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그것은 중국(다시 명나라)에 진출하려던 도요토미의 야욕을 좌절시킨 전환점이 된 승리이자 조선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대첩이었다.
한산해전에서 대패하자 도요토미는 일본 수군에게 " 조선 수군을 만나면 맞서 싸우지 말라" 는 명령을 문서로 내린다.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 적을 둘러싸기에 편리한 진형. 안택선과 판옥선 조총과 천자총통의 대결. 학익진을 펼칙기 위해 이 순신 장군은 5 ~ 6척의 배로 일본 함대를 유인한다.
패잔병들이 육지에 상륙하면 조선 백성들이 화를 입는다. 그래서 장군은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치신 것이다. 이전의 해전은 정박해 있는 적선을 기습하고 물러나는 단순한 전투였다. 당시 전황에 대한 일본측 기록을 살펴 보자.
" 건내량 속으로 조선 4, 5 척이 오는 것을 보고 철포를 쏘며 반 시간쯤 공격하자 조선 배가 조금씩 물러가는 것을 쉴틈을 주지 않고 공격했다. 조선 배는 수로를 지나 넓은 바다에 이르자 뱃머리를 돌려 키 모양의 함대 모습을 취한 뒤 우리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하며서 공격하니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학익진은 퇴각하던 배가 뱃머리를 돌리고 섬 그늘에 매복해 있던 본대가 넓게 학 날개 모양을 해서 일본 함대를 포위하는 진법이었다.
학익진은 기본적으로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도록 하고, 아군은 횡대가 되도록 배치하는 형태에 적을 감싸 안듯 양 날개가 휘어진 배치가 된다.
4열 종대의 적선 100척과 이순신장군의 함대 10척이 대적을 했다면 병력의 차이는 100 ;10 이지만 접전하는 시점에서는 4:10이 되어 그 비율이 역전된다
우리 주력선인 판옥선은 배의 바닥이 평평해 빠르게 달릴 수는 없지만 홀수선( 배가 물에 잠기는 선)이 낮아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 유리하며, 특히 양측의 노를 반대로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서의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제자리에서의 회전은 판옥선을 쉽게 돌려 측면에 설치된 화포를 적에게 발포하므로써 선수와 선미에 설치된 2문 내외의 화포에 비해 5배인 10여문의 화포를 삐르고 일시에 발포할 수있게 해준다.
학익진의 형태에서 종대로 내려오는 적은 4척이 각각 2문씩 총 8문의 화포를 쏠 수 있지만 , 이순신의 판옥선은 학익진으로 4 ;10, 다시 화포에서 8 :100 의 비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병력에서 100 ;10의 전세가 화포면에서 8 :100 으로 역전된 것이다, 이것이 학익진의 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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