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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그물 어로(漁撈)의 소멸에 나타난 도서민속사적(島嶼民俗史的) 의미
- 진도군 조도군도를 중심으로1) -
이 윤 선(목포대)
1. 서 론
碇船網은 다소 생소한 용어다. 어망과 관련하여 안강망, 유자망 등의 용어가 익숙한 데 비하면 더욱 그렇다. 정선망은 문자 그대로 닻배그물이라는 뜻이다. 닻이 많이 달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닻배는 이 그물을 싣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닻그물 어로는 칠산바다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에 한정되어 있다. 특히, 진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지역에, 나아가서는 진도군 조도면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기잡이 어업권에서도 닻배가 성행했던 지역이 조도지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의 닻그물 어로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걸쳐 넓게 분포하던 어로방법이었다2). 따라서 바닷고기에 대한 어로방법이 시․공간의 환경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점을 전제한다면, 닻그물 또한 지역적 어로 환경의 특수성을 시사해 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닻배 혹은 닻그물은 서해안에서 주로 조기잡이를 할 때 사용했다. 일부 다른 고기들이 잡히기도 했지만, 조기 이외의 것은 잡어로 분류해 버린다. 조기만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닻그물 어업이 목적하는 조기는 동해의 명태와 더불어 한국의 바닷고기를 대표하는 어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명태와 조기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祭物이었던 점이 이를 증명한다.
서해안의 조기잡이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3대 조기 어장으로 延平列島
, 漁泳島, 위도근해들 들고 있다. 이 중 본고의 닻그물과 관련된 어장은 위도근해이다. 그 중에서도 서해안의 수많은 어로민요에 등장하는 칠산바다는 조도 어민들이 碇船網을 통하여 드나들었던 일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닻그물, 곧 정선망은 자망의 일종으로 고기를 그물코에 꽂히도록 해서 잡는 어로도구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망어업사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야 할 어구어법 중의 하나로 판단된다. 물론 조기잡이를 망어업으로만 영위한 것은 아니다. 망어업을 제외한 대표적인 전통적 어구어법으로는 주낙어업을 포함한 조어업과 석방렴, 죽방렴 등의 어살어업 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닻그물이 구한말을 전후한 성쇄기를 거쳐 소멸되어버린 과정을 제작과정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의 고민은 닻그물의 소멸과정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이다. 특히 수산학, 사회학 혹은 인류학 등과 어떤 변별성을 가지고 닻그물의 소멸을 읽어내는가이다.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민속지적, 혹은 민속사적 고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민들의 생활사를 다룰 만큼의 관련 조사를 실시하지는 못했다. 민속지를 작성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닻그물의 생성과 발전과정 또한 필자의 역량만으로 소화해내기에는 무리였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재구해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로민속 혹은 도서민속적 고찰을 늦추거나 논리가 완성된 이후로 미루는 것은 책임있는 태도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한편의 문제는 민속사적 입장에서 도서민속사라는 용어의 사용이 적절한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도서민속론”에 대해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3). 도서민속학이 지역학, 또는 해양민속학으로서 시대적 전망을 함유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닻그물의 전개와 浮沈, 그리고 소멸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소멸이 갖는 의미를 도서민속사적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고의 부족한 논의들은 관련 전문가들의 질책을 통해 완성해 나가겠다.
2. 닻그물(碇船網)에 대한 이해
1770년경에 제정된 <均役廳事目>의 전라도 해세(海稅)에 관한 규정에는 어망의 하나로서 행망(行網)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여기서는 세금을 망(網)의 길이에 따라 매기게 되어 있다. 한편, 전라도 지방에서는 정선망(碇船網)을 행배그물이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서 보면, <均役廳事目>의 행망(行網)이 정선망(碇船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 즉, 정선망(碇船網)은 정망(碇網)이라고도 하였는데, 순수한 우리말로 닻배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망(漁網)은 그 역사가 상당히 깊은 우리나라 재래식 어망으로서 어법상으로는 저자망(底刺網)에 속한다. 기다란 장막처럼 생긴 자망(刺網)을 해저에 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에는 수십 컬레 혹은 수백 컬레의 닻을 채우게 되므로써 해저에 고정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그물을 닻배그물이라고 불렀고 이 그물을 위주로 조기잡이를 하는 배를 닻배라고 불렀던 것이다5).
한편, 한말에 전라도 지방에서 사용된 어망은 정선망 이외에, 중선망, 망선망을 비롯한 각종 자망, 궁선망, 주목망, 지인망, 설망, 분기초망 등이었다6). 일제 강점기까지 정선망(碇船網)은 면사로 만든 것이었고, 이것은 조도뿐만이 아닌 전라도와 충청도지방에서 주로 조기를 잡는데 사용하였다. 또 조기 이외에 민어, 달강어, 갯장어 등도 혼획하였지만 잡어로 분류하였다. 網의 길이는 40여미터에서 50여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어망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닻배에는 14명 내지 15명의 선원이 승선해야만 했다.
특이한 것은 이것이 전라남도의 완도 해남을 비롯한 진도 체도에 국한된 어구 어법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역적 특수성을 시사하지만, 왜 이 지역에만 국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닻배에서는 조기 뿐 아니라 멸치를 비롯한 이료용(餌料用) 어종도 많이 잡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주낙어선 수척이 항상 정선망어장(碇船網漁場)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설치 방법을 보면, 해안의 바위에 로프의 한쪽 끝을 묶고 한쪽 끝은 근 300M거리의 바다에 닻으로 고정시킨 뒤에 이어 어망을 매달아 놓은 형태7)도 발견된다.
그렇다면, 닻그물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이것은 망어업의 역사가 시작된 선사시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청동기 이전시대는 어망어업보다는 조어업(釣漁業)등의 외양성 어업이 성행하였다. 청동기 시대는 내수면에서 집중적으로 어망어업이 발달한 단계로서 이 시기는 도작(稻作)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었기에 더욱 주목된다. 원삼국 시대 이후는 내수면과 더불어 해수면에도 진출하여 지역의 환경에 맞추어 각 지역별로 내만성, 외양성 어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이다. 삼국시대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전문직의 단계이며 어구들이 부장품으로 매납되기도 한다8).
