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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행(四川行) 4
무정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인......미려군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후~~”
긴 한숨과 함께 무정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아까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군에서는 모든 것이 거칠다. 행동도, 그들의 말도.....무정은 그런 분위기에서 이십년을 넘게 살았다. 몇 마디의 언사를 가지고는 도발은커녕 그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헌데 무정은 그 순간 흥분했다. 그답지 않은 것이었다.
무정은 열어놓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교교(皎皎)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불을 아예 켜지도 않은 것이다. 언제나 야영의 습관대로,,,무정은 그냥 습관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은 두들기는 소리에 무정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이 왼쪽어깨를 앞쪽으로 향한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며 초우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무의식적인 자세였다.
“...........”
문 앞의 불청객은 아무 말도 없었다. 무정도 아무 말 없었다. 당연했다. 이곳에는 자신을 찾아오기는커녕 아는 사람도 없었다. 거의 적일 확률이 높았다.
“험험....무사님, 아까 봤던..당패성이라고 합니다.....여쭐 것이 있으니...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헛기침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자신과 시비가 붙었던 탁자에 있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무정은 오감을 집중했다. 다섯 명쯤 있는 것 같았다. 그중 단 한명만이 미약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무정은 조금은 긴장했다. 전장이었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적은 베면 그만이었다. 허나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들어...오시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무정의 초우가 도갑에서 한 치정도 벗어났다. 준비는 완료 되었다.
당패성은 저쪽의 허락이 떨어지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강호는 무서운 곳이었다. 친구는 몰라도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패성은 이제 자신의 일행이 깨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일행에게 방으로 가서 이 일을 무공이 아닌 말로써 풀어보자고 말했다.
결과는 극명하게 나타났다. 점창과 청성은 표독한 눈을 빛내며 사라졌다. 예상한 바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사제, 사매와 아미의 조일사태와 미려군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방에 들어간 일행은 숨을 멈추었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사척이 넘는 도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도는 도집에서 한 치가량 빠져나와 있었다. 완전히 전투에 임박한 군인을 보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시주, 저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이다. 모쪼록 오해가 없으시기를.....”
나직한 불호성과 함께 조일사태가 허리를 굽혔다. 무정은 조금 난처해졌다. 종교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성질이 아니었다. 군문에서도 종교는 소중히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불교는 한 줄기 위안이었다. 하물며 스님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 여승은 고개까지 숙이고 있으니......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딸깍”
초우의 도신이 도갑으로 완전히 숨었다. 그와 함께 무정이 바로섰다. 어찌나 큰 체구인지 좁은 방안으로 들어오는 달빛조차 가려진 것 같았다.
“일단 앉으시지요. 스님...”
무정의 입에서 조금은 정중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리곤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 유등에 불을 붙였다.
“딱”
한 번의 소리에 바로 유등의 불이 붙었다. 당패성은 눈을 빛냈다. 상당히 능숙한 동작이었다. 그것도 한손으로 호두를 쥐듯 하면서 켜진 유등이었다. 군문의 경험자임이 분명했다.
강호인이라면 화섭자를 썼을 것이었다.
당패성은 켜진 유등 탁자 가까이로 섰다. 그리곤 조일사태에게 눈길을 보냈다. 조일사태는 눈빛의 의미를 파악 했다.
“자 .... 시주, 우선 저희를 소개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저는 아미의 조일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조일사태의 말을 시작으로 각자 소개하기 시작했다. 처음 말을 붙인 청년은 일수십격 당패성이었고 그 옆은 사제 당혜, 어려 보이는 소년은 사제 당소국이라 했다........그리고 화를 닮은 여인은 아미의 속가제자인 미려군........이라 했다. 무정은 고개를 까딱였다.
“무정이라 하오”
간단한 무정의 대꾸에 당혜는 꿈틀했다. 어디서 저런 건방진 자세가 나오는 것인가? 감히 당문의 사람들 앞에서....명성 있는 무림인들조차 당문에 이토록 무례하지는 않았다.
“흥....감히 당문제자 앞에서 이토록 무례하게 나오다니......당문이 우습게 보이나요?”
