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A.D.581 ~ A.D.618)]
- 전쟁과 침략을 좋아하던 황제들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통일제국
서기 581년, 북조의 대승상인 수왕(隋王) 양견(楊堅)은 주 정제(周靜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隋)’라 개칭하니, 이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다. 그는 정권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전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일으켜, 589년에 남방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정권인 진(陣)나라를 공격하여 남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위진 이래 근 4백 년간의 분열 국면은 종결되었다.
수 양제(隋煬帝)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경(東京)을 건설하고, 운하를 파고, 대대적으로 양자강 남북 경제 문화의 교류를 진행하여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였다. 그 밖에도 수 문제가 시작한 제도는 수 양제 시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과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수나라 초기의 제도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제도로 넘어가는 하나의 필요한 과도기가 되어 주었다. 수 양제는 또한 서역 및 동남아시아 인근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수 양제 말년에 수나라의 영토는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나라는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쌓였던 재화가 급속히 소진되고, 수 문제 때에 다져 놓았던 정국 또한 수 양제 시기에 급박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수 양제가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일삼고, 그의 짧은 일생 동안 세 번이나 강남의 도시들을 순행하였으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고, 거국적으로 큰 공사를 일으켰으며, 젊은이들을 모두 병사로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논과 밭이 황폐해지니 이로서 수나라 전역에서 수나라 정권에 반항하는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 더하여 수나라 지배계급의 내부 분열은 수나라의 통치를 신속하게 와해시켰다.
급기야 618년, 이연(李淵)은 수 공제(隋恭帝) 양유(陽侑)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어 당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唐, A.D.618 ~ A.D.907)]
- 이태백의 시와 양귀비의 미모로 상징되는 중국 역사 최고의 전성기
당나라는 중국 봉건 사회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로, 건국 초기에 사회의 안정과 정치적 개명을 몹시 중시하였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에는 오곡이 풍성하고 백성이 안락한 생활을 누린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를 이루었으며, 현종(玄宗) 황제 이융기(李隆基)의 치세에는 국력이 몹시 강성하여 역사에서는 이를 ‘개원의 성세’(開元盛世)라고 칭한다.
정치상에 있어서 당은 위진(魏晋) 이래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진일보 개선된 과거제를 시행하여 양호하고도 질서 있는 정부 관리 시스템을 건립하였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세금제도에 있어 균전제(均田制)를 추진하고 조용조(租庸調)를 실행하며, 황무지의 개간과 농업 및 잠업(蠶業 - 누에치기)을 장려하여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었다. 당의 문화와 과학 사업 역시 공전의 번영을 이루었는데, 특히 시가(詩歌) 발전에 있어서는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으로 발전하였다.
당나라 시대는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주변 인접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당의 번영과 강성한 배후에는 심각한 내우외환이 잠복하고 있었으니, 이융기 집정 후기의 당조는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755년 폭발한 장장 8년간의 ‘안사(安史 -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전부 소진시켰으며 당나라는 이로써 재기불능이 되었다. 후에 비록 헌종(憲宗)의 중흥이 있었지만 구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875년에 폭발한 ‘황소(黃巢)의 반란’은 당나라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당은 이로써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벌들에 의한 혼란과 전쟁 속에 빠져버려 이름만 존재하는 멸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907년, 주온(朱溫)은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압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만든 다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니, 이로써 당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오대십국(五代十國, A.D. 907 ~ 960)]
― 안록산의 난에 의한 당나라의 멸망이후 송나라 건국 때까지의 혼란의 시대.
당나라 시대 말기, 중국 대륙 각지에 형성된 군벌호족 세력은 그 기세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서기 907년, 당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은 당 애제(唐哀帝)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후량(後粱)을 건립하니 이로서 중국은 오대십국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907년에서 960년까지 중국 황하 유역에는 후량,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다섯 왕조가 연이어 출현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五代)’라 칭한다. 이와 동시에 남방에서도 전촉(前蜀), 오(吳),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등 아홉 개의 군벌호족들이 할거(割據 - 지역을 서로 나누어 차지함)하여 수립한 정권이 출현하였으며, 여이게 산서 지역에 건립한 북한(北漢)을 합쳐 역사상 ‘십국(十國)’이라 칭한다.
오대십국은 중국이 위진남북조(위진남북조) 이후 다시 분열과 혼란에 빠진 시대였다.
각지의 백성들은 분열과 할거로 인해 초래된 여러 재난에 저항하였으며, 또한 중국인들의 힘을 모아 거란족의 침략에 따른 약탈을 막기 위한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대 후기에 이르러 통일의 추세는 날로 명확해졌다. 이에 979년에 이르러, 북송이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일하니 오대십국의 할거는 이로서 종말을 고했다.
오대십국 시대에 북방은 전쟁과 난리가 빈번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운데 반하여, 남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 전체의 경제중심은 황하 유역에서 장강(양쯔강) 유역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농업, 수공업, 그리고 상업 등이 비교적 발달하였고 해상무역 또한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