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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구원론(에큐메니칼)
Ⅰ 서 론
에큐메니칼 운동은 1961년 뉴델리 WCC총회에서 지틀러의 주제강연이 “우주적 기독론”을 제시한 이래, 그리고 1963년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가 교회의 사회참여와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 이래, “신앙과 직제”는 “교회와 사회”에 가까이 와기 시작하여, 1990년 서울 JPIC를 계기로 두 운동이 매우 근접하였다.
나아가서 1990년 서울 JPIC와 1991년 캔버라 WCC를 뒤잇는 1993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열린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코이노니아”를 바탕으로 하여 교회의 본질과 윤리를 동일귀속 시켰는데, 이“코이노니아”가“Costly Unity”의 바탕이 되었다.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는 신앙과 직제와 JPIC가 연합연구를 통하여“Costly Unity”, “Costly Commitment”“Costly Obedience”문서들을 내놓았는데, 1993년에 내 놓은 “Costly Unity”는 교회의 본성을 도덕적인 것(교회의 본질은 그 자체가‘도덕적 실재’이다)으로 보고, JPIC의 문제가 교회론과 불가분리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였다.
1994년 탄투르의 “Costly Commitment”는 동구권의 몰락으로 야기된 문제들과 서유럽과 북미 교회들의 사회 윤리적 무력화 등이 교회 공동체의 윤리적 숙고와 행동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교회들 상호간의 헌신과 참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1996년 요한네스버그의“Costly Obedience”는교회가 형성시키는 도덕(moral formation)이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교회의 사회참여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논하고 있다.
이상의 신앙과 직제와 생활과 봉사가 합류하는 과정이다. 무슨 근거로 이들이 과연 합류를 지향하는 것일까? 분명 그 공통분모는 “복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인데, 성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일치에 따른 난점(難點)은 무엇일까? 에큐메니칼 신학에서는 “교회론적 윤리학” 혹은 “윤리학적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표상의 배후에는 나름대로의 우선성을 밑에 깔고 있다.
“Esse”와 “Bene Esse”의 문제냐, 아니면, 모두가 하나의 “Esse”의 양면성이냐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신학에서는 후자 즉, 교회의 본질의 두 양면성으로 취급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교회는 사회적 윤리, 코이노니아적 윤리를 가지고(has)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is)이다.”
이 말의 의미는 윤리학이 더 이상 교회 본질의 부속물이 아님을 의미한다. 교회의 본질 자체가 곧, ‘윤리적 차원’ 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90년 이후 에큐메니칼 문서에서는 교회론과 윤리학의 접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moral formation’이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 소고(小考)의 목적은 교회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복음”(기독론)과 그 각론 차원을 이루고 있는 “칭의와 성화”(구원론)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고찰하데 있다. 이유는 교회의 본질 문제는 곧바로, 기독론의 문제이며, 기독론의 문제는 피할 수 없이 구원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Ⅱ 동방정교회의“복음과“구원론
⑴ 기독론 :“복음
동방정교회는 항상 전통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 그것은 성경의 책들(the books of the Bible),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the Creed),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령들(decrees)과 교부들의 저작들, 교회법(the Canons), 예배모범서들(the Service Books), 성상들(the Holy Icons)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 특히 성경(Bible),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the Creed),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적 정의들은 탁월한 위치를 점유한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개정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전통(Tradition)과 전통들(traditions)을 구분한다. 과거가 전해준 많은 전통들은 인간적이고 우연적이고 경건한 견해들(혹은 나쁜 견해들)이지, 근본적인 기독교 메세지인 하나의 전통(the one Tradition)의 참된 부분은 아니다.
이 하나의 전통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성경속에서 진술되었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적 구조 속에서 고백되어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동방정교회는 “전통”(Tradition)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 속에 나타난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구원론을 발전시킨다.
⑵ 구원론 : “신성화”
㈀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은총과 자유의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다른 것들 가운데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노예가 아니라 아들과 딸들을 원하신다.
따라서,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은총론도 거부한다. 동방정교회는 협력(co-operation) 혹은 협동(synergei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은 두 개의 동등하지는 않지만 동등하게 필수적인 힘들, 즉 신적인 은총과 인간의 의지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사실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은 솔직하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만약 누구든지 나의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계 3,20).
하나님은 두드리시지만,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지, 문을 부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동방교회는 타락후의 인간 상태를 서방교회보다는 덜 엄격하게 이해한다. 아담은 고도의 지식과 완전성으로부터 타락한 것이 아니라, 덜발달된 단순성(undeveloped simplicity)의 상태로 부터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실수에 대하여 너무 혹독하게 심판을 받아서는 안된다. 분명히,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어두워졌고, 인간 의지의 힘은 너무나 손상 되어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모습을 얻는 것을 희망할 수 없다.
