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침 없는 편지 - 유헌
4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 나는 아침 등교 전에 뭔가 성에 차지 않는 일이 생긴 날은 어김없이 못된 반항심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돌이켜 보면 철부지도 그런 철부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적 어머니에게 불만을 거침없이 겉으로 나타내는 내 행동 중의 하나는 아침밥을 거른 채 도시락을 팽개치고 학교에 가는 거였다. 그런 날 어머니는 어김없이 십리 길을 걸어 학교로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곤 하셨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교실 안을 기웃거리시는 어머니는 밭일을 하시다 시간 맞춰 부랴부랴 달려 오셨을 것이다. 때가 절은 일바지에 헝클어진 덩덕새머리, 여름 뙤약볕에 거무죽죽 탄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어린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었다. 교실 유리창 밖으로 얼보이는 어머니를 피해 줄달음질로 도망가 어디든 숨고 싶었던 못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초등학교 친구 K는 졸업한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을만하면 전화를 걸어온다. 울산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 생전에는 늘 “어머니 잘 계시지?”하고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다. K가 어머니를 먼저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난 그걸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K가 얘기하기 전 까지는 단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에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하는 줄 알았다. 난 어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될 정도였었는데 친구의 눈에 도시락을 갖고 오신 나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K는 고아원 아이였다.
내 친구 K의 가장 부러웠던 기억으로 남아 계시는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뜨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을 넘어 절절한 뉘우침마저 포개진다.
평소 어머니의 혈압이 높아 실살스럽게 약 먹는 일을 챙기는 아내와 외고집으로 맞서는 어머니는 심심찮게 타시락거렸었다. “아픈 곳도 없는데 왜 귀찮게 약을 먹어야 하느냐”며 약 먹기를 마다하시는 어머니와 그 적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쓱 굳어 버리는 아내 틈에 껴들어 나도 “어머니, 약을 제대로 드시지 않아 쓰러지면 그때는 아예 못 일어나실지도 몰라요”라며 사뭇 통사정을 해보지만 어머니는 “이런 좋은 세상에 무슨 그런 병이 있느냐”며 믿지 못하는 눈치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의사이고 약사이셨으니까. 그래도 아내는 꼬박꼬박 아침 식사 후 혈압약을 식탁에 올렸고 시어머니가 드시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초겨울 어머니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시느라 사나흘 집을 비우실 일이 생겼었다. 물론 어머니는 아내가 꼼꼼히 챙겨드린 혈압약과 매일 꼭 드셔야 한다는 며느리의 당부를 간직하고 집을 떠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며칠 후 안면마비 상태로 돌아오셨다. 약을 드시지 않아 버린 것 같았다. 입술만 겨우 답삭거릴 뿐,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만 봤다.
어머니는 1년여의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하얀 눈이 서러운 겨울 우리 곁을 떠나셨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 동안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우리와는 눈만 맞추셨다. 맘속으론 많은 얘기를 하셨을 것이다. 정말 그 말만은 꼭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무척 어려운 시절을 사신 분이셨으니까.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신 후 어머니의 빈방 진열장 위에서 백만 원이라는 큰돈이 발견됐다. 어머니는 돈을 꼬깃꼬깃 종이로 싸고 겹겹이 비닐로 묶어 손이 닿지 않는 본인만의 비밀금고에 보관해 두셨던 것이다. 유독 작은 키의 어머니가 그 높은 곳에 용돈을 아껴 돈을 맡기신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 당신보다는 언젠가 자식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지 않았을까. 중환자실에 누워 얼마나 그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진열장 꼭대기 깊숙한 곳에 백만 원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손자가 대학 들어가면 뭐라도 사주라고.. 안타까운 비밀을 간직한 채 눈을 감으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애단장絶崖斷腸의 피가 선뜩 식는다.
글을 배우신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당신의 방 벽에 걸린 달력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후의 하루 하루를 연필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두시기도 하셨다. 생전에 아버지를 대할 때 조금은 덜 살갑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병중에 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절실하고 큰 줄은 몰랐었다. 난 그런 어머니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미쳐 헤아려드리지 못한 불효자였던 것이다.
팔십 평생을 까막눈으로 사셨던 어머님은 생전에 노인학교를 열심히 다니셨는데 거기서 깨우친 한글 실력으로 목포에 사는 여동생 집을 찾아갔다가 아무도 없자 ‘박일심 하머이 아다 가다’란 쪽지를 아파트 현관문에 붙여놓고 가셨던 모양이다. 손자를 생각해 본인을 할머니라고 쓰셨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할머니 할머니 하니까 그렇게 적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침이 빠지고 맞춤법이 틀린 그 쪽지는 동생이 나에게 건네줘 지금도 우리 집에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품중의 하나로 어머니가 그리워 애통터질 때면 꺼내놓고 보곤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모든 게 후회로 돌아온다. 친척 집에서 쓰러지시기 전에 어머니가 조금 이상하다는 전화를 받았었고 그 때 이미 뇌혈전증의 전조 증상이 나타났던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빨리 집으로 오시라고 하세요”라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그곳의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만 받았어도 중환자실에서 힘들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남기신 백만 원은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실 일에 보태고 싶었는데 그것도 차일피일 미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살다보면 요긴하게 쓰일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십리길 강진 장에 푸성귀 몇 다발 팔러나가 해질 무렵 몇 개의 풋사과, 가래떡과 바꾸신 후 의기양양 팔을 휘저으시며 신작로를 돌아오시던 어머니. 늘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에게 뭔가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 과일 장수와 떡 파는 아주머니에게 통사정했을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생각하면 어머니는 그대로 눈물이시다.
어머니를 단 한번 만이라도 뵐 수만 있다면, 맘 놓고 울 수만 있다면.. 그 눈물의 장강長江 속으로 나도 받침 없는 편지를 쓴다. ‘어마 보고 시어요, 우고 시어요’.
첫댓글 가슴을 적시는 수필 자알 읽고 운동나갑니다.
와서 더 읽업고싶은 글... 감솨~ !^*^
네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