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성도의 유비릉
관우(關羽)가 죽었다는 소식이 성도(成都)의 유비(劉備)에게 전해졌을 때, 유비는 너무 울어 눈물이 마르고 피가 나왔다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적고 있다.
7척 5치의 키로 귀가 어깨까지 처지고 양팔이 무릎에 닿으며, 눈으로 귀를 볼 수 있는 광각(廣角) 시야를 가진 유비, 키가 8척으로 표범상에 호랑이 수염을 한 장비(張飛), 그리고 9척 키와 두 자나 늘어뜨린 수염에 누에 눈썹을 한 관우, 이 셋이 장비의 집 뒷마당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결의하는 것으로 《삼국지연의》는 시작된다. 그들은 불행히도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진 못했지만, 바라건대 훗날 동년 동월 동일에 죽기를 다짐한 것이다.
유비는 관우로 더불어 같은 날 죽기를 맹세한 도원의 결의를 잊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당장에 보복의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심오한 정략가 제갈량이 말렸다.
4년 동안 이를 갈며 기다린 유비는 오(吳)나라를 칠 출진 채비를 마치고, 앞날을 잘 맞히는 선인 이의기(李意其)에게 그 성패를 물었다.
성도 교외 청성산에 사는, 3백세 됐다는 이 선인은 지필을 가져오라 시켜 병사와 군마. 무기를 40여 장 그리더니 한 장씩 찢어 버렸다. 마지막장의 그림에는 거구의 사나이가 땅에 엎어져 있었는데, 이의기는 이를 땅에 묻고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던 것이다. 유비의 죽음은 이렇게 예언되었다.
지금 유비가 짧게 황제 노릇을 했던 촉나라 서울 성도의 서남쪽에 유비의 사당과 능이 있어 찾아갔다. 길이 구불구불 필요없이 굴곡이 심하고 누추해서 물었더니, 외적의 직진을 막기 위한 촉나라 시대의 길을 그대로 보존한 때문이라 했다. 신라 초기 경주의 골목길을 그대로 오늘까지 보존했다는 것이니, 우리의 고도(古都) 경주에 고속철도를 통과시키려는 발상과 대조되어 그 현격한 거리를 상념으로 잡아 매어둘 수가 없었다.
유비전의 가로현판이 시선을 보다 오래 잡아끈다. '임금은 밝고 신하는 착하여 천고에 수범이 된다'는 뜻인 '명량천고(恹良千古)'라 씌어 있는데, 밝을 '明'자의 '日' 변이 '目' 변으로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目'변의 밝을 '恹' 자란 없는 글자다. 하지만 '日' 변의 밝을 명은 자연적 밝음이요, '目' 변의 밝을 명은 인지(人智)의 밝음을 암시해 주어 유비의 인덕을 한결 더해주는 것 같았다.
유비전에는 금색칠을 한 3미터 높이의 면류관을 쓴 유비좌상이 복판에 있고, 그 오른편에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놓여 있다.
유비가 양자강변 백제성(白帝城)에서 죽으면서 제갈량을 불러 아들 유선(劉禪)을 후주로 맡긴 '유비고탁(劉備孤託)'은 유명하다. 그런데 그 고탁받은 아들 유선의 상이 있어야 할 유비전의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세워도 자빠지는 아두(阿斗)'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하나 마나 하는 일을 해보았댔자 허사라는 것을 빗대는 속담이다.
아두가 바로 유비가 제갈량으로 하여금 후주로 맡긴 유선이다. 이 아두의 상이 유비상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세워두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돼 없어지길 수없이 거듭하여, 청나라에 들어와 이 유비전을 증수할 때 아예 아두상을 만들지 않았다 한다.
촉나라을 뒷받침하던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시시각각 조여들어 멸망 직전에 놓인 촉나라 황제 아두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 유심이 죽더라도 결전장에서 죽자고 일전(一戰)을 재촉했으나 소심하고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바쳐 투항하고 만다.
반면 유심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그 길로 이 유비묘를 찾아와 통곡을 한 다음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목을 스스로 날려 순국했다.
이 유심의 장렬한 최후는 중국 역대의 연극 소재로 가장 많이 선호되어 공연돼 왔으며, 도한 할아버지 유비의 왼쪽에 영원히 좌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두는 적군이 성도 성밖에 이르자, 관을 몸에 묶고 나아가 투항하여 생명을 구걸했고…….
그 유비전의 같은 울타리 안에 '한소열황제릉(漢昭烈皇帝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박힌 전돌 밖으로 유비릉이 있었다.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180미터 둘레에 높이 12미터인 유비릉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아 나무도 덩굴도 제멋대로 자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유비릉은 무덤을 이룬 지 1천7백 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황제릉으로서도 유명하다. 그 이유는 유비의 정치 소신이나 그를 보필한 제갈량의 철학으로 능에 금은 보화를 묻을 리 없다는 것이요, 당시 황제로서 부장할 재물이 없었으며 또 그러할 경황도 못됐기에 도굴해 보았댔자 헛수고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다음과 같은 금기(禁忌)의 전설들도 그 능에 손 대는 것을 기피시켰음직하다. 유비의 무덤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해서 후손 10대까지 팔병신이 태어나고, 그 무덤풀을 뜯어먹은 양이 죽으면서 울부짖었는데 그 울음소리를 들은 양들도 모두 죽었다는 등 금기가 무성하였던 것이다.
송나라 애국시인 육유(陸游)가 이 능에 와보았을 때는 보다 황량했던 것 같다. 그가 이 무덤에 와보고 남긴 시에 보면, 무덤 앞의 석인들은 풀숲 속에 누워 있고 묘내 벽도 무너지고 벽화는 이지러졌으며, 무덤 깊이 황소가 거닐고 잣나무 무성한데 잡새 소리가 요란하다 했으니…….
무후사 제갈량
제갈량(諸葛亮)을 제사지내는 무후사(武侯祠)는 천 개나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많다. 많지만 그래도 무후사 중의 무후사는 그가 유비를 모시고 승상(丞相)으로 집권했던 성도에 있는 무후사다.
당나라 때인 760년에 시인 두보(杜甫)가 이 성도의 무후사에 들러 시를 남겼다. '승상의 사당 어드멘가고 찾았더니, 금관성(성도성) 밖 잣나무 우거진 속이요, 찾는 이 없는 섬돌에 봄풀이 푸르고 듣는 이 없는 꾀꼬리가 빈소리 굴린다.'는, 한적하고 쓸쓸했던 무후사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시인 이상은(李商隱)도 하늘에 천 가지가 구름을 찢고 땅밑에 뿌리가 용트림한다는 무후사의 잣나무 고목을 읊었고, 육유(陸游)도 잣나무가 빽빽하여 새들이 날지 못한다 했으니, 이곳에 들른 그 어느 명시인의 시 속에도 이 잣나무는 빠진 적이 없다.
무후사 경내에 들어 우선 그 잣나무를 찾았다. 그러나 두 손뼘 안에 들 만한 별로 굵지 않은 손자나무 서너 그루만이 가느다랗게 뻗어 있을 뿐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늘 같아야 할 잎도 뻣세지 못하고 중노인 머리카락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역사 유적을 파괴하고 다녔던 문화혁명 때 중국 각지의 제갈량 상을 쓰러뜨리자, 경내의 잣나무들이 시들어 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정을 가로질러 정전에 드니 제갈건(諸葛巾)을 쓰고 제갈선(諸葛扇)을 든 온후한 표정의 제갈량이 오른쪽에 아들, 왼쪽에 손자를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우선 그 무엇보다 제갈량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금 양자강 중류인 삼협(三峽)에 댐을 쌓고 있어 미구에 유역 57만 에이커가 수몰되고, 연안 주민 1천3백만이 이주해야 하며, 중국 역사의 3분의 1이 명멸해 온 연안의 유적과 민속 신화가 서서히 물에 잠기게 된다. 생태계 변화에 따른 재앙과 환경 파괴는 고사한다 치더라도 1만7천6백80MW라는 전력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혹심한 문화파괴요, 환경 파괴다. 그래서 제갈량 당신의 치세라면 강행하겠소, 중단시키겠소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제갈량이 훌륭한 것은 실리 정치에 비범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상 곁에는 제갈고(諸葛鼓)라 불리는, 제갈량이 발명한 쇠북이 놓여 있다. 이것은 전시에는 전고(戰鼓)로 쓰고 평시에는 엎어서 솥으로 쓰며, 잠잘 때는 베고 자 멀리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감지하는 레이더 구실을 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매사에 그만큼 실리적이었다.
