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ㅡ性氏상식ㅡ
What's your name (姓•名)
한국 성씨의 절반 가까운 46%는 귀화 성씨이고, 한민족의 약 30~40%는 귀화인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다문화를 수용해야 한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와 몽골제국, 미국과 중국이 대국으로 건재한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엔 정해진 짝이 없이 남녀가 혼거하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누군지 불확실해,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모계사회를 구성했다.
수렵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아버지 중심의 부계사회로 전환된다.
성(姓)은 모계사회에 근거해 여자에게 붙인 것으로 女+生, 즉 여자가 낳은 아이를 뜻하며, 씨(氏)는 씨앗에서 연유돼 남자에게 붙혔다.
(이름은 '이르다'에서 나온 명사이다.)
성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대 씨족사회에서 다른 씨족과 구분하기 위해 지배자에게 부여해 사용한 호칭이 성(姓)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는 고조선시대 부족장이나 왕족에서부터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 초기엔 이름만 있었다.
그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자식 표기로
이름 앞에 동계혈족집단 (同系血統集單)의 명칭인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
성씨(姓氏)의 성(姓)은 출생의 혈통, 씨(氏)는 시조의 출생지나 근거지인 관향 (貫鄕)을 나타내고, 항렬은 시조로부터
몇 대 손임을 나타내는 돌림자이다.
[성명에 관한 법률]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나, 부모가 어머니 성을 따르기로 합의한 경우 예외를 인정한다.
※동성동본 금혼은 2005년부터 폐지한다.
※성씨에는 두음법칙 규정을 삭제한다.(유-->류)
※이름의 글자 수는 성(姓) 외, 5자까지만 허용한다.
고조선은 환(桓)에서 한(韓)으로, 고구려 시조 주몽은 성이 고(高)씨다. 충신에게 극(克), 중실(仲室), 소실(小室) 성을 주었고, 백제 온조왕은 성을 부여(扶餘)로 하였다.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왕족 외, 3대 유리왕 때 6부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했다.
양부(梁部) 李氏, 사량부(沙梁部) 崔氏, 모량부(牟梁部) 孫氏, 본피부(本彼部) 鄭氏, 한지부(漢祗部) 裵氏, 습비부(習比部) 薛氏 성(姓)을 사성했다
가야국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許黃玉) 공주와 최초 국제 결혼한 왕으로, 황금알에서 태어나 성을 金氏로 했고,
왕자 일부는 김해 許氏가 됐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성이 대씨(大氏)로 대씨와 태씨(太氏)의 시조가 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20여 개, 신라는 10여 개 성씨가 사서의 기록에 보인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성(姓)은 차츰 사라지고, 신라에서 발생된 성씨가 한반도 전체로 확산됐다.
고려 왕실의 성은 왕씨(王氏)로 왕건의 증조부 왕국조(王國祖)가 시조이다.
왕건은, 개국공신들에게 사성했는데
'홍유'는 부계 洪氏, '신숭겸'은 평산 申氏, '배현경'은 경주 裵氏, '복지겸'은 면천
卜氏의 시조가 됐다.
고려 때, 신라 장수 '김행'은 왕건의 건국을 도와서 권씨 성을 하성받아 '안동 權氏'의 시조가 된다.
제국공주를 따라 귀화한 몽골인 '후라타이'는 성명을 '인후'로 바꿔 '연안
印氏'의 시조, 위구르 귀화인 '三哥'는 '장순룡'이란 성명을 얻어 '덕수 張氏'의 시조, 베트남의 왕족 '이용상'은 정변으로 고려에 귀화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전주가 관향이다.
여진인 개국공신 '동두란'에게 '이지란'이란 성명을 주어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됐고, 임진왜란 때 귀화해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한 왜장 '사가야'는 '김충선'이라는 이름으로 우록(달성군 가창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근래 한국 관광공사 사장을 지낸 <이참> (베른하르트 크반트: 독일)은 '독일 李氏'의 시조, 국제 변호사 <하일>(로버트 할리: 미국)은 '영도 河氏'의 시조가 됐다.
고려 중엽부터 일반화하기 시작한 성씨는 조선시대에 더욱 확장돼 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갖게 된다.
