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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속문俗文과 악문惡文
속문이란 그 내용이 저속한 글이요, 악문이란 그 표현이 졸렬한 글이다. 수필이 생활의 체험이나 감회의 기록이라 해도 그 생활의 향기나 그 체험의 감격이 순결하고 고아한 감회가 없다면 그 글의 품위가 있을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품위 없는 생활에서 품위 있는 문장이 생길 수 없고 품위 없는 문장이 저속한 수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글은 첫째 품격이 있어야 한다.
이 품격이란 말은 반드시 윤리적 교훈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정잡화市井雜話나 유치한 감정의 피력이나 인기를 위한 재담이나 에로틱한 문장, 그 생활의 바닥이나 인격이 드러나 보이는 글들을 기탄없이 써 내고, 또 이런 글들을 흥미삼아 게재하는 것을 가끔 지상에서 볼 때, 참으로 면구하고 창피한 감조차 느끼며 책장을 덮고 빈축하는 때가 가끔 있다.
수필에도 어느 정도의 체면과 모랄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인격에 저촉되는 일인 까닭에 예문을 지적할 수 없지마는 글이란 말보다 두렵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수필이란 잡담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하고 학문적 깊이와 이상적 철학성이 풍족하다 해도 그 표현이 비문장적일 때, 이것을 악문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국어교육이 일제 삼십육 년 간 서리를 맞고 올바른 서술이나 표현을 알고, 외국어의 무질서한 침입으로 제각기 글을 써 나간 것이 발단이 되어 올바른 문장을 쓰는 이가 드물다. 그래서 번연이 쉬운 말이 있고, 간단히 말해도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어색하고 난삽한 표현으로 독자를 괴롭히는 예가 많고 모호한 개념을 서슴지 않고 장황히 늘어놓아, 사이비 명문이 풍미한 적도 없지 아니했다. 또 이것을 만연체니 화려체니 명칭을 붙여 서로 치켜세우고 추종하며 후진을 현혹케하여 문장 순화에 피해가 컸다. 그러므로 전항 「문장과 표현」에서 그 기준을 들어 둔 것이다. 만일 전항에서 말한 것이 틀림없다고 받아들여진다면 그 각도에서 문장을 검토해 보면 될 것이다. 청말淸末의 어느 평론가가 “ '호웅미저체원원虎熊麋猪逮猿猨, 수룡타구어여원水龍鼉龜魚與黿’ 이나 ‘심외포훈숙비분燖煨포爋孰飛奔’과 같은 악렬惡劣한 문구가 한유韓愈 작이라고 해서 명시 속에 전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세상이 글 자체를 안 보고 명성에 아부하는 까닭이다”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 한학자 정인보鄭寅普 씨, 사학자 최남선 씨가 그 석학의 권위로 인하여 명문장가로 칭도稱道되는 것도 명실이 상부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근래 우리 문장에 서투르고 외국어식 무리한 문장이 무슨 고차작 예술적 문장인 듯이 군림하여 많은 젊은 초학자들의 문장수련에 피해가 적지 아니함을 본다.
일부 한글 학자들의 글에는, 애써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 써 나가며 말본에 맞는 글로 우리말을 순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높이 평가해도 좋겠으나, 문장이 어색하고 괴이해서 언어사회를 떠나서 문법책만 가지고 공부한 교포학자 같은 말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능청스럽다, 자연스럽다 하는 말은 들었어도 사람스럽다는 말은 못 들었건만 어른스럽게, 겨레스럽게란 말도 쓰고, 노인은 멸시가 아니지만 늙은이는 멸시하는 말이요, 꼴이니 아치(벼슬아치) 하는 말이 다 나쁘게 쓰는 말이건만 대상에 가림 없이 쓰는 것도 올바른 국어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이론은 당연하지만 지나치게 난삽한 한자숙어로 되매기를 해서, 자전을 찾게 만들어 놓고, ‘돌출’이라 하여 명사로 만들어 쓰고 ‘섬광’이란 명사는 또 ‘섬광한다’하여 동사로까지 만들어 가며 쓰려 드는 한자 애용벽도 순탄한 우리말이 아니다. 관용구를 무수히 첩용하고 나서 골자가 되는 말은 꼬리에 잠간 붙여 두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외래어를 잡곡밥처럼 범벅을 만들어 쓰는 것도 곤란한 일이요, 내용은 단 세 마디면 족한 것을 수천 어씩 늘어놓거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일부러 어렵게 표현해야 유식한 줄 아는지, ‘밥 한 그릇 짓는 데 쌀 얼마, 물 얼마면 되느냐’는 평범한 말도 ‘일인분 식사를 제조하기 위하여서는 소요되는 쌀의 분량과 그에 따르는 물의 양은 얼마를 필요로 하게 되는가’ 식의 표현이라야 글이 되는 줄로 아는 사람도 있고, ‘적’자만 대고 열거해 가며 핵심을 잡기 어려울 만큼 애매모호한 개념을 늘어 놓는 글도 없지 않다. 어떤 것은 순 일본인용 한자어를 거침없이 쓰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수필문학 작품과는 관계없는 일반문장에서 지적한 것이기로 극히 사소한 부분이요, 어문학의 논제에 속할지 모른다. 