지금도 사천성의 노인들은 야채인 무를 제갈채(諸葛菜)라 한다.
제갈량이 전진(戰陣)에서 성에 주둔할 때 맨 먼저 시키는 일은 전량(戰糧)으로서 십상인 무를 심기는 일이었다. 그에 의하면 무에는 일곱 가지 장점인 칠장(七長)이 있는데 싹이 나자마자 날로 먹을 수 있다, 먹을수록 자란다, 오래 될 수록 번식한다, 버리고 가도 아깝지 않다, 겨울에도 잘 자란다, 딴 야채에 비해 먹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래서 제갈채였다. 그 얼마나 실리 위주의 정략가란 말인가.
한편 성도를 금관성(錦官城)이라고도 하는데, 제갈량이 뽕나무를 심어 비단 짜는 것을 업으로 장려한 데서 성도가 중국 굴지의 비단 고을이 되고 그래서 얻은 별칭이다. 이렇게 보니 실리 정치가인 제갈량으로서는 삼협댐을 백 번 막아야 한다고 대꾸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제갈량은 실리보다 미래를 투철하게 꿰뚫어보는 현실 정치를 한 데서 보다 뛰어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아내를 택한 것부터 보자. 그의 아내는 지방의 유력가인 황승언(黃承彦)의 딸로 얼굴색이 검고 노랑머리이며, 소문난 추녀였다. 그래서 '배워야 쓸모 있나. 공명(제갈량)이 황녀를 얻는 바에야.'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제갈량이 이렇듯 현실적으로 미모인 실리보다는 추녀이지만 현명한 미래를 선택한 것이다. 제갈량의 기산(祁山) 전투에서는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목우(木牛)와 유마(流馬)가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 했는데, 그 인력 운반차를 만들어낸 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황 부인의 아이디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무후사의 제갈량은 제갈선이라 하여 거위털을 겹겹이 겹친 우선(羽扇)을 들고 있는데, 국사를 논할 때 황 부인의 비전(秘傳)을 그 부채틈에 숨기고 나와 참고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나돌 정도의 현부인이었으니, 앞날을 내다보고 아내를 선택한 제갈량의 미래지향적 안목이 가공할 정도다.
유비가 죽은 후 남족의 만족을 정벌할 때 적의 수괴인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준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는 앞날을 내다보는 눈 없이는 불가능한 전술이다. 요즘의 경영학에서도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성을 치는 공성(攻城)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공심(攻心)'이 제갈량의 전쟁 철학이었고, 그래서 포로를 우대하고 점령지 주민을 본국 주민보다 우대하는 심공 정치로 가는 곳마다 추앙받았던 것이다.
모택동이 중국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비법 중 하나가 이 제갈량의 미래지향적인 심공 정책을 도입한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중공군의 삼대규율 팔대주의가 바로 이 제갈량의 심공법을 현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것은 감자 하나도 취하지 말 것, 물건을 살 때는 제값을 줄 것, 빌린 것은 반드시 갚을 것, 물건을 부수면 변상할 것, 자고 나면 건초(이불)는 묶어두고 문짝(대용 침대)은 제자리에 끼워놓고 떠날 것, 부인 보는 데서 목욕하지 말 것 등이 제갈량과 모택동이 상통했던 전진훈(戰陳訓)인 것이다.
곤명(昆明) 등 남부 도시에서는 아직도 부엌칼을 제갈도(諸葛刀)라 하는데, 제갈량이 평정을 하자 군도를 모두 거두어 이를 녹여 평화스런 부엌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제갈량은 현실 지향의 심안(心眼)과 미래 지향의 심안을 재고 견준 후, 삼협댐은 막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판정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음의 귀로 대답을 들으며 무후사를 등지고 나왔다.
두보 초당
양자강 상류에 산재된 두보의 유적을 더듬다보니, 인간의 정서가 옷을 지을 수 있는 천이고, 전란(戰亂)의 세월이 옷을 짓는 실이라면 1천2백여 년 전에 당나라 시인 두보가 그 천, 그 실로 지어 입었던 옷을 고스란히 물려입은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밑바닥 서민의 전란을 겪기란 천여 년의 간격을 두고도 다를 것이 없음을 절감한 때문이다.
한 해 모자란 60평생을 산 두보는 후반생을 전란과 혼란과 방랑으로 일관하다 양자강 배 속에서 죽었다.
그 유명한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해는 기우는데 초목은 짙다.' 는 시도 난중(亂中)에 두보가 장안에 연금당했을 때 지은 것이다.
어느 날 두보가 석호촌(石壕村) 주막에 들었을 때, 야밤중에 장정 사냥을 나왔다. 주막 영감 담 넘어 달아나고, 주막 할미 나가 맞이하며 하는 말이 세 자식 모두 수자리에 나갔는데 두 아들이 얼마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밤새워 우는 소리를 듣고 두보는 시를 남긴 것이다. 한국전쟁중에 얼마든지 겪었던 우리 민족과 같은 체험이다.
양귀비가 죽던 해, 두보는 그 장안의 거리에서 몰락한 한 왕손(王孫)을 만난다.
물어도 이름을 대지 않고
그저 종으로라도 써달라 애원을 한다.
백여 일 가시울 속에 숨어 살다보니
심신에 상처나지 않은 곳이 없다.
두보가 연금된 장안을 탈출, 봉선현에 피난가 있는 처자를 찾아갔더니 통곡소리 처량하게도 울고 있었다. 물은 즉, 아이 하나가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奉先縣櫓懷詩).
이처럼 두보의 시는 사실의 고발이요, 또한 어쩌면 그 고발 내용이 한국전쟁중의 우리 서민이 겪었던 상황과 그렇게 같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두보와 한국인만의 공감대가 따로 형성되는 것만 같았다.
두보는 처자를 둘러업고 음모와 모략이 날뛰는 장안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정처없이 방랑길을 떠났다. 사천 경계인 동곡에서 남긴 시를 보면, 두보는 엄동설한에 원숭이 기르는 사람의 뒤를 따라 산에 가 도토리를 줍고 있다. 처자식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는 손발이 얼어 손에 주워도 주운 것 같지 않고, 발을 디뎌도 디딘 것 같지 않다 했다.
고생 끝에 재를 넘어 당도한 곳은 물산이 풍부하여 천부(天府)라 불리는 성도(成都)였다. 완화계(浣花溪)라는 개울가 근처의 절간 빈방에 몸을 푼 두보는 백리 밖에서 고을살이를 하는 친구와 성도에 사는 종질의 도움으로, 그 절간 이웃에 오두막, 곧 초당(草堂)을 짓고 정착을 한다.
그리고 1백80여 평 남짓의 개울가에 남새밭, 약초밭, 죽통으로 물을 끌어댄 연못에 꽃길까지 만든다. 나무는 황매 등 열여섯 종이요, 꽃은 국화 등 아홉가지며, 새는 두견 등 열일곱 새고, 2백년된 남목(楠木)에만 와서 우는 매미는 울음소리가 삼매경 속의 독경소리 같다 했고…….
처마에는 제비가 오고
물가에는 갈매기가 원근을 겨루네.
노처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자식 못을 쳐 낚싯바늘 만든다.
오로지 옛 친구 도움이 있는 한
가냘픈 몸 더 이상 무엇을 구하랴.
가혹한 고생 끝인지라 그 자그마한 자연,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얼마나 흡족했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지금 1백80여 평 남짓했다는 두보의 그 초당은 6만 평으로 커져 있고, 용주(龍舟)가 오르내렸다는 완화계는 좁혀져 거이 두어 마리가 지나갈 정도였다. 오두막 하나였던 것이 전각이 30여개요, 꽃길은 재생해 놓았지만 너무 화려하게 확대시켜 원형 파괴가 심한 것 같았다.