조선 초기엔 천민이 전체 인구의 1/2로, 백성의 반 정도만 성이 있었다.
백성(百姓)이란? 백 가지 성씨란 뜻인데, 국민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본관과 성을 갖게 된다.
전 국민의 1/2이나 되던 노비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명문세가에 투탁
(投托)하면서 성을 사고 팔기도 했다.
그래서 소위 양반이라는 대성(大姓)엔 약 반 정도는 노비 출신 천민이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무명 성씨이거나 희성(稀姓)들의 가문이 순수한 혈통을 유지했다.
현재 명문세가의 성씨들은 자기의 조상이 양반이나 천민일 확률은 반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엔 250여 개, 성종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개, 후기 영조 때는 298개 성이 수록돼 있다.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주로 250여 개, 1930년대와 1980년대 국세조사에도 250여 개로 나온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한국의 성씨는 총 728개로 갑자기 늘었는데, 428개는 근래 귀화 성씨이고, 한국 성(姓)은 286개였다.
현재 주민등록상 성씨는 5,000개가 넘고,
그 중 한자 없는 성이 4,000개 이상이다. 동남아시아 등에서 국제결혼에 의한 국적 취득자들의 성으로 보인다.
(코비•리샤•짠투이•레지나•와비린 등.)
동•서양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결혼하면 여자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한국만 예외이다.
중국도 일부는 남편 성을 따르기도 한다.
金•李•朴•崔•鄭•姜•趙•尹•張•林의 10대 성씨가 64.1%, 20대 성씨까지는
전 인구의 약 80%를 차지한다.
金氏가 21.6%, 李氏가 14.8%, 朴氏가 8.5%이다.
본관으로는 김해 김씨가 9%,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의 순서이다.
286개 성씨 중 약 40%는 인구 1,000 명 미만이고, 하위 42개 성은 인구 100명 미만이었다.
중국 성씨는 4,000여 개,
일본은 10만 개가 넘는다.
※<중국> 5대 성씨: 李•王•張•劉•陳.
※<일본> 사토•스즈끼•다카하시•다나카•와타나베.
※<미국> Smith•Johnson•Wlliams•Jones•Brown.
한국의 복성(複姓: 2字姓)
南宮, 皇甫, 司空, 諸葛, 鮮于, 獨孤, 西門, 東方, 魚金, 小峰.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 중, 중국 역사
속의 유명한 위인들과 연관된 성씨들.
孔氏: '공자' 52세 후손 '공소' 고려 귀화.
孟氏: '맹자' 40세 손 '맹승훈' 신라 귀화.
諸葛氏: 시조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
5세 손 '제갈충'이 신라 귀화.
칠원 제씨와 남양 갈씨도 제갈씨에서 기원한다.
白氏: 중국 '황제헌원'에서 기원,
16세 손 '백을병'의 후손 백우경 신라 귀화.
餘氏: '여불위' 후손 '여어매' 신라 귀화.
진시왕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기에 진시황의 후손이 될 수도 있다.
朱氏(新安): '주자'의 후손 '주잠' 고려 귀화, 주잠과 동행한 '섭공제' 경주 葉氏 시조, 주잠의 사위 '구존유'는 능성 具氏 시조.
劉氏: 한나라 '유방' 41세손 '劉筌'
고려 귀화.
본인의 성, 밀양 손(密陽 孫)은 신라 6부 모량부(牟梁部) 촌장 문의군(文義君) 구례마(俱禮馬)가 득성조(得姓祖)이다.
유리왕 때 孫氏 성을 받고, 흥덕왕 때 국효(國孝) 손순(孫順) 할아버지가 시조이며, 손자 익감(翼減)이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 밀양의 옛 이름)에 봉해져 본관이 밀양이며, 성씨 순위 25위다.
[가장 많은 이름]
(1945~75년)
※남자: 영수.정훈.
※여자: 영자.미영
(2,000년)
※남자: 민준.현우.지훈.
※여자: 서연.민서.서현.
<뿌리공원>
대전시 중구 침산동 보문산 기슭에
성씨별 조형물과 관련 자료를 모아 만든
세계 최초의 '姓氏公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