따라서 상론하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는 수필가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김진섭金晉燮 씨의 문장을 한 편 놓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교양에 대하여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을 보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말할 때 우리는 보통 그가 비교적 여유 있는 계급에 속하고 어느 정도로 보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거지가 충분히 사교적이어서 체면도 알고 범절도 있는 말하자면 말쑥하고 세련된 사람을 예상하는 듯싶다. 그러므로 전문대학의 졸업장이나 가지고 있고 일가의 식견을 가지고 매사에 당하며 유행에 뒤지지 않는 맵씨 좋은 의복이라도 입고, 거기다가 간간이 영어 마디나 섞어서 왕왕히 시속담時俗談이나 하고 보면 이것으로 우리는 그를 범상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교양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좀더 세밀히 검토할진대 이것은 교양이란 것을 순수히 외면적으로 관찰한 데서 필연히 결과된 피상적 견해라 할 수밖에 없으니 만일에 교양의 정체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종류에 속하는 교양인의 이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결국은 그들이 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자기 주장을 통용시킬 수 있는 정도의 지식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만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소위 한 문명인이 될 수 있다면 그만일 것이다. 이때 사람은 오직 자기를 주위환경에 순응시켜 나가는 재주만 있으면 그뿐이요, 그때 그의 앞길을 막으며 그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이요, 그러한 조건을 구비했는지라 그는 또한 어느 곳에서나 교양인으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를 요할 것은 세간에는 흔히 이기적 성공만을 위하여 사는 이른바 영달주의자의 무리가 있다는 것, 그리하여 영달주의자, 공리주의자에 속하는 불유쾌한 인간전형이야말로 표면적으로는 교양인과 부합하며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이니, 즉 교양 유무의 표준과 증좌證左를 외면적 인상에 둔다는 심히 위험한 소이가 이곳에 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요 유머리스트인 빌헬름 부슈는 “너는 사람이 입고 있는 조끼만을 보고 그 심장은 보지 않는다”고 일찍이 말한 일이 있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라 할지니, 아름다운 허울이 반드시 좋은 심장을 싸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명정대한 비판적 견지에서 본다면, 사실 많은 사람이 얼마 가량 실용적 한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는 지식과 항상 인기를 모으고 주목을 끌기 위한 정면적인 행동으로 자기 도회韜晦를 일삼고 있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가소로운 미숙과 무내용은 도저히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양이 있다 하는 존칭에 대한 요구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 주장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교양이라 하는 이 개념을 얼마나 깊고 또 높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물론 어느 정도의 지식과 사회적 예의범절이 교양적 요소에 속하기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만일에 그 사람의 인격적 전체와 혼연히 융합되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인격으로부터 유리탈락된 무생명한 요소에 대하여 교양의 낙인을 찍을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교양인이란 사람이 그의 전 인간성과 그의 생활전선에 있어서 내적 발달과 통일에 도달하고 표현하는 곳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니 혹은 이성 교양, 혹은 심적 교양, 혹은 사회적 교양이 각기 완전의 영역에 달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써 교양의 이상에 도달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왜 그러냐, 가장 섬세한 영적 교양이 완전한 무지와도 병존할 수 있는 반면에 고도로 순치된 정신이 내면적 공허를 배제하지 않으며 결점 없는 사교형식의 숙달이 또한 흔히 자기 가정에 있어서의 그의 조야粗野를 엄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교양적 성분이 가치적으로 균형을 얻은 조화의 협력만이 오직 총체적으로 교양이란 현상을 결과시킬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교양이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상술한 바 네 개의 교양형식이 어떤 인격을 통하여 한 개의 통일체를 실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양의 요구는 언제나 그의 전체적인 인간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요, 그 사람의 성분성成分性과 일면성一面性에만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교양의 의미와 목적은 우리들이 타고난 소질과 능력으로부터 될수록 다각적인 통일체를 형성시키려는 데 있다.