세종실록지리지의 양중어(梁中魚) 관련 설화를 통해 어량(魚梁)의 존재가 확인된 바 있지만9), 원시시대에는 대나 싸리 등을 얽어서 만든 삼태그물 같은 것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갈피(葛皮)와 같은 식물성섬유로 만든 것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토기의 빗살무늬나 방추차(紡錘車)의 유물로 미루어 보아 추(錘)가 달린 그물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미개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그물어구는 대부분 초망(抄網/채그물)인 것으로 보아 채그물을 최초의 그물형태로 추정하기도 한다.10) 이같은 소형 그물이 대형화함에 따라서 부망(敷網/들그물)으로 발달하고, 또 치는 방법을 고안해서 함정그물류로 발전하였으며, 채그물을 옆으로 사용한 것이 낭장망류(囊長網類)가 되고, 더욱 발달한 것이 승망류(昇網類)가 되었다. 낭장망류(囊長網類)를 고정하지 않고 이동하며 고기 잡는 방법이 지인망(地引網)으로 발전하고 배로 예인하여 잡는 방법이 선인망이 되었다. 현재의 건착망(巾着網)은 건간망(建干網/개막이 그물)에서 출발해서 썰물을 기다리지 않고 어획하기 위한 것이 현대의 자망(刺網/걸그물)이 되었고, 걸그물에 걸린 고기는 어체(魚體)가 많이 상하고 고기를 떼어내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건착망(巾着網)을 생각하게 되었다.11)
여기서, 닻그물은 망어업의 오랜 역사를 거쳐 정착된 자망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는 지역적 특수성이나 직접적인 발전의 경로를 밝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는 서남해안 도서지역의 역사가 한편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즉, 현재 어민들의 입도조는 임란 이후의 세대라는 설을 전제한다면12), 그 전 세대가 운용하던 어구 어법들을 직접 승계하진 못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역적 특수성이 아닌, 서남해안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던 어구 어법은 승계한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석방렴 어업이나 조어업 등이 그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조도군도의 어민들은 조선중기까지 주로 연안 어업에 치중하여 석방렴(石防簾)과 낚시 어업, 그리고 채취어업에 주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부는 주목망(柱木網) 등의 소규모 어장 어업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이 사용했던 어망은 주로 성근 베로 만든 무결절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3. 닻그물(碇船網)의 제작
조도군도의 닻그물 제작은 원료의 자체수급이 어렵기 때문에 육지지역과의 교류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현지 어민들의 구술에 의한, 닻그물 제작과정을 살펴보겠다.
어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칡덩굴이 필요하다. 칡덩굴은 조도에서 구하기는 힘들고 육지에서 구해와야 한다. 조도사람들이 칡을 주로 구입했던 지역은 영광이나 법성포, 해남의 횟개(화원반도 위쪽에 있음), 영암 등이다. 그곳 장터에는 새끼다발처럼 칡다발을 놓고 판매하는 상인들이 있었고, 때로는 현지 주인을 통해 칡을 직접 채취하기도 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로 차기에 닻배 조업을 할 선원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가 십일월쯤 된다. 이렇게 구입한 칡줄은 나뭇단을 쌓듯이 채곡 채곡 쌓아서 비바람 들키지 않게 보관한다. 이것을 1월이 되면 꺼내어 바닷물에 담그게 된다. 칡줄이 물이 불어 탱탱해지면 물에서 건져다가 잘게 세로로 쪼갠다. 쪼갠 칡줄은 길게 느려 뜨려 약 일주일정도 방치해둔다. 이후 길게 쪼개진 칡줄은 집안의 기둥이나 마당의 적당한 곳에 설치한 물레를 통해 꼬아야 한다. 이것을 디린다고 하는데 보통 쓰임새에 따라 굵게 꼬기도 하고 가늘게 꼬기도 한다.
라배도의 경우 칡줄을 디릴때는 마을 사람 전원이 참석했다. 보통 닻배 조업을 나갈 선원들과 그 가족 중심으로 꾸려지지만 결국 선원들이 마을 사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 전체가 나와서 협동하여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라배도 마을 앞 모래사장은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라배도에 닻배가 9척이 있을 당시에는 마을 사람만 갖고는 조업에 임할 수 없으므로 인근 섬이나 진도 체도 그리고 육지에서 선원을 사오기도 했다.
면사는 1900년 이전에는 직접 물레에서 만들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영광 법성포 장에서 구입해서 썼다. 면사는 질기지 못하고 잘 끊어졌기 때문에 기름칠을 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었다. 면사에 들이는 기름은 들깨기름, 참기름, 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여기서 갈이라 함은 해당화 뿌리를 삶아서 진하게 만든 물로 면사 그물이 바닷물에서 오래 견디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라배도에서는 주로 들깨기름을 사용했는데, 소시깨(작은 소나무 잎사귀)로 면사에 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기름칠한 면사는 해안가에 약 20일정도 방치했다가 그물을 꿰매게 된다. 그물 작업13)은 뱃동무(선원)로 나갈 사람들이 모두 모여 협동작업을 했고 가족들이 모두 동원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러나 이들이 임노동자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물을 물에 뜨거나 세우게 하는 것은 툽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나무로 만든다. 참나무 껍질 또한 조도에서 구하기는 어려웠고 산림이 우거진 육지에서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 구입한 참나무 껍질을 솥에 넣고 푹 삶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변한다. 이 부드러운 껍질을 길이가 약 15~20cm, 두께가 약 10cm정도 되게 잘라 묶는다. 두꺼운 껍질은 한 개로도 충분하지만 얇은 껍질은 두 세 개를 묶어야 된다. 이렇게 묶은 툽은 그물이 물에 뜨는 역할을 한다.
그물 닻은 목수의 몫이다. 목수가 전담해서 만들기 때문에 훨씬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도 참나무를 사용하는데, 그 개수가 많기 때문에 참나무의 소요량도 만만치 않다. 물론 영광이나 법성포, 그리고 해남이나 진도 체도에서 구입을 한다.
그물 윗줄은 윗배리라고 하며, 칡줄을 사용했다. 그물 아랫줄은 아랫배리라고 하여 짚줄을 사용했다. 짚은 진도 체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 주로 진도군 임회면이나 지산면 등의 서남해 면지역에서 구입해 왔다. 짚줄도 칡줄과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꼬게 된다. 윗줄인 칡줄 바로 밑에는 살배리라는 속줄이 있는데 맨 윗 그물코는 여기에 묶여진다. 살배리는 짚으로 가느다란 새끼를 꽈서 만든다.
이제 들기름을 멕여 놓은 면사로 윗줄은 칡줄에 아랫줄은 짚줄에 꿰매어 정선망 그물을 완성한다. 그물의 폭이나 길이는 배의 크기와 조업할 뱃동무 등 환경여건을 살펴서 만들었지만 대부분 가로 80코에 세로 스무발에서 스무 세발 정도의 규모로 완성시킨다. 이것은 대략 길이가 40~50m, 폭이 10~15m 가량 된다.
