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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스크랩 김형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왜 살해된걸까요?
이상진 추천 0 조회 58 06.07.04 15: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형욱이 양계장에서 살해됐다는데...
김형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왜 살해된걸까요?
  김형욱, 김형욱 사건의 풍문과 사실
답변자: khi4040 (채택율:76.54) | 05/04/11 11:53 신고하기
김형욱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그후 중앙정보부장직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가서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을 반대하는 반한국적인 발언등을 해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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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형욱
출생 :  1925년 1월 16일
학력 :  경희대학교대학원 석사
경력사항 :  최고회의 최고위원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
제8대 국회의원
 
특이사항 :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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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사건/ 풍문과 사실
현정권이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뒤로, 특히 김형욱(金炯旭) 실종사건이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다투어 김형욱 사건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대부분 보도는 이 사건을 둘러싼 설(說)과 소문을 재탕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에 접근하려 했던 과거의 취재 성과조차 반영되지 못한 보도도 눈에 띄었습니다.

가령, 김형욱의 며느리(미국체류) 말을 인용해, 김형욱의 실정은 파리주재 공사였던 중앙정보부 간부 L씨가 관계되어 있고 김형욱은 청와대로 끌려와 살해됐다는 등의 단정적 보도가 그렇습니다. 이는 사건 당시 떠돌던 여러 풍문을 토대로 한 일본 소설가의 작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거에 떠돌았던 풍문들이 사실인양 지금의 언론매체에 아무런 검증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형욱 사건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은 -목격자조차 없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미스테리한 사건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야심만만한 기자들로 하여금 그 실체를 파헤치도록 유혹합니다. 저는 1994년(입사 7년 시절) 이 사건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월간조선에 약 250매의 추적기사를 썼습니다. 당시 이 사건과 관계있는 인물들을 거의 만났고, 그 중에는 앞서 말한 문제의 중정간부 L씨도 포함돼 있습니다.

김형욱 사건이 요즘 언론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저는 그 시절에 썼던 심층취재 기사를 다시 읽어보게 됐습니다.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이는 지금은 떠나간 제 젊은 날의 열정을 봤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마치 백사장에서 사금을 가려내듯 풍문 속에서 사실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애쓰던 그 모습은 참으로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세월 갈수록 굳어지는 미스터리
[파리=신용석(愼鏞碩) 특파원]  미국에 거류중인 김형욱 前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에 여행 중 1주일째 행방불명이다. 김형욱씨는 2주 전 파리에 도착, 처음 투숙했던 호텔에서 샹젤리제 소재 웨스트 엔드 호텔로 옮겼으나 짐만 갖다 놓은 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15일 밝혀졌다.

미국에 있는 김씨의 가족들도 그의 행방을 알기 위해 파리에 있는 친지들에게 문의중이나 아직 행방을 알아내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고 한다. 주불(駐佛) 한국대사관에서는 이날 파리 경찰당국에 金씨의 실종 여부에 관해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다.(朝鮮日報 1973년 10월16일字)

김형욱 前중앙정보부장의 실종은 이렇게 해서 처음 세간에 알려졌다. 실종됐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라는 실종의 내용물은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

역사적인 미스터리 사건은 대개 두 갈래 상반된 행로(行路)를 걷는 법이다. 세월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와 정반대로 세월이 갈수록 더욱 미스터리가 화석(化石)처럼 완결되어가는 경우로 나눠진다. 15년 전에 발생했던 김형욱 실종사건은 후자의 경우였다.

그 실종 사건이 미궁과 풍문 속으로 들어가게 된 데에는 우선 발생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김형욱이 실종된 뒤 20일쯤 지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 사건)을 맞게 된다.

이 기묘한 타이밍은 김형욱 사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랄 수 있는 朴 대통령 시해 사건의 소용돌이는 김형욱 사건을 한 동안 삼켜버림으로써 그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추적을 중단시킨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은 10?26 trjs이 김형욱에 대한 대척점에 섰던  것으로 알려져왔던 박정희, 김재규(金載圭), 차지철(車智澈)이라는 인물을 역사 속으로 데리고 갔다는 점이다.

