음을 감상했다. 신음하듯 낑낑대는 바이올린, 허스키의 저음으로 파고드는 첼로,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피치카토의 경쾌함이 함께 밀려왔다. 비진암에서 마음으로 바라본 바다와 하늘은 검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밝음과 어두움, 깨달음과 미망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 '당신'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꽃이 피고 지는 그 모든 순간에 자재(自在)하는 존재를 생각했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좋은 소리가 해조음이라 했다. 외물에 현혹되지 않고 마음을 밝히기 좋은 소리. 내딛는 돌계단에 동백이 누워 있다. 적멸인가 화엄인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 말씀과 침묵의 경계가 사라진다. 우주의 거대한 윤회 질서 속에서 피고 지는 것을 분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붉게 누운 비진암 와불들이 침묵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만해 선사가 떨어지는 오동잎에서 '당신'의 얼굴을 본 것처럼, 우주의 장엄한 소멸과 신생의 수레바퀴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리라.
슬핑이치, 혹은 갈치바위라고도 부르는 용머리바위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에서 점심을 했다. 파도가 치면 이 용머리바위에 갈치가 널려 있어 갈치바위라 했다 하니 자연에 찬탄과 외경심을 갖게 된다. 단애, 즉 급경사의 암석사면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더해 성주여, 버꿈여, 안노루여 바깥노루여 등 바다 기암괴석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노루여전망대에 오르니 연화도(蓮花島), 욕지도, 남해 등의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유봉(313m)을 0.9km 내려와 망부석 전망대에 오르니 동북쪽으로 한산도와 용초도가 보인다. 용초도는 한국전쟁 당시 거제수용소의 전쟁 포로 중 극렬 공산주의자를 분리해 감금했던 역사 현장이기도 한다.
안섬 더씨펜션 아래에서 하산주에 숭어회를 곁들인 후 귀로에 오른다. 저무는 섬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수평선 너머로 빛이 사라지고 난 바다가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한가를. 집과 가족이 문득 그리운가를. 청산에 와서야 떠나온 곳이 청산임을 알게 된다. 여행이 주는 깨달음 가운데 하나다. 비진도 외항선착장에서 문득 희랍 신화를 떠올린다. 외딴섬 오기기아에 사는 요정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구출하고, 그에게 영생불멸을 약속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망토처럼 두른 미의 화신 칼립소를 떠나 육지로 귀환한다.
떠남, 여행은 되돌아감을 전제로 한다. 꽃이 피는 것은 아름답게 지고, 견고한 열매를 남기기 위함이다. 늙지 않기 위해 트리갭의 샘물을 마시고, 피터팬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주름진 얼굴에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남긴 지혜가 쌓이고, 여행을 통해 영혼이 성숙해졌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또한 설레는 일인가. 나를 기다리는 집, 그리고 가정, 혹은 하늘나라와 그분을 향한 여정은 또 얼마나 가벼운 여행일 것인가.
통영 중앙시장에 들러 어물들을 구경한다. 이 틈을 타 중앙 시장 윗마을, 동피랑벽화 마을에 올라 벽화들을 감상했다. 어린왕자가 커피를 팔고 있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면서. 그런가 하면 동피랑 작가 강제윤 시인이 쓴 소설 '어머니전'을 형상화한 노모 그림과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는 글이 벽에 그려져 있다.
동피랑갤러리에서는 구영환의 통영연 초대전이 열려 통영 전통연을 다채롭게 제작해 전시하고 있었다. 군산의 해망동을 연상케 하는 바닷가 달동네, 그 서민들의 애환을 소박한 그림에 담아 승화시켜 통영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속이 재리서 문디가 될라카다가도 저게, 뻥 뚤린 강구안을 보모 분이 써언하니 가라앉고 그라는기라. 그라이깨 오곰재이 오글티리고 살아도 내구석이 조은기라." 통영항(강구안)을 보며 한을 달래고 살았던 이분들의 건강한 삶을 다시금 생각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시 '통영' 2편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 즐거웠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객주집의 /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
진안 마이산 휴게소를 잠시 들른 버스가 소양 고개를 내려온다. 비진도의 산하와 나무, 그리고 풀꽃들이 그러했듯이 삶이 혹독할수록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다짐한다. 전주의 불빛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2월 보름달에 젖은 보배로운 섬 하나, 마음에 환히 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