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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현(名賢) 명사(名士)를 많이 배출한 금성면 월림리
* 계수나무 숲(계향산) 정기 어려
*월림리 전경
제천은 금성 면을 비롯해 청풍 수산 한수 덕산 송학 봉양 백운 등 어쩌면 그토록 하나같이 아름다운 지명이 모였는지 제천시가 내세운 자연치유도시가 결코 과장된 캣치프레이스가 아님을 실감한다. 지명에 얽힌 유래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명 그대로만 가지고도 병이 절로 낫는 기분이다.
더하여 금성(錦城)이란 이름은 또 어떤가. 구룡 진리 적덕 사곡 활산 중전 포전 월림 위림 양화 대장 동막, 그리고 일부지역이 청풍호로 수몰된 월굴 성내리와 제천 시로 편입된 산곡 명지 강제리 등 모든 지명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런 지명 탓인지 우리 금성이 고향인 분들은 심성 또한 고와서 어디를 가나 순박한 제천사람의 티를 벗어나지 못해 다정다감함이 넘쳐난다.
금성면은 예로부터 금수산을 주산으로 섬겨왔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금수산은 글자그대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명산이다. 이처럼. 비단금(錦)자에 함축된 의미도 아름답지만 금성면 월림리(月林里) 또한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달(月)과 수풀(林)이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마을 등 뒤로 계향산(桂香山)이 병풍처럼 둘러 쳐졌으니 이 또한 신비스런 장관이 아닌가. 계향산은 계수나무가 우거진 산, 그 계수나무 숲속(桂林)이 바로 월림(月林)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 우국충절의 대명사 포옹 정 양 선생
* 포옹선생 묘소(상)와 신도비(하)
중국에는 달과 계수나무에 대한 설화가 많이 있다고 한다. 이름난 관광지인 계림(桂林)의 계수나무에 얽힌 설화를 떠 올리지 않더라도 월림리 뒷산 계향산은 바로 그 계수나무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이 아닌가 싶다. 영일정씨 집성촌인 이 마을엔 포옹(抱翁) 정 양鄭 瀁)의 묘소와 의병장 송운(松雲) 정운경(鄭雲慶) 선생의 묘소가 있다. 포옹 정양 선생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손자로 태백오현(잠은 강 흡, 각금당 심장세, 두곡 홍 석, 손우당 홍우정, 포옹 정 양)중의 한분으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경북 봉화에 은거하며 위국충절을 불태웠던 선비들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나라의 두 번에 걸친 침입으로 조선과 청과의 전쟁을 말한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후 조선이 계속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와 대신을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청의 이 같은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조선의 태도에 분개한 청태종은 같은 해 12월 2일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쳐들어 왔다. 임경업 장군이 의주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으나 청의 군은 이를 피해 곧바로 서울을 점령하므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12월 16일 청의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성 아래 20만 청의 군을 집결 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성문은 열리고 항복을 하게 된다. 청태종은 항복의 조건으로 청에 대해 ‘군신의 예를 지킬 것’ 등 9개항에 달하는 굴욕적인 항복문을 강요하고 한강을 건너 환도하게 된다.
이 당시 일국의 신하가 어찌 청을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대명 절의와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아래 봉화군 일대(춘양.법전.봉성.명호면 등)에서 각각 은거하며 학문과 덕을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우려 대대로 추앙받던 다섯 분 현인이 있었으니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칭했다. 태백오현은 잠은 강흡, 각금당 심장세, 포옹 정양, 두곡 홍우정, 손우당 홍석 선생, 그 태백오현의 한분인 포옹 정양선생의 묘소가 월림리에 있다.
* 태백산인공 鄭普衍
영일인(迎日人)으로 포옹 양(瀁)의 자. 자는 만창(晩昌), 천품이 매우 고상하며 뜻이 맑고 옛스러워서 어릴 때에 엄자릉(嚴子陵)의 절의(節義)를 사모하여 항상 표연(飄然)이 티 글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살 때부터 좋은 음식을 보면 어버이에게 드리고 어버이가 혹시 먹지 않으면 울면서 또한 먹지 않았으며 점점 자라매 더욱 공정하고 두려워 할 줄을 알아서 곁에서 감히 떠들고 웃지 않았다. 사서(四書)및 근사록(近思錄) 등을 읽고 비록 의리의 어려운 대목이라도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깨달았다.
소정(素性)이 청렴하고 결백하여 남이 주는 물건을 문득 즐겨 받지 않았으며 원래 마음속이 활달(豁達)하고、원대(遠大)하여 세상의 기쁘고, 슬프고、이롭고、해로운 것을 일체 마음에 거리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종명(宗溟), 증조는 송강 상국(松江相國)이다. 둘째 딸은 관찰사(觀察使) 이만웅(李萬雄)의 아들 징하(徵夏)에게 출가했고, 아들 천(洊)은 장성하여 현감(縣監) 심약명(沈若溟)의 딸을 맞이하여 남녀를 낳았다. 나이 二十四세로 졸했다.