그물이 다 ‘조사지면(완성되면)’툽과 굽독을 채운다. 굽독은 망추(網錘)로서 그물독이라고도 하는데, 닻과 더불어 그물이 곧게 펴지는 역할은 물론 지표면에 가라앉게 하는 역할을 한다. 굽독 주변을 면사줄로 잘 얽어서 빠져나가지 않게 한다. 툽이나 굽독의 간격은 그물코로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해서 달아야 한다. 그물코 여덟 개에 툽 한 개를 달고 툽 여덟 개 마다 굽독 한 개씩을 단다. 이 굽독은 약 여덟자 간격인 셈인데, 굽독 세 개마다 닻 한컬레를 단다. 곧 스물넉자 칸에 닻 한 개씩 달아 메는 셈이다. 이렇게 완성된 그물의 닻이 50개에서 100여개를 넘나들었고 100개가 훨씬 넘는 그물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 규모가 상당히 컸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제작과정은 음력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다. 정선망 제작과정을 월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닻그물 제작 시기와 관련하여 닻배도 손질하거나 새로 무으게 된다. 닻그물 원료를 시장에서 구입하게 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닻배도 임대해서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게 된 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살펴본 바 있기 때문에 생략 한다14).
10월: 짚구입 및 저장, 참나무 구입 및 저장, 면사실 뽑기
11월: 칡줄 구입 및 채취작업. 면사실 뽑기
12월: 칡줄 저장 및 보관, 면사실 뽑기
1월: 칡줄을 바닷물에 담그기, 쪼개기, 짚줄 만들기, 줄 디리기, 참나무 닻만들기
2월: 그물코 조스기(그물 제조), 면사실 갈하기(들기름 멕이기)
3월: 닻그물 완성하기, 한식사리에 출어.
[그림] 닻그물의 형태와 설치도
4. 닻그물(碇船網) 혹은 닻배의 어로작업
이렇게 완성된 그물은 잘 마무리를 시켜 보관했다가 한식절기가 되면 배에 옮겨 싣는다. 이때 배에는 약 두달에서 세달가량 먹을 식량과 물, 술, 그리고 부식 등을 준비한다. 출어날은 선주를 비롯한 선원들의 생기복덕을 순서대로 짚어 생기가 맞는 사람이 치를 잡는다. 물론 항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운행은 칫사공의 몫이 된다. 뱃동무는 대개 14명에서 15명으로 꾸린다. 이들은 선주, 칫사공, 이물사공, 화장, 웃급, 아랫급, 이하 뱃동무들로 나뉜다. 선주와 선장은 겸하는 수가 많고 여기서의 칫사공은 선장을 말하는 것이다.
선원과 관련하여 1860년대 오페르트의 기록을 보면, 고종 3년(1866)에 2차, 동 5년에 1차, 합계 3차에 걸쳐 서해안 지방을 내항하고 우리나라 어선을 기술하면서 선원의 숫자를 언급한 바 있다15). 30명 내지 60명의 뱃사람이 승선해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배의 규모뿐만 아니라 어획의 규모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뱃사람들의 조직이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내항 지역이 서해안이고 다수가 승선한 것으로 보아 필경 조기잡이 어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해안의 대표적 어종이 조기이고, 대형어선임을 전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기어업에 대한 갖가지 선박에 대한 정황을 증거해 주는 것일 뿐이지만, 어쨋든 碇船, 中船, 網船 등이 서해안의 주요한 조기잡이 어선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대목이다16).
닻배 조업 준비가 다 끝나면 라배도 같은 경우, 풍장굿을 걸판지게 치면서 출어를 하게 된다. 이때는 마을 사람 모두가 나와 만선을 기원했고 선주댁으로부터 제공된 갖은 음식을 나눠먹을 수가 있었다. 특히 라배도의 경우는 출어 때마다 항상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한다. 관매도의 경우, 행선 전날 밤에 행선고사를 모셨으며 라배도를 비롯한 기타 조도군도의 닻배들은 출어 당일 배에다 드리는 출어고사를 지내고 출항하였다.
출발은 대개 한식사리를 전후해서 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발을 하게 되기 때문에 운행을 같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개 상조도 위쪽에 위치한 라배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조도의 일원과 관매도, 대마도 진목도, 거차군도, 맹골도 등의 닻배들은 꼭 상조도의 어두지를 들러서 뱃고사를 지내고 다시 출발하곤 했다.
이렇게 출발한 조도의 닻배들은 대부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섬의 연안을 끼고 올라가게 된다. 신안의 우이도안과 밖을 거쳐 자은도의 밖, 재원도 밖, 혹은 임자도 안을 경유하여 낙월도, 안마도, 칠산도에 이르게 된다.
조업지역은 주로 칠산도를 중심으로 한 칠산바다이고 흑산도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닻배의 특성상 큰바다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민들의 표현대로라면 키 30질을 넘는 곳에서는 조기잡이를 하지 못한다. 닻그물의 생태적 환경조건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처음 어장을 하는 곳은 비금도 밖 칠팔도 부근이다. 칠팔도 밖 열여덟발 위치에 처음 그물을 친다. 칠팔도에서 흑산도 안으로 형성된 이곳 푸냉이밖 바다에서 한사리 즉 보름 조업을 하고 위로 올라간다. 한 사리에는 날씨가 궂지만 않으면 약 10여회 그물을 뽑는다. 물때에 따라 밤에 조업을 할 때도 있고 낮에 할 때도 있다. 이어서 안마도로 올라간다. 여기서는 주로 굵고 알찬 조기를 어획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산고사17)를 지낸다.
작업과정을 뱃사람 별로 나누어 보면, 선주는 대개 칫사공이나 이물사공을 겸하는 수가 많다. 칫사공은 문자 그대로 배의 키를 잡는다. 이물사공은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조기들의 흐름을 눈으로 보고 식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년 어로주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물사공은 눈에 핏발이 서거나 독한 눈병을 앓는 경우도 있다. 화장은 뱃사람들의 먹거리를 담당한다. 웃급과 아랫급은 짓가림에서 이물사공과 대등한 대우를 받는다. 대개 반짓 정도의 몫을 더 받는다. 웃급은 그물의 윗배리를 아랫급은 그물의 아랫배리를 담당한다. 이하 뱃동무들은 기타 업무를 맡아서 한다.