그러나 타락이 인류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에 의해서 왜곡 되었으나, 결코 파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록 죄가 자유의지의 범위를 제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타락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그를 순종하거나 순종치 않을 의지의 힘을 제거하지 않는다.’ 협동의 사상에 충실하여,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타락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거부한다.
그러나 타락후 인류는 여전히 자유의지를 소유 하였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인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세워진 인간의 죄가 그들의 노력에 의해 결코 무너질 수 없다고 믿는 서방과 확실히 동의한다. 죄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을 막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오셨다.
㈁ 신적 본성의 참여자’-“Deification”
동방정교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로 적절하게 잘 정의될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인이 목적해야 할 최종적 목표는 신이됨(to become god), 테오시스(theosis), 신화(deification), 혹은 신성화(divinization)를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방정교회에게 우리의 구원과 구속은 우리의 신화(deification)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론적 구원론
동방교회의 신화론(the doctrine of deification) 뒤에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인격에 대한 사상이 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만찬에서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요한 17,21)’고 기도하셨다.
삼위일체의 삼위들이 서로 서로 끊임없는 사랑 속에 거하시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흡수 되기를 기도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이고 유기적인 결합 -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안에 거함 - 에 대한 이 사상은 요한 복음에서 계속되는 주제이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삶으로 보는 성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계속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사상이 그 유명한 본문인 베드로 후서에서도 나타난다. ‘이 약속들을 통하여 너희가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1,4)’ 마음속에 이 신약성서적 배경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신화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교리는 종종 생각되는 것처럼 비성서적이기는 커녕, 베드로 후서 뿐만 아니라 바울과 제 4복음서에서 견고한 성경적 근거를 지녔다.
㉡ 구원론의 우주적 차원
신화(deification)는 몸을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격이 몸과 영혼의 통일성이고, 성육신한 그리스도께서 전 인격을 구원하고 구속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처럼 동시에 신화한다.’
우리 인간들이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 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점에서, 몸은 그것의 장소를 가진다. 그러나 부활의 날까지는 인간의 몸은 완전히 변형되지 않는다. 의인이 죽은자들로 부터 일어나고 영적 몸을 입을 때, 그들의 신성(sanctity)은 외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
부활의 날에 성령의 영광은 그들이 전에 가졌지만 그들의 영혼들 속에 감추어진 영광안에서 부터 나와, 성자들의 몸을 장식하고 덮을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의 몸이 변화산에서 변형된 것처럼, 성자들의 몸들은 신적인 빛에 의해 외적으로 변형될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몸 뿐만 아니라, 전체 물질적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변형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때에 나는 새하늘과 새땅을 보았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졌다.(계 21,1) 구속된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로 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우리 인간들과 더불어 구원받고 영화되는 것이다.
우주적 구원에 대한 이 사상은 동방정교회의 인간의 육체론과 성상론과 같이, 성육신에 대한 정당한 이해 위에 근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육체(물질적 질서로부터의 어떤 것)를 입으셨다. 그래서 비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모든 피조물의 구속과 변형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상의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신화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화는 몇몇의 선택된 주창자들을 위해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동일하게 의도된 것이다. 현재의 삶 속에서는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과의 충만한 신비적 연합을 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이행해야 한다. 우리가 성실하게 이것들을 행하고자 하는 한, 비록 우리의 시도들이 약하고 종종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동일한 정도로 신화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 사람이 신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 혹은 그가 죄를 인식하기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가 신화되기 위하여 쫒아야하는 방법들에 관한 어떠한 것도 [소수에게만 전해지 는] 비의(秘儀)적(esoteric)이고 비상(extraorinary)한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어떻게 신이 될수 있을까 ?’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단 순하다. 교회로 가서 정규적으로 성만찬을 받으라.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기 도하고, 복음서들을 읽고 계명들을 지키라. 서방교회와 마찬가지로, 동방정교회는 확고하게 도덕적 규범들을 희생 시키고자 하는 신비주의를 거부하였다.
넷째로, 신화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사회적’과정(social process)이다.
다섯째로,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재적이어야 한다. 동방정교회는 모든형태의 정적주의, 행동 속에서 문제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거부하였다.
