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의 제도 종교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가 최근 전세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뉴에이지라 일컬어지는 이 새로운 사상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인류가 취해야 할 패러다임의 변혁을 내세우고 있다. 패러다임은 모든 사회현상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을 말하는 용어다. 이들이 주장하는 변화해야 할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이들의 사상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미 음악, 미술,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서 '뉴에이지 문화장르' 라는 영역을 만들어가며 자신들의 이념을 일반에게 전파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와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비해 유독 기독교와의 극단의 대립을 보이고 상호 비난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중에서도 카톨릭보다는 개신교(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측과 첨예한 대립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도대체 어떤 교리와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기독교측의 맹렬한 비난을 보이는지 살펴보고, 이들의 사상이 녹아있다는 뉴에이지 문화의 각분야를 소개하기로 한다. 또한 뉴에이지 문화 속에 담겨있는 동양 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도 고려해본다. 참고로 이 글에서의 뉴에이지사상과 그 문화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측의 주장을 대부분 그대로 서술하였다. 그 이유는 '뉴에이지' 에 대한 글이 기독교측과 뉴에이지론자들의 것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이 글이 주로 기독교와 뉴에이지 사상 間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 문제의식
㉮ 기독교 사상과 뉴에이지 사상의 충돌을 단순히 상이한 문화관의 충돌로 볼 수 없을까
㉯ 왜 유독 기독교에서 뉴에이지 사상을 문제삼는 것일까
㉰ 뉴에이지 사상의 전세계적인 확산은 사람들의 기호와 욕구에 부응하는 종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가
▶ 뉴에이지의 기원과 개념
New Age 운동의 근원은 1875년 뉴욕에서 러시아 사람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에 의하여 창설된 '신지학 협회(神智學協會)' 에 있다. 신지학적인 기본 명제들 중의 하나는 "모든 종교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뉴에이지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이다. 뉴에이지 사상의 출현 배경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세계관, 과학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몰락에 있다. 즉, 합리주의에 근거한 과학발전을 통해서 인류는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이루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과학의 발전만으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홍수와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 기아와 각종 전염병 만연 등의 사태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만능주의로 인해 생태계 파괴 및 핵전쟁 위협, 인간성의 상실 등의 폐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과학만능주의의 한계는 모더니즘의 그것을 드러낸 것이었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면에서는 뉴에이지 사상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뉴에이지 사상은 특히 60년대 중반 아시아인에 대한 이민법 개정 이후 힌두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구루(guru)들이 미국에 건너오면서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들이 서구의 합리주의·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뉴에이지 사상 속에는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힌두교 사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현대문명에 염증을 느낀 현대인, 특히 서양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위기와 기회의 시대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왜 지구가 이러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일까? 배우 출신으로 뉴에이지 운동의 저술가이며 전도가인 셜리 맥클레인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는데 이 능력을 무지와 망각으로 인해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데 인류의 사상을 지배해왔던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관들이 인간을 스스로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뉴에이지는 특히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의 신과 인간과의 복종관계에서 찾는다. '배꼽' 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뉴에이지 운동가 오쇼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지금까지 기독교가 인간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며 죄인 취급하고 무조건 신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렸기 때문에 인간이 가치없는 존재로 평가되어 스스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 사상의 굴레에서의 탈피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을 위기의 시대와 동시에 기회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뉴에이저들은 기독교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New Age)가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점성술로 말하면 기독교의 시대를 의미하는 물고기자리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물병좌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가 오면 지구의 위기가 사라지고 인류는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병자리 시대라는 개념은 점성술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태양의 춘분점으로부터 순수한 천문학적인 변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약 2000년 동안 지배하게 되는 12성좌의 하나이다. 이것은 점성술에 의하여 우리 지구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미신적으로 믿어왔다. 그들에 의하면 이번 2000년대 말에 태양의 춘분점이 물고기자리로부터 물병자리로 바뀐다고 한다. 물고기는 초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상징이었고,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주 사용되었다. 뉴에이저들은 물고기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기독교의 시대도 끝났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사상을 담고 있는 Marilyn Ferguson의 '뉴에이지 혁명'(원제는 The Aquarian Conspiracy - 물병자리시대의 공모)에서도 뉴에이지 운동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 민족주의와 국가적 이기주의를 떠나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셜리 맥클라인은 자아숭배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지식이 심화되면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사회에 공헌한다고 하면서 뉴에이지 운동이 지구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인간의 잠재력 계발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초능력, 심령술, 두뇌개발 등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대표적인 뉴에이저들로는 앞서 말한 셜리 맥클라인, 오쇼 라즈니쉬 등을 들 수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개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제도 종교로서의 형태도 띠고 있지 않으며, 그 주체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밖에서 뉴에이저라고 불리는 이들도 자신이 뉴에이저인지 확신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뉴에이저들은 기독교의 예배와 같은 의식이나 교회와 같은 자신들만의 모임도 가지지 않고 있다. 다만 1년에 한번 1월 11일 오전 11시와 오후 11시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모여 의식을 치르는 것이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뉴에이지 운동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으며, 그 실체가 분명치 않은 만큼 그 해당 영역도 상당히 넓다는 점이다.