조기들의 북상이 시작되면 법성포, 위도, 안마도, 칠산도 근처에서 본격적인 조기잡이를 시작한다. 이곳이 조도군도 어민들의 일년 일터다.18) 여기서 주로 세 사리 이상 네사리 혹은 다섯사리까지 어장을 한다. 즉 두 달에서 두달 반이 소요된다. 기간으로는 4월에서 6월까지 약 세달 동안을 이곳 칠산 바다에서 기거한다. 물론 위도 안마도, 법성포 등지에 주인을 정해 두고 식수나 기타 식료품을 조달하기도 한다. 배를 손질하는 것도 이곳이다. 이같은 지역적 조건 때문에 이곳에는 파시와 조기 집산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세달 여에 걸쳐 조기잡이를 끝낸 닻배 뱃동무들은 파시촌에 출하하거나 상고선을 통해 잡은 고기를 매매하고 다시 조도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닻그물을 이용하는 어로코스는 조기의 회유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회유성 어족인 조기떼를 따라서 북상하다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다만, 닻그물이 사용되는 수심이 키 30질 이내인 칠산도와 안마도 안쪽의 연근해에 국한되기 때문에, 충청도 이북지역과 발해만의 조기 어군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 선박과 그물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닻그물 사용과 관련된 참조기의 회유로는 흑조의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른바 쿠로시오(흑조) 해류는 북대서양의 Mexico 만류(灣流)(Gulf current)와 함께 세계적인 대해류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다. 쿠로시오가 Luzon, 대만 동방으로부터 유구열도 서방의 동중국해의 대륙붕의 외연을 유속 1~2.5knot, 유폭 수십 해리로 북상하여, 아마미오시마(庵美大島)의 북서방에서 분리된 것이 대마난류로 갈라지게 되어 대한 해협을 거쳐 동해로 유입된다.
이 흐름을 따라 회유하는 참조기 어족은 3계 계통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해혼합군, 강소군 및 절강군 등 3계 계통군이 그것이다. 항해혼합군은 발해연안 압록강 하구역 및 한국 서안의 각지에서 산란하고 10~11월에 외해측으로 이동한 후, 황해 중, 남부에서 제주도 서방 및 서남측 수역으로 남하한다. 강소군은 양자강 하구역의 북측에서 산란한 후 8~9월경에 외해측으로 이동하고, 12월~익년 3월에 황해 중․남부로부터 동중국해의 깊은 수심에서 월동을 한다. 절강군은 2~3월에 대륙남부의 절강 근해에 출현한 후 3~5월에 연안역에서 산란하고 외해측으로 이동하여 동계의 깊은 수심에서 월동을 한다.19)
닻그물 어로와 관련된 것은 물론 황해혼합군이다. 이 회유로를 따라 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 3개월의 조업기간이 끝나면 닻그물 어업은‘강치지만’(종료하지만), 조기잡이는 주낙 등의 어업으로 계속 이어진다. 농사력에 의한 벼 재배주기를 생각하면 조도 어민들의 닻그물 어로가 지닌 일년주기의 비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일년의 전 주기를 바쳐 닻그물 어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주낙을 포함한 조어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닻그물을 사용하지 않는 조도 연근해바다로써, 이곳을 푸냉이 바다라고 한다. 원래 푸냉이는 신안군 초란도의 다른 이름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20), 조도군도의 푸냉이는 연근해어업을 하는 곳, 혹은 닻배조업을 하지 않는 곳이라는 심리적 공간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한편, 한식이후부터 조도군도의 닻배들이 칠산바다에서 잡아올린 조기는 참조기이고 조도군도의 연안에서 낚시와 주낙 등으로 채포하던 조기는 부서와 보구치(백조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식 이전 조도군도의 연안에서 주낙으로 잡았던 조기와 7, 8월 이후에 푸냉이 바다에서 주낙으로 잡았던 조기도 회유해 내려가던 참조기의 일부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21). 이렇게 잡힌 참조기가 영광굴비가 되는 점은 이미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도군도의 어민들이 닻배와 닻그물을 통해서 영광굴비를 생산해낸다는 점은 아는 이가 드물다.
5. 닻그물의 盛衰와 소멸
그렇다면, 닻그물로 조기잡이를 시작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조선 세종 14년(1432)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의 토산부에 어류 34종의 이름과 함께 石首魚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조기의 최초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기를 원료로 하는 鹽乾 가공품인 영광굴비가 고려 때부터 유래했다는 일설이 있어22) 조기어업은 훨씬 더 이전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러한 영광굴비의 기록만으로 닻그물의 역사를 소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에 앞서, 필자는 졸고23)를 통하여 이종길의 논문24)을 인용한 맹골도의 위약문서를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 文記가 연대를 측정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으나, 17세기 후반의 丁卯年(1687)이나 18세기 중반의 丁卯年(1747)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고, 船隻이 典當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文記는 1671년에 船隻을 造船하여 인도하기로 하면서 위약의 경우 책임관계를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25) 물론 필자는 이것을 닻배와 관련지어 연대를 추정하였다. 따라서 닻그물의 역사를 추정하는 하나의 고리로 이 위약문건의 연대를 다시 사용하고자 한다. 또한 조도어민들의 구술에서 드러나는 닻배 전성기의 역사도 닻배와 마찬가지로 3~4대 以前 說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이 구술을 전제로 한다면, 닻그물 어로의 최대 전성기는 조선 후기, 그것도 한말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전술한 위약문서의 시점인 18세기에 닻그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본고의 사적 관점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어쨌든 현재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도 어민들의 3~4대 이전 선조의 연대를 닻그물 어로의 전성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26). .