신화는 고도의 신비적 경험을 포함하지만, 또한 평범하고 지상적 측면을 지닌다. 마지로, 신화는 교회의 삶과 성례전적 삶을 전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신이됨(Theosis)은 일상적 삶을 포함하며, 이 연합의 일상적 삶이 적절하게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의 친교 안에서이다. 교회와 성례전들은 우리가 성화하는 성령을 획득하고 신적 모습으로 변형 되어질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수단들이다.
이상이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의 내용이다. 동방정교회는 복음과 삼위일체의 틀거리 속에서 구원론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원죄사상과 죄의 유전을 거부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긍정이 서방교회보다 강하며, 서방교회에서 강하게 부각되었던‘칭의론’문제가 전혀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구원의 과정은 ‘신성화(deification)’ 서방교회의 표현을 빌리자면‘성화’- 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방정교회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의 우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주론적 구원론으로 나아간다. 이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생태신학적 문제를 창조론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기독론, 구원론의 틀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Ⅲ 서방교회의“복음과“구원론”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기둥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모두 공히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인‘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는 삼위일체론적 틀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령의 교통하심이 언급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는 동방교회와 동일한 신앙고백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복음”이해 위에 있지만, 그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방교회는 분열양상을 띠게 되었다.
⑴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서방교회 구원론의 모체는 단연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가 세워놓은 구원론의 두 뿔 중에 어느 것을 잡느냐에 따라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도의 구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의 구원론에서는 “justitia Dei” 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분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실 justification을 구원론의 핵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기인하며 그의 구원론을 살피기 위해서는 은총론을 얘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은총의 3단계가 곧,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은총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서 말한다.
첫째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다. 이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총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서 의지가 선을 의지하도록 준비시킨다.
너의 길을 주께 보이고, 그 안에서 소망하라 : 그러면 그 자신이 그것을 행하리라.’이 말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행한다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을 교정해준다 : 왜냐하면‘그(주님) 자신이 그것을 행하리라’는 말하는 성서는 분명히‘우리 자신이 그것을 행한다’
즉,‘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염두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도 이런 점에서 능동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행동과의 협동(co-operation) 속에 있다. 왜냐하면,‘그의 자비가 우리보다 앞서서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비가 우리보다 앞서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치유될 수 있다 : 그것이 뒤따를 것이므로 우리는 영화로워질 수 있다. 그것이 앞서므로 우리는 신실하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앞서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왜냐하면‘그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 속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멀리 치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치 그분 홀로 완전한 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자기의 의지의 힘을 자랑하지 않고, 의지로 결정한 자, 그러나 겸손하게 의지로 결정한자 외에 누가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justification을 위해 인간의 의지를 준비시킨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행은총을 언급할 때, 그는 성령의 작용(operation)과 은총의 개념을 연결지으면서, 은총 개념을‘비인격적 추상적인 힘(impersonal abstract force)’으로 이해했다.
둘째는 협력은총(co-operative Grace)으로, 이것은 선행은총에 의해 준비된 인간의 의지가 은총과 협력하여 선한 행동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은총이 협력한다는 것이다.
그는 의지를 준비하고, 그리고 협력(co-operation)에 의해 자기가 자신의 작용(operation)으로 시작하는 것을 성취하게 한다. 그는 우리 없이 우리의 뜻을 수행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그 뜻과 행할 뜻을 가질 때, 그는 우리와 협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원하게 만드는 그의 작용과 우리가 원할 때 그의 협력 없이는 경건한 선한 사역들을 수행할 힘이 없다. 우리의 의지를 산출하는데 있어 그의 작용(operation)에 관하여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작용이다.’그리고 우리가 그 의지를 가지고 결과적으로 행할 때 그의 협력(co-operation)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협동으로 모든 것들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셋째는 견인의 은총(persevering Grace)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이 justification을 위해 인간의 의지를 준비시킨다고 하였다. 이때 주어지는 은총은 세례의 성례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했다. 그러나 그가 세례없이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세례받은 모든 죄인이 의롭게 되고, 결국에는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생의 끝날까지 신앙을 지키기 원하다면, 최후의 견인의 은총(The grace of final perseverance)이 요구된다. 이것은 명백히 예정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과, 들은 후에 더 좋은 삶으로 개종되었으나 견인의 선물(the gift of perseverance)을 받지 못한 자들과, 복음을 들은 후에 그리스도에게 오기를 거부한 자들 이들은 정죄된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택함받은 자들은 그들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은총으로 선택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공로는 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견인의 은총은 선행은총과 협력은총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중까지 참고 견디는 선물이다. 이 견인의 은총이 있어야만 죽는 날까지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 나갈 것이고 결국에는 최후의 면류관 즉,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행은총에 의해서 야기된 justification의 사건(event)과 협력은총에 의해서 야기된 justifcation의 과정(process)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justification 이해를 가졌다.