두보의 시에 '성안은 10만 가(家)지만 이웃은 양삼가(兩三家)'라 했던 초당 둘레에는 수만 가게가 성시를 이루고, 사천 특산요리인 마파두붓집이 본포를 다투며 즐비하였다. 마파두부는 곰보, 뚱보, 욕보 등 삼보를 갖춘 마파가 남편을 골탕먹이려고 맵게 만든 것이 그 시초라 한다. 그 삼보를 갖춘 추녀가 하는 두붓집이 지금도 가장 인기라고 한다.
본전에 공부사(工部祠)란 현판이 걸려 있어 시인의 사당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보는 성도에 있었을 때 공부(工部), 요즈음 같으면 토목과의 서기쯤 되는 원외랑 관직을 가졌었다. 시인에게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해서 그 같은 관료주의적 이름을 이 시역(詩域)의 핵심에 들여놓는다는 말인가.
또 본전의 양곁에 후대 시인 육유(陸游)와 황정견(黃庭堅)을 더불어 모시고 있는데, 이 초당과 두 시인의 명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남편 두보를 위해 종이로 바둑판 그리는 빈처와 낡은 못 주워다가 낚싯바늘 치는 애자(愛子)의 상을 만들어 놓았던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보가 초당에서 친근하게 오가던 오각건(烏角巾) 쓴 은자 금리 선생이며, 앵두가 잘 익었다고 따다 주는 정 많은 이웃 농부에 관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보가 살던 당시 초당은 매우 허술했던 것 같다. 지붕이 바람에 날려 나뭇가지에 걸리고 못속에 빠지며 강 건너 날아가, 지붕없는 집의 비에 젖은 이불이 쇠처럼 차기에 '어떻게라도 천 칸 만 칸 되는 큰 집을 구하여 / 천하의 가난한 사람 그 집에 들이고 / 기쁨에 넘치는 얼굴을 짓게 하는 그런 집을 / 풍우에 아랑곳없고 산처럼 태연한 그런 집에 살고 싶다.' 고 했다.
태풍이 불어도 까딱 않게끔, 사는 집 같지 않고 정각(亭閣)처럼 지어놓은 지금의 초당은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생기는 저만큼 멀리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5년 남짓 살다가 두보는 좌비(坐痺), 즉 관절염 앓는 노처(老妻)와 자식을 낚싯배에 태우고 양자강에 띄워 강상(江上) 방랑길을 떠난다. 가다 머물러 살고 다시 가길 5년 동안 하다가 큰 물에 갇혀 열흘을 굶은 끝에 고을 원님이 보내준 주식을 과식하고, 그 배 속에서 노처의 무릎을 베고 저승 가는 배에 갈아탄 것이다.
탁문군의 금대
흥부가 놀부집에 양식 얻으러 갔다가 양식은커녕 뒈지게 얻어 맞아 걷지도 못하고 개처럼 네 발로 기어온다. 날이 어두워지자 서낭당길에 나와 흥부를 기다리던 흥부 마누라는 기어드는 개에게 발길질하며 이놈의 개! 이놈의 개! 하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개가 아니라 남편 흥부인지라 흥부 마누라 기가 막혀 사설을 늘어놓는다.
"여보 여보, 형님집에 다시 가지 맙시다. 내가 차라리 탁문군(卓文君)이 되어 술이라도 팔 테니 모진 형님집엔 다시 가지 맙시다."
탁문군 소리에 흥부는 개구리처럼 나자빠지며, 자네가 술 판다니 그게 웬말이요를 연거푸하며 기겁을 한다. 놀라 자빠질 일의 연속인 《흥부전》에 있어 흥부가 가장 크게 쇼크받는 대목이 바로 이 탁문군에게 유발된 충격이다.
그 가난한 흥부 내외까지 익히 알고 있었던 탁문군이란 누굴까.
양자강 상류가 금강(錦江)이라는 이름으로 성도(成都)를 감아 흐르고, 그 금강의 지류인 완화계(浣花溪)가 유원지 사이로 흐르는 그 언저리 어딘가에 한나라 제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천하일색이요, 재원인 탁문관과 사랑의 탈주를 감행, 금(琴)을 타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가난에 울었다던 금대(琴臺)의 옛자리를 찾아갔다.
당시 성도 서남쪽 백 리밖에 있는 공협의 부호 탁왕손(卓王孫)은 성도의 명사들을 불로 곧잘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낙향해 있던 문장가 사마상여도 초대되어 가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탁왕손의 딸 문군을 훔쳐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능란한 탄금으로 탁문군에게 사랑을 직소했고, 탁문군 역시 워낙 재녀인데다 사마의 문장에 반해 있던 터라 둘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당시 탁문군은 17세로 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너무나 뛰어나 문군(文君)하면 곧 미인의 별칭이 되었고, 중국 미인의 조건인 원산미(遠山眉), 연화협(蓮花峽), 부용부(芙蓉膚)도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탁문군은 도덕이나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분방함을 지녔고, 글재주가 뛰어난 반체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임어당(林語堂)이 중국 현대 여성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탁문군을 높이 추켜세운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성도로 도망친 연인들은 탁문군이 입고 나온 털깃 옷을 잡혀 술을 마시고 나서 목을 끌어안더니 밤새워 울었다. 개가를 허락않는 완강한 아버지를 골탕먹이고자 이들은 공협 장바닥에 주막을 차려 탁문군은 시정잡배에게 술을 따르고, 사마상여는 국부만을 앞뒤로 가리는 잠방이만 입고 저자 복판에서 그릇을 씻었다. 이렇게 체면에 먹칠을 하여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백만 금과 백 명의 종을 얻어 낸 것이다.
그 동안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무제(武帝)의 정비인 진황후(陳皇后)가 황제의 새로운 연인인 여배우 출신 위자부(衛子夫)를 질투, 무당으로 하여금 저주한 사건이 있어 장문궁(長門宮)에 연금당해 있었다.
이 진황후가 사마상여의 팬인지라 황금 백 근을 보내며 그로써 슬픔 속에서 사랑을 건지라면서, 자신을 위해 황제의 마음을 돌릴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사마상여가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이다. '무삼 일일까. 한 미인이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방황하고 있는 것은……. 넋은 날아가는 곳을 모르고, 몸은 여위어 무상 속에 앙상하다.'로 시작되는 천하의 명문 '장문궁부(長門宮賦)가 바로 그것이다.
사마상여는 평생의 고질인 소갈병(당뇨병)을 앓다가 그 병 때문에 죽었다. 그 연인의 죽음에 바친 탁문군의 제문도 규수 문학의 백미요, 명문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성도에는 지금 두 연인이 탄금을 하며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던 완화계의 금대가 구전돼내리고, 인근 시가에 난립된 가라오케 간판에서만 '탁문군'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공협 문군이 자란 집터에는 문군을 미인으로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문군정(文君井)이 보존되어 있어 처자들이 야밤에 그 샘물을 훔쳐간다고도 한다.
성도가 기억할 재원으로서 탁문군 말고 당나라 제일의 규수 시인이요, 중국의 황진이라 할 수 있는 설도(薛濤)가 있다.
적십자회담을 위해 남북한이 오갈 때 유행했던 가요 '동심초(同心草)'의 노랫말이 바로 이 설도의 시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한 기약이 없네.
뭐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여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 하는가.
그만큼 고금에 아랑곳없이, 또한 국경에 아랑곳없이 애송되어온 설도의 시다.
그녀의 아버지가 여덟 산 난 설도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뜰의 오동나무가 구름 위로 솟으니……'하자, 설도는 '가지가 남북조(南北鳥)를 맞이하고, 잎이 동서풍(東西風)을 보낸다.' 라고 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성도의 장관들이 어릴 적부터 술자리에 불러 시를 짓게 한 것이 설도가 직업 가기(歌妓)로서 기적(妓籍)에 오르게 된 동기이다.
설도는 시도 좋으려니와 행서 또한 오묘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친필 시 한 수 얻어 가지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소망이요, 자랑이었다.
만년에는 손수 붉게 물들인 종이를 만들어 그곳에 시를 썼다 하니 대단한 풍류이다. 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 했는데, 성도 사람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하는 당대의 명물이었다.