일찍이 18세기에 있어서 괴테가 이 교양의 이상을 쿨투리 아니마 내면성의 형성에 둔 것은 저간의 소식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으로 그 시대에 있어 그 교양을 추구하는 무리의 동경과 노력이 외부에서 오는 종류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인격의 신장과 완성에 대한 수단도구로 삼았음은 물론이요, 그들의 개성이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의식적인 자기형성을 통하여 최대한으로 다면적인 형체를 조성하기 위한 재료요 소재임을 의미함에 불과하였다. 인간은 교양에 의하여 오직 인간이요 또 인간이 된다. 이것이 실로 그 시대의 몰각할 수 없는 견해이었던 것이다. 산 교양이란 가장 심오한 의미에 있어서 언제나 그것은 인간형성의 도를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또한 엄밀한 의의에서 최종단계적 완성된 교양이란 있을 수 없다. 교양은 항상 도상에 있는 것이요 목적지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과정을 의미할 뿐 어떤 인격을 통해서 낙착된 소유물로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니, 교양이란 말하자면 운동이요 생성이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있었던 것 이미 되어 있는 것에 대한 동화순응이 아니요 항상 새로이 쇄도하는 많은 재료의 섭취소화에 대한 자기 변혁이요 자기 성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정신적 교양이 무엇임을 아는 사람은 개성적 필연히 규정되는 명확한 선택 본능에 의하여 필요한 것만 섭취하면 그뿐이요, 모든 것에 대해 유희적 · 중성적 흥미란 무릇 그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다. 진실한 교양은 가능한 광범한 범위의 다채한 지식의 수용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 얻은 지식을 동시에 개인적 직업적 사회적 제생활의 요구에 응하여 심화하며 확고화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은 확보되며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양인은 그의 개인적 이해력과 판단력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제반문제― 즉 정치적 경제적 예술적 종교적인 산 현실문제에 대하여 혹은 수용도 하며 혹은 판단도 하며 혹은 형성도 해 가는 그러한 열렬한 직접 관여자가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물론 교양인은 최초부터 자기와 자기의 이해력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까닭으로 자기의 영역을 넘어서는 그 같은 경망한 행동은 그의 극히 염기하는 바 사실에 속한다. 그는 역량이 미치는 범위내에서만 겸허한 확신을 가지고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쉴러에 의하여 창도된 이래 현재는 ‘예술교육’이란 이름 밑에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저 미적 취미교육은 자연과 예술이 가지고 있는 미를 감상함에 의하여 우리의 내적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점으로 보아 다른 것으로서는 대신할 수 없는 하나의 교양가치임에는 틀림없으나 교양의 이상으로서 추앙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왜 그러냐 하면 이 다분히 향락적인 성질을 띠고 있는 취미 배양은 걸핏하면 그 정도를 지는나가기 쉽고, 그 정도를 넘어서는 때 그것은 사람의 건전해야 할 생활과 정신을 부자연스럽게 왜곡시키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양의 이상인 종교적 전체적 인간형성을 조성하는 취미만이 오직 교양가치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요 파행적인 고답적인 향락적인 취미편중은 건전한 정신적 견지에서 볼 때 유해무익한 유한인有閑人의 과잉행동이라 할 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한 것같이 가치적으로 균형을 얻은 모든 종류의 교양적 성분이 음악적 조화의 혼연일체만이 오직 참된 교양인을 만들어 낼 수 있음으로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8 · 15해방 이후 씩씩한 신정신과 불타는 듯한 향학심 지식욕을 가지고 학창에서 연학硏學에 힘쓰고 있는 많은 학생제군에게 충심으로 일언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갈구도 물론 좋으나 이와 병용하여 전체적인 인간수양을 등한히 하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찍이 오랜 압박과 학대 밑에 여러 가지 이유로 혹은 살기 바쁘고 혹은 모든 조건의 불여의에서 얼마나 사람으로서 자기를 교양하는 의무를 회피해 왔으며 태만히 해 왔는가! 