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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8 모리아에서 만난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한 번 한 번 설교가 끝날 때마다 제 마음속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노아 홍수의 주제가 끝난 후에 이제 남은 시간 창세기에 어떤 주제를 다루면 좋을까 이제 기도하면서 제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조금 이렇게 준비해 와서 이제 상황에 따라서 빼고 넣고 이렇게 하면서 지금 이 분위기에 맞춰서 가고 있는데 세 번의 기회가 왔는데 그중에서 후보로 올라왔던 내용 중에 하나가 창세기 십장에서 니므롯으로 시작해서 바벨론이 만들어지고 바벨탑까지의 이야기 어떻게 보면 종말까지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후보로 올라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창세기 십육장 십칠 장까지 나오는 할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말미암는의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언약에 대한 개념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한 후보에 올라와 있고 또 세 번째 부분은 창세기 십구장에 소돔성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 제가 종말적이라고 하는 얘기를 이제 계속 하면서 재림 준비에 관한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네 번째 후보는 야곱이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야곱이 야곱의 환란의 이야기가 이제 후보군으로 올라와 있는데요.
이 내용보다 훨씬 더 빨리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그런 주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창세기에 나온 어떻게 보면 창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저를 크게 감동시킨 십자가의 이야기에요.
에 창세기에 나온 십자가의 이야기 창세기 삼장 십오 절 그 말씀도 있지만 이제 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창세기에서 가장 강력한 그 사랑의 기별을 우리에게 비춰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모리안에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죠 그 이야기가 창세기 몇 장에 나오죠?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함정이 있는데요.
그게 바로 무엇인가 하면 제가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많이 연구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며 논리적으로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훈련된 어떻게 보면 신학을 공부했잖아요 그죠? 다시 말해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혹은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이 본문 요한복음 십칠장 삼절에서 말하는 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곧 제가 영생을 소유하다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영생을 소유할 수가 없을 수도 있어요.
이 바리새인들의 함정이었죠. 여러분 제가 성경을 수도 없이 많이 읽어서 그 내용을 달달달 외우고 그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저는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어요.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넌 나를 몰라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영생과 관계없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십칠장 삼절에서 말하는 영생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나 하나님의 관해서가 아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이 말은 실제 하는 하나님이란 뜻이에요.
참이란 말은 이게 실제 하는이라는 의미에요.
알레테니아에서 실제하는 하나님이신 그 분을 그 분 자체를 어떻게? 경험으로 아는 것을 영생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요.
여러분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사랑을 어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체험하며 아는 거 이게 실제 하는 하나님이니까 관념이 아니니까 내가 실제로 느끼고 체험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 그 사람은 무엇을 소유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여러분 요한복음 17장 3절에 사용한 이 안다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 단어에 보면 객관적 지식을 머리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중에는 독케오라고 하는 단어가 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다 안다고 할 때, 어떤 지식을 안다고 할 때 도케오라는 단어를 항상 써요.
근데 어떤 지식을 그냥 그 객관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경험과 체험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얻는 다시 말해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하는 그 지식을 의미하는 단어는 뭐냐? 기노스코라고 하는 단어를 써요.
근데 여기서 기노스코라고 하는 단어를 썼어요.
그래서 이 앎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닌 이것은 오늘 내가 하나님과 함께 오늘 우리 계속 집회에서 최 원장님이나 제가 계속 강조하는 게 뭐냐 그러면 믿음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연결되어져서 그분과 동행하는 가운데 내 삶에서 그분이 행하시고 역사하는 그 하나님을 경험으로 우리가 알 때만이 알 수 있는 앎이 바로 뭔가 하면 이 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앎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녹이나 노하나 아브라함이나 모세 모두 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곳곳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만약 내가 매일의 삶 속에서 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체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그러면 매일 말씀대로 살아가고 그분과 동행하고 하는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는 실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이야기로 꽉 차 있어요.
예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가 돼야 돼요.
아 이야기 나라 내가 경험했던 거야.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돼야 돼요.
그래서 오늘은 그중에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들이 등장하죠 예를 들면 여호와 로페 여호와 치바고츠 여와 니시 여호와 이에 이런 하나님의 이름이 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고 여호와 로페 여호와 이에 이런 이름으로 등장할까 붙어 있을까요?