만녀의 그녀는 두보의 초당이 있고, 사망상여가 탁문군을 유혹했던 탄금대 근처 완화계에서 살다가 죽었다.
성도에 남아 있는 그녀의 유적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 그리고 시(詩)에 빈도 높게 등장하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망강공원(望江公園) 안에 잘 보존돼 있었다.
양귀비의 여지
관공 개발 거리가 있으면 사족을 못 쓰는 중국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중국에 시인 두보의 무덤이 여덟 군데나 있는 것만 미루어봐도, 티끌만한 연줄이라도 있으면 관광지로 개발하는데 서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양귀비의 고향은 워낙 오지에 있어서인지, 문헌을 들고 물어물어 더듬어 찾아간 곳조차 망각 속에 파묻혀 있었다.
송나라 때 지은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에 보면 양귀비의 아버지 양현담(楊玄淡)이 촉주(蜀州), 즉 지금의 사천성 숭경고을 호방(戶房)으로 있을 무렵 귀비를 낳았다 했다. 아명이 복실복실하다 하여 옥환(玉環)이라 했으며, 어릴 적부터 부산했던지 아버지의 직장인 현청(縣廳) 앞 연못 속에 자주 빠지곤 했던 것 같다.
양귀비가 유명해진 다음 그 연못을 낙비지(落妃池)라 불렀다는 것이 문헌상 남은 양귀비의 유일한 탄생 유적이었다.
지방 사학자들에게 물어 양자강 최상류인 민강(岷江)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도강언(都江堰)에서 동남쪽으로 8킬로미터를 가니 취원진(聚源鎭)이 나오고, 다시 서쪽으로 2킬로미터 남짓 가니 양귀비 때문에 지어졌다는 영상촌(迎祥村)이 나왔다. 그곳 둘레 120미터 남짓 되는,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잡초와 수초가 어우러진 못이 바로 양귀비가 빠졌다는 낙비지였다.
여덟 채쯤 있는 농가에서는 양귀비 유적 발굴을 위해 중앙 정부에서 나온 줄 알고 흥부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이곳에는 '귀비어주(貴妃御酒)'라는 토주 간판만이 유적지임을 묵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어 고아가 된 옥환은 하남에 사는 작은 아버지 양현규(楊玄珪)의 집에 맡겨졌는데, 등에 업혀 울며 넘어가던 낭자령(娘子嶺)이란 고개 이름이 고향에 남아 있는 유적 가운데 또 하나이다.
낭자령은, 황실에서 현종이 양귀비를 낭자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을 들어 안녹산의 난에 쫓긴 현종이 성도로 피난올 때 귀비가 넘은 고개라는 말을 듣고, 낭자여 낭자여 울부짖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도강언에서 서역으로 넘어가는 고산 준령의 잘룩한 고개로, 멀리 바라볼 수는 있으나 양자령(羊子嶺)이라는 지명마저도 파괴돼 있었다.
양자강을 따라내리며 굳이 양귀비의 유적을 찾는다면, 양귀비가 즐겼다던 과일 여지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던 비자원(妃子園)이 배릉(陪陵) 강변에 지명으로 남아 있었다.
양자강 삼협으로 출발하는 유람선이 중경(重慶)에서 떠나 처음 만나는 강변 도시가 배릉으로, 180킬로미터 정도 지점이다. 바로 이곳에서 고을살이를 했던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남긴 여지에 대한 글을 보자.
'여지는 이 고을 특산인데 나무 모양이 반쯤 편 우산 같고 버들잎 같은 나뭇잎이 겨울에도 푸르다. 열매는 딸기 같은데 속살은 빙설 같고 맛은 새콤달콤한 우유죽 같다. 열매가 가지를 떠나면 하루 사이에 빛이 변하고, 이틀에는 향이 변하며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
중국에서도 사천과 광동에서만 나는 이 열대 작물을, 한무제가 남방을 정략했을 때 여지나무 1백 그루를 옮겨다 궁 안에 심고 삼품 벼슬을 내려 왕자 기르듯이 했는데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한다.
한무제에 못지않게 여지 없이 못살았던 이가 또 양귀비였던 것이다.
현종은 섬섬옥수로 여지를 까먹는 양귀비를 보면, 취해서 몽롱해진 술이 깰 정도로 황홀해 했다.
시인 두보의 '병귤(病橘)'이란 시에 보면, '남해(廣東)의 사신들 수만리 길 여지를 바치고자, 말 타고 산곡을 달리다 죽은 말 기백 마리인가.' 한 것을 보니, 양귀비의 입맛을 맞추고자 한 여지 민폐가 극심했던 것 같다. 오십 리 간격으로 감시 초소를 두고 백 리 간격으로 숙소를 두어 밤낮으로 말을 달리게 했으니, 수천 리 길이 말발굽이 일구는 먼지로 잘 날이 없었다 한다.
양귀비의 여지가 두보의 시에처럼 광동산이냐, 그렇지 않으면 양귀비의 고향인 사천산이냐는 역사의 쟁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여지는 양귀비가 자랄 대 먹었던 향수 식품이요, 그 여지의 공급을 위해 비자원을 만든 것이며 송나라 채양(蔡襄)의 '여지보'나 한유(韓維)의 '비자원 여지를 보내준 데 감사하는 글' 등에 의해 사천 배릉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칠일 낮, 칠일 밤을 달려 조달했다는 문헌을 통해 거리상으로 광동에서는 그 맛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 먹어본 여지맛은 성도산이 시고 씨앗이 굵었고, 광동산이 달고 씨앗이 작았으며, 중경에서 먹어본 배릉 여지는 그 중간 맛이었다.
그 배릉에서 뱃길 따라 76킬로미터를 내려가면 이 세상 모든 귀신이 집산한다는 귀성(鬼城), 즉 풍도(豊都)에 이른다. 이승의 모든 사자는 이곳에 와서 죄과를 심판받고 내세의 삶을 배정받게 돼 있었다.
양귀비도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한 직후 이 귀성에 와서 담당 판관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워낙 술수가 능란해서 추파와 뇌물로 천당도 지옥도 아닌 봉호도(蓬壺島) 선계(仙界)에 옥비태진원(玉妃太眞院)이라는 궁전을 짓고 살게 됐다고 이 귀성의 전설은 전한다.
죽은 양귀비를 못 잊어 눈물로 지새우는 현종에게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양통유(楊通幽)라는 도사가 찾아와, 이 귀성을 통해 양귀비의 소재를 찾아 서로 정을 나누게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 귀성 강쪽으로 망향대(望鄕臺)가 있는데, 사자들이 이곳에서 정든 고향을 마지막 바라본다는 곳이기도 하다. 양귀비도 이곳에서 화청궁(華淸宮)을 내려다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지금은 관광객의 명소가 돼 있었다.
이 귀성도 망향대도 삼협댐물이 차면 수중에 묻힌다던데, 이제 양귀비는 이승에 남아 있는 거점마저 상실하게 되는가 보다.
이빙의 도강언 치수
트로이 원정을 앞둔 그리스 함대는 거센 폭풍으로 출진(出陣)할 수가 없었다. 바다의 신 알테미스의 노여움 때문이었다. 예언가에게 물었더니 그리스군 사령관 아가멤논의 귀여운 외동딸 이프게니아를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아가멤논은 나라냐, 딸이냐의 택일을 둔 갈등 끝에 전자를 택하기로 하고, 달을 신단에 뉘어 칼을 목에 가져다댄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용사 에프타는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면 지배자로 추대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다만 이기고 돌아오는 날 가장 앞서 달려오는 자를 신에게 희생한다는 조건부 약속이었다.
에프타가 개선하는 날 맨 먼저 달려온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다. 옷을 쥐어짜며 약속을 후회했지만 에프타는 신과의 약속이라면서 딸을 신에게 바쳤다. 그 후 이스라엘의 아가씨들은 에프타의 기일(忌日)이 되면 나흘을 통곡으로 지새우며 그 상활을 공감했다고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할아버지 때 일이다. 사천성 일대인 촉(蜀)의 지방장관은 이빙(李氷)이라는 사람이었다. 이곳 양자강 상류 민강(岷江) 도강언(都江堰) 부근은 높은 산들과 평야가 접하는 곳으로 상습적인 홍수 지역이었다. 이 수마로 그 아래 펼쳐진 넓고 풍요로운 사천 평야는 언제나 황무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이곳에 탐욕스러운 독룡(毒龍)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 화를 줄이고자 해마다 몸에 상처나지 않은 깨끗한 처녀 둘을 산 채로 물 속에 떼밀어 희생해왔다.
