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말씀 강론 중 유두고의 추락
행 20:1~16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의 마게도냐 지방 순방사(巡訪史)인데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빌립보, 드로아, 앗소, 미둘레, 기오, 사모, 밀레도에 이르는 바울의 전도 여행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여행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방의 교회를 방문해 성도들을 위로하고 드로아에서 이튿날 아침 떠나려 하기 전날 밤에, 앞으로 그곳의 신자들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여로의 피로도 개의치 않고 잠도 잊어버리고서 집회를 인도하며 밤중까지 말씀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유두고라는 청년은 주간의 노동으로 피곤했기 때문인지 바울의 설교도중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응급처치로도 손쓸 틈도 없이 금방 숨이 끊어져 싸늘한 시체가 돼 버렸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삽시간에 주위는 소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떠들썩한 무리들의 서성대는 틈새를 헤치고 시체 쪽으로 급히 내려가 그 위에 엎드려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하라고 안돈시킨 후 기도하여 저를 살렸습니다. 이로써 저의 순방(巡訪)에 뜻을 더욱 새롭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해서 죽은 유두고가 살아난 사건 전후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앉은 자리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9절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했습니다. 유두고는 밤이 깊도록 3층 창문에 앉아 바울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두고가 앉은 자리는 본래 앉기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닌 위험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이 자리는 젊은 유두고의 모험적 충동을 만족시켜 줄만한 곳이었지만 밖으로 떨어지기 쉬운 자리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은”(시 1:1~3) 복 있는 자의 필수적 삶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크리스천은 가선 안되고, 서 있어도 안되고, 앉아서는 더욱 안되는 곳이 분명히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애마(愛馬)를 목베어 끝장 낸 것도,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에서 변을 당하여 살상의 참극을 빚은 것도, 선지자 발람이 짐승의 항변을 받게 된 망신스러움도 따지고 보면 가서는 안될 곳에 함부로 갔다가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동양의 현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씩이나 이사를 다녔다함도 귀감되는 일입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더러 가지 말라고 했는데, 보혈 피로 씻음 받고 의에 흰 옷 입은 성도들은 결코 아무 데나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도 먹어서는 안될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1. 자세가 잘못입니다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이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이는 오만 불순한 자세니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은혜를 못받으면 졸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자세부터 바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어져서 은혜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마음 자세가 잘못됐습니다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해석을 붙여 본다면 교회와 세상 중간 지점에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서 헤메이는 사람, 미온적 신앙상태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2. 예배의 성격을 인식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7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세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면 지금의 주일입니다. 떡을 데려 모였다는 것은 성찬예식을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예식을 통하여 믿는 자가 하나가 되고, 예수님을 기념하는 귀한 예식을 행했습니다. 이 귀한 예식에 참여한 유두고가 그 성격을 바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예배에 중요성을 바로 인식하고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과 만찬을 기념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바울과 드로아의 모든 성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식사하실 때 하셨던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는 말씀을 따라 주께서 부활하신 소망스러운 날에 만찬을 행한 것입니다(막 16:9, 요 20:1).
따라서 이 모임은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기억하게 하고 영혼의 만족을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요 6:35). 이처럼 성도의 모임이 기념해야 할 것은 교회가 부요해지고 숫자가 많아지는 것에 앞서 성도되게 하신 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나누는 모임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성도들이 모였을 때 바울은 다음날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드로아 성도들은 바울의 강론을 원했으며, 그래서 시작된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누는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벳세다에서 주의 말씀에 귀기울였던 무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게 되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체험했습니다(눅 9:11~). 또한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수가성 전체가 구원을 얻었습니다(요 4:29~42). 뿐만 아니라 주의 가르치심에 귀기울였던 백성들의 열심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적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눅 19:47~48). 말씀에 귀기울이며 나누는 모임에는 이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반드시 결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유두고는 이 같은 모임의 성격을 몰랐던 것입니다.
3. 강론시간에 졸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에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루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유두고는 설교시간에 잘 듣지 아니하고 졸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성경 속에 잠자다가 실족하거나 범죄와 죽음까지 당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유두고 같이 불행을 당한 자들을 열거해 보면,
1. 시드라는 전쟁하다가 쫓기어 피곤한 중에 야일의 장막에서 자다가 말뚝에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삿 4:17~24).