그러나, justification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의’를 아우구스티누스는 16세기적인 ‘전가된’(imputed) 의미보다는‘본래적인’(inherent)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justification 교리는 이 칭의 속에서 인간이 의롭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속에서(within) 창조된 은총의 주입 -이것은 분명 16세기적인 루터식의 칭의개념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justification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righteousness)의 시작과 그에 이어서 일어나는 완성(perfection), 즉 사건과 과정(event and the process) 모두를 포함하며, 훗날 종교개혁의 ‘성화’(sanctification) 개념이 justification의 보호아래 사실상 포함되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justification은 종교개혁기의 칭의 개념인 ‘법정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되는 ‘인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행은총의 우위성을 매우 강조한다.
은총의 우위성을 대단히 강조하였는데, 은총의 우위성을 붙잡은 것이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깔뱅이었으며, 은총의 ‘의화(義化)’ 개념을 붙잡아 발전시킨 것이 로마 가톨릭이었다.
⑵ 로마 가톨릭의 “의인론
로마 가톨릭의 “의인론”은 트렌트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을 ‘창조적 은총’으로 파악하였는데, 로마 가톨릭은 이 은총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서는 은총을 ‘habitus’, 즉 ‘하나님에게서 생겨서 인간에게 내재하는, 어떤 확실한 초자연적인 것’
즉,‘영혼의 본질에’거하는 주입된 상태(habitus infusus)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 은총은 창조된 은총(created grace)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자질(quality)을 의미하는 품성적 은총(habitual grace)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은총 개념은 종교개혁의 거센 도전에 반대하여 칭의를 둘러싼 트렌트공의회의 구원론 부분에서 더욱더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총25차 회기를 이루고 있는 트렌트공의회 내용 중 제6차 회기가 바로 ‘칭의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이며, 이 교령은 ‘칭의’에 관해 현재까지 유효한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칭의 교령’은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칭의의 잠정적인 첫번 논술(제3-4장),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을 인도해 가는 칭의에 이르는 길로서의‘준비’라는 옛 주제(제5-6장),
그 다음에는 더 상세한 칭의의 본질 규정(제7장),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명제를 이해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입장(제8장), 구원의 확실성(제9장), 칭의 은사에 있어서의 성장(제10장),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삶(제11장),
예정의 문제와 그것이 기독교적 생활에 끼치는 영향(제12장), 견인의 은사와 과제(제13장), 새로 짓는 중죄의 가능성과 제거(제14-15장), 그리고 선행으로 나타나는 칭의의 열매(제16장)에 대하여 가르친다.
트렌트공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이해를 따라 은총을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힘’으로 이해하였으며, 루터처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품은 호의(favor)가 아니라 인간에게 객관적으로 제공되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효력적인(effective)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은총 개념에 근거하여 트렌트 공의회는 칭의론(구원론)을 다섯 단계, 즉
① 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 →
② 준비(praeparatio) →
③ 의인(iustificatio) →
④ 선한업적들의 공로(meritum bonorum operum) →
⑤ 영생(vita aeterna). 이 다섯단계에서
①,③,⑤는 하나님의 작용에 속하고 ②,④는 인간의 반응으로 이 둘이 서로 맞물려 함께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이 다섯 단계에 맞추어 트렌트공의회의 의인론을 살펴보자. 첫번째, 선행적 은총은 인간에게 의인을 위한 준비를 마련케 하는 것으로 이 은총에 의해 의인은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의 협력과 동의가 또한 필요하다.
더나아가 공의회는 다음의 사실을 선언한다. 성인(adultis)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칭의의 시작은(ipsiui iustificationis exordium) 예수 그리스도 즉, 인간들 편의 어떠한 공로도 없는 자들을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은총(praeveniente gratia)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격려와 도움을 통하여 자유롭게 동의하고 협력함으로(libere assentiendo et cooperando) 자신들의 칭의를 향해 돌이키도록 성향이 조정된다.
여기에서 ‘자신들의 칭의를 향해 돌이키도록 성향이 조정된다’는 말은 인간이 칭의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의지가 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미 여기에는 신인협동론이 내포되어 있다.
둘째, 칭의에 이르는 준비과정을 언급함에 있어서 그 과정을 세분하여 보면,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믿음 →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함 →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소망함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신뢰함 → 의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함 → 죄를 증오함=세례이전의 회개 → 세례받을 의향 → 새로운 삶의 시작 → 계명의 준수과정으로 나눌수 있다.