그런데 이빙은 그리스도의 아가멤논처럼, 이스라엘의 에프타처럼 비극적 영웅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두 딸을 독룡에게 바치고 치수에 착수함으로써 독룡에게 도전한 것이다.
전설은 희생된 이빙의 두 딸이 두 사나이(二郎)로 둔갑, 독룡과 싸워 이겨 그 후부터 홍수며 수해가 사라진 것으로 돼 있다.
이빙은 강심에 금강제(金剛堤)라는 인공섬을 구축하여 물줄기를 내강. 외강으로 분류, 수세(水勢)를 약화시켰다. 급류에 초석을 쌓기란 난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내외강으로 분수(分水)한 물을 다섯 갈래, 스물다섯 갈래 등 기하급수적으로 나누어 총 520갈래의 인공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너른 사천 평야를 옥토로 관개하여 우리 남한 인구보다 많은 5천만 명을 2천 몇백 년 동안 먹여 살렸으니, 하늘이 내린 '천부(天府)'란 이름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사천성 사람들은 이렇게 용을 퇴치, 홍수를 다스리고 수해 상습의 황무지 수천 리를 옥토화했다 하여 그 강 중 섬의 분수 부위에 용을 정복했다는 복룡관을 지어 이빙과 이랑을 모시고 해마다 수백 마리의 양을 희생해왔다고 한다.
이빙 부자는 복룡관 말고도 도교신으로서 외강 동쪽 산기슭 이왕묘(二王廟)에 모셔져 있는데, 그 속의 이빙은 한 손엔 지도와 한 손엔 공구를 들고 엔지니어임을 표방하고 있음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에서는 콜라를 가락(可樂)이라 하는데 외래의 코카콜라(可口可樂)나 펩시콜라(百事可樂)를 배척하고, 이 사천에서 개발된 천부가락(天府可樂)을 많이들 마신다. 그 선전 포스터에 실린 이빙의 손에 공구 대신 천부가락이 들려 있음을 보고, 중국 토착 애국주의가 우리의 가없는 오래 선망 풍조와 비교되어 뒤통수가 가려워져옴을 느꼈다.
《서유기(西遊記)》에서 천궁을 헤치고 다니는 손오공을 토벌코자 옥황상제가 이랑진군(二郞眞君)을 파견하는데 바로 그 이랑이 이빙의 아들 이랑인 것을 미루어 보면, 그들이 산을 자르고 물을 막아 산수를 바꿔놓는 영웅으로서 오랫동안 중국 민중의 마음에 좌정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기원전 3백여 년 전에 구축된 이 도강언 구조물들이 관광 편의를 위한 출렁다리 이외에는 그 기본 구조에 보탬도 던 것도 없이 그대로 작동하며 혜택을 주고 있어 첨단 토목학자들도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 있어 정치사는 수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임금이 곤에게 치수(治水)를 맡겼으나 9년이 넘도록 홍수가 멈추지 않자 처형을 하고, 그의 아들 우(禹)에게 맡겨 성공시켰다.
곤이 실패한 이유는 물을 틀어박고(塞) 억제(障)한데 비해, 우나 이빙의 성공은 물을 성기고(疏) 이끈(導) 것이 다르며, 이 치수철학은 치수를 벗어나 정치철학으로도 정착하고 있었다.
관경대(觀景臺)에 올라 도강언을 부감(俯瞰)하면서 서울의 폭주하는 자동차 홍수도 터널을 막고 통행세를 받는 따위의 새(塞)나 장(障)의 발상 말고, 소(疏)와 도(導)로 푸는 정치적 역량이 도입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의 치수나 현대의 치차(治車)는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강 치수는 한국의 정책 수립자들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지금 양자강 하류에 홍수가 나 860여 명이 죽고 이재민이 수백만이며, 재산 피해도 77억 달러에 이른다 하니, 2천 몇백 년 전의 이 수리 토목이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사천 지방이 촉나라로 독립해 있던 고대 촉나라 임금 망제(望帝)도 요임금이 우에게 치수를 맡기듯, 망명해 온 별(鱉)에게 재상 자리를 주며 치수를 맡겼다. 그러나 망제는 별의 출타중 예쁜 그의 아내를 간통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촉나라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태평환우기》란 10세기 문헌에 보면 망제(杜宇)는 도망쳐 복위를 노리다가 원한에 사무쳐 죽었는데,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봄이면 귀촉(歸蜀) 귀촉하고 피를 토하며 주야(晝夜)로 운다고 한다. 영월로 유배당한 단종이 자규루에 올라 두견새 울음을 듣고 자규시를 읊은 사연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두견새는 사천성 일대에서는 흔한 새로 도강언이 자랑하는 칠대 명물, 곧 산(山). 수(水). 성(城). 림(林). 언(堰). 교(橋). 두(杜) 가운데 하나로 끼여 있다.
당나라 때의 이백의 시에 보면, 그가 이곳 도강언을 거닐 때 그토록 슬피 울었다던 그 두견새가 지금도 이왕묘 뒷산의 옥루산(玉壘山)에서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한국의 소쩍새보다는 피를 덜 토했던지 허스키의 떫은 소리는 덜한 것만 같았다.
무측천의 미색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날씬한 것을 선망하고 토실토실 살이 붙는 것은 싫어했을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날씬함의 선망 시대와 토실함의 선망 시대가 물결형으로 굽이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한나라 이전에는 날씬한 것을 선호했다. 조왕(趙王)과 초왕(楚王)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자 후궁 중에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고, 곡식알을 헤아려 밥을 지었으며, 여인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걸었다 한다.
한나라 초의 이름난 미녀 비연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바람에 날리지 않고자 병풍을 치고 살았을 정도로, 날씬한 것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데 당대(唐代)에 들어서는 토실한 것을 선망하여 미인의 인식이 바뀐다. 고금의 미인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이다. 옥처럼 부드럽고 토실토실 둥글둥글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사랑의 라이벌인 매비(梅妃)로부터 질투를 받는데, 그녀가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욕이 '비비(肥婢, 살찐 종년)'였다. 양귀비는 대단한 글래머였던 것 같다.
지금 당나라 때의 다른 한 글래머를 찾아보고자 양자강 지류인 가릉강 상류 도시 광원(廣元)을 찾아든다.
가릉강 큰다리를 건너 강변 벼랑을 깎아 지은 황택사(皇澤寺)라는 그 절 밑 기다란 강둑에, 흰 글씨로 여황고리환영(女皇故里歡迎), 곧 '여황제가 태어난 고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씌어 있었다.
《구역지(九域志)》란 옛 문헌에 보면, 가릉 강변의 깎아지른 산벽을 파서 절을 지었는데, 당나라 초 이곳 이주 도독(利州都督) 무사호의 아내가 양자강의 용과 교감하여 딸을 낳았으니 바로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무측천(武則天)이요, 그의 원찰로서 지은 것이 황택사로, 그녀의 용모와 꼭 닮은 진용(眞容)을 모셨다 했다. 용문 석술사에 무측천이 살아있을 때 본뜬 상을 본존으로 모셨다던데, 황택사의 영황상도 거기에서 본떴다 하여 진용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성당지화(盛唐之華)'란 가로 현판 아래 부처 모양으로 앉아 있는 '무후진용석각상(武后眞容石刻像)'을 보면, 한마디로 윤관이 뚜렷하고 갸름하게 다듬어진 토실이형 미인이었다.
당태종은 황후가 죽자 천하에 미색으로 소문난 이 무사호의 14세 된 딸을 궁에 불러, '무연(武娟)이란 아호를 내리고 곁에 앉혔다.