그리하여 우리 한국의 각계를 막론하고 참된 교양인이 희소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건국을 위하여 심히 유감된 일이다. 우리 한국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일면적인 교양인조차 많지 않은 현상이 아닌가. 여기서 진정한 교양의 이상을 향하여 자기완성의 길 내지는 국가 재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청년학도 제군의 사명과 책무가 얼마나 중차대함을 제군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언으로 요약하면 교양이 없는 사람은 광택을 잃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올바른 우리 문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위 예문이 얼마나 순화되지 못한 어거지 문장이며 정상적인 표현이 목되는 비문장非文章이라는 것을 알 것이요, 고딕 부분만 생각해 봐도 수정 첨삭 퇴고해야 될 문장이란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해방 후 이런 문장이 학교교재로 널리 채택되어 강의로 다듬어지고 명문으로 선전되고 눈에 귀에 익혀 와서 이제는 조금도 어색하거나 잘못된 문장이 아니라 순탄하고 멋진 글같이 고질화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정된 지면에 일일이 지적해 가며 설명할 수도 없다. 한두 군데만 지적하더라도, 다분이니 도구니 하는 것은 일어日語인데 우리말같이 되어 버렸고 ‘순수히’란 부사는 없는 말이요 ‘낙인’은 ‘전과자로 낙인을 찍었다’ 고는 해도 “애국자로 낙인을 찍는다"는 용례도 없고 “섬세한 영적 교양”이니 “낙착된 소유물”이니 “필연히 결과된”이니 “성분성成分性”이니도 있을 수 없는 용어요 ‘조야粗野’는 이런 경우에는 우리말로는 난폭이요 “얼마 가량”은 이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요 “부합”과 “맥상통”은 공용될 수 없는 말이니 어휘의 사용이 엉망이라고 할 것이다. “일찍이”란 말은 아무개가 일찍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아무개가 이러이러한 말은 일찍이 했다고는 쓸 수 없으며, “무릇”이란 부사의 위치도 그런 용례가 없고 허다한 접속사가 원래의 용례 목적을 벗어나 있다. 즉 문법을 도외시하고 있다. “유희적 중성적 흥미”니 “개성적 필연히 규정되는 명확한 선택본능”이니 “가소로운 미숙”이니 “음악적 조화의 혼연일체” 하는 어구가 다 가능한 표현이 아니며, “섬세한 영적 교양이 완전한 무지와” 운운이라든가, 그 아래 계속해서 연발하는 문구들이 다 불성언어不成言語의 표현이다.
문맥에 있어서도 혼선이 심하고 외면적으로 세련된 수식이나 단편적 지식이 아닌 인격완성을 기해야 하며 완성된 인격자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활용력을 발휘해야 하고 편중교육이 아닌 전인교육이어야 한다는 이 글의 중점과 골자는 산만한 설화 속에 덮여서 선명한 달의達意를 흐리게 하고 있다.
끝에 “일언으로 요약하면” 운운했으나, 이 글을 요약해서 그런 결론은 되지 않는다. 그는 “말하자면”의 뜻으로 사용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글은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해도 문장으로는 악문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명문으로 그릇 알려져 온 까닭에 지금 내 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혹을 느낄지 모른다.
건조체에는 건조체의 특징이 잇고 우유체에는 우유체의 특징이 있듯이 이것이 곧 만연체의 특징이 아니겠느냐고?
먼저 번에도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문장론도 아니요 문체론도 아닌 이 문장유형 분류방법이 실은 커다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건조하면 건조무미한 기록이니, 문장이 될 수 없을 것이요, 우유하면 문장이 우유부단해서 골자가 없을 것이요, 만연하면 문장이 지리혼탁해서 간명하지 못할 것이니 좋은 문장이 될 수 없는 것이 사리가 아닌가. 일보 양보해서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자. 만연체 문장의 대표로 김진섭과 염상섭의 일례를 들어보자.
반달 동안을 두고 찾다 못하여 경찰서에 수색원을 제출한 지 사흘 되던 날 밤중에 연통 속으로 기어나온 것처럼 대가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탈을 하고 훌쩍 돌아와서 불문곡절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코를 골며 잤다.
이 말이 통틀어 한 마디로 엮어져 있다. 만연체라 함직하다. 그러나 여기는 김진섭에게서 보는 비틀어진 어법, 생경한 용어, 괴이한 문구는 없다. 어느 것이 옳은 만연체인가.