반정부 발언을 하던 전직 중정부장인 김형욱이 파리에서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실종됐다는 것은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다. 누구나 이 사건을 화제 삼을 수 있고, 나름대로 점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생 당시만 해도 이 사건을 둘러싼 추리는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오작교(烏鵲橋) 작전
이 사건이 극적인 인과구조를 가진 스토리로 구성된 것은 사건 발생 후 한 해가 지나면서였다. 1981년 초 일본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月刊文春’이 처음으로 이런 역할을 했다. ‘오작교(烏鵲橋) 작전/김형욱은 박정희에 의해 살해됐다’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몰래 떠도는 김형욱 실종 공작의 극비 문서를 입수했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한국 중앙 정보부는 김형욱이가 집필하고 있는 회고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2백만 달러를 약속했다. 그 돈은 스위스 은행을 통해 지불토록 하되, 파리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朴相悅 공사가 심부름을 맡았다.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李 공사는 김형욱을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李 공사는 김형욱을 유인한 다음 마취 주사를 놓아 KAL 화물편으로 서울에 보냈다. 김형욱은 청와대 지하실로 끌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직접 권총으로 살해했다.

한편의 소설 같은 이 기사(일본의 한 소설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짐)는 김형욱 실종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열흘쯤 뒤에는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가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무기명으로 개제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기사가 전혀 사실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르몽드紙에 반론을 싣기도 했지만 이미 세간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난 뒤였다. 국내의 어느 잡지에서는 한 술 더 떠서 김형욱이 서울로 끌려온 뒤 잠시 플라자 호텔에 모습을 나타냈다라고 싣기까지 했다.

사건 발생 후 15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김형욱 실종 사건에 둘러싼 풍문을 화석(化石)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던 셈이다. 그 풍문들은 약간씩 구성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김형욱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과연 김형욱 실종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의 사실 여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중정(中情)의 공작이라면 당시 파리 대사관 공사인 이상열(李相悅)은 무엇이든 대답해야 할 입장에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파리 현지 정보책임자였다. 세간에서는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가담했거나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그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존 인물로 그를 첫 번째로 꼽아왔다.

하지만 그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줄곧 함구했고 언론 매체와의 접촉을 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의 침묵은 오히려 김형욱 사건에 그가 연루됐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그런 연유로 지금껏 김형욱 실종 사건을 다뤘던 대다수 기사들의 결론은 ‘이상열씨가 입을 열어야 한다’는 식으로 끝맺기가 일쑤였다. 

이상열씨를 만나기까지 
이상열씨에게로의 접근이 어려웠던 데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는 파리 대사관 공사직을 마친 뒤 1980년 이후로는 버마 대사, 리비아 대사, 이란 대사직을 맡아 외국에서 쭉 생활해왔다. 1994년 4월, 이란 대사를 마지막으로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공직에서 물러난 그를 만나는 것도 여의치는 않았다.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그는 늘 외유를 하고 있거나 지방에 내려가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6월 어느 날 밤늦은 시각 그가 직접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가 수차례 왔다는 것을 전해들었지만 경황이 없어 답신을 못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7월6일 여의도 맨하탄 호텔에서였다. 한동안 세상 잡담을 나누다가 김형욱 실종 사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만나자고 한 목적이 이 사건 때문이었소?.”라고 그는 물었고, “김형욱 사건만큼 현장에서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은 미스터리는 드물다. 솔직히 기자로서 궁금증을 억누를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잠시 시선을 고정한 채 “나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일로 인해 내가 누명을 쓰고 있다. 난 피해자다..”라고 말했다. ‘피해자’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사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의심합니다. 아마 우리 자식들도 애비에게 차마 묻지는 못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오래 살아서 저를 잘 아는 제 처(妻)가 유일하겠지요. 제 자식까지 애비에 대해 내심 의심스런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상념이 들면 서글퍼집니다.

저는 44년 동안 정보 전문가로서 직업의식을 갖고 국가를 위해 활동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주위로부터의 의심스런 눈입니다. 언젠가 어느 시사 잡지에 실린 김형욱 사건 기사를 보고서 더 이상 참지 못해 정식으로 항의하려고 했습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내용을 너무나 터무니없이 써놓았어요.

그런데 제 동료가 말렸습니다. ‘항의하고 해명해봐야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는가. 정보인의 숙명이라고 여기자’라고 달래더군요. 그래서 그만두었습니다. 기자가 사건에 대해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상상력 때문에 음지에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저에 대해 떠들어도 상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李 선생께서 그 사건에 관여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 파리 현지 정보 책임자로서는 무엇인가 해줄 이야기는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만났으니까, 다음에 적당한 기회가 있으면 그때로 미룹시다..”
두 달 보름쯤 지나서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두 번째 만났다.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김형욱 사건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崔 기자가 취재하는 데 무슨 도움되는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여기로 오면서 내내 생각했는데 그런 게 없어요..”라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 사건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는 것이거든. 그렇다고 사실로 검증되지 않는 내 개인적인 추리를 늘어놓을 수도 없지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실종된 날 김형욱을 만나지 않았다..”
-김형욱씨가 실종되기 직전 파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데 10월 5일쯤 같아요(기자 注: 김형욱의 실종 날짜는 10월 7일). 그때 아마도 파리 특파원,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카지노가 딸린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2층에 金부장이 와 있다.’고 말해 올라갔습니다.