태종이 죽고 고종이 등극하자 태자적에 보았던 무측천의 미색을 잊지 못한 고종은 절에 들어가 부왕(父王)의 상을 입고 있는 무측천을 불러들여 부자가 내리 사랑하고 있음을 미루어, 당나라 때의 미인은 토실이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도의 한 광고 회사에서 발매한 캘린더 모델들을 우연히 훑어보았더니 거의가 토실이형인데 예외가 없었다. 중국에서의 캘린더 사진은 자비 출판으로 스스로가 모델이 된다지만, 수준급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뀌어가는 미인의 추세를 감지할 수 있다.
상해항공공사에서 몇 년째 공중수자(空中嫂子), 곧 미세스 스튜어디스를 뽑아왔다던데, 미혼의 스튜어디스보다 인간적으로 친절하며 인내력이 강한 장점도 있지만 토실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 패션을 주도한다는 《보그》지에서도 이제 토실이형 모델을 선호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무측천의 공포 정치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녀가 후궁일 때 낳은 딸이 이불에 질식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고종의 사랑을 독점코자 왕황후와 숙비를 제거키 위해 무측천이 죽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좌우지간 딸의 죽음을 빌미로 무측천은 왕황후와 숙비 두 여인을 모함하여 죽이는데,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가 죽였다고 전설은 전한다. 죽이고 나서도 왕황후의 일가 성을 구렁이 망으로, 숙비 일가의 성을 부엉이 효(梟)로 개성(改性)케 했으니 대단한 원념(怨念)이다.
왕황후는 죽을 때 무측천을 향해 외쳤다.
"내세에 너는 쥐로 태어나고,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 너의 목을 물어죽일 것이다."
무측천은 이 원령에 시달려 궁중에서 고양이를 기르지 못하도록 했고, 행차하는 곳마다 고양이 없애는 일이 선무였으며, 그의 진용을 모신 황택사에서마저도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전통이 있다 했다.
무측천은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로 등극, 그 등극을 반대한 고명신들을 유배시켜 죽게 하고, 밀고를 장려해 진실이 아니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특별법을 공포(公布)하여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어기면 자신이 낳은 황태자도 죽이거나 갈아치길 밥먹듯 했다. 이홍(李弘)은 의문의 급사를 했는데 《자치통감》에 보면 무후가 독살했다고 적고 있고, 이현(李賢) 즉 장괴태자는 파주에 유배시켜 자살케 했다.
또한 이현(李顯) 즉 중종은 황제를 폐하고 왕으로 강등시켰으며, 네 번째 세운 것이 이단(李旦) 즉 예종으로 당나라 왕성인 이씨를 자기 성인 무(武)씨로 개성시켰다.
또한 그녀는 북문학사(北門學士)라 하여, 독재자라면 예외없이 거느리고 있는 아부 학자배들을 슬하에 먹여 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무측천 진용 앞에서 새삼 생각나는 것은 백제와 신라를 망쳤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며 소정방(蘇定方) 그리고 이적(李勣) 등이 모두 이 무측천 휘하에서 비굴하게 아부하고 존명했다는 사실이다.
의자왕은 유인궤와 소정방에게 이끌려 낙양 무측천루에서 바로 이 무측천에게 머리 조아림을 강요받았다.
그때 약탈해 간 보물 가운데 홍속옥(紅粟玉)이 있었다. 이 보물은 무측천으로부터 예종, 다시 예종의 셋째 아들인 현종에게, 현종은 양귀비에게, 양귀비는 이를 자신과 친근했던 무희(舞姬)에게 주었고, 무희가 이 보물을 현종에게 바쳐 눈물을 복받치게 하였다.
무측천은 늘그막에 미소년인 장형제(張兄弟)와 병적인 사랑으로 지냈으며,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후세인 명나라 학자 이탁오(李卓吾)는 무측천 치하에 백성의 반란이 없었던 것은 그녀가 악리의 대담한 제거, 균전에 의한 경제 평등, 문인들 우대로 문예 부흥을 시킨 것 등 선정을 베푼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죽어 건릉에 묻혔는데 죽은 후 그의 송덕을 새겨넣기 위해 생전에 세워둔 백비에는 아무 것도 새기질 않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 백판 비석을 몰자비(沒字碑)라 하는데, 겉모양은 잘 생겼으면서 무지무식한 사람을 빗대는 말로 요즘도 널리 쓰이고 있다.
강유의 투항
중국땅을 십자(十字) 가름으로 사등분한다면 그 왼편 아랫부분이 유비 제갈량이 다스린 촉(蜀)나라요, 지금의 사천성이다. 비행기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니 온통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주발 속에라도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밖으로 트였다면 오로지 육로 한 곳과 수로 한 곳, 두 곳뿐이다. 수로는 동쪽으로 난 양자강 삼협(三峽)이요, 육로는 북으로 난 검문(劍門)이다.
하느님이 도끼로 다듬어 놓은 듯한 칼날 같은 72봉우리의 60리 연맥이 검문산이다. 그 복판 즈음이 잘룩하게 꺼져 마치 문처럼 열려 있어 검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그 고갯길 폭은 20미터요, 길이는 500미터쯤 되어 보였다. 이 고개를 넘어갔던 이백(李白)이 '올려다보니 하늘에 한 줄 금이 가 있다.' 읊어 심산유곡을 뜻하는 '일선천(一線天)'이란 말을 만들어 낸 현장이요, 이 고개를 넘어왔던 두보(杜甫)가 성난 장부 하나 백만을 막는다고 읊었던 현장이다.
시(詩)에는 보이는 물상(物象)을 읊어 발휘되는 외채(外彩)가 있고, 보이지 않는 심상(心象)을 읊어 발휘되는 내윤(內潤)이 있다. 두보는 이 검문관을 넘는 전후 5백 리 길에서 12수의 시를 읊었는데, 그 많은 천하의 기관(奇觀)을 접했으면서도 시에서 반짝하는 외채를 느낄 수가 없다. 단지 길이 험하다는 것, 굶주림과 고달픔, 그리고 가엾은 처자에의 연민과 늙어 기력이 쇠진함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가 이 검문관을 넘기 전 동곡에 있었을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원숭이나 먹는 도토리를 주우러 겨울산에 가 '손발이 얼고 피육(皮肉)이 죽어 있는데, 아 비풍(悲風)이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구나.' 라고 읊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검문관을 넘을 때 지은 '공낭(空囊, 빈 주머니)'에 보면 호주머니 속에서 돈 한 푼을 굴리며 망설인다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이 고갯길에 있었을 이곳 명물인 검문 두부장수 앞을 지나면서 읊었을 빈 주머니일 것이다.
일당 백만의 험한 관문이기에 그 역사도 다채롭다. 유비(劉備). 조조(曹操). 손권(孫權)이 천하 삼분지계로 세운 삼국이 무너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검문관인 것이다.
제갈량이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위나라를 취기 위해 북벌에 나섰을 때, 위나라의 지장(智將) 강유(姜維)가 투항을 했다.
제갈량은 죽을 때 자신의 저작 24편과 당시의 비밀무기로서 연발식 활인 연노(連弩)의 설계도를 강유에게 맡겼을 만큼 신임이 대단했다. 그리하여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되풀이해 온 터였다.
그 강유가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서 1만 병력을 거느리고 검문관을 지키고 있는데, 위나라의 주장 등예와 부장 종회(鍾會)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치고자 이 검문관으로 진군하였다.
등예의 군대가 석 달 동안 버티다 병량이 떨어지자, 일부 병력을 빼어 병가(兵家)에서는 상상치도 못할 감숙성(甘肅省) 준령을 넘어 우회, 등을 치는 작전을 구사했다. 사람이 다닌 적이 없는 7백 리를, 모포로 몸을 싸 비탈을 구르고 손과 발을 잡아 사람으로 끈을 만들어 벼랑을 타내리며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결국 촉나라 황제 유선(劉禪)은 등예 앞에 무릎을 끓었고, 종회와 검문관에서 대결하고 있던 강유도 유선의 칙명을 받고 투항했다.
강유가 투항한 것은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적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종회로 하여금 촉의 서울을 점거한 등예를 처치케 하여 촉나라 황제로 받들어 놓고 이어 종회를 처치, 촉을 부활시킨다는 강유의 계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종회는 강유의 계책에 말려들어 등예를 잡아들인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위나라의 기무 업무를 보는 감군(監軍)이 그 음모를 알고 종회를 잡아죽였고, 강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강유를 국가의 부흥을 노린 충신으로 다루었으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버린 불충(不忠)으로 적고 있어, 어느 편이 옳은지 알 길이 없다.