2. 삼손은 음행에 빠져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자다가 머리털을 깎여 불행을 당했고(삿 16:18~21),
3. 다윗은 아침 늦게까지 잠자다가 유부녀와 음행하여 범죄했고(삼하 11:2~5),
4. 요나는 주의 사명을 기피하고 배 밑층에서 잠자다가 고기밥이 되어 죽을 뻔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기도 하고(욘 1:1~10),
5.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세 번이나 당부를 받고도 잠자다가 시험에 빠졌고(마 36:56),
6. 야보고, 요한도 기도하지 않고 잠자다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마 26:36~56).
예배시간에 조는 것은 설교자의 얼굴을 보기가 싫습니다라는 의미도 됩니다.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화평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얼굴을 천사의 얼굴과 같아 보기도 좋으나, 조는 얼굴은 마귀같이 보기도 흉합니다.
졸면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예배시 조는 모습을 얌전치 못하여 고개가 끄덕끄덕 하다가 옆 사람에게 넘어지어 불쾌감을 주거나 코를 골므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공해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대단한 실례를 하는 경우가 됩니다. 고로 우리들은 예배의 예의가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신자가 예배에 어긋나는 행동은 악한 영이 주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피곤하고 힘들지라도 졸지를 맙시다.
4. 예배를 엄숙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걸터 앉아 졸은 것은 예배 시에 존엄성을 상실한 행동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신령이란 말은 원어로 ‘프뉴마’라고 하는데, 바람, 성령. 영이란 말과 같습니다. 또 진정이란 원어로 ‘알레테이아’로 거짓과 대조되는 낱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는 현실적으로 드림으로 신령한 예배가 아니었으며, 사마리아인의 그리심 산 예배 역시 거짓으로서 진정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양과 수송아지와 비둘기를 잡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만민의 죄를 지시고 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과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모시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천주교나 성공회처럼 순서에 따라 예배를 꼭 드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배가 단순한 순서와 의식을 통해서만 그 중심으로 성령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고용된 거룩한 피조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생만이 특권입니다. 하나님께 바로 엎드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손에 입맞추기 위하여 인생이 존재합니다. 인생은 이렇게 예배적 인격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명은 인생을 인생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 본연의 위치와 자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이 예배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예배의 거룩한 전당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이 같은 예배에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잠만 잔 것입니다.
5. 외적 노출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이유중 하나라면 이는 창가에 걸터 앉았으니 그의 육체의 중심이 외부로 더 많이 노출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게 된 것입니다. 유두고의 육체가 교회 안에 노출되고 기울어졌더라면 교회 안으로 내려 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과실을 절로 맺는다”(요 15: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크리스천들이 천만 성도라고 하는데, 과실이 절로 맺는 것과 같은 형통 속에 지내는 사람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나의 신앙은 어떠한지 검토해 봅시다. 크리스천들이여! 주안에서 감추어진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에 많이 노출이 되거나 세상에 더 많이 나의 육체가 나의 생각이 행동이 노출되면 주와는 멀리 떨어질 것이며 관계가 끊겨져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6. 흠없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1. 삼층루에서 추락했으니 이 얼마나 망신입니까?
2. 은혜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떨어진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3. 보다 더 열심히 강의하고 강의를 들었던 회중의 시간을 중단시켜 은혜 받는데 봉사는 못해도 은혜받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심려를 끼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케 되었으니 이는 보통의 결례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모방하여 살수는 없지만 다만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걸어가신 발자취는 한마디로써 인류를 위한 희생과 흠과 티가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를 위한 어떠한 공헌보다는 결례를 시키어서는 아니되며 질서없는 생활로서 타의 손해를 끼치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7. 말씀의 경청자와 경시자의 차이점가 있습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도 노아의 전도를 들었더라면 살았을 터인데 노아의 전한 말씀을 듣지 않았으므로 죽었고, 롯의 때에도 사위들은 롯이 전하는 말을 농담으로 듣다가 죽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딸들은 살았습니다.