어쨌든 전직 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인사를 했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나눈 게 없습니다. 그때 金씨는 돌아보지도 않고 저리 가라는 손짓을 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우리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저도 그가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터라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마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명색이 정보기관의 부장까지 지낸 사람인데 파리에 와서 우리 중정 직원들에게 촌지 한 번 건넨 적이 없고 식사 자리 한 번 마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카지노에서는 수백 달러씩 돈을 뿌리니 더욱 그렇지요..”

- 그 뒤로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김형욱입니다..”

-김형욱은 정보기관에서 감시를 늦춰서는 안 될 요주의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국내로부터 김형욱의 동태를 감시하라는 지침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정보부는 상부로부터 어떤 지침이 없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는 룰이 있습니다. 제가 파리에 주재한 동안 김형욱을 서너 차례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파리에 와도 우리 대사관으로 연락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인 신용석씨의 부인(작고)과 몹시 친했습니다. 그 부인이 모는 승용차를 타고 쇼핑이나 관광을 했습니다. 저는 주로 김형욱의 파리 도착 사실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가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의 행적을 일일이 체크하지는 않습니다. 국내에 보고는 합니다만 어떻게 하라는 지침도 없었기 때문에 감시나 미행을 한 번도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실종되기 석 달 전인가, 김형욱이가 파리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샹젤리에 거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저에게 ‘윤일균(尹鎰均?당시 중정 해외차장)에게 연락이 없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없었다’라고 했지요. 김형욱이가 국내에 있는 윤일균(尹鎰均) 차장으로부터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중요한 정보라고 여겨 국내에 이 사실을 전보로 알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첫째 룰은 필요 이상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그가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라인을 통해 그를 체크하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이 대목은 추리의 단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만 말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행적 보고를 국내에 한 적이 있었지만 별다른 지침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말 골프장에서 金의 실종을 처음 전해 들어
- 김형욱의 실종과 직접 상관이 없었다면, 그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처음 어떤 경로로 알게 됐습니까?
“그때가 아마 주말(기자注=당시 달력을 확인해 보니 10월13일이었는데, 나중에 그는 10월9일 한글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음)이었을 겁니다.
파리에 있는 교민들과 대사관 직원 7~8명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습니다. 골프 치는 중간에 누군가가 대사관으로 연락을 했던 모양인데,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에게서 제 부하인 H참사관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H참사관이 그녀와 통화를 했는데, 김형욱씨가 어디 갔는지 그 가족이 찾고 난리다, 혹시 아는 게 없느냐고 물어요. 통화한 장소가 골프장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통화하게 된 경위는 분명합니다.

그때 처음 김형욱의 실종을 들었던 셈입니다. 솔직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며칠 안보인다고 해서 실종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디 갔다가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했지요. 이틀 뒤인가 국내에 전문으로 보고했습니다.

-국내로부터 어떤 지침을 받았습니까?
사건 경위에 대해 알아서 보고하라,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의심 사지 않게 활동하라는 지침을 받았습니다.