이 이름들이 참 궁금하잖아요 그렇죠? 그것은 성경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구원을 경험하고 난 후에 음 그 감격스러운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경험한 그 특별한 구원의 역사를 담은 이름들을
하나님의 이름 속에 넣어서 부르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만난 하나님은 여와 일행의 하나님이야.
에 내가 만난 하나님 여호와 그 츠바오츠의 하나님이야.
에 이런 자기의 경험을 담아서 붙여놨다고 하는 거예요.
그 중에 창세기 이십이 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너무너무 감격스럽게 경험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 아브라함이 경험한 이 모리아산에서의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좀 창세기 이십이장을 통해 나눠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한 수도 없이 읽었을 거예요.
창세기 이십이장의 시작에 보면 보통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한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집니다.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한 단어 한 단어가 되게 중요합니다.
내가 내게 일러준 한산 내가 내게 일러준 한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번죄가 뭐죠? 번제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짐승을 칼로 죽여서 그 몸을 쪼개요.
그 다음에 불에 태워서 하나님의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에요.
근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번재로 몸이 쪼개져야 되고 불로 태워져야 할 재물이 무엇인가 하면 양이나 송아지가 아니라 누구에요?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근데 이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은 어떤 아들인가 하면 이십오 년 동안의 기다림 속에 힘들게 얻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게 중요해요.
하나밖에 없는 너무너무 소중한 백 살이 되어서 난 거예요.
정말 미칠 정도로 좋은 거예요. 이 아이가 웃기만 하면 막 가슴이 뛰고 할 때 너무너무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 독자예요. 그 소중한 독자. 근데 그 아들을 그냥 하나님이 데려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직접 니가 어떻게 알아 그 아들을 죽이고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니가 직접 죽이라고 하는 그리고 어떻게 알아 그 아들을 쪼개라.
그리고 범죄로 바치라고 하는 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이상한 명령이에요.
제가 노아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 아시죠? 노아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그 한 명이나 살리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며 애수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노아의 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해 보여요.
갑자기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의문을 가지고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를 파악하고 끝까지 답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가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흘러나와요.
예 이 명령을 받고 난 후에 아브라함도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삭을 바치는 제사는 이방인들에게나 행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셨을까? 더군다나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분인데 왜 사람을 죽이라고 하지?
왜 하나님은 이런 어마어마한 고통을 나에게 허락하실까? 다 의문인 거예요.
하나같이 다 캐치 마크가 붙어 있는 거예요.
근데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엄청난 고민 속에 빠져서 이 명령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명령인지 알고자 이전에 해보지 못한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밤새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답을 찾아야 되겠죠 근데 계속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귀에 들려오는 음성은 똑같은 명령 반복하는 내 아들 사랑하는 녹자 이삭을 데리고 번째로 드리라.
이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그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가 갈 때와 우리를 떠날 때 들었던 그 음성이에요.
그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들었던 부인할 수 없는 그 음성이
똑같이 계속 그 얘기에 계속 들렸을 때 아브라함은 감히 지체할 수 없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면 어떻게 한다? 즉시 순종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밤에 낮에 그 하지도 않고 그 다음에 누구예요? 새벽에 출발하죠.
살아도 깨우지 않아요. 왜냐 그러면 지체하면 어려워질 수 있으니까 그 모든 가능성들을 순종하지 못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다 배제한 채 즉시 순종해서 나갑니다.
이게 믿음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이 이 명령 앞에 순종을 결심하고 거의 죽을 것 같은 삼일의 시간을 걸어가고 모리아산까지 갑니다.
근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또 질문 그 근처에 산이 아니라 그 근처에서 죽이면 되잖아요.
근처에 산이 아니라 사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것도 중요해요.
사흘길
해필이면 왜?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리고 그것도 모리아 땅 아무 데서 하면 안 돼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려준 그곳 거기서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너가 직접 니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려 하셨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돼.