모세 때, 불뱀에 물린 자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장대 위에 매달은 구리뱀을 쳐다 본 자는 살았고 모세의 말을 불신한 자들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 삼층누에 바울의 열심있는 설교를 들은 자들은 다 은혜가 충만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영적으로 한량없는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졌는데 말씀을 안 듣고 자던 유두고 청년은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여 영육이 되살아야난 이 청년은 기독교의 훌륭한 역군이 되었습니다.
결 론
성도들이여! 항상 말씀과 은혜가 충만한 자리에 앉기를 힘씁시다. 그리고 예배는 큰 관심과 말씀의 경청 속에서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유두고는 이 점에 소홀히 하다 불행을 당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은혜롭지 못한 곳에 있으면 떨어져 죽게 될 염려가 되오니 자신의 신앙을 살펴보며 나의 신앙의 위치를 재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생각을 바꾸라
창 35:16~18
소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믿음은 터와 같고 사상은 기둥과 같고 생각은 창문과 같다 하겠습니다. 좋은 터 위에 튼튼한 기둥을 세우고 멋진 집을 지었다 하더라도 창문이 없는 집이라면 창고로는 쓸 수 있어도 주택으로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주의 대지 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기둥을 세우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생각으로 멋지고 복된 삶을 살도록 생각을 바꿉시다.
자석이나 전기는 아무 것이나 통하지 않고 통할 것만 통하는데, 하나님도 아무에게나 통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갖는 자만이 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집시다
야곱의 사랑하는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는데(첫째 아들은 요셉), 어찌나 힘이 들든지 난산하게 되므로 신고(辛苦)하더니 자기가(라헬) 죽게 된 것을 느끼고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여인(라헬)의 마음속에는 내가 애기를 낳자마자 죽어버리면 저 아이(베노니)는 누가 젖을 먹이고 키운단 말인가? 생각하니 눈물이요 근심인지라, “베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자기 아내를 지켜보고 있던 믿음 좋은 야곱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크게 외치고 “여보! ‘베노니’가 무슨 말이요. 내 아들 이름은 ‘베냐민’이야(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 내 아들이 결코 슬픔의 아들은 될 수 없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오른손의 아들이 될 거요.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라헬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자기의 환경만 바라보니 ‘베노니’가 될 수밖에 없었고, 야곱은 자기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 좋은 결과를 소망하며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 외쳐 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내 생각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만 해야 합니다.
자! 보세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려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 앞에 왔을 때, 엘리사가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하니 나아만 장군은 노발대발하면서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고 하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우리 나라 강 중에 다메섹강, 아마나강, 바르발강들이 요단강보다 얼마나 크고 깨끗한가. 내가 왜 시시하게 요단강에 들어가겠느냐”고 화를 내며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종들이 만류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엘리사) 당신을 명하여 더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하였으리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케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권하니 나아만이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문둥병이 어디로 가버리고 어린아이 살과 같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곧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또 들어보세요. 베드로가 밤새껏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배 오른편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시니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실력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도 아니오 전문가도 아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을 때 고기가 두 배가 가득하여 잠길 정도로 많이 잡았다 하지 않았습니까(눅 5:1~10).
뿐만 아니라 요나도 자기 생각만 하다가 크게 실패했으나,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따르매 니느웨 사람 12만 명을 구원해 내지 않습니까?(욘4:11) 지금 곧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릅시다.
2.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자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나 축복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으려다가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또한 그의 안에서 크게 쓰임 받게 창조되었는데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을 거의 모른 채 인생을 피곤하게, 어렵게, 슬프게 삽니다. 이제부터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읍시다.
벳세다 광야에서 5천명(장정만)을 먹이실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서 먹을 것을 내주어라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계산이 빠른 빌립 집사가 “예수님 이곳은 빈들이요 사막이라 먹을 것도 없으려니와 어디서 구해온다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나 있어야 되겠나이다”라고 불가능의 말을 했습니다(막 6:34~44). 예수님은 “아니다 너희 중에서 먹을 것이 있으면 내놓아라.”고 하셨습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이 없는데서 창조하셨으나 창조 이후에는 있는 것을 가지고 재창조하십니다. 즉 ① 밀가루를 가지고 밀가루가 불어나게 하시고 ② 보리떡을 가지고 보리떡이 불어나게 하시고 ③ 기름을 가지고 기름이 불어나게 하시고 ④ 생선을 가지고 생선이 불어나게 하십니다.
