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서
김형진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電源 단추를 누른다. '윙' 소리와 함께 초기화면이 뜬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영문 자막이 쉭쉭 지나가고, '찍' 소리와 함께 Windows라는 영문자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나타나더니 그 아래 길쭉이 누운 막대 칸에서 초록 네모가 바쁘게 움직인다. 움직임이 다한 뒤에야 아이콘이 일렬종대로 늘어선 화면이 뜬다.
아이콘들이 한 번 움찔한 뒤에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한다. 잠시 꾸물대다가 욱 달려들 듯이 나타나는 기사 제목들. 정치, 경제, 사회, 연예 등의 기사 제목을 훑고 있는데 뚝 소리를 내며 화면이 사라진다. 되돌아온 아이콘 화면에 화살표 커서가 옴짝 않고 서 있다. '또 시작이군.' 눈살을 찌푸리며 전원 단추를 누른다. 무슨 조화 속인지 알 수가 없다.
주체 못하는 시간을 죽이느라 하루의 거의 반을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검색과 게임으로 허비하지만, 내 본판이 간단한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 조립하지 못한 기계치이다. 겨우 전원을 켜고 마우스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릴 줄 알 뿐이다. 컴퓨터를 켤 때면 우선 인터넷 기사를 대강 훑어본 다음 이메일을 확인하고 카페를 기웃거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런다가 인터넷 바둑을 둔다. 화면에 나타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ID뿐인 상대와 수담을 즐기는 것이다. 바둑판에 돌을 놓을 때마다 '딱 딱' 나는 경쾌한 소리에 홰나무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컴퓨터의 조화가 신기하다.
인터넷에 싫증이 나면 이번엔 '한글'에 들어가 미루어 두었던 원고를 쓰기도 한다. 몇 줄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고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원고를 쓰는 건지 원고가 나를 쓰는 건지 흐리멍덩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컴퓨터가 싫어지기도 한다. 초보인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재다능하다는 이 작은 기계 앞에 앉아 있기가 무섭다. 모니터의 밝은 화면이 설익은 내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며 비웃고 있는 듯도 싶다. 전원을 끄고 컴퓨터 앞에서 일어서버린다. 그러나 몇 시간 뒤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런데 어제였다. 인터넷 바둑에서 승패의 갈림길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뚝' 하더니 바둑판이 사라져버렸다. 되돌아가기 화살표를 클릭해보아도 Enter을 눌러보아도 마우스를 굴려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망하여 한동안 멍히 앉아 있다가 전원 단추를 눌렀다. 끄고 다시 시작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꺼지지 않았다. 부리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기계, 이건 반란이 아닌가. 얼른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뽑아버렸다. 리고, 켰다가 플러그를 뽑아버리고, 켰다가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일을 한나절 동안 반복했다. 그냥은 안 되겠다 싶어 '컴퓨터 구조대'에 구원을 요청했다. 구조대원이 와 이것저것 점검을 하더니 별 이상이 없다며 수리비도 받지 않았다. 구조대원이 다녀간 뒤 컴퓨터는 순한 양이 되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말 잘 듣던 컴퓨터가 하룻밤 사이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다니. 사람이 만든 기계가 사람보다 힘이 세고, 사람보다 지능이 높은 게 사실이다. 아무리 용량이 적은 컴퓨터라 할지라도 그의 지능이 사람의 지능보다 몇 십 배 또는 몇 백 배 높다지 않던가. 두려움이 엄습한다.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로봇이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다재다능하고 조화가 무궁한 컴퓨터가 느닷없이 나를 공격한다면…. 조심스럽게 일어서 플러그를 뽑고 거실에 나가 하늘을 본다. 하얀 구름 한 덩이가 한가롭게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