문학적인 문장이 일용문같이 쉽게 쓰면 맛이 없으므로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고?
문학적인 문장이 일용문보다 어려운 것은 왜 어려운가? 내용이 원래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밑바닥에 철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것은 특수한 감정이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은유, 상징적 표현이 필요했거나 생략 혹은 비약에 의하여 긴장과 함축을 강조함으로써 문장의 밀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진섭의 문례는 그것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문장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 그 사람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독특한 개성적인 문체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김진섭의 문장은 그의 특유의 개성적 문체로서 높이 평가될 것이 아닌가?
개성적인 독특한 문체란 다른 말로는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목적 · 감정은 그런 식으로밖에 표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은 외국어로 번역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 통례다. 「날개」의 작가 이상이나, 『천변풍경川邊風景』의 작가 박태원도 독특한 문장을 쓰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기는 한국어의 특색이 말살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뚜렷하게 살아나 있다. 가령 이상의 「권태」 속의 최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한 것을 고칠 도리도 없거니와 일본말로 “崔樣ノ家ノ犬ガ…… 金樣ノ家ノ犬ガ 하고 번역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박태원의 「병원」의 ”아픕니다. 모두들 아픕니다. 모두들 너무나 아픕니다“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위 김진섭의 문례에서 "있어서"를 “アリテ”로, 어떠한 사람을 “或ル人”와 같이 일어로 직역을 하면 훨씬 순하게 어울린다. 우리말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을 “이곳에 있다” 한 것이 어색해 보이지만 일문 직역으로 “此處ニ居ル”라고 하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고딕체로 표시한 곳의 어색한 데마다 (이것들을 멋지다고들 하지만) 일문직역日文直譯을 하면 대개 순탄해진다. 문구의 괴상한 데마다 영문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 데도 있고, 어느 것은 전혀 애매한 데가 남는 것도 있다. “도회韜晦”라고 하면 뜻이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카무플라주’ 한다고 하면 과히 어려운 말도 아니다.
일제시대에 우리 어문의 소양이 없이 일본 가서 서양어를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이런 글을 썼고, 그분들이 영어강독 시간에는 단어를 어려운 한자로 뜻을 달아 “바가지를 표자瓢子, 깨진다를 파경破鏡, 담는다를 수용收容, 할 수 없다를 불가능不可能’, 이것을 다시 영어독본 해석에서는 ”바가지가 깨져서 물을 담을 수 없다“가 ”표자瓢子가 파경破鏡되었음으로 인하여 물을 수용收容하기 불가능不可能하였다“ 가 되고, 이 구습口習이 그대로 문장화된 것이 위의 예문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글은 본문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해방 후 학생들에게 훈시 같은 성격의 글이다. 학생들을 놓고 훈회訓誨하는 말에 무슨 예술적 철학적 표현이 필요해서 이런 납삽지리한 문체라야 하겠는가.
이 글은 해방 직후에 쓴 글이다. 각 학교에서 국어교육이 전폐당하고 있다가 해방을 마지했다. 각 국민학교 학생으로부터 중고등학교 교사, 대학생 교수에 으르기까지 다같이 우선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강습 받아야 하던 때다. 이때 이런 글이 나왔다고 해서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근년 문학사나 시사詩史에서 최남선의 신체시를 대서특필하지만 그 시를 오늘날의 시안詩眼으로 시비한다면, 그 시비하는 사람이 돈 사람이다. 지금 어느 누구도 시인이 되기 위하여 최남선의 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김진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김진섭 이전에 우리 나라에 많은 산문가가 있었다는 것, 해방 후 외국어에 감염된 비문장을 씻고 우리 어문을 순화해야 할 시기에 있었다는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그보다도 큰 것은 지금 소위 수필가라 하고, 혹은 대학에서 수필을 강의하고 지도한다는 이들이 이런 글을 “특별한 개성적 문장”이니 “예술적 방향이 짙은 문장”이니 “만연체”니 “멋진 문장”이니 “이런 멋진 수필이 다시 나타나야 하느니” 하고 무분별한 말로 후진을 오도하고들 있다는 데 있다. 문단 노숙老宿의 업적을 찬양하고 좋은 점을 말하지는 못알망정 하자만을 지적하고 있는 내 마음은 무겁고 괴롭다. 그러나 문장을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우리 어문의 올바른 순화발전을 위하여서는 부득이 이것은 지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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