여기서, 닻그물 어로의 최대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한말을 잠식하게 된 일제 강점기의 상황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닻그물의 소멸과 일제 강점기의 어로침탈은 불가분의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 어업에 대한 침탈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명된 바 있다.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까지의 미국 영국 등 외국어선의 일본 근해조업이 일본인을 자극시켜 일본 정치문제로 크게 비화하고 그 대항책으로 1889년의 원양어업장려법의 제정에 이르러 무차별적 외국형 어선과 기술의 도입을 자행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은 연안어업의 분해를 초래하고 그 화살 끝을 한국어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일본이 1901년에 [어업법]을 제정한 것을 고려하면 어업의 기본제도를 만들기 전에 [원양 어업법]을 제정하여 해외진출을 유도했고 자국정치문제의 해소와 피폐된 어촌 어민의 활로를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通漁라고 하였는데, 외국 영해수산 조합법에 의하여 설립되는 通漁組合이 1870년대에 시작하여 1900년 초에는 72개에 달하였다는 것으로 그 방대함을 알 수 있다.27) 그 실체를 입증하는 어획물 운반선수가 1909년에 하야시가네(林兼)상회(그후 大洋漁業)것 만으로도, 1,000여 척에 달했다고 하니 그 방대함과 조선어장의 풍도를 짐작케 한다.28)
1909년 5월 발생한 칠산바다 사건은 이런 정황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증거임을 밝힌 바 있다29). 이것은 韓國漁業法 시행(1909년) 이후 일인들이 허가를 내세워 발달된 鮟鱇網漁船을 이용하여 七山 앞바다에서 어로행위를 자행하자, 생계의 터전에 위협을 느낀 어민들이 결사항쟁하여 일본어민을 다수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안강망 어업이 일인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칠산바다를 주 무대로 하여 활동하던 조도 어민들의 활동이 위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안강망에 의하여 정선망이 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안강망은 칠산 바다와 海況조건이 비슷한 일본 九州의 有名海에서 개발되었다. 닻그물이 전성기일 무렵 이곳에선 이미 鮟鱇網이라는 어법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우리 中船網과 비슷한 것이다. 鮟鱇網은 일본의 大川지방에서 강물의 흐름을 이용하는 漁具로서 발달되었는데 일면 밧샤網, 道樂網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그물을 우리 서해안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은 1900년(명치 33년) 長崎縣 기술지도자 正林英雄이었다30).
이것이 일단 도입되면서 칠산어장은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된다. 蝟島 근해에서의 일본 鮟鱇網 어선의 증가 상황을 보면, 1900년에 겨우 4척이던 것이 7년 후인 1907년에는 509척으로 급증했고, 1912년에는 1,100척, 4800명으로 늘어났으며 척당 평균 어획고는 6백円에 이른다. 1908년 경부터는 파산한 한국어민을 어부로써 고용하기에 이른다.31) 한국어민이 안강망을 이용하여 자영하게 된 것은 겨우 1910년 말부터라고 하니 그 사이 한국어민은 조기의 보고 칠산 앞바다에서 완전히 배제당하고 생업을 잃은 채 일본 어업자의 고용살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32) 즉, 도입된 鮟鱇網 어업 때문에 조도 어민들은 전통 어장의 상실에 대한 상대적 위협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33).
나아가 어선의 동력화 또한 조도 어민들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자생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민족별 어선보유현황 표를 참고로 하면, 韓海에서의 어선 동력화율은 1919년 0.04%에서 1930년에는 2.2%로 1940년에는 4.8%로 진전된 것을 알 수 있다. 船型別 어선소유 현황은 1920년 한국인은 조선형 14,062척, 일본형 6,245척으로 전체 어선 수의 53.2%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사용하는 어선 상당부분이 일본어선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겠다.34) 이것은, 전통 어망으로서의 정선망이 자생적 활로를 모색하지 못하고 일제 중선배에 의해, 즉 안강망, 유자망에 의해 잠식 또는 침탈되어 갔던 대표적 사례들이다. 나아가 파시 등의 유통구조 또한 일인들에 의해 유린되었던 정황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이같은 과정들을 통하여 일본은 한국 어장을 잠식해 나갔는데, 우리 어업의 자생적 활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 어민들이 전통적으로 영위하던 대표적 어업인 명태(동해), 조기(서해), 멸치, 대구 및 청어(남해)잡이에도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地先의 定置漁場 및 암벽에 부착, 자생하는 海藻類(연안 어민의 생계 터전)의 채취까지 손을 댔다. 생산과정과 유통까지 장악했던 것은 1889년 부산에 설립된 부산수산회사의 어시장을 효시로 하고 있다. 또 이로부터 불과 20년만에 전국의 중요 항구와 경성, 대구, 평양과 같은 내륙의 소비지 시장마저 장악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촌에 유민이라 부르는 건달들을 풀어 반강제적으로 수산물을 買集하고 있었다.35)
이것은 한일 어민사이에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증거해 준다. 그 결과 한국인은 결국 경쟁에 이기지 못하고 일본인에게 양보하거나 혹은 일본인의 어선에 승선하여 오로지 勞役에 종사하는 수밖에 없었다.36) 이것은 곧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碇船網이라는 닻배 조업의 자생적 발전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조도군도 어민들에게 천혜의 어장으로 그리고 일터로 기능하였던 칠산어장을 침탈당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편, 碇船網 어업이 일제 강점기의 鮟鱇網도입과 일본식 어선(쌈판배)의 도입 등을 계기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 鮟鱇網은 다시 流刺網으로 바뀌게 된다. 鮟鱇網 초기의 조기잡이만 해도 韓船과 일본식 목선을 사용했었지만 流刺網의 도입은 동력선의 도입과 때를 같이 한다. 조도 어민들은 流刺網을 조기 투망이라고도 부른다. 닻배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50년대 말기에는 참조기 어획의 누년별 주된 어업을 보면, 안강망(鮟鱇網) 어업이 주였으나, 1960~1970년대에서는 유자망(流刺網) 어업이 주가 되었다. 이것은 1960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주로 무동력 어선이었으나 그 이후는 동력화가 되면서 어선 세력이 대폭 증가한 때문37)이라고 한다. 또 어황(漁況) 예측을 위한 상관분석 등을 토대로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이전에는 유자망(流刺網) 어업에서 가장 높은 어황(漁況) 상관을 보였으나, 그 이후에는 오히려 저인망(底引網)에서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한다.38)
이렇게 잠식당하던 닻그물 어로는 점차 쇠약해지다가 조도면 상조도 여미리 박계용(1908. 어업)선주를 마지막으로 한국어업사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碇船網 조업이 조기의 回遊를 따른 生態的 어로활동이었다면 이어지는 鮟鱇網과 流刺網 그리고 底刺網 등은 관련 선박과 더불어 非生態的 어로 활동 쪽으로 전개된 셈이다. 조기 어업이 해를 거듭해 갈수록 불황기에 처하는 것은 이를 증명해준다 하겠다.39)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조도군도의 어망(漁網)변화
1600년初~ 1700년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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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1770년 (違約文件, 行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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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1850 (口述된 先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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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初 (日帝强占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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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박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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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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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結節網 등의 원시적 漁網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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碇船網(行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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鮟鱇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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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刺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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底引網 |
4. 결 론
본고는 닻그물(碇船網)이라는 우리나라 전통적 어망의 제작과정과 역사를 도서민속사적 입장에서 정리해 본 글이다. 논의 자체가 빈약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오류가 예상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도서민속사적 논의를 시도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선․후학들의 질책을 바랄 따름이다.
