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성(金玄成)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이다. 중종37년(1542년)에 태어난 그는 삼현파의 중조이신 판도판서 문정공 諱관의 10세이며, 절효공 諱극일은 그의 5대조이다. 중조)관-子)문숙-子)항-子)서-子)극일-子)건-子)태석-子)인손-子)언겸-子)현성 어릴 때부터 문학과 행실과 정의감이 뛰어났다. 그는 출생한지 두 살도 못 되어 벽상에 있는 글자를 보고 손으로 똑같이 그리기를 오래 하니 보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겼다. 다섯 살 때 소학을 읽고 그 뜻을 알며, 글씨를 쓰고 보는 일 외에 다른 놀이는 하지 않았다 한다. 15세에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고, 명종 16년 20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명종 19년, 23세에 이율곡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사자관(조선시대 관직 승문원 규장각의 벼슬로 문서를 정사하는 일을 봄)에 제수되어 시문과 필법을 익혔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51세로 비변사 사랑이 되어 임금의 대가를 호위하고, 이듬해 재령군수, 인천부사, 공주목사가 되었다가 선조 35년에 양주목사,여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선조 41년 왕의 옥첩(황실의 계보)을 써서 그 노고로 특별히 가선대부동지돈녕부사(종 2품)에 올랐다. 1617년 광해 정사년에 평양에 있는 기자전 비문과 여수에 있는 이 충무공의 수군대첩 비문,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산성 대첩 비문을 쓰니, 당대를 대표하는 명필로서 취헌금 박팽년(朴彭年), 우계 성혼(成渾), 퇴계 이황(李滉) 등과 더불어 [필원목록(문필가와 명필들의 이름을 집록한 책)]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우애있고 덕행과 문장 필법이 당대에 높이 평가되어 일찍이 율곡(李珥)은 공을 가리켜 마땅히 정승 자리에 앉을 분이라 극찬했으며, 성우계도 가리켜 고인 중에나 찿아볼 수 있는 분이라 했다. 그는 이무렵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과 조선 중종 때의 유여림(兪汝霖)의 신도비문을 써서 당대의 명필로서 자리를 굳혔다. 광해군 13년 10월 15일에 타계하니 수가 80세 이었으며, 당시 최대의 석학 이수광[지봉유설의 지은이]이 치전문을 쓰고 신도비문을 지었다. 조정에서는 우의정을 증직하여 그의 생전의 공훈을 기렸다. 그는 평소 청렴결백하여 돌아가실 때 매우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청백함을 칭송하고 돈을 모아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김현성(金玄成)에 대하여 자 여경(餘慶) 호 남창(南窓) 생졸년 1542(중종 37) - 1621(광해군 13) 본관 김해(金海) 활동분야 예술/체육 / 화가 / 선비 서화가 과거 및 취재 [문과] 명종(明宗) 19년 (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7위 1542년(중종 37)∼1621년(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선비 서화가. 본관은 김해.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 목사 언겸(彦謙)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교서관정자(敎書館正字)와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양주목사 등을 거쳐, 1617년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는데, 그림보다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고 한다. 글씨는 조선초에 유행하였던 우아하고 균정된 모습을 지닌 송설체(松雪體)를 따랐다. 현재 전하는 그림은 없고 서예 유작으로 행서로 쓴 주자시 朱子詩〉가 남아있다. 또, 금석문으로는 〈숭인전비문 崇仁殿碑文〉·〈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 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조헌순의비문 趙憲殉義碑文〉〈신숭겸충렬비문 申崇謙忠烈碑文〉·〈정언유격묘비문 正言柳格墓碑文〉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저술로는 《남창잡고 南窓雜稿》가 있다. [참고문헌] 南窓雜稿 芝峯集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선조 8권, 7년(1574 갑술 / 명 만력(萬曆) 2년) 4월 16일(경신) 1번째 기사 경회루에서 상이 2품 이상 문무관을 시험하다 경회루 밑에서 상이 친히 2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을 시험 보였는데 시관(試官)은 10원이었다. 묘시(卯時) 정각에 상이 전좌(殿坐)하니, 우상 노수신 이하가 당초에 경회루 대문 안에 앉았다가 이 때에 차례대로 입시했다. 문신(文臣)은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하에게 글을 시험 보이고, 무신(武臣)은 2품 이하에게 관혁(貫革)을 5순(巡)씩 쏘는 것을 시험 보였다. 우상 노수신이 대제학(大提學)·제학(提學)과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을 불러 출제(出題)를 의논했다. ‘기선악(幾善惡)’·영소(靈沼)’·‘유예(游藝)’ 세 가지 글제로 품하자 상이 ‘유예’에다 낙점(落點)했는데, 김귀영(金貴榮)이 낸 것이었다. 상이 점심을 먹기 위해 환궁(還宮)하고 입시한 종실(宗室)과 재상들에게 선반(宣飯)을 내렸는데 신(臣) 등도 먹었다. 오시(午時) 정각부터 거둔 시권(試券)을 세 군데에 나누어 고사(考査)했다. 윤담휴(尹覃休)가 이하(二下)로 장원이 되고 김현성(金玄成)이 삼상(三上)으로 차석이 되었는데, 실지는 김현성이 지은 것이 사기(詞氣)로 치면 제일로 해야 마땅했다. 유시(酉時)에 무신들의 활쏘기가 끝나 파하고 물러났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1책 299면
통제이공수군대첩비(보물 제571호) ○ 여수시 고소동에 소재한 고소대터의 정자형 비각안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타루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대첩비는 귀부, 비신, 이수의 3부작을 잘 갖춘 것으로 기단과 귀부가 1매의 돌로 되었다. 귀부에는 세장한 다리와 형식적인 머리, 그리고 등에는 육갑문이 표현되었다. 그 위에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 비신 상단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라 전액되었고, 비제는 "유명조선국정헌대부행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 증효충장의 유곡협도 선무공신광보국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령 경연사덕풍부원군일 충무이공수군대첩비명병서"이다. ○ 이수는 하면에 연화문이 장식되었고 전면은 중앙에 여의주를 중심으로 2마리의 용이 구름에 둘러 쌓인 채 다투는 형상이다. 후면은 구름무늬와 꽃무늬가 조식되었고 맨 위에는 꽃무늬가 보주가 있다. ○ 이 비는 이충무공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 황해병사를 지낸 유연이 돌을 보내 김상용이 전을 쓰고 이항복이 비문을 지었으며, 비문은 김현성이 써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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