결국 어린아이가 바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장정만 5천명이 다 배불리 먹고 또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고(故) 김응조 목사님이 행촌동 신학교를 지으려고 미국에 가셔서 모금을 하는 중 일이 잘 안되어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김 목사야 나 여호와는 미국 사람의 하나님만 되겠느냐 대한민국의 하나님은 아니냐 여기서 찾지 말고 한국에 가서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김목사는 부끄러워 속히 돌아와 한국에서 찾으니 곧 바로 홍대실 권사님을 만나게 하셔서 행촌동에다 신학교를 짓고 또 지금의 성결대학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을 하셨지 않았습니까(남자도 아닌 여자를 통해서)!
에서가 축복을 못 받은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① 자기 손에 있는 장자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② 별미를 가져 오라 하니, 짐승을 잡으러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다가 늦게 오니 벌써 야곱이 아버지께 별미를 드려 아버지가 기쁘게 잡수시고 포도주도 마시고 마음껏 축복해 준 뒤였습니다. 야곱은 산이나 들에서 찾지 않고 바로 자기집 뜰에 있는 살진 염소를 잡아왔기 때문입니다(창 27:1~46).
여러분! 이제부터 밖에서 찾지 말고 우리 집 안에서, 내 호주머니 안에서, 내 통장 안에서, 내 손으로, 내 입술로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분이 졸지에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두 아이를 두고 남편이 타계해 버린 것입니다(왕하 4:1~7). 그런데 ‘미망인’이란 말을 글자 풀이를 하면 ‘망하다가 조금은 남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불행이 와도 결코 완전히 망하거나 실패할 자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는 내일 아침에 “동편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미망인인 과부와 함께 하므로 모든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되고 행복이 다시 올 것입니다.
3. 타지 않은 떨기나무에서 배웁시다
출애굽기 3장 1~6절에 모세가 시내 산에서 불꽃 중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떨기나무는 수난을 당하고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불은 시련을 의미하고, 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시련과 환난은 당해도 결코 망하지 않고, 다시 소생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나 성도는 핍박을 받아 어려움을 당하기는 하지만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문턱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생각을 바꾸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니 결코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고 크게 외치십시다. 수공품이 손의 행동이요 말은 입술의 행동인 것 같이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기도 하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기도 한다 합니다(마 12:37).
마태복음 8장 23~27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곤하셨던지 깊이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줄로 알았으나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태우고 안전하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생각을 바꾸세요.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며 생활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내 손목을 꼭 잡으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면 아멘 합시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제자들은 의기양양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태우고 간다고 생각하고 예수님도 별 수 없이 잠을 자고 우리의 덕을 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 후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듯 하자 제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즉시 뛰놀던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해 염려하는 게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염려하고 준비하듯 우리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보장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생각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쌓을 곳이 없는 축복
말 3:8~12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어느 날 어머니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딸이 심부름 값을 달라고 해서 귀엽기도 하고 해서 그 값을 주었습니다. 처음엔 애교로 봐 주고 용돈을 주었는데 그 다음에도 심부름 값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그 딸을 앉혀 놓고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뱃속에서 10개월, 해산할 때까지의 수고와 병원비, 지금까지 지출한 우유값, 옷값, 세탁비, 유치원비 등을 합하니까 엄청났습니다. 그 항목들을 열거하는데,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그 금액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혼신의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부모된 도리가 거기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달라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궁 무진한 것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늘 달라고만 합니다. 마치 그 딸처럼 말입니다. 태양, 달빛, 맑은 공기, 산과 바다, 물, 부모, 형제, 재물 등 수 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엇이 그렇게 부족한지 자꾸 달라고만 합니다. “뭐가 있어야 하고, 뭐가 필요하고 … .” 하여간 없게 해 달라는 항목은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는데, 달라고 하는 항목은 청구서 용지가 모자랄 정도이니 언제까지 그런 기도를 계속할 것입니까?