표독한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래도 일말의 두려움은 있었는지 반말은 아니었다. 당패성은 머리가 지끈 거렸다. 당혜는 본가출신이 아니라 방계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인정받으려는 마음에 남보다 독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 결과 독수화접(毒手花蝶)이라는 명호도 얻었다. 그러나 생각은 편협과 오만으로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당혜를 쏘아보며 조용히 무정의 눈치를 살폈다.
“?......”
뜻밖에도 무정은 가만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돌려 조일 사태를 쳐다보았다. 아까 주루와는 딴판이었다. 당패성은 조용히 가슴을 쓸었다.
“헌데 스님, 무슨 말씀이 있으신지요?”
게다가 조일사태에게 말까지 걸고 있었다. 무정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자가...감히 내말을 무시해!”
당혜가 새파란 눈을 빛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그녀의 뇌리에는 아까 점창의 가기연이 개망신을 당한 사건을 깨끗이 잊은 것이었다. 무정은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이...이......이잌!”
당패성은 낭패한 기분이었다. 이미 그녀의 손은 품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 채려했다.
“팡!......”
공기를 찢는 북소리가 당혜의 얼굴 반치 앞에서 일어났다. 당혜의 얼굴살이 세찬 경풍에 흉측한 모습으로 뒤로 밀리더니 급기야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가 돌아왔다. 어안이 벙벙한 그녀는 흐트러진 초점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비틀거리며 겨우 초점을 잡은 그녀는 자신의 얼굴만 한 주먹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무정의 왼손이었다.
“한 마디만 더해라......”
‘주르륵’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죽는다!.”
차디찬 무정의 말에 그녀는 이제야 한 장면을 떠 올렸다. 가기연의 목이 반쯤 꺾이고 실례를 했던 장면...그녀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품속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조일사태는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무공은 장문인 에게도 그리 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정순한 내력도 이미 일갑자는 가볍게 넘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정의 출수는 눈치 채지 못했다. 아까 주루안과는 달랐다. 그때는 창졸간의 일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대기하고 있음에도 막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침읍했다.
놀라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당패성은 더했다. 그는 그림자조차도 못 보았다. 게다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혜아를 말리는 손보다도 건너편의 무정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무학성취가 덧없게만 느껴졌다.
무정도 약간은 의외였다. 그저 짹짹거리는 것이 귀찮아서 내뻗은 일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코앞에 주먹만 갖다 댐으로 해서 입만 막을 생각이었다.
헌데 갑자기 주먹이 자신이 정한 임의의 점으로 잔상(殘像)을 남기며 빨리듯 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느낌을 기억하려는 그였다. 생각을 계속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무정은 주먹을 거두었다.
창백한 얼굴의 당혜는 두귀가 멍멍한 것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문득 옆의 당소국이 면포를 내미는 것이 느껴졌다. 코밑의 축축한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면포를 코에 댔다. 코피라니....
무림인에게 이것은 중대한 증상이다. 진원진기(眞元眞氣)가 손실된다던가, 주화입마의 증세로 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얼른 운기를 해보았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저자는 내력이아닌 권압만으로도 자신의 코에 있는 혈관을 터트린 것이었다.
권압(拳壓) 혹은 권풍(拳風)은 실상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촛불정도를 끄는 것은 숙련된 외공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녀가 당한 것은 그런 류가 아니었다. 유령처럼 날아오는 주먹은 공기를 밀면서 해낸 것이 아니라 공기를 찢은 것이었다.
그 절대의 속도가 이런 내력도 없이 빠르기로만 주먹으로 공기를 찢고 그 파동이 지금 자신의 귓속까지 공명하고 있는 것 이었다. 당혜는 손에 힘이 빠졌다. 이자는 확실히 자신의 위였다. 그것도 현격하게....그런 그녀의 귓가에 당패성의 전음이 들렸다.
‘이제야 느꼈느냐? 본가는 절대로 저자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금 내가 너희들과 이방에 있는 이유다.’
당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실 이정도면 당패성도 많이 참은 것 이었다. 아무리 현명하고 올곧은 인간이라 해도, 문파를 걸고 말하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참지 않는 것이 정석이었다. 설령 죽더라도 말이다.
당패성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자존심을 접어라! 강한 가지는 멋대로 자라 잘리기 마련이다. 강하고 크게 자라 벨 수 없을 정도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은 고개를 숙여라. 그것이 당문과 너를 위한 것이다.’
