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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오염을 지우는 묘약
― 박연구의 <어항 속의 도시> 조명
어항 속의 도시
박연구朴演求((1934-2003) 수필집 ⟪바보네 가게⟫⟪햇볕이 그리운 시절⟫ 등
고일高一짜리 딸아이가 창경원 연못에서 한 시간에 이백 원을 주고 낚시를 하여 잡아온 붕어 다섯 마리를 어항 속에 넣었더니 제멋대로 유영游泳, 곡예를 부려서 미상불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돈이 들고 기술이 따라야 하는 열대어 같은 건 길러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디에서나 손쉽게 잡히는 담수어淡水魚인 붕어쯤 하등 신경 쓸 일도 아니어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침 앞집에 우물이 있어서 딸들이 다투어 물을 갈아주곤 해서 고기가 팔팔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보니 그중 큰 놈 두 마리가 죽어서 떴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아이 할아버지가 모르고 수돗물을 갈아준 탓이었다. 딸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원망하였다. 할아버지는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모양인지 고기도 죽는 독약 같은 물을 우리가 마시고 산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시었다.
그 다음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우물물을 갈아 주곤 했다. 세 마리가 얼마 동안 잘 살아 있어서 그 후로는 어항 사정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보냈는데, 또 두 마리가 죽고 한 마리만 외롭게 남아 힘없이 유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물을 갈아 준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단정을 하고 남은 한 마리마저 죽일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당장 새 물로 바꿔 주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 정성으로는 붕어를 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금붕어나 열대어도 아닌 시시한 물고기라고 해서 관심이 시들해진 탓이 아닌가 싶다.
물을 새로 갈아주었을 때는 유난히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활발하게 헤엄을 치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동작이 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다 물을 갈아 주는 것을 잊어 버렸을 때는 조금 충충해진 물속에서 붕어가 몹시 피로하게 보인다. 마치 탁한 공기로 해서 질식할 지경인 인간의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같은 서울의 지붕 밑이면서도 별로 공해를 느껴보지 못할 만큼 공기가 맑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동네여서 주위에 숲이 있고 새소리가 끊이지 않아 자연 동산이나 마찬가지다. 까치가 지저귀고 참새가 출근길을 전송해 주는 골목길을 걸어 나올 때는 발걸음이 가볍다.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루 일과를 문제없이 해치울 것 같은 의욕이 솟는다. 그런데, 막상 시내 쪽으로 달리면서 정류소마다 사람을 주워 싣고 박석고개를 넘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차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 되고 차도엔 차량이 붐비게 마련인데 스컹크처럼 꽁무니에서 내뱉는 매연으로 해서 서서히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녹번동을 지나 산골 고개를 넘으면 하늘의 색깔부터가 달라진다. 갈수록 짙은 매연 속을 달리게 되는 셈이니 마치 포연砲煙이 자욱한 적진을 향해서 진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에 방불할 만큼 긴장이 된다. 빅톨 위고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살아간다는 게 곧 전쟁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호흡기가 약한 나로서는 정말 비장한 각오가 없고는 곤란하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사무실까지는 한참을 걸어야만 된다. 무슨 행사가 있는 거리처럼 항상 사람들의 물결이 넘실대는 길을 헤쳐 나가려면 스스로가 걷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려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에서도 읽었거니와 사무실에 당도하면 마치 강을 헤엄쳐 저쪽 언덕에 간신히 당도한 것처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버리고 만다.
창밖을 내다보아야 건너편 빌딩의 콘크리트 벽뿐 눈은 여전히 피로하기만 하다. 잠깐 다방에라도 앉았다 오면 기분전환이 될까 하고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따갑게 한다. 전축소리를 좀 줄이라고 하면 못들은 척하기가 일쑤다. 내가 불연자不煙者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방 같은 데서도 나이 어린 사람이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환기 시설도 잘 안 된데다가 굴뚝 연기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로 해서 나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우리 집 어항 속에 남은 붕어처럼 지쳐 버리고 만다.
돌아가신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일화逸話가 생각난다. 언젠가 상경을 했을 때 어느 분이 서울 와보니 소감이 어떠하냐고 묻자, “서울에 오니까 공기가 보인다.”고 대꾸하더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보이는 공기를 안 보이는 공기하고 이따금 환기할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 몸뚱이는 파김치처럼 지쳐 있으나 마음은 그래도 고비 하나를 극복한 것 같은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다 친구와 만나 맥주라도 몇 잔 들이킨 후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다.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서면 차창 안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맛이 달라진다. 점점 우리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사이다 맛처럼 상쾌하다. 새물로 바뀐 어항 속의 붕어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북한산의 솔바람을 호흡하게 되면 나는 생활전선에서 개선하고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집에 들어서면 막내가 된 세 살짜리 아들아이가 나를 제일 반겨 준다. 이놈의 재롱을 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귀여운 자식들은 어버이 눈에 비타민과 같다고나 할까. 그날의 피로가 가셔지고 내일의 생활전선에 활력이 되어 주었다.