하나님도 참 이상하십니다. 간절히 구하고 찾는 자에게 서슴없이 주시기도 잘 하십니다. 과거 6. 25사변 이전과 이후에는 좀 못살았지만, 지금은 굶어 죽는다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니 형편이 아주 좋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라고 아우성치는 인간에게 또 주십니다. 주시되 아직까지는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1. 십일조의 기원과 발전
성경에서 십일조를 제일 먼저 실천한 분은 아브라함입니다. 야곱의 축복도 십일조 생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양과 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으니까 드리는 게 쉽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생각을 뒤집어 보면 많은 사람이 주는데 인색합니다. 부자가 그냥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매우 인색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행복하지’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위선자입니다. 돈이 없으면 무슨 행세를 할 수도 없고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돈에 혈안이 되어 검은 돈이든 하얀 돈이든 무조건 주면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속된 말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귀한 것을 교회 앞에 드린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분명히 믿고 확신하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증표’입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강조하셨고, 바울도 “십일조를 예비하여 주일에 드리라”고 고린도후서에서 말했습니다.
2. 십일조를 드리는 정신
헌금 중 가장 중요시 여기는 십일조는 어떤 계명이나 권유가 아닌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목사님, 과거 어려웠을 때에는 축복의 조건으로 헌금을 했는데 지금은 잘 안돼는 데 야단입니다”라는 성도의 고백을 듣습니다. 그분의 고백대로 야단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분명히 있는데 감사의 조건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중생을 했고 어떤 은혜를 받으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피로 ‘성도’라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던가요. 즉 예수님의 피와 성도된 내가 맞바꾸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에게 의로우신 자 한사람이 그 죄를 대속하신 것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섭리와 사랑입니다. 이 은혜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사단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레위 지파에게 드렸는데, 하나님의 일꾼인 레위 지파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접하라는 뜻인데, 축복권이 그 지파에게 있었었습니다. 오늘날의 성직자도 직업을 가질 수 없으니 성도가 잘 섬겨야 합니다.
또 십일조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으로 율법의 대 강령도 첫째가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라고 했으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요, 주의 사자를 사랑치 않는 것이며, 이웃을 돌보지 않는 죄가 됩니다.
3.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이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와 같이 지키는 대리자에 불과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어찌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완전해져 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맨소래담 사장은 10의 9까지 드리는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드렸을 때 누리는 축복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축복의 권리인 줄 믿습니다.
4. 십일조를 안 드리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
십일조를 실행치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중동권 아랍은 도적질하다 발견되면 손목을 자릅니다. 아간을 보세요. 그로 인하여 온 식구가 멸절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게하시는 죄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 화가 임합니다. 세상에서도 도적질하면 즉결심판에 들어가서 벌금을 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재앙에 앞서 축복의 통로를 스스로 막는 행위가 됩니다.
학개 1장 5~6절에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면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고 삯을 많이 받아도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고 경고했습니다.
5. 십일조의 축복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10절
요셉의 풍년을 보세요. 곡식 가마를 세고 또 세다가 그만 둡니다. 야곱과 이삭도 그랬습니다.
카네기는 강철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은 십일조이고 왼쪽은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가난했기에 수입의 대부분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썼던 것입니다. 한국의 최순영 장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선교 헌금을 엄청나게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시 머물다 가는 순례자의 모습이지만 온전한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십일조 헌금을 온전히 드려 축복 받는 생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비신자보다 더 건강해야 하는데, 11절을 보면 “모든 황충을 금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질병 즉 환난, 재난, 사고, 가난, 슬픔, 고통과 같은 어려움을 막아 주시고 피하게 하고 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욥은 엄청난 시험이 왔으나 피할 수 있고 잘 감당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를 복되다 하리로다”(12절)
가는 곳마다 축복의 비밀을 알려 주는 복음의 신발을 신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주저 말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는 결단을 합시다. 내 삶이 주 하나님과 더불어 축복의 삶이 되게 하사 나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심령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내가 먼저 헌신해야 가정 축복이 임합니다. 나 자신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이 믿음 가지고 영광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하는 제목들을 가지고,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에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까지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신앙고백과 더불어 간구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9절로 1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로 잘못 이해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매운 간단하고 단순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매우 깊고 넓은 모범적인 기도입니다.
1.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한 기도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뿐입니다. 자랑스럽고, 감사하며, 이렇게 부르는 우리는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버지로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이시오,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부모와 같이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진실하고 정직할 뿐 아니라 사실적이어야 합니다.