당혜는 목면으로 코 주변을 깨끗이 닦았다. 코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흘깃 옆의 당소국을 보았다. 전음은 그도 같이 들은 것 같았다. 당소국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리곤 일어섰다.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손속에....사정을 두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확실한 사과였다. 그녀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정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었다.
일행은 모두 놀랐다. 당패성과 당소국은 이렇게 빨리 마음을 돌린 것에 놀란 것이고, 조일사태와 미려군은 정반대의 예상이 나온 것 때문이었고 무정은 급변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무정은 또 다시 난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코피를 터트린 것에 꺼림직한 데다가 사과까지 받으니 자신이 무슨 산 도적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초우를 공중으로 수직으로 올렸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모두 긴장했다. 그가 도를 든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일으켜졌다. 그러나 출수도, 살기도 없었다.
“...........”
조용한 적막 속에 무정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그러자 도병과 머리가 ‘탁’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나야 말로 미안하오...그대보다는 내가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연장자답지 못했소...”
“ !..... ”
그제서야 일행은 사태를 이해했다. 무정이 사과를 한 것이었다. 당패성은 저것이 군문의 인사법과 비슷함을 느꼈다. 긴장이 풀어진 그는 조용히 웃으며 앉았다. 나머지도 당패성을 따라 얼떨결에 앉았다. 무정은 서서 도를 내렸다. 그때, 창문으로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엇!....”
일행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그의 긴 머리칼이 벽을 휘도는 바람에 날려 올라가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어렸다.
이십년을 전장에서 살았다기에 최소한 오십은 넘은 줄 알았던 것이었다. 또한 한쪽 얼굴은 흉측한 상처로 얼룩져 있지만 또 다른 한쪽은 상당히 준수한 면을 보여주었다....
아니, 약간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특히 정광은 빛나지만 전체적으로 보이는 눈의 쓸쓸함은 도저히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일행은 모두 입을 벌리고 무정을 쳐다보았다.
특히 당혜와 미려군은 지금까지 무정이 보여주었던 행동은 까맣게 잊은 듯이 두 볼이 살포시 발개졌다.
무정은 조용히 앉았다.
“흠...흠....아미타불......”
나직한 불호가 실내를 흔들자 일행은 모두 정신을 추스렸다. 특히 당혜와 미려군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핫핫핫....이것 참.”
낭랑한 웃음과 함께 당패성은 무정을 보았다.
“노형이 ... 그렇게 나이가 어리실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소, 난 어디 은거 고인인줄 알았는데...핫핫핫”
“그렇습니다. 저조차도 저분을 제 윗분으로 보았으니...아미타불”
조용한 미소와 함께 조일사태가 말했다. 당혜와 미려군은 고개를 숙이며 여전히 말이 없었고, 어린 당소국은 이제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무정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당패성은 생각했다. 지금이 분위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소이를 불렀다.
“어쨌거나 저희가 무형에게 실례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벌로써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빛나는 눈의 당패성이 본격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려는 심산이었다. 무정은 살포시 웃음 지었다.
군문에서 무정이 만나본 사람은 정말 많았다. 그중에 당패성 같은 인물도 많았다. 이런 자들은 솔직히 가까이 하면 더욱 피곤한 사람들이었다. 장단을 맞추면 맞출수록 힘들어지는 부류였다.
“당형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단 나는 그리 술을 좋아하진 않소, 아마 많이 못 마실 거요”
당패성의 눈이 잠깐 굳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힘만 센 철부지 강호초출의 풋내기 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란 것을 직감했다. 그는 무정을 구슬려 이용하려는 계획을 지웠다. 이런 자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느꼈다.
“핫핫 걱정 마시오 무형, 벌주로 저 혼자 다 마시고 가면 되잖소. 핫하하하”
어느새 말을 놓기 시작한 당패성이었다. 무정은 그 모양을 보고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은 당패성도 깊게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당패성은 크게 기뻐하며 들어온 점소이에게 술과 안주를 시켰다.
“아미타불 .... 오해가 풀린 것 같군요...정말 다행입니다. 선재, 선재입니다.”
조일사태가 웃으며 연신 불호를 헤아렸다. 무정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완연한 달빛이 중천에 떠 있었다. 밤은 언제나 그렇게 지속될 듯 한없는 어둠만은 머금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