-그 지침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합니까?
이 사건에 대해 깊숙이 관여해 쓸데없이 오해받는 일을 피하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사건 개요와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선에 그치고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어 추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겠지요. 사실 추적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더라도 해외주재 요원의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단순히 정보 보고 차원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파리 현지 中情 책임자란 직책
-그 뒤 국내로부터 후속적인 지침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아마 국내로부터 중요 사안이라는 지침이 떨어졌더라면 좀 더 신경을 썼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겁니다. 어차피 수사는 프랑스 경찰과 정보기관에서 하는 것이고, 우리로서는 수사 진척 상황에 대해 얻어 듣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실종 직후 김형욱씨 가족이 파리로 건너와 李선생이 실종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다면서 만나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요. 내가 중정에서 파견된 파리 지역 정보책임자였다는 단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그 직책 때문에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때 金씨 가족들을 만났습니까? 일부러 피했다는 설도 있더군요.
일부러 피한 게 아니고… 입장이 곤란했습니다. 제가 관여한 것도 아닌데 그 사건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 해줄 수 있겠습니까. 가족을 만나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슨 큰 비밀을 숨기는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정보인으로서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추리해 말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만나면 만나는 대로 곤란하고, 안 만나면 안 만나는 대로 곤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 만났습니다. 아마 그 가족은 파리 대사인 민병기(작고)씨를 만나 ?李공사가 의심스럽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閔대사로부터까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金의 실종 뒤 런던에 갔던 경위
-金씨 가족들이 李선생을 의심하는 것은 어쩜 크게 어긋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그 당시 누구라도 파리에서 발생한 김형욱 실종 사건의 진상을 알 만한 위치에는 파리 현지 중정 책임자보다 더 적격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바로 그 직책 때문에 입이 열이라도 저의 무관함을 밝히기 어려울 겁니다. 당시 대사관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조차도 아마 제가 이 사건에 연루돼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릅니다.

-李선생께서는 실종 사건을 전후로 해서,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런던에 건너갔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행적도 오비이락(烏飛梨落)격입니다. 하필 그 시점에서 왜 런던에 갔던 것일까요. 세간에서는 李선생의 런던行을 김형욱 실종의 공작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런던에 언제 갔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김형욱의 실종 전이 아니라 실종 소식을 듣고 난 뒤에 갔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런던에 갔던 것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현지 정보 책임자로서 실종 사건의 와중에 그 현장을 비웠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까 말했지만 우리는 그 사건을 수사하거나 추적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경찰을 통해 수사 진척 상황을 얻어듣는 쪽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과연 실종인가 아닌가도 뚜렷하지 않았고, 또 국내로부터 특별한 지시도 없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 매여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런던에는 누구를 만나러 갔던 것입니까.
그는 이 질문에 곤혹스러워 했다. 처음에는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기자의 질문이 되풀이되자 그는 마지못해 응했다.

서울서 손님이 왔어요.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서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런던에 가기 전에 아마 국내에 출장보고를 했을 겁니다.

-李선생께서 런던까지 가서 접대를 했다면 서울서 오신 분은 상당한 신분을 지녔거나 특정 기관에서 나왔을 것 같군요. 게다가 하필 그 시점에 서울서 왔다면 어떤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이 사건과는 무관해요.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참, 이걸 말해야 하나… 그때 온 사람은 김재규 부장의 친척입니다.

-그렇다면 더 절묘하지 않습니까. 김형욱 실종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던 김재규 부장이 그 시점에 친척을 런던으로 보내 李선생을 만나게 한 것은 좀 더 명확히 해명되어야 합니다. 李선생께서는 그 만남이 김형욱 실종 사건과 무관하다고 여겼지만 李선생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만남이 실종 사건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됐던 것은 아닐까요? 가령 李선생께서 런던으로 간 것이 실종 사건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돌리는 바람잡이 역이 됐다든가 말입니다. 사실 李선생께서 실종 사건과 관련해 가장 의혹을 사게 됐던 대목중 하나가 바로 런던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해야 하나… 저는 당시 김재규 부장의 동생인 김항규(金恒圭)씨를 만났습니다(기자注=그는 나중에 ‘김항규씨가 직접 런던에 왔던 게 아니라, 김항규씨가 보냈던 친척을 만났다’고 정정했다).

김항규씨는 연세대 동문이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가까웠던 친구였어요. 둘이서 술집 순례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는 건축 사업을 했고 정보계통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당시 런던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희미합니다만 물론 김형욱 실종건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이미 런던에서도 그 사건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국내 사정이 궁금했기 때문에 국내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항규씨는 10?26 사건이 난 뒤로 불가에 몸을 담았는데 이런 얘기로 그를 입에 올린다는 게 어찌 됐든 누가 될 것 같아 삼갔던 것입니다.

유학성 안기부장 앞에서 사건 연루 여부를 해명
-그 시점에 김항규씨든, 혹은 그 친척이든 간에 실종 사건의 현장과 근접한 런던에 왔다는 사실은 순수하게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김재규 부장의 밀명이 주어졌던 게 아닐까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친구 간에 있을 수 있는 만남입니다.

-실종 사건이 있고서 프랑스 경찰의 조사에 응한 적이 있었지요. 외교관 신분으로는 그러한 조사에 응하지 않아도 무방한데, 그때 조사에 응했던 것은 스스로의 판단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국내의 지침에 의한 것이었습니까?

