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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의 통일은 단지 대립되는 정권의 소멸을 의미할 뿐이었다. 지방의 성주들은 후삼국의 혼란한 시기나 조금도 다름없는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호족의 몫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지방의 호족들은 일정한 통치체계를 갖춘 가운데 자신의 영역을 다스렸다. 성종 2년(983)에 있었던 향리직제(鄕吏職制)의 개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 ) ․․․․․․․․․․․낭중(郎中)―원외랑(員外郞)―집사(執事)
―병부(兵部)․․․․․․․병부경(兵部卿)―연상(筵上)―유내(維乃)
―창부(倉部)․․․․․․․창부경(倉部卿)
신라말․고려초 지방의 호족들이 신라의 상대등을 연상시키는 당대등을 수석으로 하여 중앙과 동일한 명칭의 병부와 창부 등의 기구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는 직능의 차이에 따른 그같은 기구에다 낭중․병부경․창부경과 같은 직책을 설치하여 지방민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모든 지역의 호족이 위와 같은 통치조직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었다고는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세력에 따라 대호족(大豪族)과 중소호족(中小豪族)으로 구분되어 서로 상하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또한 직제가 지역에 따라 일률적이지도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그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신라말 이래 고려초기에 이르도록 지방통치가 호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하려는 고려왕조의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또한 호족들에게 지방통치를 일임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초기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금유(今有)와 조장(租藏) 및 제도(諸道)의 전운사(轉運使)와 같은 외관의 존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금유와 조장은 그 명칭으로 짐작컨대 조부의 징수와 보관을 담당한 관원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관지(百官志)에서 이들을 가리켜 ‘외읍(外邑)의 사자(使者)’라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지방에 상주하는 외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당시의 정세로 보아 이 직책에는 주로 호족들이 임명되어 그같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제도는 성종 2년(983)에 12목(牧)을 설치함과 동시에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전운사는 금유․조장보다 범위가 넓은 도(道)에 설치된 관직이었다. 명칭 그대로 일단 징수․보관된 조부를 개경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은 외관이었던 듯싶다. 그리하여 이 또한 국가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지방에 파견되곤 하던 임시직이 아니었던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 전운사는 현종 20년(1029)까지 존속하다가 혁파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위에서 서술한 금유․조장과 전운사 외에도 중앙에서 파견한 외관이 상주하는 도호부(都護府)와 도독부(都督府)가 지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태조 왕건이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요충지에 설치하고서 중앙군을 주둔시키던 일종의 군정기구였다. 따라서 여기에 파견된 외관을 훗날의 민정적인 외방 수령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지방에 상주하는 외관의 선구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하여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고려조정으로서는 재정의 확보와 군사적인 안정이 급선무였고 그리하여 그같은 국가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일찍부터 지방관을 파견하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방관이란 지역적으로 극히 제한된 곳에만 파견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또한 임시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의 호족에게 미치는 통제 효과라는 게, 그다지 보잘 것이 없는 수준이었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고려시기에 체계적으로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는 단서는 역시 성종 2년의 12목(牧) 설치에서 찾는 것이 온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 조치를 계기로 고려의 지방관제가 하나하나 갖추어져 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종은 고려왕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정비되는데 주춧돌을 놓은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원년(982)에 백관(百官)의 명칭을 바꾸었고 이듬해에는 다시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그러는 한편으로 2년(983)에는 전국의 12목에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주현(州縣)의 정수(丁數)에 따라 공해전시(公廨田柴)를 지급하였고 이어서 주․부․군․현 이직(吏職)을 개편하였다.
성종 2년의 12목 설치는 문치적 지방행정 및 지방의 호족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12목이 두어진 곳은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晉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 州)․승주(昇州)․해주(海州)․황주(黃州) 등이었거니와, 이 가운데 광주․충주․청주․황주․나주․승주는 특히 태조 왕건과 매우 밀착된 호족세력이 웅거하던 지역이었음이 눈에 띈다. 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지역으로써, 그 지역의 호족들은 모두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지금의 전남지방에는 나주와 승주의 두 지역에 목사가 파견되었다. 통일신라시기 9주 가운데 하나인 무진주의 치소였던 현재의 광주를 제치고, 나주와 승주가 지역을 대표하는 최상급의 행정단위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격동기를 맞아 견훤의 사위인 지훤(池萱) 등 광주의 토착세력이 끝내 후백제의 편에 서 있었던 반면에, 나주와 승주의 호족들은 왕건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 따른 일이었다.
이어서 성종은 12목에 대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5년(986) 8월에는 12목의 관원으로 하여금 처자를 거느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수령으로서의 그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6년에는 12목마다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를 각 1인씩 뽑아 보내어 지방 자제의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나아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유교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지방 유력자의 자제를 교육시켜 중앙에서 뽑아 쓰거나 혹은 기왕의 능력있는 이를 중앙으로 진출시킴으로써, 지방세력의 독자성을 약화시키려는 방책이었다. 또한 12년(993) 2월에는 서경․동경과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기능을 부여하였다. 12목이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조치였다. 아울러 같은 해(993) 8월에는 주․부․군․현과 역 등에 공수시지(公須柴地)를 지급하였는데, 이로써 앞서 2년(983) 6월에 지급한 전지(田地)와 더불어 공해전시(公廨田柴)의 제도를 완비하게 되었다. 지방의 각 관아에서 각자의 경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지방관제가 정착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가 마련된 셈이었다.