▶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 사상
뉴에이지 운동이 표방하는 것은 한마디로 '다양성 가운데 통일'이라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들은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적 사상의 통합체로서 인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다원적인 종교관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갖가지 사상을 용광로 속에 넣고 융합시킨 형태를 띠고 있다. 뉴에이지의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범신론
범신론의 기본 논리는 신과 우주가 하나이며 한 인간의 영혼이 우주의 핵심이고 우주의 핵심은 곧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범신론적 용어로 신을 정의하면 신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라 궁극적이며 무한한 비인격적 실체, 즉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이며 명상을 통하여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저들이 만든 음악에서 등장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아닌 불교의 싯달타, 힌두교의 크리슈나 등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에서 Lord는 인도의 힌두교 신인 크리슈나를 지칭한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사상의 범신론은 범신론을 강조하는 힌두교 및 바벨론, 그리스 등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또한 범신론은 다음에 나오는 인본주의와 연결된다. 범신론에 다르면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이며, 모든 것이 신이다. 자연을 비롯한 우주만물이 신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에는 우주,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곧 범신론은 인간이 신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이는 뉴에이지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기독교측 비난의 근거가 되고 있다.
②다원주의
범신론을 전제로 하여 발전된 사상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사물의 모습이 달라져 보이듯이 각 종교에서 말하는 신도 이처럼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상이다. 각 종교에서 내세우는 신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이며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지 종교상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③인본주의
여기서의 인본주의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자는 개념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곧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④영적 진화론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는 방법론적인 사상이며 인간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점차 신으로 진화해 간다는 사상이다. 영적진화론과 관련하여 뉴에이지에서는 환생을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규정하며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에서는 인간이 기존 지식과 경험,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해서 의식개혁을 강조하는 데 여기서 명상이라든지 초월명상, 강신술 등을 이용한다.
▶ 뉴에이지 운동의 주요 분야
동양종교, 영지주의, 심령과학, 무속신앙, 명상(초월명상), 투시, 점치는 것, 최면술, 점성술, 요가, 관상, 수상, UFO에 관한 것, 마녀 숭배, 윤회설, 범신론적 학문운동, 인간 잠재력 계발 운동, 초혼(영매를 통한 접신), 텔레파시와 정신동력, 강신술 등을 뉴에이지 운동에서 이용하고 있다. 사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를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분야는 대부분 현대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 대중문화 속의 뉴에이지
대중문화 중 어떤 것이 뉴에이지 문화에 속하느냐 하는 판단기준은 아직 불명확하다. 지금까지의 뉴에이지문화 분류는 대부분 기독교, 특히 개신교측의 판단기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속에 드러나는 뉴에이지 사상이나 제작자에 의한 분류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다음의 분류도 기독교측의 분류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1. 영화
앞서 말한 뉴에이지의 핵심사상들이 반영되고 있으면 일단 뉴에이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접신행위를 소재로한 '사랑과 영혼' , 케빈코스트너 주연의 '꿈의 구장', '엑소시스트'. 데미무어가 열연한 '사랑의 기쁨', '디어헌터', '터미네이터 시리즈', 죠지루카스의 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의 'ET', '백투더 퓨쳐', '인디애나 존스' '쥐라기 공원' 등의 외국영화뿐만 아니라 천년에 걸친 사랑을 노래한 '은행나무 침대' 등의 한국영화도 이에 속한다.