― ⟪어항 속의 도시-1976⟫수록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생활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대량 생산으로 손쉽게 구해 쓸 수 있는 생활용품은 인간의 노역을 감소시켰으며,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과 통신 수단은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거리감을 줄여놓았다. 참으로 살기 편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폐해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어항 속의 도시>는 이러한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위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일高一짜리 딸아이가 창경원 연못에서 한 시간에 이백 원을 주고 낚시를 하여 잡아온 붕어 다섯 마리를 어항 속에 넣었더니 제멋대로 유영游泳, 곡예를 부려서 미상불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돈이 들고 기술이 따라야 하는 열대어 같은 건 길러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디에서나 손쉽게 잡히는 담수어淡水魚인 붕어쯤 하등 신경 쓸 일도 아니어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침 앞집에 우물이 있어서 딸들이 다투어 물을 갈아 주곤 해서 고기가 팔팔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보니 그 중 큰놈 두 마리가 죽어서 떴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아이 할아버지가 모르고 수돗물을 갈아준 탓이었다. 딸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원망하였다. 할아버지는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모양인지 고기도 죽는 독약 같은 물을 우리가 마시고 산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시었다.
붕어는 우리나라 어딜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하천이나 저수지에서 많이 사는 담수어이다. 사는 환경을 그다지 가리지 않아 수질이 좋지 않은 곳에서도 잘 산다. 딸아이는 잡아온 붕어 다섯 마리를 어항에 넣어 기르기 시작했다. 앞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갈아주어 팔팔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그중 큰 놈 두 마리가 죽어 떠 있었다. 아이 할아버지가 갈아준 수돗물 탓이었다. 할아버지는 의아해한다. 붕어가 죽는 독약 같은 수돗물을 사람이 마시고 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
화자는 우물물과 수돗물의 대조를 통하여 물고기인 붕어의 생과 사가 갈라지는 현상을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의 생과 사에까지 확대시키려 하고 있다.
그 다음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우물물을 갈아 주곤 했다. 세 마리가 얼마 동안 잘 살아 있어서 그 후로는 어항 사정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보냈는데, 또 두 마리가 죽고 한 마리만 외롭게 남아 힘없이 유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물을 갈아 준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단정을 하고 남은 한 마리마저 죽일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당장 새 물로 바꿔 주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 정성으로는 붕어를 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금붕어나 열대어도 아닌 시시한 물고기라고 해서관심이 시들해진 탓이 아닌가 싶다.
어항 속에서 잘 살고 있는 붕어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던 어느 날 또 두 마리가 죽고 말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어항의 물고기가 관상용 열대어였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은 시들해진다. 화자로부터 야단을 맞은 처음에는 아이들이 우물물을 자주 갈아주겠지만 그 정성도 오래가진 못한 탓이다.
물을 새로 갈아 주었을 때는 유난히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활발하게 헤엄을 치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동작이 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다 물을 갈아 주는 것을 잊어 버렸을 때는 조금 충충해진 물속에서 붕어가 몹시 피로하게 보인다. 마치 탁한 공기로 해서 질식할 지경인 인간의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화자는 어항 속 물고기가 갈수록 동작이 느려지고 탁한 물속에서 몹시 피로해 보이는 현상을 탁한 공기로 인하여 질식할 지경인 사람의 모습에 견주고 있다.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에서 서울에 사는 사람들로 확대시켜 주제와 연결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같은 서울의 지붕 밑이면서도 별로 공해를 느껴보지 못할 만큼 공기가 맑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동네여서 주위에 숲이 있고 새소리가 끊이지 않아 자연 동산이나 마찬가지다. 까치가 지저귀고 참새가 출근길을 전송해 주는 골목길을 걸어 나올 때는 발걸음이 가볍다.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루 일과를 문제없이 해치울 것 같은 의욕이 솟는다. 그런데, 막상 시내 쪽으로 달리면서 정류소마다 사람을 주워 싣고 박석고개를 넘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차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 되고 차도엔 차량이 붐비게 마련인데 스컹크처럼 꽁무니에서 내뱉는 매연으로 해서 서서히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녹번동을 지나 산골 고개를 넘으면 하늘의 색깔부터가 달라진다. 갈수록 짙은 매연 속을 달리게 되는 셈이니 마치 포연砲煙이 자욱한 적진을 향해서 진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에 방불할 만큼 긴장이 된다. 빅톨 위고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살아간다는 게 곧 전쟁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호흡기가 약한 나로서는 정말 비장한 각오가 없고는 곤란하다.