이러한 정비 작업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지방제도가 다시 크게 개편되는 것은 성종 14년(995)의 일이었다. 이 해에 개주(開州)가 개성부(開城府)로 개정되고 10도(道)가 신설되었으며, 종래의 12목은 12군(軍)으로 개편되면서 그 지방관도 절도사(節度使)로 바뀌었다. 아울러 도단련사(都團練使) 7․단련사(團練使) 11․자사(刺史) 15가 설치되고, 도호부사(都護府使)와 방어사(防禦使)도 각각 5곳과 21곳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12목이 설치된 이후에도 외관은 점차로 추가 설치되어 왔었지만, 성종 14년에서와 같이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증설된 것은 지방관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2목에서 12군 절도사제로의 전환은 주목할 만하다. 단순한 명칭만의 변경이 아니라 지방 통치조직상의 중대한 질적인 변화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절도사는 당나라에서 시행한 군사적인 외관제였다. 아마 고려의 절도사제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거니와, 그 얼마 전에 있었던 거란과의 전쟁 및 잇따르는 양국간의 긴장관계를 감안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밖에 도호부사와 방어사의 증설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단련사 역시 군사적 성격을 농후하게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성종 14년의 지방관제 개편에 내포된 의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성종 14년에 이루어진 그와 같은 세부적인 지방조직은 행정적인 면에서 그다지 큰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같다. 시행 10년만인 목종 8년(1005)에 12절도사․4도호부사와 양계지방의 방어진사․현령․진장을 제외하고, 도단련사와 단련사․자사가 모두 폐지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이후 현종 3년(1012)에 이르러서는 12절도사마저 혁파됨으로써 이 체제는 영구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대신하여 5도호(都護)․75도안무사제(道安撫使制)가 성립하여 민정적인 성격의 지방통치체제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현종 3년에 개편된 지방제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행 6년만인 현종 9년(1018)에 75도안무사는 모두 혁파되었다. 그리고 그 대신 4도호(都護)․8목(牧)․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이 설치되었다. 이제 고려의 지방통치제도는 4개의 도호부(使)와 8개의 목(使)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외관이 상주하는 56개의 주․군(知事)과 28개의 진(將) 및 20개의 현(縣)으로 편성되어, 중앙의 행정력이 군․현 단위에까지 침투하도록 짜여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고려의 외관제는 다소 출입이 있었으나, 기본체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말하자면 고려의 지방제도는 현종 9년에 일단 완성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처럼 갖추어진 고려시기 군현의 편제와 구조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군현이 주군현(主郡縣. 즉 主縣)과 속군현(屬郡縣. 즉 屬縣)으로 이원화되어, 주군현은 속군현을 거느리면서 경․도호부․목 등에 영속되고, 경․도호부․목은 다시 각각 자신의 속군현을 거느리면서 동시에 하위의 주군현(主郡縣)을 거느리는 편제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군현의 하부 행정 구획으로 향․부곡․소 등이 있어, 주군현은 물론 속군현도 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둘째, 읍격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주군현이건 속군현이건 모두 독자적인 통치구역을 가지고 독립적인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셋째, 규모가 작고 호구도 매우 적은 군소군현(群小郡縣)이 광범위하게 편성되어 있었다.
고려시기의 군현은 주목(主牧)과 영군현(領郡縣)․속군현(屬郡縣)의 3층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크게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군현(主郡縣)과 그렇지 못한 속군현(屬郡縣)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중앙정부의 정령(政令)은 주목과 영군현 즉 주현만을 직첩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속현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려시기에는 군현의 크기가 문제되는 게 아니라, 주현이 되느냐 혹은 속현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고려시기의 지방통치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동안 장성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앞서 서술하였듯이, 고려시기가 되면서 장성군에는 명칭의 변경과 읍격(邑格)의 하강이라고 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장성군은 백제․통일신라시기에 고시이현(古尸伊縣)․갑성군(岬城郡)으로 불리다가, 고려시기에 들어와서 현재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려시기에는 대략 두 차례에 걸친 지방 명호의 개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조 23년(940)과 성종 11년(992)의 일이었다. 태조 23년의 군현 칭호 개편은, 호족의 지배력이 강하거나 혹은 군사상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신라적 내지는 후백제적인 지방 행정체제를 명칭상으로나마 고려적인 것으로 개편하려는 데 주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태조 23년의 군현 명호 개편 때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개칭하지는 않았을 듯싶다. 그 당시 장성이 그만큼의 비중을 지닌 주요 지역이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장성군의 명칭 개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광범위한 칭호 개편이 이루어졌던 성종 11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고려시기의 장성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그리하여 성종 2년에 처음 12목이 설치되었을 때에는 나주목의 통할을 받았을 것이며, 성종 14년의 10도제 아래에서는 해양도(海陽道)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랬다가 현종 9년의 지방제도 정비를 맞이하여 나주목 관내의 영광군에 예속된 속현으로 자리매겨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삼계현과 진원현이 각각 영광군과 나주목에 이속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그처럼 형성된 고려시기 장성의 영속관계(領屬關係)를 알기 쉽게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정부(尙書都省) → 나주목(主牧) → 영광군(主縣) → 장성군(屬縣)․삼계현(屬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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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현(屬縣)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