2. 음악
뉴에이지 음악은 명상을 통해 만들어지며,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으며, 가사가 없고, 들었을 때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졌다는 느낌이 든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뉴에이지운동의 음악적인 도구로 지칭하며 뉴에이지 음악을 들을수록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매료되다가 장시간 지속적으로 들으면 영적인 혼란을 일으켜 정신질환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뉴에이지 음악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는 신디사이저 등의 전자악기가 주로 사용된다. 명상을 통해 만들어진 뉴에이지 음악이 듣는이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흥미롭게 들린다. 명상을 통해 대부분 뉴에이저인 작곡가 및 작사가의 뉴에이지적 사상이 음악에 담겨진다는 주장의 진위를 판가름하기는 어렵다. 일반 음악에서 뉴에이지 음악을 분류해내는 기준은 대부분 그 음악을 만든 작가가 누구인가로 하며, 그 장르는 클래식, 락, 치료음악 등 거의 모든 음악장르에 걸쳐 있다. 대표적인 작곡가들로는 George Winston, Yanni, Vangelis, Aphrodite's Child, Beatles, Ace of Base 등이 있다.
3. 대중 영상매체 속의 뉴에이지
모 방송국의 '8월의 신부'라는 드라마는 요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생퇴행요법을 통해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사랑하니까' 라는 드라마에서는 죽은 사람이 현세에서도 등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들이 재밌게 보았던 애니메이션 분야에도 뉴에이지 사상이 담겨있는 것이 많다. '스머프 가족' 이라는 만화에서는 사탄의 5각형 별이 종종 등장해 마력을 일으킨다던가 파파 스머프가 악을 막기 위해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온다. '히맨' 이라는 만화에서의 히맨은 초자연적인 남자신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피라미드, 수정의 힘, 뱀, 해골, 마녀의 주문, 해골인간, 마법사, 동물인간, 반인반조(半人半鳥) 등의 뉴에이지에서 사용하는 상징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 우주여왕 쉬라'는 신비의 바벨론에서 육체로 환생한 하롯(Harlot)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쉬라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며 우주의 악과 싸운다. '슈퍼 그랑죠' 라는 만화에서도 그랑죠가 등장하는 곳의 문양은 '다윗의 별'로 불리는 육각형이며, 원의 가장자리에는 고대문자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그려져 있다.
4. 기타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은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책 가운데 하나이다. '어떠한 믿음도 관념도 갖지 말라, 믿어야 할 것이란 세상에 없다. 그렇다 알아야 할 건 많지만 믿어야 할 것은 없다. 믿을 필요도 없다. 믿음이란 모든 두려움,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대 겁쟁이가 되지 말라. 기도는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것. 기꺼이 세상에 도전하라.....' 등의 어구는 이 책이 뉴에이지 사상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성자가 된 청소부', 클로드 보리롱 라엘이 쓴 '진실의 서' 등 수많은 뉴에이지 관련 서적들이 있다. 인간의 잠재능력을 키우는 방법이 적인 책들도 뉴에이지 계열로 분류된다. 웬만한 서점이면 이러한 책들을 모아놓은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다. 丹, 요가, 초월명상, 마인드 컨트롤 등도 뉴에이지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 뉴에이지 운동의 상징들
뉴에이지에서 사용하는 상징들은 다양하며 영화 속에, 음반의 자켓에, 책표지나 목걸이 등 여러 곳에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5각형의 별, 삼각형(피라미드), 원, 이집트인들이 쓰던 앵크 십자가, 무지개, 6선형으로 된 다윗의 별, 태양, 수레바퀴, 제 3의 눈, 수정, 다이아몬드, 용 또는 큰 뱀, 유니콘, 페가수스, 인어, 뿔있는 염소, 황소머리, 반달과 별모양 등 다양하다. 이 중 목걸이 등 여성들의 엑세사리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앵크십자가는 영생, 불멸을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징으로서 신비주의자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둥근 원은 다산을 상징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하며, 궁극적으로 사단이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며 신성 모독적인 문양으로 간주한다. 제 3의 눈은 모든 것을 보는 눈(The All-Seeing Eye)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조화(Unity)를 묘사한다. 이 조화는 주술, 사단숭배, 힌두교, 불교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신비주의에서 나타난다. 여기서의 조화는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면 제삼의 눈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삼의 눈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영적인 방법을 통해 유한한 존재인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삼의 눈은 호루스(Horus)의 눈으로도 불린다. 제삼의 눈은 특히 앨범 자켓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머티어리얼(Material)의 '제삼의 힘'(The Third Power), 빌 넬슨(Bill Nelson)의 '푸른 달과 웃음의 기타'(Blue Moons and Laughing Guitars),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의 '하늘의 눈'(Eye In The Sky) 그리고 넥스트(N.E.X.T)의 '존재'(The Being)이다.