프랑스 경찰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프랑스 경찰 입장에서는 외국 여행자가 자신의 나라에 와서 실종된 것 아닙니까? 자국민도 아닌 한 외국인의 실종 때문에 애를 먹고, 우리로서는 자국민이 외국에서 실종됐기 때문에 손을 놓고 있는 입장이었지요. 또 우리 정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 괜한 의심을 살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협조를 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경찰에서 어떻게 진술했습니까?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껏 말했던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 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로 우리 정부 기관에 의해 혹시 이 사건과 관련해 조사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10-26 사건이 발생하고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정부가 들어선 뒤 내부적으로 조사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형욱씨의 가족이 우리 정부에 저를 사건의 주모자로 모는 진정서를 수차례 올렸기 때문입니다. 유학성 안기부장이 저를 불러 당시 사건과 관련해 연루 여부를 해명하라고 하기에 진술했던 적이 있습니다.

-김형욱 실종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대략 1979년 10월7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0일쯤 뒤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랄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시해사건 이틀 뒤인 10월28일 李선생께서는 서울로 급히 귀경했습니다. 하필 그 역사의 분기점에 서울로 들어왔는가에 대해 항간에서는 별별 추측들이 많았습니다. 왜 10월28일 급거 귀국하게 됐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추측이란 이런 경우에는 정말 우습군요. 저는 그때 귀국 명령을 통보받고 들어온 겁니다. 그는 말을 아끼려고 했다.

-10-26 사건이 발생한 직후 귀국 명령을 받았습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 왜 귀국 명령이 떨어졌습니까?
시해사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김재규의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맡은 보안사(정확히는 합동수사본부)에서는 중앙정보부의 국장급 이상에 대해 조사를 벌였습니다. 아마 해외에 나가 있는 국장급 중에서도 김재규 부장과 친한 이들도 소환됐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재규 부장과 인연이 많았습니다. 그가 3사단 부사단장 시절에 저는 부관을 했고, 보안사령관에 재직할 때는 보안사에 있었거든요. 게다가 동생인 김항규씨가 제 친구이지 않습니까.

10-26 사건 직후 귀국한 까닭
그가 합수부의 조사를 받기 위해 귀국 조치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차이가 있었다. 10.26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 간부를 연행해 내란음모와 관련해 조사를 벌인 합수부 수사국장이었던 이학봉(李鶴捧)씨는 해외에 나가 있던 간부들은 연행 조사의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당연히 우리가 이상열씨를 소환했던 적도 없고 조사한 적도 없었다고 했다.

기자는 보름쯤 지난 뒤 전화로 이 대목을 다시 확인했다.

-10-26 사건 직후 어떻게 해서 귀국하게 된 것입니까?
시해 사건이 있은 다음날 귀국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누구로부터 그 지시를 받았습니까?
중정 비서실의 한 과장이었습니다.

-어떻게 국장급이 비서실 과장의 지시를 받습니까.
그 과장은 누구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고 제게 통보를 했던 것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라고 물었지만,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짐을 꾸려 들어왔습니다만 저도 솔직히 귀국하는 동안 내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왜 보안사쪽의 소환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우리 직원이 나와 워커힐 호텔에서 24시간 대기하라고 통보했습니다. 하루를 대기한 뒤 남산 중정(中情)으로 갔습니다. 동료들이 저에게 이 험한 시기에 어떻게 해서 들어오게 됐느냐고 물어요. 나도 어리둥절했습니다. 당시 중정(中情)은 보안사에서 파견된 감독관들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한 감독관(소령)이 저를 불러 약식조사를 했어요. 그래서 보안사쪽에서 소환시켰던 것이구나 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보안사에서 파견된 감독관으로부터 어떤 조사를 받았습니까?
조사 받은 내용까지 말해야 합니까?

-李선생을 그 시점에서 왜 소환했느냐는 것은 궁금한 대목입니다.
“그 때 조사는 10-26 사건 전에 김재규로부터 무슨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느냐‘, ’중앙정보부에는 어떤 경위로 들어가게 됐는가라는 등 김재규와의 관계를 알아보는 쪽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형욱 사건과 관련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는 식의 질문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상열씨가 10.26 사건 직후 급히 귀국한 데 대해 항간에서는 두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그가 김형욱 사건의 비밀을 지킨다는 담보로 신군부쪽에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왔다는 소문과 다른 하나는 신군부쪽이 김형욱 사건의 비밀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본 그를 관리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신군부가 권력 주체로서 전혀 부각되지 않은 10?26 직후의 상황(기자注=신군부가 권력의 주체로 나타난 시점은 12-12 사건 전후였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데서 비롯됐던 것 같다.

