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김덕남
봉인을 뜯는 순간 내장이 쏟아진다
질주의 본능 뒤로 풍경은 사라지고
당신의 검은 음모가 꼬리 물고 재생된다
삿대질 맞고함에 꽁꽁 막힌 여의도 길
출구는 오리무중 비상구도 막혔는데
의사당 철문을 걸고 종이꽃만 피운다
(《나래시조> 2015 겨울)
작품평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 / 변현상
블랙박스에는 두 종류가 있다. 비행기에 부착하는 것과 차량에 부착하는 것이 있는데 두 가지 다 운행기록장치다. 사고가 났을 경우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하지만 비행기와 차량의 용도가 많이 다르다. 비행기의 경우에는 사고가 나지 않으면 거의 열어볼 이유가 없어지지만, 차량용의 경우 사고발생시 운행기록과 추가된 기능에 따라 범죄 예방과 난폭운전을 감시하는 기능도 있다.
여기서 묘사하는 작품의 제목인 블랙박스는 차량용 블랙박스다. 첫수중장 “질주의 본능 뒤로 풍경은 사라지고"에서 질주의 본능이란 시어가 그 증거다. 시인이 말하는 질주의 본능은 차량이 아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 위반한 수많은 부조리와 은근슬쩍 통과했던 우리들의 양심불량이다. 블랙박스 화면을 열어보는 것을 "봉인을 뜯는 순간 내장이 쏟아진다”라고 표현하며 쏟아지는 그 화면 속은 참 부끄러운 당신의 검은 음모"라고 말한다. 속된말로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블랙박스는 결국 CCTV로 불리는 감시카메라와 같다. 우리들이 걸어온 부끄러운 과거가 영원히 봉인될 줄 알았는데, 어쩌랴! 시퍼렇게 눈을 뜬 블랙박스가 쉬지 않고 여과 없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일 봉인을 뜯고 재생하면 당신의 검은 음모가 꼬리 물고 재생된다” 는 사실을 잊었는가?
둘째로 넘어가면 시인의 눈은 국회로 향한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없고 소속정당에 따라 국민의 여망은 망각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당리당략에 따라 자기 몫 챙기기만 급급한 그들은 비상출구조차 꽁꽁 막힌 귀머거리다. 못 먹고 헐벗은 빈곤의 체험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뽑아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못 배운 무리들인가? "의사당 철문을 걸고"무슨 토론이 될 것이며 무슨 논의가 나올까? 향기도 없는 종이꽃 만 피우는 저들은 블랙박스가 찍고 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했는지 시인의 시선은 무척 답답하다.
(변현상)
- 《나래시조》 2016.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