셋째, 이렇게 준비된 영혼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원죄와 실제 죄의 제거가 세례에서 일어나고, 믿음·소망·사랑이 주입되면서 실제적인 칭의가 일어난다.
이러한 성향조정과 준비는 실제적인 칭의(iustificatio ipsa)로 나아가는데, 이 칭의는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은총과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내적 인간의 성화와 갱신으로 나아간다(sanctificatio et renovatio interioris hominis per voluntariam susceptionem gratiae et donorum).
그 결과 그 사람은 불의한 사람에게서 의로운 자가 되고, 원수가 친구가 되어 결국에는 영생에 대한 상속자가 된다....그 결과 칭의의 과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제거와 함께 믿음, 소망, 사랑(fidem, spem et charitatem)이 동시에 인간에게 주입된다.
넷째와 다섯째에 관하여는 칭의를 통해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이나 선행의 공로인 칭의의 열매가 넘쳐야 하며, 이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행위와 공로에 따라 신실하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사를 인간들의 공로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트렌트공의회의 칭의교령을 요약하면, 선행적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칭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만들고, 이 준비에서 하나님을 의의 근원으로 사랑하게 되며 죄를 미워함과 동시에 증오라는 회개가 생기고, 이러한 준비에 이어 신·망·애가 주입되면서 칭의 자체가 이루어지며 이때 성화도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리고 계속된 칭의의 증가를 통하여 선행을 하면 그 공덕으로 영생(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하여 볼 것은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루터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생각한 것과는 상반된 개념이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성화와 구분하지 않으면서, 칭의 자체를 실제적인 인간의 의화개념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⑶ 루터의 “칭의론”
루터의 ‘칭의’ 개념과 구원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타락하여 이미 노예의지로 되었음을 전제한다.
㉠ 인간의 노예의지
루터는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은 인정하지만,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는 왜곡되어 전인적으로 자기 사랑과 자기 우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사랑, 자기 우상화로의 지향을 루터는 “자기 자신 안으로 꾸부러져 들어간 것(incurvatam in se)”
혹은 “자아에로의 굴곡(sibi inflectere)”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죄’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죄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를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부른것 보다 훨씬 더 과격한 이해로서 ‘죄=불신앙’이라는 공식까지 이르렀다.
루터의 이러한 죄이해는 인간에게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의지의 자유가 없다는 주장까지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결코 구원에 이르는 선을 할 수 없다고 루터는 말한다.
㉡ 율법과 복음 속에서 등장하는 은총
가톨릭은 트렌트공의회에서처럼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휘하여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면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이 효력적(effective) 은총으로서의 신·망·애를 주입한다는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은총이해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favor)로서의 은총을 주장한다.
이 호의로서의 은총은 말씀의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속에서 나타난다. 루터는 노예의지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을 성령이 말씀속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적 방식을 통하여 구원에로 이끈다고 말한다.
율법은 고발기능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고 죽이고, 소멸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상한 일(opus alienum)이며, 결국 우리를 복음으로 이끈다. 복음은 율법과 완전히 다르고 심지어 정반대의 기능을 갖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고 책망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전파한다.
㉢ 은총의 의미
루터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선포가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자비로서 나타나며 이것은 은사와도 구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은총은 가톨릭이 말하는 주입된 은총(infusa grace)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호의(favor)이다.
은총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라는 사실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
㉣ 이신칭의
루터는 율법이 우리 양심에 고발하는 기능과 복음이 죄용서를 약속해 주고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일깨워 줄 때 회개가 일어나며, 이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 칭의가 주어지며(justificatio per fidem propter christum), 이 “이신칭의”에 의해 인간은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동적 의의 전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이신칭의’신앙이 모든 기독교 지식의 핵심이며,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로 보았다. 루터가말하는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믿어주거나 전가하거나 인정하는(imputare, reputare) 행위로, 즉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에게 가치를 주는 행위를 의미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죄를 전가하지 않음, 곧 죄의 용서에 있다.
루터에 의하면, 죄의 용서나 죄를 전가하지 않음은 곧 의의 전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따라서 죄인에게 주어진 의는 자신에 의해 생성된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이다. 이러한 “칭의론”은 결국 성화차원과는 분리되어질 수밖에 없다. 루터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루터의 칭의론은 성화차원의 적극적인 부분이 취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의 칭의론을 따르면서도 루터와는 달리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깔뱅이었다. 깔뱅을 언급하기 전에 깔뱅에게 영향을 준 동시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을 간략하게 언급해야 한다.