근데 이 자세 이 지시한 내용 하나하나는 모두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해석해야 될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첫 번째 이 모리아 땅은 모리아 땅에 있는 이 산은 어떤 산인가요? 성경에 보면 모리아산이라고 하는 지명이 모리아라고 하는 지명이 성경에 딱 두 번 밖에 안 나와요.
한 번은 창세기 이십이장 여기에 하고 또 한 번은 역대야 삼장에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모리아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죠 그렇죠? 예 다시 말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 근처에 있는 산이 어떤 산이다? 모리아산이에요.
성전 근처에 있는 근데 이곳에서 나중에 이천 년이 지난 후에요 이곳에서 이 성전에서 430미터쯤 떨어진 언덕에서 이 언덕이 바로 뭔가 하면 모리아 산이에요.
그곳에서 이 창세기 이십이장에서 벌어진 똑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거기서도 한 아버지가 한 자신의 아들을 다른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들을 죽이고 그 희생의 범죄를 이산에서 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거기서도 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독자를 잃은 극한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이 모리아산은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는 곳 바로 골고다 언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걸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고 하실까? 여러분 근데 먼 미래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곳으로 지금 누가 번죄를 드리러 가고 있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고 있는 거예요.
뭔가 의미심장한 지금 장면이 지금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 이천 년 후에 똑같이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그곳으로 아브라함이 지금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머릿속에 넣어야 돼요.
그리고 이 삼일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아버지가 겪게 되는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이 삼일 동안 모리아 산으로 걸어가며 똑같이 겪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삼 일 동안 그 죽음에 아 자식을 잃은 죽음의 고통을 지금 계속 느끼죠 부활하기 전까지 예 그래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의도하고 계시는지 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거룩한 의도를 파악하며 이 이야기를 따라가야 돼요.
우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소중한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주셔서 돌아가시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정도로 아주 피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그 이야기 속에서 놓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뭔가 하면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하늘 아버지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그 아들을 내어주셨는지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그 아버지는 어떠한 고통을 겪고 계셨는지를 우리는 간과하는 경우들이 참 많아요.
예 근데 실제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가장 큰 사랑의 빛은 이 아버지의 희생을 통해 보여주고 나타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에요.
예 더 큰 희생을 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 그러니까 이거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요한복음 3장 십육 절 한번 띄워주세요.
여기 보면 하나님이 누구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이 누구예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에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어요.
또 뛰어주세요. 요한일서 사장 구절부터 십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대요.
근데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랑도 엄청나게 크지만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려 하는 이 사랑이 훨씬 더 큰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은 여기 있나니 하는 거예요. 이 사랑을 보고 요한이든 사도든 모든 사람들이 다 압도되어서 다 감동받고 그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그러한 어떤 우리의 희생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만든 사랑이 바로 뭔가 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건 어떤 사랑인가 하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는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희미하게밖에 몰라요.
지금 그걸 알아야 돼요. 사랑은 여기 있다니 이 성경에서 말하려고 하는 사랑이 이 사랑이라고 하는 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또 반복하는 거예요.
우리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화목 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는거 이 사랑을 우리가 느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랑이 여기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나오는 본문은 전부 성자의 사랑보다 성부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물어볼게요.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할까요?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할까요? 대답을 못하세요.
쉽게 나와야죠. 동일하게 똑같은 마무리를 사랑해요.
왜냐하면 두 분 다 사랑이잖아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에요.
세 분이 사위 일체잖아요. 그래서
근데 이 성경 말씀들은 전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두 분이 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그때 성자 하나님보다 성자 하나님이 엄청나게 우리를 사랑했죠 성부 하나님의 희생이 훨씬 더 컸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들은 전부 제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찾아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전부 다
그냥 읽고 아 하나님이 우리 사랑했구나 이러면 우리 안 돼요.
예 찾아야 돼요. 그 사랑이 우리에게 비춰지고 느껴질 때까지 성령 하나님께 구하며 계속 계속 파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전부 예수님의 모습만 나오지 성부의 모습과 사랑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고 하는 근데 성자 하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다 보여주는 거죠.
근데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그 희생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저는 쉬지 않고 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보게 되었어요.