▶ 뉴에이지와 환생과의 관계
앞서 말했듯이 뉴에이지의 영적진화론에서 전생 혹은 환생 사상은 떼어놓기 힘들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는 윤회사상으로도 불리는데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초기 유태교와 기독교에서도 윤회의 가르침이 있었고,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아시리아, 그리스에서도 윤회사상이 발견된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수많은 논란 끝에 서기 553년에 제 2차 종교공의회에서 윤회의 이론을 이단으로 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회사상에서는 죽음은 영혼의 세계에 이르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윤회를 결정하는 힘은 업(業, Karma - 각자의 영혼이 살아 있을 때 행한 행위)라고 말한다. 최근엔 전생의 기억을 최면술에 의해 되살려 냄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이른바 '전생퇴행요법' 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를 단순히 사람들의 내면에 있던 잠재 의식으로 여기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근거만을 내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뉴에이지에서의 환생은 영적진화의 중요과정으로서 인간은 환생을 통해 이전보다는 영적으로 나은 상태로 변환한다는 사상을 나타낸다. 환생은 인간이 신이 되기까지 반복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주로 고대 힌두교에서 강조되었는데 <우파니샤드>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는 영원히 죽음을 반복할 것이다' 라는 구절이 쓰여져 있다. 기독교나 뉴에이지 둘다 영혼 불멸설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전제로 영혼이 육체의 소멸 뒤에도 다시 다른 육체에 깃들 수는 없다는 사상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재할 때 지상에 있는 이들은 그대로 천상에 들려 올라가고, 지금껏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데 만약 환생설을 인정하면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사상을 부정하는 셈이 되어 기독교의 존립근거가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환생이 실제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론이 기독교와 뉴에이지의 대결 양상을 보여주는 일단이라 할 수 있다.
▶ 뉴에이지 사상이 유독 기독교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
뉴에이지 사상을 비판하는 기독교 서적들의 어조는 상당히 과격하고, 신랄하다. 뉴에이지 사상 뿐만 아니라 이를 담고 있다는 뉴에이지 문화에 대해서도 비난의 강도를 더하고 있으며 대중문화 가운데 뉴에이지적 요소가 많음을 근거로 심지어 대중문화 자체를 뉴에이지문화로 여기기도 한다. 뉴에이지측에서도 기독교는 타파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측에서 뉴에이지 사상을 문제삼는 이유는 기독교와 배치되는 뉴에이지의 교리 때문이다. 앞서 말한 뉴에이지의 핵심사상들은 예외없이 전부 기독교의 교리와 배치되는 것들이다. 범신론이나 다원주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써 더구나 인간을 신과 동격으로 놓는 인본주의사상은 절대신(여호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영적진화론에 있어서도 기독교에서는 전생을 부정하고 있는 반면에 뉴에이지는 신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환생을 인정하고 있다. 뉴에이지사상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근거는 뉴에이지의 출현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사상 및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지금 인류가 당면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찾는 뉴에이지 사상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다른 사상과의 타협을 모색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갈등관계를 이루는 원인은 교리의 배타성 때문이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 '신과 인간과의 절대복종관계' '절대진리로 여겨지는 성경말씀' 등은 다른 종교사상과의 타협 여지를 없애는 주된 근거로 작용했다. 이러한 배타적 교리체계는 비기독교인에게는 唯我獨尊식의 논리로 보일 수 밖에 없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크고작은 종교전쟁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만이 옳다는 식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종교사상과의 갈등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들은 배타적 교리체계를 수정하여 혼합주의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기독교, 특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융통성있는 교리체계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결국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기독교의 고민이 담겨있다. 기독교의 부활론, 유일신론을 포기하면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져 기독교의 존립기반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의 배타성은 오늘날 기독교가 전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는 주된 요인이다. 기독교는 이와같은 배타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를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으며, 앞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사상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 뉴에이지 사상과 동양사상과의 관계
뉴에이지 사상 형성에는 동양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중에서도 힌두교의 사상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앞서 설명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뉴에이지 사상은 기독교측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그렇게 문제시할 이유는 없는 듯하다. 뉴에이지 사상 속에는 동양 사상, 특히 한국 전통사상으로 여겨지는 무속, 氣, 丹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단지 뉴에이지 사상에 속한다는 이유로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분명 서구인들에게는 뉴에이지 속의 동양사상은 낯설고 새로운 대상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사상이다. 기독교측에서 주장하는 뉴에이지 사상에 대한 비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전통사상들은 좀더 다른 시각으로 봐서 상호병존을 모색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제기한 문제의식 중의 하나인 상이한 문화관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뉴에이지 사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적 문화관과 뉴에이지사상을 담은 세계관과의 충돌로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동양사상과의 충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동양사상과 뉴에이지 사상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즉 동양사상 속에는 뉴에이지적 요소를 담은 것들도 있지만, 동양사상 전체가 뉴에이지 문화인 것은 아니다. 무속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전통사상으로서의 위치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기독교적 시각에서 뉴에이지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도 불 수 있으며, 더구나 전통사상 자체를 전부 뉴에이지문화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측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해 다소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다음에 설명할 기독교의 문화관에서 비롯된다.