⑷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소고(쯔빙글리, 오이코람파디우스, 마틴 부처)
대부분의 주요한 종교개혁자들(루터를 제외하고는)은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개혁교회의 경우, 인문주의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인문주의의 대(大)학자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의 법(lex Christi)의 중심점을 그의 윤리학에 적용시켰다.
쯔빙글리와 부처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영향은 적지 않았는데, 그의 영향력은 칭의교리를 도덕적으로 설명하도록 이끌었다. 쯔빙글리는 칭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로부터 상당히 벗어났다. 그의 칭의에 대한 이해는 우선 윤리적이었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의’(rigtheousness of faith)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근거하며, 자기 확신에 근거하는 ‘자기 의’ 와는 대조를 이룬다. 복음의 법(lex evangelica)에 대한 에라스무스와 쯔빙글리와의 유사점은 칭의를 갱신(regeneration)에 종속시켰다는 점이다.
사실,쯔빙글리는‘칭의’나‘의롭게 됨’의 용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대신에 rechtglöbig 라는 용어를 쓰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rechtglöbig한 인간은 믿지 않는 자와는 반대로, 기꺼이 자신을 율법에 복종시킨다.
칭의에 대한 유사한 도덕적 접근은 오이코람파디우스의 저작 속에서도 발견되는데, 그의 기독교인의 삶속에서 갱신(regeneration)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강조점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칭의를 그의 갱신에 종속시키도록 이끌었다.
오이코람파디우스의 주된 관심은 신앙의 윤리적 차원(ethical dimension)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증하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도덕적 훌륭함으로 옮기려고 의도했다. 또한 유사하게도 하인리히 불링거는 칭의를 의의 전가(imputation)로 의미하지 않고, 의의 현실화(actualisation)로 의미했다.
마틴부처는 쯔빙글리의 아직 미완성된 도덕주의를 강력한 에라스무스적 칭의교리에로 발전시켰다. 부처는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 교리를 발전시켰다 :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의가 그에게 전가되는 ‘첫번째 칭의’(primary justification) 이후,
인간이 의롭게 되는 ‘두번째 칭의’(secondary justification)가 뒤따른다. 부처의 설명에 의하면, 전가된 의는 사도바울에 근거하고, 경건(pii)의 의는 사도요한에 근거한다.
비록 인간의 첫 번째 칭의가 오직 믿음(sola fide)에 근거하여 발생할지라도, 그의 두 번째 칭의는 그의 행함(works)에 근거하여 발생한다. 이러한 부처의 구원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praedestinatio → electio → vocatio → iustificatio → glorificatio [이것이 논리적 순서인지, 아니며 연대순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기에서 칭의는 두 요소를 가진다 : 믿음에 의한 최초의 칭의와 그 후에 일어나는 행함에 의한 칭의. 그러나, 중요한 점은 부처는 칭의의 보호아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포함시켰지만, 다른 사람들(가령, 맬랑히톤)은 갱신 또는 성화의 보호아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포함시켰다. 부처는 그의 구원의 질서(ordo salutis)속에 성화를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⑸ 깔뱅의 “칭의론”
칭의에 대한 초기 개혁교회의 교리 발달에 가장 의미있는 공헌은 당연히 깔뱅에게 돌려야 한다. 깔뱅은 루터와 같은 의미에서의 칭의를 언급한다. 인간은 사람밖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칭의 속에 있는 그의 의는 항상 그 자신밖에(extra seipsum) 있다 ; 우리의 의는 언제나 우리안에(in nobis)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in Christo) 있다. 깔뱅은 칭의속에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개인적인 연합(union)을 주장한다. 오시안더는 이 연합을 물리적인(physical)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깔뱅은 그것을 순전히 영적인(spiritual)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신자들이 연합의 두 결과는 칭의와 성화인데, 이것들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가 ‘두번째 칭의’를 말한 곳에서, 깔뱅은 성화를 말한다 ; 부처가 성령의 갱신시키는 활동에 근거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 칭의를 연결한 곳에서,
깔뱅은 신자들의 그리스도안으로의 연합(insitio in Christum)에 근거하여 그것들을 관련시킨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새로운 삶의 관점들이다. 구원의 질서에 대한 부처와 깔뱅을 비교해 보자.
부처 : electio → iustificatio impii → iustificatio pii → glorificatio
깔뱅 : electio → unio mystica {iustificatio → glorificatio{iustificatio
쯔빙글리와 부처가 칭의를 성령(성령은 그리스도의 외적인 모범을 모방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할 수 있다)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통한 신자들의 갱신에 종속시키는 반면에, 깔뱅은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에게로의 연합의 결과로서 신자들에게 자발적이고도 분리되지 않게 베풀어진 주된 그리스도의 호의(beneficia Christi)로 이해한다. 깔뱅의 관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으며, 칭의는 단지 그 중의 하나였다.