복음서에 나온 십자가 이야기를 쭉 따라가 보면 십자가 이야기는 제가 시대의 소망을 계속 여러 번 읽고 그 복음서의 내용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는데 크게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네 가지의 국면으로 나타나요.
첫 번째 국면은 금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벌어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그러면 예수님이 금요일 밤부터 어떤 경험을 하죠?
아니 금요일 밤이 목요일 밤부터네요.
목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죠? 세만의 게세만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그때 엄청난 이제 그때부터 십자가가 시작되는 거예요.
두 번째 국면은 언젠가 하면 안나스와 가야바와 헤로과 빌라도로 이어지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장면이에요.
계속 왔다 갔다 하면 두들겨 마주치고 하는 그 장면이 나와요.
세 번째 국면은 오전 아홉시부터 이제 예수님이 여덟시 쯤에 그 빌라도에 사형 선고가 이제 집행 집행이 떨어져요.
그래서 예수님이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그 골고다 언덕 사백삼십 미터의 거리를 쭉 올라가서 드디어 골고다 언덕에서 오전 아홉시에 이제 매달려요.
십자가에 그 십자가의 상에서 여덟 여섯 시간 동안 매달려 계시는데 그중에서도 먼저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에요.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은 육체적인 고통에 집중되어지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근데 사단이 그렇게 해도 끝까지 십자가에 안 내려오니 이제 사단이 정말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고통을 가하게 되는데 그 시간이 정오부터 제 마지막 오후 3시까지 예 이때가 십자가의 사건 중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 돌아가시는 시간 중에 예수님에게
가장 극심한 고통에 이르러 오는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이때는 이 정오부터 시작해서 오후 세시까지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 시대의 소망이 보면 나와요.
여러분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툭하면 말하는 게 예수님이 여섯 시간 내내 육체적 고통이 느껴지지 느껴지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구타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어요.
실제 시대의 전망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탁 세워질 때 이렇게 기둥으로 봐가 탁 세워질 때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을 느꼈대요.
손이 막 찢어지면서 그때가 육체적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느낄 때였다고 합니다.
근데 이제 그렇게 큰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마치 머리를 쥐어짜듯이 그의 마음에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사단의 공격을 받으시면서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십자가의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렇게 아픈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럴 정도로 큰 마음에 고통을 당하시다가 어떻게 됐죠? 심장이 터져버리는 거예요.
이거 몰라요 우린 이 고통을 그 인류 누구도 당하지 못한 고통을 주님이 당하신 거예요.
그분만이 근데 그때
그 고통이 시작되어질 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세 시간이 지난 정오 열두시쯤에 예수님이 찾았겠죠 아버지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주님 살려주세요.
주님 제가 여전히 버림 받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세요.
님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사랑해서 철저히 버려졌다는 것을 느끼지 않게 해주세요.
한번 아버지를 찾아요. 근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 기도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띄워주세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전부 다 보면 제육시로부터란 말이에요.
이 제육시가 정오 때부터요. 그러니까 이 시점은 굉장히 중요한 국면이에요.
십자가 작근에서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해서 오후 세시까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가장 극심한 고통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 새 복음서의 기자들이 전부 다 동일하게 이 사건을 다 기록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거죠.
뭔가 그렇죠? 왜 이 짙은 어둠이 임했을까 생각해보고 시대의 소망을 여기서 성경에는 안 나오면 시대의 소망을 또 찾아보는 거예요.
성경에는 이유 없는 기적은 없습니다.
그죠? 뭔가 기적이 벌어졌잖아요. 이 특별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시대 소망이라는 책에 보면
그 짙은 어두움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증거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이 찾고 있잖아요.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더 이상 하늘에서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는 거 내려오는 거예요.
근데 아들에게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응답하면 안돼요.
손을 뻗치면 안돼요. 그분은 어둠의 장막을 만드시고
그분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 부터 감추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천사들 하나님과 거의 그의 거룩한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계셨다고 하는 이때부터는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가까운 곳에 그 옆에 계시는 거예요.
천사들과 함께 다 지켜보는 거예요. 그 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가리워졌다.
그분은 어두움으로 장막을 만드시고 그분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감추었다.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계셨으나 함께 했어요.