▶ 기독교의 문화관과 문화선교사업
기독교의 문화관은 일반적인 다원주의 문화관과 다르다. 보통의 다원주의 문화관에서는 문화가 지역이나 향유하는 사람들, 기타 요인들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코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해 우월하다는 식의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한 간섭을 옳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런데 기독교의 문화관은 문화의 다양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구체적으로는 성경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뜻에 합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모습 가운데서도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만족시켜야만 참다운 문화라고 여긴다. 또한 이러한 전제 下에 기독교는 끊임없이 다른 문화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왔다. 이는 다른 문화에 대한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일반 다원주의 문화관과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기독교측에서 최근 펼치고 있는 이른바 '문화선교사업'도 반기독교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문화를 지키고, 나아가 세상 문화를 변화시켜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인터뷰하러간 곳도 문화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문화아카데미의 주요 대상은 주로 10대와 20대이다. 이는 이 세대들이 가장 대중문화의 유혹을 강하게 받고 있기도 하고, 장차 기독교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미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본래 문화에 대한 개념 인식이 희박했던 한국 기독교계에서 위기의식을 가지고 문화아카데미라는 형식으로 문화인식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직 미약한 상태다. 인터넷과 멀티미디어 영상세계에 익숙해있는 젊은이들에게 교회에서 제시하는 대안적 문화는 시대에 뒤쳐지고 흥미없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아직도 문화에 대한 중요성 인식이 미미한 상황에서 무수히 펼쳐지는 대중문화와 맞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쪽의 일부 사람들이 새로운 기독교문화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새로운 발견하고 느낀점
완오: 기독교인으로서 이 문제를 살펴보았던 나로서는 이전에도 교회에서 뉴에이지에 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뉴에이지 사상 및 문화에 대해 어느정도는 식견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 조사를 진행하면서 새로이 발견한 뉴에이지의 특성은 다음의 두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의 개인화를 상징하는 뉴에이지이다. 일본에 가면 각 가정마다 따로 방 하나에 신전을 차려놓고 시간날 때마다 종교적 의식을 치루는 가정들이 많다고 한다. 굳이 교회나 절 등에 가지 않고도 개인이 원하는 시각에 편리하게 종교의식을 치룰 수 있는 것이다. 또 큰 교회일수록 예배시간을 1시간으로 정확히 지키고, 한번에 드려도 될 예배를 1부, 2부, 3부로 나누어 드린다. 어떤 교회는 저녁예배를 오후 3시에 드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교회의 융통성있는 변화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기호와 욕구에 교회가 순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컨데 뉴에이지는 종교의 개인화를 상징하고 있다. 개인종교로서의 특징을 띠기 때문에 제도종교들처럼 밖에서 곧바로 알아볼 수 없으며, 보인다 하더라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뉴에이지의 실체가 불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성의 핵심에 위치한 뉴에이지이다. 막연히 알고 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Marilyn Ferguson이 쓴 의 내용 중에 드러나는 뉴에이지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하는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낡은 사고의 틀을 타파하고,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자는 전제에서부터 그 세세한 내용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고' 라는 핵심주제에서 양측이 제기하는 것들이 너무도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제시하는 행동양식 및 사고방식이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 이상 기독교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가 지겹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고 있고, 같은 맥락에서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뉴에이지 문화가 기독교측에서 말하는 사탄을 숭배하는 이들의 악의적인 음모인지 아니면 새로운 소재를 찾는 현대문화가 상업주의와 결합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는 이 글의 제목인 문화 속의 종교성 존재여부와도 연관된다.
