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의 法名(법명)은 日陀(일타), 號(호)는 東谷(동곡)이다.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14살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였고, 1954년 26세에는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오른손 열 두 마디를 연비(고행의 한 방법으로 향불로 손가락 마디를 지지는 일) 정진으로 일대사를 해결할 것을 발원하고, 홀로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가 6년 동안 수행 정진으로 정각을 이루었으며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으셨던 한국 불교의 선지식이었다. 그는 1999년 미국 하와이 와불산에서 세수 71세로 입적했다. 친가와 외가의 친인척 41명이나 출가하여 승려가 된 수행자 집안 출신으로 세계 불교사에 전후 후무한 족적을 남겼다. 출가는 큰 외삼촌을 시작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외삼촌까지 모두 출가한 데 이어 친가의 부모와 형제, 누이까지 모두 출가하였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며, 가히 신기하고 드라마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일까? 세상에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반드시 이루어지기 전에 어떤 씨앗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외증조 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세상을 떠남),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跡)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평등월 보살은 안성이씨 양반으로 광산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속에서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 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대부분의 재산을 다 잃고, 연이어 시름시름 않더니 남편은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평등월 보살은 실의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만수 완수 은수 세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가 이렇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열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들이 집안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잘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기계 한 대를 일본에서 구입하였다. 이 기계는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 넣으면 껍질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짝처럼 빠져 나오는 그야말로 당시로는 최신식 기계였다. 지금이야 오리털 이불이 있어 가볍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솜으로 이불을 지었으므로 두텁고 무거웠다. 공주 시내 한복판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삼 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덟 시간씩 3교대로 24시간을 멈춤없이 직접 솜틀 기계를 돌렸다. 목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 양이 많을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다.
월말이 되면 삼 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네 몫으로 나누었다. 그 이유는 한 몫은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 몫은 직접 드리지 않고, 한 달 동안 삼 형제 중 누구집에서 며칠을 머무르셨는지에 따라 머문 만큼 분배를 하였다. 예를 들면, 큰 아들집에서 20일을 머물렀으면 2/3몫을 더 주고, 작은 아들 집에서 10일을 머물렀다면 1/3을 더 분배하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집 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청결하게 꾸몄으며,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로 잘 대접해 드렸다. 가끔 절에 가신다고 하면 시주할 돈을 마련해 드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마침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자자 했으며, 평등월 보살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평안함과 기쁨 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마치 관세음보살님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담아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 드렸다.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던 비구니 스님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할머니 ! 요즘 세상 사는 재미가 아주 좋으신가 봐요?” “아, 좋지요, 우리 아들 삼 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 해 주는지......, 라며” 아들, 며느리, 손자 자랑을 늘어 놓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업이 된다는 말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할머니는 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이고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습니까?” 라며 바랑을 짊어지고 떠나는 스님을 10리의 길을 쫓아 가면서 스님에게 사정을 했다. “스님, 제발 저희 집에 하룻밤만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라며 매달렸다. 간청에 못 이긴 스님은 할머니가 안내하는 데로 방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또한 스님의 등 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을 하고 있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제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정말 업이 되기 싫소?‘라는 질문에, 할머니는 “아이구, 제가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 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주십시오.”라며 애원했다. 그러자 스님은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라고 하자, 할머니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身口意 삼업을 단속하라는 말이었다. 즉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몸 단속을,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라는 것은 입 단속을, 일심으로 극락 왕생을 기원하라는 것은 생각 단속이었다. 이 말에 할머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리 도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 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러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 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고 생각으로는 긍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자, 할머니는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큰 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 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걸치고 온 걸망도 그대로 둔 채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할머니는 스님이 ‘변소에 가시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다. 사람을 시켜 온 동네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순간 ‘아! 그 분이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라는 생각이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방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하여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다. 집안 일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고, 10년 가까이 스님이 시킨 대로 하루 종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이 생겼다. 하루는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과연 끼니 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러 각별히 당부하였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세 아들은 말씀대로 아침부터 솜틀기계를 멈추고 물통 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서둘러 옆집 불을 껐다. 만약 가득 쌓여있는 목화솜에 불이 옮겨 붙기라도 했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집의 피해까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일타스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 할머니는 큰 아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 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 김창석 씨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男)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婚事)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수보살’을 찾았다. 갑작스런 변화를 걱정한 아들 삼형제는 인근에 있는 마곡사 태허(太虛:鏡虛 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가 상의한 바, 지금까지 불렀던 나무아무타불을 지속적으로 염송할 것과 예언을 자주 하는 것은 마섭(魔攝:마장, 혹은 장애)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면서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란 글자를 써 주며 벽에 걸어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상 부를 수 있도록 말씀드릴 것을 일러주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이란 글자를 보면서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다. 그리고 앞 일도 예언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할머니는 부지런히 염불 기도를 하시다가 8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때에 그야 말로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7일장을 지내는 동안 매일 같이 방광(放光)을 하였던 것이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매일 같이 달려오기를 거듭했다. 문상객들이 붐비는 집안에서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대낮같이 훤하게 밝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 말로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 자체였다. 이는 외증조할머니의 염불 기도를 통하여 대광명을 놓는 기적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신비한 기적을 직접 체험한 가족들은 크게 감화를 받고 그뒤 차례로 출가하여 집안 친가·외가 41인 모두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일심으로 염불하고 기도한 공덕으로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가피가 함께 한 것이다.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기도는 일타스님의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출가시켜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불가사이한 일이 일어난다. 다만,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다는 것이다. 일타스님의 가족(친가·외가) 41명의 출가를 접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듯이 세상 모든 일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며,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고) 1) 일타스님,祈禱(기도),효림 2)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출가 부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