그 분의 인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이 시간 아버지 하나님은 더 이상 하늘에서 그 장면을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 시간 어둠으로 장막을 치고 이 땅에 내려서 오셨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근데 이제 중요한 게 뭔가 하면 이제부턴 우리가 정말 묵상하고 성령을 강구해야 되겠죠 그 어둠의 장막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 시간 동안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분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그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거는 오직 성경에 기록이 없기 이때부터는 이제 우리가 성경을 구해야 되는 거예요.
예 성경에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이 세 시간 동안 침묵 속에 계셨던 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예
하나님이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실까 우리에겐 잘 안 느껴져요.
우린 너무나 어두워서 근데 이 세 시간 동안에 침묵이 말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희생과 그 사랑을 희미하게 남아 정말 희미하게 나마 깨닫게 해준 장이 바로 뭔가 하면 창세기 이십이장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저는 이 창세기 이십이장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를 번제로 드리는 이 경험을 통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만든 일종의 장치가
바로 창세기 이십이장에 모리아산에서 벌어진 사건에 담긴 이야기라고 생각을 근데 왜 아브라함에게 했을까? 다른 사람들이 이 순종을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엄청난 순종을 하나님께서 요구해서 뭔가 장치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이 이런 요구를 했을 때 그 순종을 대부분 다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잖아요.
친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면 순종하겠다 싶어서 이 순종을 요구했던 거예요.
이 창세기 이십이장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그거 그것만 해서는 안 돼요.
우리의 모범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에 대한 아주 헌신에 대한 것도 알지만 더 큰 거를 우리가 이 모리아 산의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야 돼.
삼일 동안 아브라함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앞에 죽을 고민을 하며 모리아산까지 걸어갑니다.
죽을 고민을 하는 거예요. 이 죽을 고민이 뭘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고민이겠죠.
근데 모리아산에 다달았을 때 약속의 표인 영광의 구름이 그 모리아산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아브라함은 아 이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구나 다시금 확신을 해요.
근데 왜 일까? 아직도 모르겠어. 이제 아브라함은 이제 하인들을 전부 그곳에 나무라고 그래요.
너희들은 올라오면 안 돼. 왜냐 그러면 굉장히 비참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너 이제 남아있어 하고 나무는 이삭에게 딱 주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산 꼭대기로 향해 올라갑니다.
근데 이 삼일 동안 아버지를 따라 같이 여행한 이 이삭은 아버지 때문에 근심이 생긴 거예요.
평상시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거예요.
그렇게 다정한 아버지가 한 마디 말도 안 해 삼일 내내 평소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늘 평온하시던 그 얼굴에 막 수심이 가득하고
때때로 아버지의 눈에 가만히 보니까 막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막 막 울고 있어요. 그리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얼굴이 흙빛인 거예요.
이게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겠죠. 그래서 이상하게 묻습니다.
아버지 무슨 근심이 있으세요? 아버지 안색이 너무나 안 좋으시다고.
아버지 장성한 아들인 제가 있는데 무슨 근심이 있냐고 제가 아버지의 근심을 들어드리겠다고 무슨 일이 그 심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라고 하면서 그 착한 아들이 물어보았을 거야.
근데 아무리 물어봐도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하는 거
근데 희생을 드리러 산으로 올라가는데 아버지가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이 허둥대며 올라가는데 가만히 보니까 희생 제사로 드릴 양이 양을 아버지가 빠뜨린 거예요.
그래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묻습니다.
아버지 잠깐만요 불과 나무는 있는데 아버지 번제할 양을 빠트렸다고 양이 없으면 어떻게 번제를 드리냐고 번제할 양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근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근데 아브라함이 도저히 이 말을 아직까지 할 수 없는 거야.
청천병력 같은 말이잖아요.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뭐라고 하죠? 창세기 이십이장 칠절부터 팔 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가 이걸 피피티로 저기 뭐 이걸 성경전을 못 올는 것 같은데요.
아들아 번제할 양은 어떻게 하신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거야.
근데 이게 굉장히 영적인 말이죠. 근데 이 말은 어떤 말인가 하면 아브라함아 아니 아들아 나도 모른다.