종주: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에서 문제삼는 뉴에이지사상이 단지 이질적인 문화유입에 따른 과민반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조사에 임했다. 특히 기독교측에서 뉴에이지를 비판하면서 동양사상 자체를 뉴에이지라고 하여 매도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으며, 혐오감마저 들었다. 단순한 문화관의 충돌인지 종교간의 충돌인지는 결정하기 힘들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이상 반드시 뉴에이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앞서 말한대로 뉴에이지 속의 동양사상, 구체적으로 한국 전통사상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평가절하한다는 것은 종교가 보이는 편협성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뉴에이지사상은 음반, 영화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들어오고 있기에 서구처럼 뉴에이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약하다. 뉴에이지 사상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대다수 사람들에게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교회가 최근 벌이는 문화선교사업은 생존전략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청년교인 數 감소에 따른 방어적인 대응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방대한 규모의 뉴에이지 사상과 문화를 살펴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주로 기독교적 시각에서 뉴에이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본적인 논의의 한계를 지니고 조사를 진행했다는 아쉬움도 지울 수 없다. 다른 종교에서 바라보는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논의가 빠졌다는 것도 아쉽다. 수박겉핥기식의 피상적인 뉴에이지 운동 이해로 그릇된 판단을 내릴까봐 조심스럽게 조사에 임했다. 그래서 이 조사에서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단지 우리들의 느낌을 이렇게 적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기로 했다. 이 조사를 끝마치면서 가까운 장래에 이 뉴에이지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용어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참고서적
신상언, <사단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 낮은 울타리, 1992
곽용화, <당신은 뉴에이지와 그 음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낮은 울타리, 1995
월간 낮은 울타리 3, 4, 5월호 (뉴에이지 관련 기획연재기사)
김영우, <김영우와 함께하는 전생여행>, 정신세계사, 1994
Marilyn Ferguson, 김용주 역, <뉴에이지 혁명>, 정신세계사, 1994
참고> 낮은울타리 울타리문화연구소 강진구 소장과의 인터뷰 내용
1) 문화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모든 문화가 다양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뉴에이지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것인가?
한국의 문화가 전부 옳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당쟁마저도 좋게 보는 의견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뉴에이지 사상은 그 범위나 실체를 알기 힘들다. 뉴에이지 자체가 동서양 사상의 혼합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 중에는 동양적인 사상과 겹치는 부분도 많이 있다. 이를테면 환생론적인 세계관 및 시간관은 우리 민족들도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사상이었다. 신이 대리인에게 강림해서 현세의 사람을 치료해 준다든지 자신의 말을 전한다든지 하는 무속신앙의 접신, 강신 사상은 뉴에이지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 만주 등지의 무속에서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뉴에이지와 동양사상의 교집합으로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뉴에이지적인 요소가 우리 민족의 사상 및 문화 안에 어느정도 존재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문화 전체가 뉴에이지인 것은 아니다. 동양사상에는 통합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어느 한가지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일례로 氣를 들 수 있다. 이 氣를 근거로 풍수지리설을 설명하는 것이 그 일례이다. 이 氣로 정치 경제 문화 등등의 모든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에는 이 氣를 표현할만한 다른 용어도 없었다. 이 氣는 뉴에이지적 사상에서도 쓰이고 있는 개념으로서 여기서 氣를 근거로 하는 한의학이 뉴에이지냐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한의학 자체가 전부 뉴에이지인 것은 아니다. 한의학을 인간을 치료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 氣의 논리를 비약하여 풍수지리에서 묘자리에 따른 후손의 흥망을 규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리하면 동양사상 內에 뉴에이지적 요소가 들어있지만, 동양사상(우리나라의 사상도 포함) 전체가 뉴에이지인 것은 아니며, 과학적으로 분석해 옳은 것은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동양사상은 서양과는 다른 나름대로 현상을 설명하는 해석원리를 세운 것이며, 서양의 시각에서 무조건 비과학적으로 볼 수는 없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한계점에 도달한 서양의 해부학적인 의학에 대해 다른 시각에서 의학에 접근하는 동양의학을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으며, 연구해서 과학적인 요소를 수용, 의학 발전을 이루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동양사상 內에는 서양사람들이 모르던 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며 미신적인 부분은 제외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볼 때 올바른 것은 수용해 쓰는 것이 타당하다.
2) 뉴에이지가 왜 기독교에서만 문제시 되는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근대문화가 이루는 현실은 자연파괴, 오염, 핵위협 등의 암담한 상황이다. 따라서 뉴에이저들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대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을 탈피해 동양사상들을 포함한 뉴에이지 사상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뉴에이저들은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점들의 근원을 기독교 사상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과 갈등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측에서는 현대 사회를 해석하는 원리로서 성경을 절대 옳은 것으로 여기며, 세상이 잘못 되어 가는 이유는 성경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행동하는데 있다고 본다. 반면에 뉴에이저들은 기독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오류이든 아니든 원인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사상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뉴에이지의 기본 사상에는 인간 내부에 신성이 있다는 전제 下에 인간도 수련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기독교와의 갈등요인이 아닌가?