2.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거룩치 못해서 거룩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분이시오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인간들이 사는 이 사회에서 거룩히 여기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경과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사회가 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거룩히 여기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3.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어느 나라 어느 땅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입니다. 또 그렇게 지배를 받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마땅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면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여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임하며, 축복받는 곳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42)
여기서 말하는 잔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거든 그 방법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면, 비록 그 길이 험하고 어려울지라도 십자가라도 지겠다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상에서 가르쳐주신 세 마디의 기도는 간결하면서 분명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 마디를 한 마디로 말하면 나를 중심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라고 하면 주로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도 훨씬 유익하고 좋습니다.
나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보시고 과거도 보시고 먼 미래도 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시며 만사형통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구하고 관심가지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 4:2~3)
하나님은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해야 함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사심(私心)이나 정욕으로 기도하여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기도를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히 하나님의 뜻을 찾아 다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보복하지 말라
마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본문은 보복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38절의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24~2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으로서, 그의 도는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이 입은 손해보다 더 큰 손해를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세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는 말은 손해를 본 사람이 직접 가해자에게 보복하라는 것이 아니요, 법에 의하여 세운 유사나 재판관의 판결을 거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정당한 보복을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이 피해를 입으면 즉각적으로 보복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정당한 보복이라고 생각하여 행하는 일들은 복수에 복수의 꼬리를 물고 보복이 악순환되어 평화를 깨치게 만듭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의 최근 역사가 잘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바로 전쟁이 일어나 1949년에 시작하여 1년만에 끝났습니다. 그후 7년 만인 1956년 10월에 다시 충돌이 일어났으며(시나이 전쟁임), 1967년 6월에는 그 유명한 6일 전쟁으로 골란고원을 탈취하였고, 1973년 10월에는 10일 전쟁 등 건국 후 25년간에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하여 이웃 아랍과 사이에 평화가 없습니다. 아랍 제국과의 적대관계로 인하여 국방비를 국가 예산의 35%를 사용되고 있으며, 병역의 의무를 남자는 물론 여자들까지 총을 들여 전 국민이 전쟁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눈은 눈으로 이로 이로 갚으라”고 한 율법의 정신의 결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공정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 준 거룩한 율법이 인간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었고, 바로 지켜지지 않으므로 이런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편협성과 죄악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 땅에 악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심기 위해서는 공정한 처벌이 아니라 아예 대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39~42절과 같이 교훈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흑기 주석에는 이 교훈은 반드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나 그렇다고 해서 이 교훈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이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이 교훈을 무시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교훈을 준수하였다고 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이상의 노임을 주고자 할 것이요, 노동자도 자본가의 요구 이상의 일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계급 투쟁은 극복될 것입니다. 이러한 무저항 정신은 매우 수동적이고 약해 보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공상이나 이상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데, 이 역사적인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1828년 러시아 귀족 출신 톨스토이와 서인도 카티와 주에서 탄생한 마하티 간디(1869~1948)입니다.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맨손으로 불복종 무저항 대중운동을 일으켜 승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노사간의 갈등, 지역 감정, 한 걸음 나아가 남북 통일 등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이 산적하여 있는데, 이것인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길은 바로 예수님의 교훈하신 무저항 정신 곧 악으로 악을 보복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이런 악으로 악을 보복하지 않는 무저항 정신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자기 중심의 자연인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의 마음이 깨어지고 새로운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인생관을 가진 새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임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하고 큰 일, 인간이 치료할 수 없는 병이나 큰 사업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자연인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예수님의 교훈, 나를 핍박하고 해롭게 하는 악의 세력을 보복하지 않는 삶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셔서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말씀을 따라 살아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갑시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 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사랑
요 20:1~18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어보셨습니다.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어보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물음이 본문에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필요한 질문일까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역경을 넘지 못하는 사랑이었고 죽음을 넘지 못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사랑함이 죽음도 뛰어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막달라 마리아를 실로 위대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가장 천한 것으로부터 가장 큰 영광을 차지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들린 여인입니다. 어떤 학자는 창녀라고도 합니다. 가장 밑바탕에서 인간 대접도 받아보지 못하고 소외된 채 불쌍하게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최초로 보고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던 제자들과 그 시대 성경에 탁월한 학자들과 권력자들을 제치고 부활을 증거하였고, 이 여인의 뒤를 이어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영광을 차지한 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사랑한 행위의 결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랑의 자국들은 여기 저기서 찾아보게 됩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20장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무덤을 찾았습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또한 그때 상황이 죄인으로 죽어간 예수를 찾아 무덤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둘째는, 빈 무덤임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무덤에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해 보고 고개만 갸우뚱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요 20:10). 그러나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마리아는 눈물이 흘러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을 때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만 알았습니다.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나이다.” 