이상과 같은 틀거리를 가지고 깔뱅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나온 칭의론을 요약해 보자. 위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깔뱅은 칭의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언급하고,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깔뱅의 구원론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 제3권의 내용속에 잘 나타나 있다. 1장은 성령, 2장은 신앙, 3-5장은 회개, 6-10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성화, 11-18장은 칭의, 19장은 종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순서에 의해서 깔뱅의 구원론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빌헬름 니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 구원의 수용의 기초”라고 주장하며 칭의, 회개 및 성화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들”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제 검토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사적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빈곤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유익들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했다.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기까지는 그가 가지신 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것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볼 때에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사리에 닿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는 성령이다.
㈁ 칭의와 성화의 삶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도 말했듯
이, ‘칭의’ 개념에 있어서 깔뱅은 루터와 동일한 견해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깔뱅의 구원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성화”의 강조이다. 이는 그가 성화를 칭의 앞에 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깔뱅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교제라는 틀거리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불가분리적으로 연관시킨다.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택함받은 사람들에게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 그들은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며, 어떤 때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 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이상에서 깔뱅의 구원론의 핵심을 살펴보았다. 깔뱅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였지만, 분리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전통이 20세기 칼 바르트에게서는 보다 객관적 차원으로 전개된다.
⑹ 칼 바르트의“칭의론”-“화해론
㉠ 칭의의 객관적 화해사역 : 예수 그리스도
칼 바르트의 “칭의론”은 철저히 ‘하나님-인간’ 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 근거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의 영원한 초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은혜로우신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복음의 총화’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어떠한 선택도, 어떤 길도, 어떤 행위도 없다. 따라서 죄인들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개개인을 선택한 독특하고 영원한 선택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인간이시다.
이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인류는 선택되었다. 모든 인류가 서 있어야만 하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홀로 서 계신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해 고난당하신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아버지에게 선택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No는 없고, 오직 Yes만 있는 영원한 선택이시다. 이것이 인간들의 칭의를 위한 초석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는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은
우리없이 우리를 위하여’(Ohne uns - Für uns)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Ein-Für Allemal Geschen),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종국적인 사건(Zu-Ende-Geschen)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객관적인 화해의 사역인 것이다.
㉡ 칭의의 객관적 화해 사역의 주관적 실현 : 칭의, 성화, 소명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사건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소명의 초석이다.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칭의,성화, 소명을 그리스도 화해의 일회적 사건(Ein- für-Allemal der Christusversöhnung)에 기초지우고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적 객관적 화해의 실체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성취하신 것을 통하여 모든 인생들이 칭의를 얻고, 성화되고,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바르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의 주관적 수용에 대해서도 크게 주목한다.
성령은 “교회를 모음”“교회를 세움”“교회의 선교”를 이 세상에 실현한다.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성화를 얻게 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 봉사와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있게 된다. 끝으로 성령의 소명을 받아 각각의 신자들은 그들의 소명의 일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1. 칭 의
교회 교의학 4/1에서는, 하나님의 스스로 낮아지심(종이 주가 되심,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그에 대립되는 인간의 교만으로서의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직무에서 비롯되는 화해의 사건인 칭의를 말하고, 성령의 사역에 의한 교회공동체의 불러모음 및 개인의 신앙이 서로 상응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종으로 낮추신 참하나님이요,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칭의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업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바르트는 우리에게 ‘낯선 의’(justitia aliena)로서의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을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받아들이고 있다. 즉 인간의 칭의는 인간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justitia passiva)이며, 우리의 밖으로부터 오는 의(justitia extra nos)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루터나 깔뱅보다는 보다 객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를 강조한다.
2. 성 화
교회교의학 4/2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높이 들리우심(주님이 된 종, 하나님의 아들의 주되심)과 그에 대립되는 인간의 태만으로서의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의 직무에서 비롯되는 화해의 사건인 성화가 들어서며 성화의 사역에 의한 교회공동체의 건립 및 개인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즉,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신 종이시오, 인자이시며 따라서 화해된 인간이신데, 모든 나머지 인생들은 이 화해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데까지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화를 일으키시는 왕적 사업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러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어떠한가?