화자는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이지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아직 시골 풍광을 잃지 않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탈 때까지도 하루 일과를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다는 의욕이 솟구친다. 일테면 어항에 우물물을 부어주었을 때 팔팔하던 붕어와 같다. 그런데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그러다가 시내에 들어서면 호흡기가 약한 화자로서는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곤란하다.
시골에서 자연을 호흡하며 사는 편안함과 기계문명의 결집체인 대도시에서 호흡하며 사는 곤란을 형상화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사무실까지는 한참을 걸어야만 된다. 무슨 행사가 있는 거리처럼 항상 사람들의 물결이 넘실대는 길을 헤쳐 나가려면 스스로가 걷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려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에서도 읽었거니와 사무실에 당도하면 마치 강을 헤엄쳐 저쪽 언덕에 간신히 당도한 것처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버리고 만다.
서울(대도시)의 공기는 오염되어 있다. 사람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데서 야기된 현상이다. 그 속에서 인파에 떠밀려 가는 걸음. 서울은 마치 붕어가 헤엄치는 어항 속과 같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 걸어 사무실에 당도하고 나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창밖을 내다보아야 건너편 빌딩의 콘크리트 벽뿐 눈은 여전히 피로하기만 하다. 잠깐 다방에라도 앉았다 오면 기분전환이 될까 하고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따갑게 한다. 전축소리를 좀 줄이라고 하면 못들은 척하기가 일쑤다. 내가 불연자不煙者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방 같은 데서도 나이 어린 사람이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환기 시설도 잘 안 된데다가 굴뚝 연기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로 해서 나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우리 집 어항 속에 남은 붕어처럼 지쳐 버리고 만다.
돌아가신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일화逸話가 생각난다. 언젠가 상경을 했을 때 어느 분이 서울 와보니 소감이 어떠하냐고 묻자, “서울에 오니까 공기가 보인다.”고 대꾸하더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보이는 공기를 안 보이는 공기하고 이따금 환기할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심신을 피로케 하는 서울 생활. 사무에 지쳐 창밖을 내다보면 푸른 나무 대신 콘크리트 벽이 눈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기분전환을 할까 하여 다방에 들르면 시끄러운 음악과 굴뚝 연기 같은 담배연기가 가득하여 귀를 따갑게 하고, 목을 답답하게 한다. 여기서 화자는 물 갈아주는 것을 잊어 충충해진 물속에서 몹시 피로하게 보이던 어항 속 붕어를 떠올린다. 전주에 살다가 서울에 오니 공기가 보인다고 했다는 신석정 시인의 말씀은 충충한 어항 속의 물처럼 서울 공기가 오염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 몸뚱이는 파김치처럼 지쳐 있으나 마음은 그래도 고비 하나를 극복한 것 같은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다 친구와 만나 맥주라도 몇 잔 들이켠 후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다.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서면 차창 안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맛이 달라진다. 점점 우리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사이다 맛처럼 상쾌하다. 새 물로 바뀐 어항 속의 붕어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북한산의 솔바람을 호흡하게 되면 나는 생활전선에서 개선하고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서울 시내에서 콘크리트 벽과 소음과 굴뚝 연기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버스를 탈 때의 후련함. 이를 화자는 한 고비를 극복한 같다고 표현한다. 기계문명에 의해 오염된 서울이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에 대한 간접적인 심리묘사이다. 서울 시내에서 벗어나 화자가 사는 집이 있는 동네에 가까워지면 새로운 샘물로 바꾼 어항 속 붕어처럼 마음껏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게 된다. 이러한 화자에게 서울 시내에서 치러야 하는 하루 일과는 포연이 자욱한 전신이요 그 전선에서 이기고 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집에 들어서면 막내가 된 세 살짜리 아들아이가 나를 제일 반겨 준다. 이놈의 재롱을 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귀여운 자식들은 어버이 눈에 비타민과 같다고나 할까. 그날의 피로가 가셔지고 내일의 생활전선에 활력이 되어 주었다.
집에서 맞아주는 세 살짜리 막내 아이의 재롱이 일상에 지친 화자에게 내일의 생활전선에 활력소가 되어줌은 어린 막내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막내에게서 전해오는 순수성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해맑은 웃음, 꾸밈없는 말,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는 행동이 오염된 공기와 일과에 따른 불신으로 가득한 서울의 벽을 허물어주기 때문이다.
<어항 속의 도시>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어항으로 축소시켜 어항 속의 붕어가 수돗물에 활기를 잃어가고 급기야 죽기까지 하는 현상을 통해 오염되어 가는 서울이 사람에게 끼칠 위험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화자가 찾는 마지막 돌파구로 택한 것이 자연, 세 살짜리 막내아들이 전해주는 순수성이다. 이는 어항 속의 붕어에게 생기를 주는 우물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