마리아는 삼일 된 시체, 부패 된 시체, 이런 시체라도 내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친구 하나가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친구를 삼일만에 물 속에서 찾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누나와 동생들은 울며 목이 터지라 부르짖고 슬퍼했는데, 삼일동안 물 속에 있다 건진 시체는 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형제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다 돌리고 눈물도 그치고, 그 시체하고 멀리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는 그 아들의 얼굴을 자기의 얼굴로 비비고 수건으로 닦으면서 울고 더듬고 하며 우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라도 가지고 가겠다는 그 행동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던 제자들과는 너무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16절에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는 “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이 대목이 마음이 뭉클하고 심장이 멎는 듯 하고 마리아의 온 마음이 묻어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앞에 확인된 마리아의 사랑은 결국 부활한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는 영광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증거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요20:19)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최초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한 말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결론은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큰 소리를 치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일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데 나 혼자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마음은 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인정을 받느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여러 고비를 넘기며, 그래도 하나님 사랑한다는 나름대로의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가라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추고, 버리라 하면 버리고, 포기하라 하면 포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것보다 더한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주어진 마지막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하나님 사랑의 보상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이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삼일 길을 걸어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하나님이 지시한 곳에 이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급히 부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부터 하나님 사랑한다는 인정을 받을만한 행위가 여럿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하신 것은 독자 이삭을 바친 때였습니다. 성도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한 화가 지망생인 청년 학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을 가지고 스승을 찾아가 그림의 비평을 부탁했습니다. 그 스승은 한참 있다가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구먼, 그렇지 않다면 보다 잘 그릴 수 있을 텐 데”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구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자신을 향한 냉철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
나의 삶의 마음 씀씀이나 행동 하나 하나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인정을 받는 사람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모든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나름대로 사랑한다는 고백은 다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사랑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앙인의 기본적인 출발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찬송을 멈추게 하고, 봉사를 멈추게 하고, 믿음과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예수님도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8:23~27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 풍랑이 일어나 배를 침몰시킬 정도로 큰 파도가 쳤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도 있었는데도 감당을 못해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무서워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며 책망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믿음이 적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왜 무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요, 물질과 상황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왜 무서워했습니까? 갈릴리 바다의 물결치는 것만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을 건너가라고 명하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가야 할 사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내가 어떻게 모세처럼 할 수 있습니까? 불평이 많은 이 백성을 내가 어떻게 이끌 수 있습니까?’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이 말씀에 여호수아는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게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 해답을 본문을 통해 찾고자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닫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선생님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 차례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며 기가 죽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한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서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평안을 빌어주신 예수님을 인식할 때, 정확히 알 때, 믿음으로 신뢰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 삶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확신이 되지 않는다면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 121:1~2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시대 종교지도자와 정치가들 사이에 심한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 길가에 놓아 조롱거리가 되고, 백성들에게도 미움의 대상이며,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친한 친구들한테도 버리움을 당하고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기가 나던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 .”(렘 20:11)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견디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라고 하였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고 하셨듯이,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삶의 한 가운데 계십니다. 고난과 고통의 한 중심에 계십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20장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믿을 때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는데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또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너희에게 주는 평강을 지속적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
능력의 예수를 믿으면서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처럼 허무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물을 옆에 두고 목말라 죽는 것이지요. 한강을 옆에 두고 기갈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현대기독교인들의 안타까움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수많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지식으로만 끝내고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만 마치고 있습니다. 아는 지식이 삶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사람들은 그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으며, 시편 3장 5~6절에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 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명이 주어질 수도 없고 주어졌다 해도 감당을 못합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왜 세상에 보내고 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일을 위하여 입이 되어야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보내신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이 순종은 보냄에 있어 뜻을 이루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할 때 보냄을 받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순종과 복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럴 때 보냄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종을 한다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 조상인 아담도 여기에서 탈락되고 말았습니다.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100%입니다. 90% 가지고도 안됩니다. ‘50%만 넘으면 그래도 낫지’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예수님은 “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죽기까지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을 아십니다. 나를 아십니다. 연약한 나를, 부족한 나를, 허물 많은 나를 아십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철저한 순종이 가능하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실 때도 “ …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을 때 능력의 사람이 되고,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 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연약한 자가 강하여 집니다. 희미한 자가 확신에 거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이 됩니다. 땅만 보던 자가 하늘을 보며 살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이 됩니다. 초대교회 직분자 또는 사명자의 자격은 항상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자는 어떤 자 입니까? 예수님이 요구하고 있음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두려움과 무서움에 잡혀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 음성을 인식하고, 확신하고, 신뢰하고 있는가 입니다.
