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07
탈원전 폐지에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지난 정부가 박아놓은 굵은 대못들을 빼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탓이다. 탈원전 선동가들이 틀어쥐고 있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작년에 공사를 마친 신한울 1·2호기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번에는 피동형 수소 제거장치(PAR)의 시험성적서에 괜한 시비를 걸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세워놓았던 한빛 3·4호기의 재가동도 난항이고, 지난 정부가 어정쩡하게 중단시켜놓은 신한울 3·4호기의 공사 재개도 만만치 않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지난 정부가 꽁꽁 묶어두었던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의 현실화가 쉽지 않다. ‘좀비’ 기업으로 전락해버린 한전을 살려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에 미치는 피해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국제 에너지 시장의 혼란도 심각하다. 그런데도 국회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야당은 탈원전 폐지에 필요한 예산을 무작정 삭감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 11월 3일 상업 운전이 임박한 신한울 1호기와 운영 허가 심사 과정에 들어간 신한울 2호기 내부를 출입기자단에 공개했다. 사진은 경북 울진군 한울원자력본부 신한울 2호기에 설치된 비상디젤발전기. / 뉴시스
폴란드 원전 수출에 거는 기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다행히 원전의 폴란드 수출에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폴란드의 최대 민간 발전사인 제팍(ZEPAK)과 폴란드 전력공사가 지난 10월 한수원과 한국형 원전(APR1400) 4기를 건설하는 협력의향서(MOU)에 서명했다. 지난 10월 28일 1단계 원전 건설 사업자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를 선정했던 폴란드 정부가 민간 주도의 2단계 사업의 협력대상국으로 우리를 선택해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가 탁월한 원전 건설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APR1400은 유럽사업자요건(EUR) 인증과 미국 원자력안전규제위원회(NRC)의 표준설계인증을 모두 취득한 원전이다. 기술력과 안전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원전 건설 능력은 국제사회에서도 입증되었다. 2009년에 시작한 UAE의 바라카원전 건설 사업은 당초의 예산과 공기(工期)를 정확하게 준수한 대표적인 모범 사례였다. 한국형 원전의 건설 기간이 짧은 것도 금상첨화다. 우리가 최근에 건설한 원전 13기의 건설 기간은 56개월이었다. 프랑스·러시아·중국·미국·일본 등의 건설 기간 190개월의 30% 수준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다.
물론 폴란드의 원전 수출에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금융 조달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러시아와 경쟁했던 이집트 원전 건설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입찰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전체 사업비의 85%에 해당하는 250억달러의 자금을 연 3%의 저금리로 제공했다. 우리의 자금 조달 능력은 고작 80억달러뿐이었고, 이율도 연 8%나 됐다. 충분한 건설 비용을 저렴하게 조달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원전 기술과 건설 능력도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원전 수출 프로젝트다.
환경부의 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포함시키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원전은 현재 실용화된 에너지 기술 중 유일하게 검증된 ‘무탄소(carbon free) 전원’이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과학적 진실이다. 유럽연합도 뒤늦게 그런 사실을 인정했다. 세계 최악의 자원 빈국(貧國)인 우리의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절박하다. 태양광·풍력 자원도 턱없이 부족한 우리가 원전까지 포기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고준위 원전 폐기물에 대한 제도 확립과 ‘사고저항성 핵연료’(ATF)에 대한 거부감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원전을 운영한다면 고준위 폐기물에 대한 대책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40년이 넘도록 방치해왔던 고준위 폐기물 처리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원전 수출에 필요한 해외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혼란에 빠진 세계 에너지 시장
현재 세계 에너지 시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혼란에 빠져든 상태다. 러시아가 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을 차단시켜버린 유럽의 사정이 특히 심각하다. 전기요금은 10배나 올랐고, 가스요금도 14배나 뛰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갑자기 시작된 에너지 대란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통해 전기요금을 안정화하겠다는 유럽집행위원회의 ‘긴급조정’은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스요금과 전기요금을 분리하겠다는 발상은 비현설적인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다. 발전 비용이 가장 싼 발전소를 우선적으로 활용하는 ‘메리트 오더(merit order)’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성’ 대신 ‘환경성·안전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2017년의 탈원전 주장이 유럽에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독일은 치솟은 에너지 가격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12월에 국민들이 지불해야 하는 가스요금을 정부가 대신 납부해주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무려 90억유로(약 12조5581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내년 3월부터는 에너지 요금 상한제를 도입한다. 생활비 경감을 위해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도 시행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각각 15억유로(약 2조1000억원)를 부담할 예정이다.
영국의 소비자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연료비 절약을 위해 전통적인 오븐을 포기하고 에너지 소비가 적은 에어프라이어에 매달리고 있다. 판매량이 3배 이상 늘어났다. 한 시간 사용에 아낄 수 있는 전기요금은 고작 11센트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영국 소비자들이 느끼는 절박함의 증거다. 압력솥·전기냄비의 판매도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우리의 형편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전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LNG와 석탄의 가격이 오르면 한전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발전 비중이 28%나 되는 LNG 발전의 단가는 kWh(킬로와트시)당 277원이나 된다. 발전 비중이 32%인 석탄의 발전 단가도 156원이다. 한전이 소비자에게 받을 수 있는 비용은 kWh당 116원뿐이다. 한전이 애써 전기를 만들어서 팔수록 적자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정부가 맹목적으로 밀어붙였던 태양광·풍력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태양광과 풍력의 발전 단가는 원전의 5배가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태양광·풍력은 극심한 간헐성 때문에 역시 발전 단가가 만만치 않은 LNG를 보조전원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태양광·풍력의 발전 비중이 늘어날수록 LNG의 발전 비중도 덩달아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다. 폭리에 눈이 멀어버린 태양광·풍력·LNG 사업자들이 한전을 적자의 늪에 밀어넣고 있는 형국이다.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전의 발전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다. 원전의 발전 단가는 kWh당 53원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82%에 머무르고 있는 원전의 이용률을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지난 정부가 탈원전을 밀어붙이기 전에는 원전의 이용률이 90%를 훌쩍 넘었었다.
이덕환 /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