그렇다. 뉴에이지는 극단적인 人本主義를 지향한다. 인간 내부에 신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한 人本主義는 없다. 기독교에서는 우주 만물을 지은 신과 인간, 자연이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로 규정하며 서로간의 변환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치 돼지가 道를 닦는다고 해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뉴에이지 사상은 이 존재론적 변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본주의가 기독교의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4) 그렇다면 천도교의 人乃天, 事人如天 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도 뉴에이지의 人本主義에 해당하다고 보는가?
천도교의 人乃天 사상은 단순히 인간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고 한 것이지 인간이 곧 하느님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사상 속에는 하늘을 높이는 요소가 존재해 있다. 단순히 나와는 다른 존재로서 내가 도움을 청하면 도움을 주고, 나의 청을 들어주는 존재로서 상정해 놓은 것이다.
5) 전생을 소재로 한 '8월의 신부', 영혼의 현실 존재를 소재로 한 '사랑하니까' 등의 TV드라마나, 뉴에이지 음악, 뉴에이지 영화 등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뉴에이지 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문화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문화를 만든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어떠한 문화도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 문화에는 만든 사람의 가치관, 사고방식 등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많든 적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간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영화, 음악 등의 뉴에이지 문화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든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6) 기독교측에서 뉴에이지 음악을 비판하는 주장 중에는 뉴에이지 음악은 명상을 통해서 만든 것이며, 명상을 통해서 만든 음악에는 만든이의 사상이 담겨지게 되고, 그 음악을 들은 사람은 그 사상의 영향을 받게 받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이 내용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물론 음악을 통해서 듣는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음악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당들은 음악이 없으면 굿을 할 수 없다. 음악은 궁극적으로 종교가 추구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다리(橋)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 다리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의 무속에도 음악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음악이 우리의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곳에서 밝혀지고 있다. 우울증이나 위장병 등을 고치는 치료음악 분야가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리창을 긁는 소리를 정상인에게 매일 들려준다면 그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에 보이지 않는 독이 뿌려져 있다기 보다는 음악도 일종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음악 속에 담겨진 보이지 않는 사상이 인간에게 흥분, 진정 등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찬송가와 같은 음악을 이용한다. 성경의 내용 중에는 악귀들린 사울을 보고 다윗이 음악을 이용해 악귀를 내쫓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음악을 통해 듣는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든지 하는 기능을 하는 뉴에이지 음악은 사회적으로 보면 좋게 보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7) 기독교 내부에도 뉴에이지 문화가 많이 침투해 있지 않은가?
기독교 사회에도 뉴에이지 문화가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사람들에게 세속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을 강조한다. 기억력을 증대시킨다든지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앞세워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요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요가를 지속적으로 수련하면 직관력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이들은 주식 투자를 하기 위해 해당 회사의 경영실적이라든지 기타 제반 여건을 분석하는 동안에 가만히 주식시장에 가서 주식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응시하면 어느 주가가 오를 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주식을 투자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돈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게 하는 매력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건강을 위한다는 미명 下에 사람들의 관심을 크는 경우도 있다. 요즘 시중에 유행하는 엠씨스퀘어도 우리나라의 교육열을 이용한 뉴에이지 문화적 요소로 볼 수 있다. 氣를 강조하는 동양사상에 서양의 과학적 기계문명을 결합한 것이다.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명상을 쉽게 해주는 일종의 명상보조기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것은 보건복지부에 의료기구로도 등록되어 있지 않고, 명상보조기구로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8) 현실적으로 대중문화 자체가 뉴에이지 문화라고 보아도 될 만큼 대중 문화 속에는 뉴에이지적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뉴에이지 문화를 반대한다면 이는 모든 문화에 반대하는 반문화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크리스찬이 가지고 있는 사상 중에는 합리적인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종교 다원주의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나 뉴에이지나 문제될 것은 없다. 각각의 종교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종교 각각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면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와 반대되는 문화나 사상은 줄여나가고 기독교적인 문화를 많이 번성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환생 문제를 예로 들면 불교나 힌두교, 뉴에이지 모두 환생 및 전생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환생은 비록 허구적인 논리이기는 하지만, 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긍정적인 것이다. 즉, 현세에서 착하게 살아야 다음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에 현세에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을 던져준다. 그러나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는 환생은 이와는 달리 진화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간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보다 나은 피조물로 변모해가며 궁극적으로는 신이 되기까지 반복적인 환생을 한다는 주장이다. 죽음 자체를 새로운 세계의 시작으로 보는 것들은 예로부터도 있어온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생을 크리스천이 문제 삼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결코 있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환생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조차도 없다. 혹자는 전생을 되살려서 정신의학적인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분야는 정신의학의 주류가 아닌 Outside 계열로서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전생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관한 자료도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을 대상으로 전생에 대한 실험을 하는데 세 명 다 자신이 일제시대에 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중 한명은 자신이 1920년대 슬라브건물 아래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는데 슬라브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온 것이고 휠체어도 1948년에 이르서 등장한 것이므로 허구로 판명되었다. 이렇듯 환생은 허구적 논리이며, 단순한 종교적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는 타종교의 논리에 대해서 결코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타종교의 가치 중에도 기독교에서 받아들여할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 특히 뉴에이지는 부분적으로 옳은 것을 전체적인 것으로 과장, 호도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부분적인 진리만을 소유하고 있기에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사상들이다.