조기잡이는 서해안의 대표적 어로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조기잡이는 전통적으로 낚시어업과 어살어업 등 다양한 어구 어법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망의 일종인 정선망 어구어법은 서남해안의 조기어업에 가장 대표적인 망어업이라고 할 수 있다.
조도지역에서 성행하던 닻그물 어로는 고기록에 나오는 행망과 연관지어 해석해보았다. 1770년경에 제정된 <均役廳事目>의 전라도 해세(海稅)에 관한 규정을 근거로 들었으며, 전라도 지방에서 정선망(碇船網)을 행배그물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均役廳事目>의 행망(行網)이 정선망(碇船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박구병의 논의를 원용하였다.
즉, 정선망(碇船網)은 정망(碇網)이라고도 하였는데, 순수한 우리말로 닻배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망(漁網)은 그 역사가 상당히 깊은 우리나라 재래식 어망으로서 어법상으로는 저자망(底刺網)에 속한다. 이 그물의 제작과정을 현지 어민들의 구술을 토대로 전개해봤다.
필자는 이 제작과정과 시기별 어로를 생태성의 입장에서 읽고자 하였다. 생태적이고 전통적인 제작과 조업은 다시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자생적 발전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동안의 제반 어로상황을 통해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전통 어망으로서의 정선망이 자생적 활로를 모색하지 못하고 일제 중선배에 의해, 즉 안강망, 유자망에 의해 잠식 또는 침탈되어 갔던 맥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상 닻그물의 제작에서부터 작업에 이르기까지 본고에서 살펴 본 것은 닻그물 어로의 발생과 소멸을 중심으로 한 계절의 순환에 따른 어기, 자연물을 이용한 제조, 조기의 회유로에 따른 조업 등이었다. 그러나 닻그물의 소멸과 함께 이 회유의 시스템은 붕괴되었다. 물론 회유 시스템의 붕괴로 닻그물이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우선, 본고에서 살펴 본 닻그물의 제작에서 조업에 이르는 순환적 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조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기적 회유이고, 어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간적 순환구조이다. 조기는 물론 조도군도 어민들의 이 순환주기가 와해되었다는 뜻이다.
겨울(1~2월): 닻그물의 제작준비 작업
봄(3~6월): 출어, 칠산바다를 중심으로 한 조기잡이
여름(7~9월): 주낙, 혹은 낚시로 회유해 내려오는 조기잡이
가을(10~12월): 닻그물 원료 준비(면사실 등)와 저장
이것을 다시 공간적 순환구조로 살펴볼 수도 있다. 적어도 조도군도의 어민들에게 정선망 어로는 삶터와 일터가 확연하게 구분된 공간 순환 시스템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라배도의 경우, 출어를 앞두고 벌이는 풍장굿은 집에서 일터로 나가는 공간이동에 대한 의식을 뜻한다. 전술한 조도군도 어민들의 어두지 출어고사는 집을 포함한 삶터에서 일터로 나가는 다음 단계의 공간이동 의식으로 볼 수 있다. 조도군도의 어민들은 이 의식을 통하여 비로소 삶터에서 일터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도서적 적응관념은 비단 조도군도의 어민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조도면 가사도 어민들은 이러한 시공간의 의례들이 당제에서 도깨비굿의 적응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40).
푸냉이를 넘어서면 첫어장에서 신산고사를 지낸다. 신산고사 이후의 약 3개월간은 칠산바다에서 생활한다. 일터인 셈이다. 이후 회유하는 조기를 따라 내려오면, 여름철에 푸냉이 안바다를 중심으로-대개 병풍도에서 신안군 접경지역이 대상지역이다- 연승(주낙)어장을 한다. 물론 이때는 닻그물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공간은 시기적 구조와 맞물려 순환된다. 이 공간적 순환구조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2] 닻그물 어로의 공간적 순환
만선풍장굿
삶터(조도군도) 푸냉이 일터(칠산바다)
(가을, 겨울) 출어풍장굿 (여름) 신산고사 (봄)
어두지출어고사
결론적으로 본고에서 살펴 본 닻그물의 소멸은 이러한 시공간적 순환구조의 와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과정을 필자는 시공간적 순환구조의 와해로 결론짓고자 한다.
그러나 시공간적 순환구조의 붕괴가 닻그물을 통한 어로활동이 중지되었다는 표면적인 뜻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 논의를 통해 비생태적 현실의 한 단면을 암시하고자 한 셈인데,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필자의 욕심이 지나친 탓이거나, 필자의 논의가 부족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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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고에 인용되는 자료들은 나승만교수와 필자가 2000년부터 실시한 도서민속 조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주요 조사는 2000년 8월에 상조도 라배도, 죽항도 현지조사, 2000년 8월 목포시 현지조사, 2001년 7월 관매도 현지조사 외에 산발적인 추가조사 등을 들 수 있다. 도움을 준 제보자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상조도 라배도의 한양배, 상조도 여미리의 박계용, 허효석, 목포시 산정동의 박윤중 옹 등은 주요제보자 들 중의 한사람이다.
1)본고에 인용되는 자료들은 나승만교수와 필자가 2000년부터 실시한 도서민속 조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주요 조사는 2000년 8월에 상조도 라배도, 죽항도 현지조사, 2000년 8월 목포시 현지조사, 2001년 7월 관매도 현지조사 외에 산발적인 추가조사 등을 들 수 있다. 도움을 준 제보자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상조도 라배도의 한양배, 상조도 여미리의 박계용, 허효석, 목포시 산정동의 박윤중 옹 등은 주요제보자 들 중의 한사람이다.상조도라배도:한양배(1927), 한학록(1930), 한영춘(1945), 한길배(1934), 심남만(1924), 한학용(1925), 박종연(1936), 한석봉, 한호림(1924), 박송산, 한명천(1936), 신상호(1925)
상조도라배도:한양배(1927), 한학록(1930), 한영춘(1945), 한길배(1934), 심남만(1924), 한학용(1925), 박종연(1936), 한석봉, 한호림(1924), 박송산, 한명천(1936), 신상호(1925)상조도 여미리: 박계용(1908), 허효석(1919)
상조도 여미리: 박계용(1908), 허효석(1919)하조도 나래리: 박경식(1945)
하조도 나래리: 박경식(1945)관매도: 최북동(1926)
관매도: 최북동(1926)가사도: 장흥규(1939), 박영일(1956)
가사도: 장흥규(1939), 박영일(1956)죽항도: 이관학(1948), 박진섭(1927)
죽항도: 이관학(1948), 박진섭(1927)목포시 옹금동: 박복동(1949)
목포시 옹금동: 박복동(1949)목포시 산정동: 박윤중(1920)
2)한국수산지에 의하면, 碇船網(碇網)은 어망을 해저에 병풍처럼 세우고 碇으로써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과거부터 전라, 충청 양도지방에서 주로 조기를 어획하는 데 사용했다고 나와 있다.