하나님이 그냥 재물을 따로 있다고 말씀하셔서 그냥 불과 나무만 들고 산에 올라가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성경에서 유 아주 유명한 여호와 이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 잘 모르지만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을 겪고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하면 끝까지 순종하면 그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해답을 예비하고 있을 거야.
이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말이 아니라 이 엄청난 고민 앞에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던진 믿음의 고백이었어요.
너 순종할 수 있어? 하는데 난 순종할 거야.
끝까지 순종할 거야. 왜냐면 난 하나님을 믿어.
그분은 나를 위한 해답을 가지고 계실 줄 믿어.
근데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제게 클로즈업 된 장면이 뭔가 하면 당시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같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시잖아요.
근데 그 올라가시기 직전에 개세만의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고백이 갑자기 저에게 생각이 났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해서 정오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온 거예요.
예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에 아버지 하나님이 침묵하는 장면은 딱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아버지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고 싶어 죽겠는데
하나님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끝까지 막 정말 답답해하면서 침묵하는 장면이 딱 두 번 나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번죄를 들이러 가는 이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해보라고 계속 하는 거예요.
근데 이천년 후에 모리아 산으로 직접 번제로 번제로 들여지기 위해 올라가는 예수님이 그 모리아 산에 오르기 직전 개세마의 농산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하지? 어떤 기도를 하죠?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할 만 하시거든 만일 할 만 하시거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달라고 그러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이 기도는 청청 병역 같은 기도에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막 죽겠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토록 강한 예수님이 죽겠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예수님이 성경을 전부 다 아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를 날마다 날마다 연구해서 묵상하고 연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는 분이에요.
이 말은 알고 있잖아요. 성경에서 이삭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서도 여호와 이래에 준비된 구원을 하나님 그거 없습니까? 찾고 있는거야.
기도하고 구하고 있는 거예요. 저 그 내용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 기도에 막 떨리지만 침묵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근데 이 부르시즘이 한 번만 올라오는 게 아니죠.
또 올라와요. 두 번, 세 번 계속 하나님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어요.
아버지 나를 위해 준비되어진 그 모리가 사는 그 구원 여호와 이에 어린 양은 없습니까?
근데 이 시대의 소망해보면 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본 적이 없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이 기도는 그의 가슴을 찢어놓는 기도예요.
너무나 가슴 아픈 기도예요. 왜냐면 응답할 수 없으니까.
응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인간을 포기해야 되니까요.
양단의 선택 속에서 지금 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거야.
아들을 구하면
사랑하는 인간들이 죽고 인간을 구하면 아들이 죽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기도를 할까라고 아버지 하나님이 느낄 만큼 애타게 아버지와의 구원을 찾고 있는 기도였어요.
한 번도 아니라 두 번, 세 번째 계속 올라오는 것이.
근데 그 아브라함의 구원을 위해 천사를 보내셨던 그 하나님이 여기서는 침묵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알지? 우리 보고 알지? 아브라함의 기도에 내가 응답해줬지만 아들의 기도에는 지금 침묵하고 있다 생각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은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 기도를 외면하고 있었다고 하는 이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우리는 진짜 희미하게 밖에 몰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께서 아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니까 몰라요.
그 선물이 우리에게 제공됐는데 그 선물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몰라요.
그 큰 구원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 몰라요.
인간은 다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세상에 온 우주에 이런 신은 없어요.
단지 아브라함의 모습과 그 행동을 통해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고민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정오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상상할 수 없는 아들이 고통을 당할 때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고 정말 정말 정말 비참할 정도로 참혹하게
얻어 얻어 맞으시고 등이 막 누더기가 되어서 피를 흘리면서 처절하게 펼쳐져 있는 거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 거야.
하나님 이 세 시간 동안 계속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고 3시간 동안 예수님이 뭘 했는가 하면 시대의 소망에 보면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근데 계속 아버지 제게 응답해주세요.