9) 외부에서 보기에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싸울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독교측에서 뉴에이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그에 속한 문화와 싸워야 하는가?
일단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 문화가 옳지 않다고 본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그릇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성애를 다양한 성문화의 하나로 보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성의 한 형태로서 개인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동성애를 죄로 보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이런 동성애를 단순히 옳지 않다고 비판만 하느냐. 그렇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을 깨우쳐줘서 올바른 길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선 단순히 믿음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동성애로 인한 부정적인 사례들과 동성애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켜 가는가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과 함께 절대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는 믿음적인 접근 두가지를 같이 쓴다. 교리적으로 볼 때 다소 편협하다고 보일 수 있지만, 귀를 기울여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10) 대안 없는 비판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뉴에이지 문화에 직면하여 기독교가 행하는 문화선교사업에 대해 설명해달라.
기독교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88올림픽 이후 1990년에 들어서이다. 그 전까지는 기독교 內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경제가 급성장하고, 신세대들이 등장하면서 신세대의 문화는 구세대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세대 문화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사회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교회 내에도 밖과 똑같은 차림과 의식을 지닌 청소년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인 중 청소년 계층 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직면한 교회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밖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대안 작업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는 아직도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이른바 문화사역을 하는 사람 數도 적고 그 개념도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교회의 문화사역은 세상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수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신촌의 창천감리교회이다. 여기서는 문화아카데미를 하는 데 대중가수들이 와서 노래를 부르곤 한다. 물론 기독교와 배치되는 개념의 문화는 받아들여서는 안되겠지만, 세상과 교회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는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그런 건전한 문화를 교회가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세상과 교회를 잇는 다리로서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방향은 크리스천이 대중문화 세계에 참여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대중문화를 올바르게 이용하려는 것으로 공연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세 번째 방향은 교육을 통해 문화사역을 하는 것이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크리스천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 초기 단계이다. 아직 그 개념도 모호하고,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많지 않다.
11) 문화사역이란 청년 교인 수 감소에 따른 방어적인 자세는 아닌가?
처음 시작은 그랬다. 현대는 미디어 사회이다.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력을 무시하고서는 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미디어에 담겨진 대중문화에 교인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위기 의식이 심화되어 가고 있고, 실제 청년 교인 數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통계가 입증하고 있듯이 신세대들은 의식주보다는 문화적인 것을 중시하고 있는 세대들이다. 이렇듯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신세대들을 포용하기 위해서 교회는 미디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더욱더 교회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12) 서로 다른 종교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 요즘 추세이고, 그것이 옳다고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즉, 비록 상대방의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되어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측에서는 성경에 근거해 뉴에이지를 그릇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문화관의 차이이다. 일반사람들의 문화관은 상대적인 문화관이다. 기독교의 문화관은 이 상대적인 문화관을 두가지로 해석한다. 우선 문화는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가 가치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통일성을 필요로 한다. 이 통일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즉, 보여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어떤 통일된 가치를 지닐 때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상대주의처럼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문화를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는 기독교의 문화관은 일반적인 상대주의 문화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문화관을 가졌다. 가만히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조적인 태도로 그치지 않는다.
첫댓글 하일교회 학생여러분 정신차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