2)한국수산지에 의하면, 碇船網(碇網)은 어망을 해저에 병풍처럼 세우고 碇으로써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과거부터 전라, 충청 양도지방에서 주로 조기를 어획하는 데 사용했다고 나와 있다.수산사편찬위원회, ꡔ한국수산사ꡕ, 수산청, 1968, 160쪽
3)졸고, “서남해안 시대의 민속학에 대한 시대적 의미”, ꡔ21세기 광주․전남ꡕ 제64집, 2002. 12.
3)졸고, “서남해안 시대의 민속학에 대한 시대적 의미”, ꡔ21세기 광주․전남ꡕ 제64집, 2002. 12., “조기잡이 어로민요와 닻배의 민속지적 고찰”, 목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2.
4)박구병, ꡔ한국어업사ꡕ, 정음사, 1975, 105쪽.
5)진도군 조도군도 사람들에게 닻배는 찬란한 어로역사 그 자체이다. 한말 칠산 바다를 가득 메운 닻배의 거의 전부가 조도배였다는 주장이 이 점을 증명한다.
6) 박구병, ꡔ한국어업사ꡕ, 정음사, 1975, 105쪽.
7)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ꡔ韓國民族文化大百科辭典ꡕ 14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812~813쪽.
8)김건수, ꡔ한국 원시․고대의 어로문화ꡕ, 학연문화사, 1999, 225~227쪽.
8)김건수, ꡔ한국 원시․고대의 어로문화ꡕ, 학연문화사, 1999, 225~227쪽.이글에서 김건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석기 시대 전기부터 한반도는 농업개시 전단계로 어로, 수렵, 채집이 중요한 생업 수단이었다. 이 가운데 어업은 외양성 중심이었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밭농사가 시작되면서 어로 형태는 중기까지의 외양성에서 내수면 어업으로 변화하고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완전히 내수면 어업이 확립되었다.”
9)世宗實錄地理志에 인용되고 있는 檀君古記의 <주몽탄생설화>에 梁中魚가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일찍부터 나뭇가지나 갈피를 이용한 魚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0) 노원기, “진도의 수산업과 어촌연구”, 고려대 지리교육 석사논문, 1992, 14쪽.
11)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ꡔ韓國民族文化大百科辭典ꡕ 14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890~891쪽.
12) 이해준, “조도지역의 역사적 배경”, ꡔ도서문화ꡕ 제2집, 도서문화연구소, 1984, 85쪽.
13) 라배도에서는 그물 작업을 “코 조슨다”라고 한다.
14) 졸고, “조기잡이 어로민요와 닻배의 민속지적 고찰”, 목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2.
15)조선의 어선은 중국의 그것보다 도리어 일본 것과 비슷한 것이었으나 그 만든 솜씨는 조잡하였다. 밖의 판장은 나무못으로 서로 짜여져 있고 짜서 만든 자리로 돛을 삼았다. 대단히 깊기는 하나 갑판이 없고 하나씩 떨어져서 옆으로 놓여 있는 배들뿐이었으며, 선실에 덮은 것이 전혀 없고 잡은 물고기는 그 안에 그대로 던져진다. 배는 어느 것이나 30명 내지 40명이 탈 수 있음직하게 보였으나 뒤에는 60명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16) 수산사편찬위원회, ꡔ한국수산사ꡕ, 수산청, 1968, 163~164쪽.
16) 수산사편찬위원회, ꡔ한국수산사ꡕ, 수산청, 1968, 163~164쪽.七山灘에는 -중략-이 어장에 來集하는 어선의 어구는 道에 따라 다르다. 황해도에서 오는 것은 대개 中船 및 網船이다. 중선에는 25人 내지 30人의 어부가 승선하여 조업하며 一漁期의 어획고는 300貫文內外이다. 이곳에서 어기가 끝나면 곧 황해도 延平灘으로 轉漁한다. 網船에는 34, 5人 내지 40人이 승선하여 조업하며 一漁期의 어획고는 1,000貫文 以下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다. 전라도에서 오는 것은 대개 碇船으로서 14, 5人의 어부가 승선하여 조업하며 一漁期의 어획고는 200貫文 內外이다. 충청도에서 오는 것은 대개 駐木으로서 10人 내지 14,5人이 승선하여 조업하며 一漁期의 어획고는 200貫文 내지 1,000貫文이다.
17)신산고사는 맨 처음 잡은 조기를 조상들게 바치는 고사이다. 뱃속에서 소금으로 절간했다가 보통 안마도 안에서 이 고사를 지내게 된다.
18)조기는 어업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곡우날 전날에는 칠산도 안에 들어왔어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도 곡우날 오전까지 뻘 속에 묻혀있다가 곡우날 오후가 되면 와와하고 바람소리처럼 울어댄다고 한다. 제보자 박윤중과 박계옹옹에 의하면 조기가 알을 싸야 울음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렇게 묻혀 있다가 오전에 산란을 하고 오후가 되면 대바람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19)백철인, “韓國近海 참조기(Pseudosciaena polyactics Bleeker)의 漁況과 海況의 關係”, 부경대학교 이학박사학위논문, 2001, 2쪽.
20) 김치만(1938, 남, 농업, 신안군 자은면 고교리), 2002, 7. 15. 나승만, 필자가 조사.
21)이관학(1948, 어업, 진도군 조도면 죽항도리), 2001년 3월 22일 나승만, 이경엽, 필자 등이 병풍도, 거차도, 죽항도, 청등도 주변에서의 조기 주낙과 조기 낚시에 대해 면담조사 하였음.
22) 원종오, “법성포의 영광굴비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지리학석사학위논문, 1997, 11쪽.
23) 졸고, “조기잡이 어로민요와 닻배의 민속지적 고찰”, 목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2.
24)이종길, “朝鮮後期 漁村社會의 所有關係에 대한 硏究”,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학위논문, 1997, 173쪽, 이 논문에서는 소나무 관리와 선박의 제조를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제공되었다. 필자는 이런 점을 참조하여, 닻배선척의 역사를 추정한 바 있다. 관련문헌은 ꡔ한국의 향촌민속지ꡕ Ⅲ(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1996, 문헌자료편 16~18면)을 참조.