바르트의 경우 칭의와 성화는 그 어느 하나가 시간적 우위권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양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에 일어난 하나님의 한 행동을 통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화해 행동의 구조, 혹은 본질에 관하여 말한다면 칭의가 우위권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목적, 목표가 순종하는 섬김의 삶, 곧 성화이기 때문에 칭의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만 루터처럼 분리하지 않고, 깔뱅처럼 불가분리의 관계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깔뱅이 이원론적 구조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통한 하늘나라에 대한 영화를 지향하는 맥락과는 달리,
바르트는 교회론의 구조 속에서 성령에 의한 칭의, 성화에 이어 “소명”을 말하면서 이 세상속으로의 보냄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소명은 종말론적 시야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는 깔뱅의 이원론적 구조를 극복하고 일원론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3. 소 명
교회교의학 4/3에서는 화해의 보증인이요 증인(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과 그에 대립되는 인간의 기만으로서의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무에서 비롯되는 화해의 사역인 소명, 또한 성령의 사역에 의한 교회공동체의 파송(Sendnung)과 개인의 소망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보호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the God-Man)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우리의 속죄를 “보증하시며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무장시켜 화해하는 일을 증거하도록 하는 예언자적 사업이다.
이상에서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 부분을 요약해 보았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 그리고 소명을 화해사건의 세 국면으로 본다. 그것은 법률적으로는 (de jure)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 및 각 개인이 이미 화해되었고 칭의되었고 성화되었다는 객관적인 화해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는(de facto) 그것의 완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⑺ 에큐메니칼 신학의 “복음” 과 “칭의론” 수렴
에큐메니칼 신학은 이상에서 말해온 동방정교회의 ‘신화론’(신인협동론)과 서방교회의 의인론’과 ‘칭의론’을 종합하고 있다. 물론 그 근거는 “복음”이다.
㈀ 1927년 로잔 신앙과 직제 보고서
이 보고서는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 - 복음”에서 복음에 대한 에큐메니칼적 정의를 말하고 있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만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으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사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 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
하지만, 위 보고서는 “복음”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발전시켜 최종적으로 수렴한 문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에큐메니칼적 수렴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 1937년 제2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에든버러
이 대회에서는 “복음”을 총론으로하고 그 각론으로 “은혜의 의미”와 “칭의와 성화”를 얘기하고 있다.
1. 은혜의 의미
그의 은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축복하시는 일과,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의 구속과, 거룩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파송 및 교회의 사귐과 말씀, 성례의 선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인간의 구원과 부유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그 근원이 있다.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 편의 어떠한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 의해 은혜로운 행위를 주신다.
2. 칭의와 성화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칭의하시고 성화시키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이 믿음 자체는 선물이다. ·칭의와 성화는 죄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의 불가분한 두 측면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자신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를 정죄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며,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성경과 기독교적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최고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주권이란 모든 개인과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포용하시는 의지와 목적이다.
그리고 이 영원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거룩한 본성의 표출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의 전(全)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지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자신의 의지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인간은 이 같은 수용의 결단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4. 오직 은혜로
어떤 교회들은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어떤 교회들은 그것을 피한다. 이 구절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으나, 우리 모두는 다음의 진술에 동의할 수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의 은혜의 열매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죄와 성화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참자유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을 의미하고, 완전한 자유는 오직 선하고 수용할 만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발견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정리되고 있는 “칭의와 성화”(구원론) 부분을 살펴보았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은총 관계에 있어서 예리한 구분을 내리지 않는다. 이유는 우리가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구분이 교파 분열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폭넓게 정리하고 있다. ‘
적어도 펠라기우스주의만 아니면 된다’는 넉넉한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는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적 양상을 띠고 있다. 즉, 각론에 치중하지 않고, 총론(복음의 객관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Ⅳ 맺 음 말
우리는 이상에서 개신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을 살펴 보았다. 이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이라는 복음에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사역의 주관적 측면으로 들어가면 각각이 상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하면, 2000년의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다양한 구원론을 전개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은 에큐메니칼의 시대이다. 한 교파가 자기것만을 고집해서는 현대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 이것은 구원론에도 적용된다. 물론 구원론의 각론에만 집중하다보면, 분열은 계속 되겠지만, 구원론의 총론에 집중하면은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으로 보여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분리할 수 없듯이, 구원론의 각론에서 ‘칭의와 성화’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면 이 둘은 나뉘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나뉠 수 없듯이, 칭의와 성화는 나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시대되고 있는 교회론과 윤리학의 관계는 의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깔뱅과 바르트로 이어지는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 관계는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의미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별히 깔뱅의 이원론적 구조를 극복한 바르트의 화해론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새 패러다임으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