제발 저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지금도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제게 응답해달라고 내가 이 죄를 지고 있지만 주님 제가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 계속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제가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그 사단의 암시에 시달리면서 계속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근데 아버지는 그 아들 가장 가까이에 내려오셨지만 응답하고 싶어서 데리고 오셨지만 아니 그 바로 앞에 서 계셨지만 끝까지 그 아들의 부르짖음에 끝까지 침묵하고 참고 계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 이런 기도를 비통하게 올리셨죠 끝까지 응답을 안 하시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게 뭐예요
여러분 이게 이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여러분 알아야 돼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까? 하면서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기도를 하시고 주님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
주님이 그래도 나를 사랑하심을 제가 믿습니다.
하고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예요.
예 여러분 근데 이날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 앞에 그리고 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 아들의 가슴 아픈 기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 하늘 아버지의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수많은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준비되어진 이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면 아브라함이 뭔가 너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지정된 장소까지 나무를 메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재단 위에 나무를 쌓고 번제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막 올라가는 거예요.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릴게요.
올라가는 거 계속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셨다는 그 번제할 양 어디 있어요? 아직도 없네요 하면서 막 찾고 있는 이삭에게 다 올라왔는데 그때 아브라함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 여행의 목적을 공개했다고 나옵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은 없는 거 같애 계속 아브라함도 기대했겠죠 뭔가 어디엔가 있을 텐데 아들을 죽이기 설마 죽게 하려고 근데 없는 거 같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들아 진짜 너가 하나님 오늘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희생재물인 거 같아 내가 그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가 바로 게세만의 언덕에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는 그 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응답이었어요.
여호와 일의 어린 양은 너를 위해서는 없다고 다시 말해 너를 위해 피할 길이 없다고 이 얘기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실 때 하늘에서 얼마나 우셨겠어요 그죠? 마찬가지로 이 모리아산 꼭대기에서 이삭에게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막 울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일을 감당해야 되는 아버지만 염려할 뿐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순종하려고 하는 이삭의 모습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거
이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 친구하는 아버지한테 그러나 아버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홉시서 라고 기도를 드리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손을 잡고 결박하 결박하려고 할 때 서로 많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얼마나 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아무도 보지 않고 그 누구도 모르는 그 모리와 산 꼭대기에서 이 죄 지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두 분 마니아는 눈물을 흘리며, 오직 두 분 마니아는 고통을 서로가 바라보며 우시고 있는 이 두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 신앙의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백발의 노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번죄를 들여야 하는 이 순간, 그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칼을 탁 들 때
몇 번을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울었을까요? 어떻게 한 번에 죽일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었을 것 같아요.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내 온 몸과 마음이 이것을 행하기를 거부한다고.
아버지, 어떻게 내가 내 사랑하는 이 아들을, 100세 만에 낳은 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 뿌연 눈으로 아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에 아들아, 이제 안녕이라고 하면서 빼든 칼을 들고 아들을 향해 내리치려고 할 때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달려 내려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막 울면서 하나님도 부릅니다.
그리고 그 팔을 붙들면서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내가 내 아들, 내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내가 내 하나님을 경하노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을 하셨대요.
근데 제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 읽을 때 갑자기 이 이야기는 제게 이렇게 들렸어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 아들에게 탄 하늘에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고 그의 희생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준비된 나의 재물이 있다고
그런데 내가 내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니 이 희생을 하였음 즉 이 희생을 통해서, 이 희생을 통해서 이제야 내가 이제야 내가 너가 미래에 겪게 되는 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가 삼일 동안 겪은 이 아픈 마음이 이제 미래에 겪게 되는 내 마음이라고.
그리고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날 이 모리아산에서 성경 절에는 이거밖에 안 나왔지만 아마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 모리아 산에서 온 인류에게 말씀하시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아, 이 일은 정말 내가 하기 싫은 일이었다.
내 마음이, 내 본성이 너처럼 온 마음으로 거부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너가 내 아들, 내 독자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내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의 고통 앞에 피할 길을 열어달라고 그 기도 소리를 들을 때, 나는 그 기도에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니? 내 아들이 죽어갈 때, 너무나 그 큰 고통 속에서 나를 찾으며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나는 휘장을 가리고 그 앞에 서서 세 시간 동안 그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나를 찾고 있는 그 아들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들을 때 내 고통이, 내 고통도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경의 학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버지 하나님도 함께 죽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돌아가실 만큼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일을 행하게 된 것은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 요한복음 삼장 십육 절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러분 이처럼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 끝없이 명상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니라.