검문관에는 투항하라는 칙명을 받고 강유의 장병들이 칼로 바위를 치며 통곡했다는 그 자국 난 도흔석(刀痕石)은 남아 있는데, 강유가 지휘를 했다는 장대며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는 강유의 상은 도로를 확장할 때 없애버렸다 한다.
검문관 비탈을 내리면 두붓집 50여 개가 즐비한 검각(劍閣)이 나오고, 그 검각 두붓집들의 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밭 가운데 초라하게 강유의 무덤이 있다. 호석을 두른 채 쑥대가 무성했으며, 비석에는 '촉대장군 강유지묘(蜀大將軍姜維之墓)'라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가 훼손돼 있었다. 장군 비명(碑銘)을 긁어 가루내어 먹으면 장군 같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신 때문이라니 우리 나라의 남아선호 속신과 다를 게 없다.
검각의 명물인 박달지팡이를 사서 짚고 재 하나를 넘으면, 이미 삼국지 시대의 옛길인 취운랑(翠雲廊)이 나온다. 고서에 보면 아름드리 고백목(古柏木)이 3백여 리에, 10만 그루가 박석길 양편에 자라고 있었다던데 지금은 8천 그루쯤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나무가 지름 2미터, 높이 27미터, 수령 2천3백 년의 1007호 나무로, 밑둥에 사람 둘이 들어가 앉을 만한 구멍이 나 있었고 아두백(阿斗柏)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촉나라 황제 아두(劉禪의 아명)가 위나라에 투항한 다음 낙양으로 끌려가는데, 이 길을 가다가 비가 쏟아져 그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해서 아두백인 것이다.
장비가 심었다는 장비백(張飛柏)도 있고, 문화혁명 때 반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남패천백(南覇天柏)도 있었다. 모든 나무가 왼쪽으로 기우는 좌경(左傾)인데, 유독 이 나무만이 우경(右傾)이라서 근간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삼절의 연고지
양자강 상류인 부강은 삼절(三絶)이 투신 자살을 했다 해서 삼절강이라고도 불렀다. 이백(李白)의 시에도 읊어진 이 강에 몸을 던져 죽은 삼절 중 일절은 초나라에 원수를 갚고 투신한 오자서(俉子胥)요, 이절은 춘추시대의 노국대부 추호(秋胡)다.
추호는 결혼 직후 가출, 공부를 하고 충절을 다하여 대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뽕을 따는 어린 여인에 음심을 품고 겁탈하려 들었다. 그런데 뒤쫓아 이르고 보니 자신의 아내에게 안기는 자기 딸이었다. 이 기구한 운명을 탓하고 여태껏 수절하던 그의 아내가 이 물에 투신 자살한 것이다.
절의에 투신한 전설의 현장을 더듬어내리면 마지막 삼절의 연고지에 이른다. 성도의 북방 요새인 무도진(武都鎭)의 찻길 곁으로 난 강 바위벼랑에 '한수장마모○의처이씨고리((漢守將馬貌○義妻李氏故里)'라 새겨져 있음이 그것이다. 이는 촉한 때 이곳 무도진을 지키는 장수 마모의 의로운 아내 이씨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한데 주의해서 보면 '마모(馬貌)'와 '의처(義妻)' 사이에 있던 글씨 하나가 깎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알고보니 본래 그곳에 '마모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아내 이씨란 뜻으로 '충(忠)'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띄어 쓰지 않았기에 마모충(馬貌忠)의 의로운 아내로 읽을 수 있다 하여 충(忠) 자를 깎아 없앴다는 것이다. 왜냐면 마모란 인간에 충 자가 붙어서는 안 되는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모는 촉나라 장수로 이 무도진 요새를 지키고 있었는데, 예상치 않았던 북서쪽에서 위나라 대군이 쳐들어 왔다. 그쪽은 티베트 고원이라 병가에서 넘어올 수 없는 천연 요새인데, 위나라 장군 등예가 그 험난한 7백 리 준령을 넘어 월산(越山)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병법에서 동서 역사를 통해 3대 월산 작전을 꼽는다면 이 위나라 등예의 티베트 고원 월산과 당나라 때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히말라야 월산, 그리고 나폴레옹의 알프스 월산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넘어온 위나라 장병들은 군량도 떨어진데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과 대적하는 마모에게는 유리한 전세였다. 그러자 등예는 마모에게 겁을 주는 속임수 작전을 썼다. 마모의 진에서 맞바라보이는 봉혈산에 대량의 양을 구해다, 목에 등롱을 달고 야밤에 부산히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계를 썼던 것이다.
등예가 이렇게 겁을 주어놓고 돌격하자 마모는 도망칠 채비만 하는 것이었다. 이를 곁에서 보다 못한 마모의 부인 이씨는 나아가 싸울 것을 읍소했으나 마모가 막무가낸지라,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불충불의를 매도한 다음 적이 진을 점거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싸움에서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던 제갈량의 아들 제갈섬(諸葛贍)은 위나라에 대항해 자신의 18세난 아들 제갈상(諸葛尙)과 수도방위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다. 제갈량의 아들과 손자가 싸우러 나온 것을 안 위나라 장군 등예는 사신을 보내어, 투항을 하면 낭사국(琅邪國)의 왕으로 삼겠다고 미소책을 썼다.
그러나 제갈량의 아들은 유비의 아들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그는 선친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 그 사신을 현장에서 베어 버리고 결전 태세를 취했던 것이다.
한데 위나라 대군이 성도 성밖에 포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촉나라 황제요, 유비의 아들인 유선(劉禪)은 환관으로서 권력을 좌지우지, 나라를 망치고 있던 황호(黃皓)의 꾐에 넘어가 무당을 불러 앞날을 점치게 했다. 묵계된 대로 무당은 적이 문전에 와 있는데도, "태평성세를 즐기고만 계시면 되나이다. 수년 후에 천하는 폐하께로 돌아오게 돼 있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제갈섬 부자가 나아가 처참하게 전사(戰死)하는 동안 유선은 손수 관(棺)을 업고 나아가 투항을 한 것이다. 등예는 묶은 몸을 풀어 그 관을 불태우고 우대하니, 유선은 그것이 감지덕지하여 변방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들에게 모두 투항토록 칙령을 내렸다.
면죽 옛성의 서문 밖에는 이곳에서 싸우다 전사한 제갈섬 부자의 쌍충사(雙忠祠)와 쌍충묘(雙忠墓)가 있다. 그 사당 두 문짝에는 송말의 영웅 문천상(文天祥)이 이곳에 와 썼다는 친필 '忠'. '孝' 글씨가 붙어 있고, 양편에는 3백 년 됐다는 노송이 울창했다. 사묘 안에는 제갈 부자가 전사하는 최후가 조각돼 있고, 무덤에는 제갈죽이라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면양에서 남하하면 덕양(德陽)에 이르고 성도에서 이곳까지 고속도로가 놓여 교통이 편리해진다. 그 덕양 북방 녹두산에 유비의 꾀주머니라던 방통(龐統)의 사당과 무덤이 있다.
산문(山門)에 세 사람이 앉을 만한 잣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방통의 죽음을 애석해 한 장비가 손수 심은 것으로 장비백(張飛柏)으로 불리고 있었다.
사당에는 용봉이수전(龍鳳二帥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용(龍)'은 제갈량의 아호인 복룡(伏龍)에서 따온 용이고 '봉(鳳)'은 방통의 아호인 봉추(鳳雛)에서 따온 봉이다.
앞 사당에는 용봉을 모시고, 뒷사당은 봉만을 모신 서봉전(棲鳳殿)으로 그곳에는 깊은 사색에 잠겨 오가고 있는 방통상과 문무겸전을 나타내는 책과 칼이 놓인 책상이 있었다.
