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한 시간만 작업을 계속해도 시각이 흐려오고 다리며 허리가 삐거덕거린다. 이제 나도 몸의 움직임에 녹이 슬대로 슬었나 보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두 팔을 흔들어도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폈다 뒤틀어도 본다. 어찌나 시원한지 일을 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감에 매우 만족해하며, 오늘도 이 소중하고 작은 진실들을 나의 인생 통장에 차곡차곡 저축하고 있다.
젊어 한때는, 전망 좋은 응접실에서 하늘하늘한 롱드레스 차림으로 매끄럽고 예쁜 손에는, 한지에 사군자가 그려진 부채를 살랑이며, 우아하게 커피 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남편이 가져다준 안일한 행복 속에 젖어있는 이름하여 '귀부인'이라 분류되는 여인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동승 하여 비바람도 맞고 돌부리에 채기도 하며 참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딱히 행복이란 것에 기준치를 적용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행복이란 그렇게 쉽게 힘들이지 않고 닦아오면 깊은 애정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고, 나의 사랑과 정성으로 누군가의 허기진 인생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에 대한 만족감, 덤으로 느껴지는 행복감,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명품일 것 같다고 생각된다. 해서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하고, 눈물 가득 머금은 눈을 부릅뜨고, 목구멍에서 주눅이 들어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 목소리를 힘 끝 끌어당겨 본다.
창문을 여니 푸르고 맑은 하늘빛이 나를 유혹한다. 푸르름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며 스쳐 지나는 바람 냄새는 완연 봄인 것이다. 메마른 벚꽃 가지가 어느새 연분홍빛을 띄우기 시작한다. 가지 끝엔 이슬방울 같은 꽃망울이 해바라지를 하고 있다. 저 꽃망울이 터질 때쯤이면 이 마음속에서도 잿빛 그림자를 연분홍으로 덧칠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상처가 있기에 / 다른 이 들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습니다
나도 한때 부족했기에, 그리고 / 지금도 많이 부족하기에 다른 이 들을 용서하고
실수를 품어줄 수 있습니다. / 나의 아픔이 다른 이들을 향한 자비심의 씨앗이 되기를…….
=== 혜민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중에서 ===
헤민스님의 말씀대로 나도 과연 다른 이 들의 실수를 용서하고 품어 줄 수 있을까? 나도 과연 가슴이 온통 문드러져 검붉은 피가 여름날 장맛비처럼 소리내어 흘러내려도,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오히려 쑤셔 박아 버리든 그네들의 무지와 잔인함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난 가슴이 터지도록 슬플 때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러지 않으면 삼켜버린 슬픔을 소화 시킬 수가 없다. 눈물이 고일 때는 추억의 배를 동공 위에 띄운다. 속 눈썹에 맺힌 이슬 속에서 맴돌고 있는 아픔이 은구슬처럼 반짝일 때면 열심히 노를 저어본다. 가슴 아팠던 추억들을 향하여.
노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 소리는 어느새 노래로 바뀐다.
『어디로 가야 하나, 바람 같은 내 인생』
추억의 아지랑이 속에서 희붐하게 나의 인생 드라마가 연출 된다. 남의 인생을 두고는 모두 들 쉽게 얘기들을 한다. 대궐 담벼락 안이나, 청계천 다리 밑이나, 한평생 살다 가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인데, 무얼 그리 가슴을 쥐어뜯냐고. ‘여보시오, 그리 말하는 당신들은, 보리밥 한 숟갈을 눈물에 말아 먹어 보았소?’ ‘사흘을 굶고 축 늘어진 두 살짜리 어린 딸을 안아 보았소?’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하였을까? 내가 무얼, 어떻게 잘못 살았을까? 아둔한 머리로는 알 수가 없다. 처음부터 잘 못살아왔으리라.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던 나의 인생관이 몽땅 뒤틀렸던 것이리라.
‘늦었다 싶을 때가 제일 빠를 때 이다’라고 하였던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원망으로 멍울진 나의 인생사를 불태워 버리자, 괴롭고 아팠던 사연들은 고이 접어 가슴 제일 깊은 곳에 묻어두고, 짧고 행복했던 시간 들만 추슬러 묵은 먼지는 털어내고, 따뜻한 봄볕에 말려서, 찢어진 조각들은 감쪽같이 기워놓고, 구겨진 행복들은 다림질하여 내 인생 일 장에 장식해 두자.
오늘 딸아이와 사위까지 동반하여 그동안 몸이 성치 못하여 찾아뵙지 못하였던 어머니 계신 곳엘 다녀왔다. 어머니 유택을 어루만지며 “어머니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잘 살아주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으로 용서 하십시요.”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한다. ‘인생 뭐 별거 있냐. 적당히 먹고, 입고, 즐기며 살면 되는 거지.’ 그 적당히 가 가장 어려운 것이리라.
하늘이여 당신은 아십니까?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려 찢겨지는 이 고통을
보셨습니까?
찌그러진 나의 미소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회한의 삶을
들으셨습니까?
피맺힌 나의 괴성을
슬픈 인생의 노래를
느껴지십니까?
넉마조각 같은 이 마음이
움켜쥔 두 주먹 사이로 흘러내리던 통곡을
당신께선 모르십니다
보리밥 한 숟갈을 눈물에 말아먹던
그 기막힌 맛을
이제 나도, 그만 쉬고 싶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이즈음은 육체적인 고통마저 마음의 고통보다 결코 덜 하지가 않으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신체적인 힘, 정신적인 끈기, 이 두 가지의 여력을 본인은 스스로 짐작하고 느낄 수가 있다고 본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개나리 진달래 꽃술 위에, 노랑나비 하얀 나비 쌍쌍이 노래하며 춤추고, 벚꽃잎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따뜻한 봄날, 꽃잎 따라 훨훨 날아갔으면 좋으련만……. 욕심인가?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내 가슴속을 적실 때, 그때 떠나고 싶다. ‘더 추해지기 전에.’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사랑한다. ‘내 딸’. 그리고 미안하구나. 너를 더 사랑해 주질 못하여, 너를 더 챙겨주질 못하여……. 이 어미처럼 어두웠던 일일랑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더 질겨지기 전에 마음 방에서 끊어내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가길 바란다. ‘사랑한다. 그리고 많이 미안하구나, 나의 딸,’ 너는 나의 인생이고, 나의 심장이었단다! 너를 낳아서부터 지금까지 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