여러분 성부 하나님은 당신께서 세상을 이처럼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모두가 꼭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시험의 끝에 이 백발의 노인이 비로소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산꼭대기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이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죠?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으면 그냥 우리가 눈물만 흘리고 감동받고 끝나나요? 그렇지 않고 저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이런 엄청난 사랑을 깨닫고 난 후에 온 산이 떠나가라 하면서 아마 이런 고백을 부르지셨을 거예요.
하나님 저를 용서해달라고 제가 회개한다고 다 나의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하나님 제가 더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한다고 하는 이런 회개의 깊은 어떤 그런 기도를 드리고 아마 내려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스가랴서 십이장 십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좀 띄워주세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마지막 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면 성령을 부어주시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인에게 은총과 강구하는 성령을 부어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겠죠 로마서 오장 오 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게 돼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독자를 잃은 슬픔과 장자를 잃어버린 애통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근데 이 독자를 잃어버린 애통과 그 슬픔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고 하늘 아버지의 슬픔이잖아요.
독자를 잃어버린 고통 장자를 잃어버린 슬픔이 누구의 슬픔이고 누구의 고통이에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고 하늘 아버지의 슬픔이에요 고통이고 근데 이 슬픔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예 그리고 그 하늘 아버지의 독자를 잃은 그 애통과 그 슬픔이 우리에게 담기게 될 때 그 애통과 슬픔은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에 대한 애통으로 이어지게 되어서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슬픔이 죄를 씻는 회개의 삶을 열게 한다고 하는 거예요.
예 여러분 그래서 아마 아브라함은 이 모리아 산 꼭대기에서 그날 내려오지 못하고 아마 오래오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울고 또 울었을 거라고 제가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브라함은 이제 번제를 드리게 되는데 이 번제의 재물이 바로 뭐예요? 이삭을 살리기 위해서
다 루이어지는 거예요. 이삭을 살리기 위해 마련하신 그 여호와 일에 어린 양을 드리게 되는 거예요.
그때 그는 비로소 이 양을 잡으면서 이 여호와 이래의 어린 양의 의미를 아주 깊이 깨달으면 또 한 번 그 예식 하나하나를 하면서 어떻게 할까 또 울었을까요? 이게 바로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나를 위해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그 표상하는 거 이게 어떤 의미라고 하는 걸 깊이 깨달았을까?
여러분 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 말로만 들어왔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보고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가 알게 되면 이 사랑해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된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기를 소망하게 돼요.
이 사랑을 아는 것, 이 사랑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십칠장 삼절에서 말하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으로 체험으로 그 마음을 아는 거예요.
그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이, 이 마음이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아브라함이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십자가가 세워진 모리아 산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만난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꼭 이 동산에서 우리의 마음이 모리아 산으로, 나아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가 꼭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 때문에 이제 주님을 위해 기쁘게 희생하고, 그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겨내고, 그 사랑 때문에 참아내고, 그 사랑 때문에 헌신할 수 있는 참 복음을 소유한 자가 경험하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이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 모두가 꼭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하늘 아버지 오늘 창세기 이십이장을 통하여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고자 하시고 또 보여주고자 하셨던 그 성부 하나님의 그 놀라운 희생,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계신지 그 마음을 우리가 희미하게 남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성령을 더 많이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주님 우리가 구하게 하여 주셔서 그 사랑을 아는 사람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그 어떤 것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할지라도
주님,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계명이 절대 무거운 것이 되지 않고,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기 문에, 주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러한 참 그리스도인이 오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더 많이 구하게 하시고 더 간절하게 구하게 하여 주셔서 참으로 순종이 어려워지는 이때, 수만가지의 시험이 닥쳐오는 이때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더 큰 용기를 내기 위해 주님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계속 조명하여 주셔서 어린 양과 함께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갈 수 있는 마지막 시대
주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울러 이곳에 참여한 우리 모든 분들에게 주님 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고 이 사랑을 꼭 마음에 담고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 마음에 더 큰 치유의 능력이 경험되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