그 뒤편에 둘레 10미터, 높이 4미터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 전체를 옛 장수가 쓰던 투구 모양으로 돌을 쌓아 올려 이색적이었다. 그 무덤 양편에 백마와 밤색의 율마를 세워 두었는데, 바로 방통이 죽었을 때의 고사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익주 탈환을 위해 진군할 때 유비는 방통이 타고 가던 율마가 다리를 저는지라 방통이 신상을 우려, 자기가 타고 가던 백마와 바꿔탔다. 그런데 행군이 이 녹두산 인근에 이르렀을 때 적 복병의 사정 안에 들었다. 당시 지휘관은 백마를 탄다는 것이 상식이 돼 있던 터라, 백마를 탄 이가 유비인 줄 알고 집중 방시하여 방통이 즉사한 것이다. 그때 방통의 나이 36세였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가로수 구길인 고역도(古驛道) 인군에는 말을 바꿔 탔다는 환마구(換馬溝)라 새긴 현장 표시 비석과, 방통이 활에 맞아죽은 낙봉파(落鳳坡)라 새긴 현장 표시 비석이 서 있었다.
소동파의 인생관
성도에서 2백 리를 남하하면 미산(眉山)에 이르고, 미산 사곡행이라는 곳의 삼소사(三蘇祠)를 찾아간다.
삼소사는 송나라 때 으뜸가는 문장가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동파의 아버지 소순(蘇洵), 동파의 아우인 소철(蘇轍) 삼부자를 모신 사당이다. 소동파가 진사와 대과에 급제하기까지 살았던 집터에 세워진 사당이라, 그의 시 속에 읊어진 현장들이 발걸음을 잡아 놓곤 했다.
'소동파' 하면 연상하게 마련인 시구 '조수홍거세세향(照水紅呱細細香)'의 현장인 서련지(瑞蓮池)의 붉은 연꽃은 소동파 소싯적의 그 연꽃으로 한번도 대가 끊기질 않고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한다.
또한 대나무를 무척 좋아하여 수집까지 했다는 소동파 시 속의 그 대나무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못가에 대를 심고, 달고 나와 그리고 대 그림자 셋이서 놀았다고 읊은 죽간소정(竹竿小亭)의 대나무들도 그 못가에 흐드러지고, 문전에 만 그루의 대나무요, 당상에 만 권의 책이라 읊은 피풍사의 대나무 숲도 울창했다.
사천의 명물로 비통주(碑筒酒)가 있는데, 소동파가 즐겨 빚어 마셨기로 유명해진 술이다. 대를 잘라 그 죽통 속에 술을 빚어 넣고 파초잎으로 포장해서 익힌 술이니 대단한 풍류가 아닐 수 없다.
소동파 형제가 소년 시절 글을 읽었다던 남헌(南軒)은 내봉정(來鳳亭)으로 이름이 바뀐 채 보존되고 있었으며, 아버지 소순이 애지중지했던 산 모양의 고목 골동품 목가산(木假山)도 보존되어 있었다. 인근 낙산대불(樂山大佛) 위편과 신진(新津)에는 소동파가 놀았거나 글을 새겨놓은 동파루와 동파정도 보존돼 있었다.
소동파가 태어난 고향 지명인 사고행은 비단 장사란 뜻이다. 소동파의 조상은 대대로 비단 장사를 해온 소상인으로, 큰아버지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관리가 배출된 가문이다.
소동파는 21세에 진사시에 급제하는데, 그 당시 시험관이 바로 명문장 구양수(歐陽脩)였다. 급제 때 시험관은 사제 차원을 넘어 평생 동안 의사 혈연 관계를 맺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소동파는 구양수의 정치 노선을 따르게 되고, 그것이 소동파가 기구한 인생 행로를 걷게 된 원인이 된다.
당시 송나라 정국은 왕안석(王安石)이 주도하는 개혁 신법파와 구양수가 주도하는 수구 구법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나라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최악의 경우요, 그 이전에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지론의 소동파는 신법파의 미움을 받고 필화와 발매 금지, 좌천과 투옥 그리고 유배로 일생이 아롱지고 있다. 동파라는 만년의 아호도 바로 유배지의 황량한 둔덕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고 소동파는 자신이 존경했던 굴원(屈原)처럼 멱라수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고, 곧잘 읊었던 가의(賈誼)처럼 비통 속에 요절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를 소연명이라고 자처했던 도연명(陶淵明)처럼 산속에 은둔하지도 않았다. 그 기구한 인생으로 삶이 굴곡지면서도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법이 없었고, 자기 연민이나 우수에 빠져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삼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소평생위구망(自笑平生爲口忙)' 즉 입으로 평생 바쁜 사나이로 자처하는 낙천성마저 보였다. 담론을 잘해 잘도 지껄이기에 실언이 많아 그를 수습하느라 입이 바빴고, 먹는 걸 좋아해 이것저것 만들어 먹느라 입이 바빴고, 또 식구가 많아 그 입 풀칠하기에 바빴다고 부연하고 있다.
유배 생활 할 때는 한 달 먹을 양식이라야 여느 사람 이레 먹을 분량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를 30포로 나누어 묶어 천장에 매달아두고 하루에 한 봉지씩 꺼내 근근히 연명하기도 하였다.
'소동파'하면 문장이나 시보다는 술과 음식을 연상하게 되는 것도 그의 낙천적 인생관의 단면이랄 수 있다.
소동파는 술이 '시를 낚는 낚싯바늘이요, 근심을 쓰는 빗자루'라 읊었지만, 그의 주량은 요즘의 한 홉 반짜기 소주 한 병꼴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배 생활중에 누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자신이 마실 분량만 남겨두고, 인근에 은둔하는 도사나 야인들에게 보내곤 했다.
그는 마시기보다 맛을 달리해 술을 빚는 데 보다 많은 흥미를 가졌다.
횃불 타는 것에서 암시를 받아 송진술, 요즈음 우리 소주업계에서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는 꿀술 등 관심을 가진 술 종류가 너무 많아 《동파주경(東坡酒經)》이란 책이 나왔을 정도다. 그 중 '춘몽파주(春夢婆酒)'라는 철학적인 술도 있다.
유배지에서 소동파가 큰 박을 지고 논두렁길을 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칠십 노파가 '선비님, 옛날 부귀가 일장춘몽이구려' 하자 소동파는 '잘 알아보셨습니다.' 했다. 그 후 산책길에서 만나면 노파가 이 춘몽파에게 술 한잔씩을 권하곤 했다는 데서 그 술을 춘몽파주라 했으니 운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동파의 술 깨는 수법도 철학적이다. 술에 취하면 손가락 끝으로 열 십(十)자를 수없이 쓰는데, 그러면 주기(酒氣)가 손가락 끝에서 새어 나가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동파' 하면 술보다는 요리를 더 연상할 것이다. 지금도 서울의 정통 중국 음식점에 가면 메뉴판에 동파육(東坡肉)이란 것을 볼 수 있다. 소동파의 '저육송(猪肉頌)'을 보면 '유배지인 황주에서는 저육이 흙값만큼 싼데, 부자는 먹지 않고 빈자는 먹을 줄을 몰라 못 먹는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요리하여 매일 아침 두 그릇씩 배불리 먹었다.'는 바로 그 동파육이다.
동파의 이름이 붙은 요리는 비일비재하다. 순수한 무국인 동파갱과 파와 더불어 기름에 볶은 동파두부가 그렇다.
또한 동파 요리로서 오는날까지 먹는 음식에는 쌀 수프의 일종으로 마음이 허해 안정이 안 될 때 먹는 옥삼갱, 무상감과 무료감으로 안절부절 못할 때 종려순과 열매를 쪄 초에 적셔 먹는 목어자(木魚子), 부용꽃 화심을 순두부에 넣어 수프를 만들어 눈오는 날 먹는 설하갱(雪霞羹), 상념이 구름 끝에 닿을락 말락 할 때면 맑은 개울 바윗돌에 낀 이끼를 따서 샘물에 끓여 은은한 향을 먹는 석자갱(石子羹) 등 모두가 유배지에서 신변의 값싼 재료로 만든, 가난하지만 시적이고 철학적인 요리들이다.
말년의 소동파가 자신의 아호를 먹보라는 뜻인 노도(老寕)라 했음을 보아도 동파류의 낙천적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