제자의 각오
눅14:25~3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음의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소속이 되어있으면서 주일이면 가끔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은 거의 없습니다. 명목상 간판만 기독교인입니다.
둘째는 신자가 있습니다. 믿음은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열심은 적습니다. 전적으로 헌신을 하거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제자(disciple)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제나 예수님을 따라 살아감으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제자는 어떤 각오로 살아가야 합니까?
1. 예수님만을 뜨겁게 사랑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26절)
본문 26절의 말씀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말씀은 부모나 처자, 그리고 형제나 자매를 미워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서 자학(自虐)을 한다든지 자살(自殺)을 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부모나 처자, 그리고 형제 자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도저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 길렀겠습니까? 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쥐면 터질세라, 놓으면 날아갈세라,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고 하면서 말도 안된다고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셨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아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물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해야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때는 기쁜 마음으로 져야합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기쁜 마음으로 지는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꼬마가 있었습니다. 대 여섯 살 밖에 먹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등허리에 거의 저만한 아이 하나를 엎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묻습니다.
“얘야, 무겁지 않니?”, “아뇨”, “아니라니, 그렇게 큰 아이를 엎었는데 …?”
그 꼬마는 씩 웃으면서 “내 동생인 걸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쁨으로 못 지면 억지로라도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그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그때마다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그 십자가를 끝가지 지고 갈 수 없겠다고 판단을 했던지, 많은 구경꾼들 가운데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을 잡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던 구레네 출신의 시몬의 아내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이런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자기를 철저하게 희생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철저히 희생할 각오를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의 세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지에 대해서 계산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비용, 즉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대가를 지불하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전투의 비유입니다.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먼저 않아서 우리 일만으로 적군의 이만을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지 따져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고도의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 만으로 이만을 이기려면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희생정신이 아니면 안됩니다.
세 번째는, 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면 자신을 녹이는 희생이 없이는 짠맛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특별히 33절의 말씀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 이 세상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예수님만을 더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삭개오의 신앙인격
눅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한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리고는 해저 200미터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고고학적 발견이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리고는 풍부한 물이 있어서 비교적 비옥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여리고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다가 요단강을 건너 맨 처음 정복해 들어간 도시이기도 합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팔아 먹고사는 창기이고, 다른 한 부류는 세리들입니다. 세리를 창기와 같이 멸시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세리들은 자기 동포의 피를 빨아 로마에 아부하고 자기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세리들 가운데 으뜸인 세리장이었고 돈도 많은 부자였지만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로 들어오신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예수님은 창기와 세리라도 친구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자 하는 마음이 평소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기뻤겠습니까?
1. 삭개오의 궁극적인 관심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삭개오의 최대의 관심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신앙적 관심이 엉뚱한 데 있는 것을 벌견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돈을 많이 벌 목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업상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몸이 아파서 병 고침을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니까 교제의 폭을 넓혀 보려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야 새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2. 삭개오는 열정을 가지고 장애물을 적극적으로 극복한 사람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은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들도 앞으로 달려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 뒤편에 쳐져 있지는 않습니까? 앞으로 달려나가는 열정을 가집시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체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