우암 문인 증 이조참판 배 증 정부인 여흥 민씨.
* 정랑공 鄭 洊(천)
산인공 정보연의 자로 숙종 조 공조정랑을 지냈다. 증 이조판서. 배 정부인 청송 심씨
* 도사공 鄭泰河
수암 문인. 숙종 조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배 공인 전주 이씨
* 충헌공 鄭益河
조선후기 대사성,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정익하 선생도 이고장 인물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겸(子謙), 호는 회와(晦窩). 정양(鄭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보연(鄭普衍)이고, 아버지는 정천(鄭洊)이며, 어머니는 조선조 명신 심약명(沈若溟)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에 검열(檢閱)에 재직하면서 『숙종실록』의 개수를 반대하였다. 1728년에는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듬해에는 별겸춘추(別兼春秋)로 활동하면서 상신(相臣: 영의정, 좌·우의정의 총칭)들이 배척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등용하게 되어 있는 관례를 무시하고 천거자 모두를 등용하지 않은 행동을 비판하였다.1730년에는 지평(持平)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대사간 홍현보(洪鉉輔)의 상소를 물리친 영조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1731년에는 충원현감(忠原縣監)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탐관오리라는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영조가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1735년에는 의주부윤을 역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사서(司書)를 지냈다. 1739년에는 경상도관찰사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제언을 묻어 농토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741년에는 무신란(戊申亂)에 공이 있는 고(故) 감사 황선(黃璿)의 사당을 인정해주고 면세전 10결을 하사하여 그것을 수호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영조의 허가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 해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1744년에는 가자(加資)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예조참판, 도승지·대사헌, 형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8년에는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기근 타개책으로서 영남지역의 곡식 수송을 제시하였다. 1751년에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1755년에는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화 현감 鄭 混
월림리에는 현재 고종조(高宗朝) 중반 김화 현감을 지낸 정 혼(鄭 混) 선생(1834-1886)의 묘소가 있다. 정혼(鄭 混)선생은 영일(迎日)을 본관으로 字는 경익(景益), 호는 진제(進齊)시며 선조조(宣祖朝) 좌의정을 지내신 문청공 송강 정 철 선생의 7대손이시며 태백오현 중의 한분인 포옹 정양선생의 6대손 通訓大夫(正三品)이다. 1834년(갑오) 11월 11일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 부터 학문이 뛰어나셨고 일찍이 문과에 급제, 감역(監役)에 올랐으며 김화현감 겸 철원진영을 관장하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재임하시는 동안 고을 백성들이 만인산을 봉정할 정도로 선정을 베푸셨다.
* 법부주사 정운호(雲灝)
도사공 태하의 7대손. 법부주사. 배 숙인 기계 유씨
* 항일의병장 송운 정운경(鄭雲慶) 선생
을미사변 당시 의병장 정운경 선생도 월림리의 자존심을 대변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일본의 주권침탈이 날로 심해가자 애국인사들에 의해 의병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1896년 9, 10월을 고비로 일단 해산되다시피 하였던 의병의 재기는 대부분의 의병장이 구국 결사의 결의를 새로이 하면서 흩어졌던 의병을 규합, 전국 각처에서 항쟁을 재개했던 것이다. 을사의병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재기한 지방은 원주․제천․단양 등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이었다. 그곳은 을미의병 당시에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호좌 의병진(湖左義兵陣)의 활동지였던 곳이다. 따라서 을미의병 당시에 흩어졌던 의병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니, 재기 항쟁의 기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을미의병 때 호좌 의병진의 중군을 역임하였던 원용팔(元容八)은 역시 호좌 의병진에서 같이 활동하던 박정수(朴貞洙)와 함께 1905년 9월경에 원주 동쪽 강원도 주천(酒泉)에서 의병 부대를 편성,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되고 의병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전하여지자, 곧 각지에서 다시 의병 편성이 진행되었다. 그 중에 단양 지방에서는 정운경(鄭雲慶)․이규석(李圭錫) 등이 의병진을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정운경은 을미의병 때 유인석 의병진의 전군장이었다
* 한학의 대가 桂山 鄭元泰 선생
계산 정원태 선생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의 14대손이고 그의 손자인 정양 선생의 12대손 종손이다. 선생은 1913년 2월 3일 忠北 堤川郡 錦城面 月林里의 고택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후진 양성에 힘썼고 노년엔 서울 인사동에 머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諱는 元泰(戶籍上에는 諱가 日泰로 되어 있음), 字는 致和, 號는 桂山, 昭岩이고 文淸公 松江 鄭澈의 14代孫이며 文節公 鄭 瀁의 12代 宗孫이다. 2000년 3월 20일 간행(편집인 김재갑)한 ‘계산선생유고집’을 참고하여 선생의 행적을 살펴본다.