25) <飜譯> 古文書集成三,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274쪽.
25) <飜譯> 古文書集成三,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274쪽.강희 10년(1671) 신해 11월 21일 윤생원댁노 이산처 명문.
강희 10년(1671) 신해 11월 21일 윤생원댁노 이산처 명문.이 명문은 이 몸이 지난 경술년(1670)에 윤생원댁에서 선척을 신조해주기로 하고서 가격으로 목 15동을 맡았다가 동선척을 지금까지 조선하지 못하여 인도해 주지 못하였으므로 이노의부 고정박이 매득경식하여 온 현산면 백야지 용정동의 답 2두락지를 동가에 본래 이르지 못함을 알면서 납댁하는 것이니 후에 동선척을 건조하여 납댁하지 않을 시 동답과 동가액을 계산하여 납부할 차로 명문으로 작성하는 것이니 이후에 이행치 않으면 이 문기로 관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
이 명문은 이 몸이 지난 경술년(1670)에 윤생원댁에서 선척을 신조해주기로 하고서 가격으로 목 15동을 맡았다가 동선척을 지금까지 조선하지 못하여 인도해 주지 못하였으므로 이노의부 고정박이 매득경식하여 온 현산면 백야지 용정동의 답 2두락지를 동가에 본래 이르지 못함을 알면서 납댁하는 것이니 후에 동선척을 건조하여 납댁하지 않을 시 동답과 동가액을 계산하여 납부할 차로 명문으로 작성하는 것이니 이후에 이행치 않으면 이 문기로 관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답주 갑손 (좌수촌)
답주 갑손 (좌수촌)증인 사노 생열(좌수촌)
증인 사노 생열(좌수촌)증인 사노 (좌수촌)
증인 사노 (좌수촌)필집 사노 장열(수결)
26)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계산한 바 있다. 구술자들의 나이를 평균 70세로 잡고 그들의 3대 내지 4대 조부를 30년 단위로 계산하면 1810~1830년경인데, 이 선조들이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20세로 가정할 경우, 1830~1850년경으로 추정된다는 해석이었다.
27)한규설, ꡔ韓國漁業制度 變遷의 100년ꡕ, 선학사, 2001, 17쪽., 岩倉守男, ꡔ朝鮮水産業の 現況と 將來ꡕ, 1932를 인용.
28)한규설, ꡔ韓國 漁業制度 變遷의 100년ꡕ, 선학사, 2001, 17쪽., 新川傳助, ꡔ日本 漁業に 於ける 資本主義の 發達ꡕ을 인용.
29) 七山海面에서 每年 한인이 石魚漁業으로 資生 더니 今年에 日人이 農商工部 認可를 圖得고 諸漁業을 掠奪야 韓國漁民이 飢死 境遇에 至고로 諸漁民 등이 決死隊를 組織고 日人을 多數 殺害얏다더라.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11일자 雜報 [漁民決死]란 참고.
30)박광순, “일본의 한국어장 침탈과 어민의 대응 -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중심으로-”, ꡔ경제사학ꡕ 제18호, 85쪽.
31) 吉田敬市, ꡔ朝鮮水産開發史ꡕ, 190~192쪽.
32) 박광순, “일본의 한국어장 침탈과 어민의 대응 -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중심으로 -”, ꡔ경제사학ꡕ 제18호, 85쪽.
33)이것을 박광순은 靈光지방의 의병활동과 연관지어 분석하고 있다. 이 무렵 의병활동이 도서지방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靈光지방은 湖南倡義會盟所 휘하의 의병활동이 매우 활발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 근거로 靈光지역 내에서만 1907년 9월 이후 5회, 1908년 20여회, 1909년 50회의 의병활동이 있었다는 홍영기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홍영기, “靈光地方의 義兵活動, ꡔ韓末靈光義兵史料集ꡕ, 靈光鄕土文化硏究會, 1993, 29쪽).
33)이것을 박광순은 靈光지방의 의병활동과 연관지어 분석하고 있다. 이 무렵 의병활동이 도서지방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靈光지방은 湖南倡義會盟所 휘하의 의병활동이 매우 활발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 근거로 靈光지역 내에서만 1907년 9월 이후 5회, 1908년 20여회, 1909년 50회의 의병활동이 있었다는 홍영기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홍영기, “靈光地方의 義兵活動, ꡔ韓末靈光義兵史料集ꡕ, 靈光鄕土文化硏究會, 1993, 29쪽).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영광지방의 의병활동과 연관지어 보는 견해에 순순히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근해의 조기어장을 도맡았던 닻그물어로의 담당자들에 대한 입장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34) 李啓烈, “韓國水産業의 資本制化過程에 관한 硏究”, 전남대학교 경제학박사학위논문, 1997, 27쪽.
35)박광순, “일본의 한국어장 침탈과 어민의 대응 -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중심으로 -”, ꡔ경제사학ꡕ 제18호, 73쪽.
36) 靑柳南冥, ꡔ韓國植民策ꡕ, 1908, 130쪽.
37) 백철인, “韓國近海 참조기 漁場의 漁況變動과 海況特性”, 부산수산대 어업생산학석사학위논문, 1991, 20쪽.
38)백철인, “韓國近海 참조기 漁場의 漁況變動과 海況特性”, 부산수산대 어업생산학석사학위논문, 1991, 21~22쪽.
39)백철인, “韓國近海 참조기 漁場의 漁況變動과 海況特性”, 부산수산대 어업생산학석사학위논문, 1991, 20쪽, 호황기에서 불황기까지 약 20여년간의 半週期性이 있다고 한다면, 1935년을 전후한 10년을 1차 호황기, 1955년을 전후한 10년을 1차 불황기, 1975년을 전후한 10년을 2차 불황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차 호황기는 1차 호황기에 비해서 어획량이 무려 2만 3천톤이나 감소한 것을 보면, 만약 참조기에 대한 어획강도를 줄이지 않으면, 3차 호황기에는 약 2만톤으로 감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40)졸고, “가사도민속자료에 나타난 도서적응과 변화에 대한 고찰”, ꡔ한국도서연구ꡕ 제13집, 한국도서학회, 20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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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인태님, 고생하셨읍니다,목포대학교에서,교수님한분,서무과직원한분이오서서,본마을박기용,허효석게소개드리고출향인사,김복찬 9]정선,부),윤중씨어르신목포전화번호드렸지요,계속우리것을찿는대최선을다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