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 별곡>
내 고향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이다.
보은군은 우리나라 유일한 내륙도의 남쪽 한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고장이다.
조선 태종 6년부터 ‘보은(報恩)’으로 불렸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군의 동쪽에는 소백산맥 줄기인 ‘속리산’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보은 읍 외곽에 위치한 삼년산성(三年山城)은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던 신라가 축성,
그 역사가 오래 되었고 속리산에 자리한 법주사(法住寺)는 6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
으로, 신라 사찰로는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명찰(名刹)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질(質) 좋고 맛있는 대추의 명산지로써, 그 성가(聲價)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지자체와 주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유수한 기업들을 유치, 지역 발전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산간 오지에 위치한 작은 군(郡)으로써 예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근래에 크게
발달한 도로망과 통신망의 위력을 힘입어 나름대로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련한 추억담이 되겠지만, 어릴 적 고향을 떠올리는 나의 망향의 노래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1) 입향조(入鄕祖)의 체취가 서린 고봉정사 (孤峯精舍)
고향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조들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사적지 ‘고봉정사(孤峰精舍)’
이다. 마을 입구에 상징처럼 서 있는 이 곳에는 나의 입향 조(入鄕祖) 되시는 壽자 福자
할아버지(1491-1535, 호는 屛庵)를 비롯해서, 경주 김씨의 충암(沖庵) 김정(金淨) 선생,
그리고 강릉 최씨의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선생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이 고장의
유림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 매년 음력 3월 중에 제사를 지낸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으로부터 이 세 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고 자랐다.
내 아버님께서는 입향조께서 1519년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어 관직 (이조 좌랑)을 떠나야
했고, 이로 인해 각처를 유람하시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 마을에 정착하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올곧은 선비의 집안이며 자손임을 유념하라고 당부하셨다.
입향조께서는 나중에 복직이 되셔서 구례현감 재임 중 별세, 이 지역에 안장(安葬)되셨고
그 후로 자자손손 이 지역을 지키며 오래도록 살아 온 가문의 일원(一員)이 된 셈이다.
그러니까 이 고봉정사는 나에게 뿌리의식을 심어주고 또한, 선조들께 누(陋)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 산실(産室)이 되는 셈이다.
2) 나의 큰 바위 얼굴, 구병산(九屛山)
구병산은 해발 877미터의 산이다.
산세가 마치 아홉 폭의 병풍을 두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린 시절 내 집 마루에 앉아서 보면 이 구병산이 시야에 잘 들어 왔다. 특히, 정상 부근과
그 주변이 한 눈에 들어와서 나는 곧잘 이 산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거친 바위들이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의 모습들이 시시
각각 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노여워하다가 다시 근엄하게
변하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러면서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산 정상
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 이 구병산의 의연하고 변함없는
모습에 친근감을 느끼면서 마치 나의 분신이라도 대하는 양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로,
아직도 내 맘속에 자리하고 있다.
3) 내 영혼의 길잡이, 시골 예배당
고향하면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존재, 그것은 바로 고향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예배당이었다. 1951년 쯤에 이 예배당이 우리 동네에 세워졌고, 나는 1961(초등
학교 5학년)년 여름방학 어느 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당시, 뒷집에
살던 친구 J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아 마치 인심이라도 쓰는 양 따라 들어갔던 그 날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교회와 인연을 맺고서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한 때 신앙적으로 방황도 하고, 요즘 용어로 소위 ‘가나안’ 교인 (믿기는 하면
서도 교회는 안 나가는 신자)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이 예배당에서 비롯된 내 신앙의
삶은 오늘까지 이어져 왔고, 그 출발이 바로 이 작은 시골 예배당, 지금의 관기교회(官基
敎會)이다.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이는 사람들마다 지니는 사연과 상황에 따라서 그 느낌과 감동도 각기 다를 것이다.
나에게 고향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존재이고, 앞으로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나의 나 됨’을 부단히 일깨워 주는 격려자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듯 하다.
지난 해 이 맘 때, 구병산 앞을 지나면서 느낀 망향의 한시 한편을 나의 ‘망향별곡’으로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우뚝 솟은 구병산 (秋陽雄立九屛山)
오랜 세월 천지간에 변함없이 서 있구나 (萬古不變天地間)
모양은 아홉폭 병풍을 반쯤 펼쳐 놓은듯 (形似半展九曲屛)
기세는 영웅남아들 힘차게 내 달리는 듯 (勢如勇進壯豪漢)
젊어서 너를 보며 청운의 꿈을 키웠는데 (紅顔擧頭靑雲夢)
흰머리로 앞을 지나며 탄식이 적지 않네 (白髮過前不少嘆)
멀어지는 고향을 보며 남은 길 재촉하니 (遠別鄕關促餘路)
산 그림자 묵묵히 친구가 되어 따라 온다(山影默默心中伴)
첫댓글 고향의 그리움이 문득 다가옵니다.
구병산의 정기를 받으셔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많은 좋은 글 남겨주세요.
올 가을에 남도여행과 함께 멋진 추억 쌓고 싶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