선생은 다섯 살 때 이미 祖父이신 桂陵公(諱 雲灝)에게서 ≪童蒙先習≫, ≪擊蒙要訣≫을 배웠고 일곱 살에 ≪小學≫, ≪孟子≫를 읽었으며 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이미 文理가 틔어 文集을 탐독하게 되었다. 13歲에는 四書三經을 誦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어 陽庵 柳芝赫 선생에게 師事하여 周易을 배웠다. 선생의 祖父께서는 철저하게 經書工夫를 하도록 고집하여 經書 이외의 서책들을 雜書라 하여 文集 등의 책은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러나 호기심에 가득 차 있던 선생께서는 祖父께서 出他하시는 틈을 타서 수많은 선현들의 文集과 道家書인 ≪南華經≫등을 탐독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생 댁에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만여 권의 장서가 고루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의 出他는 지금의 교통이 발달된 상황과는 달라 한번 외출에 몇 주일 또는 달포가 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선생의 祖父께서는 華西學派의 淵源으로 救國義兵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잦아 더욱 많은 분량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이때 읽은 文集 중에 ≪宋子大全≫같은 경우는 후일 民族文化推進會의 古典飜譯事業에 크게 기여를 하게 되었다. ≪宋子大全≫은 분량이 102책이나 되는 巨帙일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이 不知其數이고 文集에 등장하는 분들의 字, 號를 한 자씩만 쓴 경우도 많으며 난해한 隱語, 시대배경 같은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이를 소상하게 일러 준 것으로 전하여 온다. 이후 선생께서는 60평생을 향리에서 대대로 물려오는 넉넉한 농토로 農業을 경영하면서 학문을 계속하였다. 특히 祖父께서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는 어린 나이에 가업을 맡아 경영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사변을 겪고 나서 사회가 안정되면서 堤川에 學校法人 桂林財團을 設立, 桂林中學校를 세워 경영하였다. 몇 해 후에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학교경영에서 손을 떼고 1973년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동향 후배인 尹南漢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어 尹先生이 창립한 韓國文獻硏究所의 顧問役으로 위촉되었다. 1977년 尹先生께서 民族文化推進會 常任編輯委員으로 취임하면서 선생께서도 함께 民族文化推進會 常任校閱委員으로 위촉받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작고할 때까지 인연을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중요한 업적으로는 ≪星湖僿說≫, ≪五洲衍文長箋散稿≫를 共譯하고 ≪東史綱目≫, ≪經世遺表≫, ≪氣測體義≫, ≪朝鮮王朝實錄≫, ≪東國李相國集≫, ≪靑莊館全書≫, ≪茶山詩文集≫, ≪惺所覆瓿稿≫, ≪寒水齋集≫ 등을 교열하여 총 20종 150여 책에 이른다. ≪韓國文集總刊≫刊行事業에서는 文集 73종을 標點·監修했다. 後學指導로는 1984년부터 國譯硏修院에서 ≪四禮便覽≫講讀, 性理學講讀, 古文書讀解, 詩歌講讀, 草簡選講讀 등을 강의하셨다. 그 밖의 사회활동으로 1986년에 靑丘詩友會가 창립되면서 선생께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한시를 지도했고, 1990년 초에는 老村 李九榮 선생과 함께 以文學會를 설립하여 後學指導에 힘썼다. 1988년 二樂會라는 詩會가 창립되면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제천이 낳은 당대의 한학자 계선선생의 유택은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큰말 에 모셔져 있고 선생이 기거하던 인근 고택은 제천의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돼 제천시가 관리하고 있다. <참고 계산 선생 遺稿>
<제천 영일 정씨 문중 근현대 인물 >
(무순)
* 정원태(작고. 한학의 대가 계림중학교 설립 초대 이사장.위 기사 참고)
* 정운서(작고 계림중학교 재단이사)
* 정택원 (작고 금성교 교장)
* 정운목 (작고 금성교 교장)
* 정하택(보훈처 공무원)
* 정성태(작고. 교사) * 정찬용(상산고교장)
* 정규원(국세청 사무관)
*정운영(작고 삼성종합건설상무)
* 정운주(작고 경찰공무원)
*정운세(작고 재미 사업가)
* 정운하(치과 의사)
* 정호원(작고 서울 금성교 교사)
* 정달용(문학박사 홍익대 교수 영문학)
* 정운종(경향신문 논설위원)
* 정석용(성신여대 교무처장)
* 정명택(작고 공군준장)
* 정호택(고교 교장)
* 정영택(고교 교장)
* 정필용(한문전공 조선왕조 실록등 고전번역)
* 정승민(작고. 시조시인)
* 정승홍( 작고. 경찰공무원)
* 정중택(사업)*
정금택(공인중개사)
* 정운엽( 작고. 시조시인)
* 정운형(신학박사)
* 정종택(고교 교장)
* 정윤택(작고. 기업은행 지점장)
* 정우택(박사 세명대 경영대학원장)
* 정희태(박사 강원대 교수)
* 정일태(학원 수학 강사) * 정미택(청주지방법원)
* 정종태(공인회계사)
* 정의택(삼성종합화학 중견간부)
* 정우택(엘지전자 샌디에고 지점장)
* 정홍태(공인회계사)
* 정순택(석사 심리상담사)
* 정윤수(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