현금을 노린 범죄 집단의 소행은 아닐 것
-당시 중정의 국장급들은 그때 옷을 벗었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진급이나 보직 등에서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李선생께서는 전주 지부장으로 나갔고 뒤이어 본부 해외국장, 미얀마대사 등으로 평탄하게 진급했습니다.

어떤 각도에서는 유신(維新)체제를 이은 5공화국이 李선생을 보호-관리해준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자세한 배경까지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李선생께서 김형욱 사건을 공작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추측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당시 중정의 동료들에 비해 잘 풀린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보안사 시절 노태우 前 대통령과는 함께 근무했던 적이 있는데 그분과 매우 친했습니다. 그때 보안사로 전두환 前 대통령 등 육사 11기들이 자주 놀러와 같이 어울렸습니다. 그런 인덕을 본 것입니다.

-김형욱 실종을 둘러싼 여러 루머 중에는 단순히 현금을 노린 범죄 집단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현지에 있었던 입장에서 이 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형욱씨는 카지노를 할 때 늘 현찰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가 카지노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달러 뭉치를 호주머니마다 불룩하게 넣고 다녔습니다. 누가 봐도 현찰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뒷골목 마피아가 현찰을 노려 金씨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알다시피 카지노의 마피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객을 보호하는 나름대로의 관례가 있습니다.

세간의 추측에는 허점이 있다
-그렇다면 김형욱의 실종에는 우리정부 공권력이 개입됐다는 것입니까?
저 역시 이 실종 사건의 진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쪽입니다. 정부 공권력이 개입됐는지 안 됐는지 제 자신조차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추리를 늘어놓을 입장이 못 됩니다. 분명한 것은 파리 현지의 중정 요원들은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중정이 이 사건을 공작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파리 현지의 중정 직원들 모르게 별도의 라인(秘線)으로 공작을 진행할 수 있습니까?
가능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별도의 라인이 존재했느냐 여부를 떠나 외국에서 그러한 공작을 한다는 것은 양국간의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주권 침해 행위입니다.

과거 동백림 사건이나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예에서 보듯이 비밀리에 공작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도 장담을 못합니다. 그러한 위험 부담을 안고서까지 과연 정부 공권력이 김형욱의 납치에 개입해야 했느냐, 납치를 선택할 만큼 절박했느냐는 점은 의문입니다.

세간의 믿음에는 또 다른 허점이 있습니다. Why only Paris?(왜 오로지 파리냐?). 김형욱 실종 사건이 파리에서 발생했다는 전제부터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金씨의 마지막 모습이 파리에서 목격됐다는 점 때문에 그가 파리에서 납치나 실종됐을 것으로 추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사건 이후로 지금껏 파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한점 물증이라도 나와야 하고 목격자도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비행기만 타면 1시간 안에 국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金씨가 다른 지역에서 납치나 실종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정부 기관에서 현지의 마피아를 통해 청부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루머도 떠돌았지요.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이 미스터리이니까 가능한 한 해볼 수 있는 추측은 해보는 것이겠지요. 청부 살인을 가정했을 경우 프랑스 현지의 마피아와 줄을 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미국에서부터 따라붙었다는 게 더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김형욱 사건과 관련해 눈총을 받는 입장이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나름대로 추리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발설하기는 어렵습니다.

파리에 있을 당시만 해도 저는 김형욱의 회고록을 둘러싸고 우리 정부와 빚어진 불협화음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국내로 들어와 본부 해외국장을 맡았을 때 비로소 우리 정부가 김형욱씨에게 회고록 원본을 받는 조건으로 우선 50만 달러를 지급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돼 일본에서 그 회고록이 일본어로 출판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증언의 진실?
李씨와 만나고 돌아온 뒤로 기자는 심한 몸살에 시달렸다. 평소 과음으로 몸을 혹사했던 게 원인이었겠지만, 김형욱 사건 취재와 관련해 李씨에 쏟았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그것이 몸살로 나타난 게 아닌가라는 별난 생각도 들었다.

‘그가 입을 열면 김형욱 사건은 풀린다.’는 세간의 정설(?)을 李씨는 기자가 보는 앞에서 거부해버렸던 것이다. 그는 과연 김형욱 실종 사건과 무관한 것일까, 또 기자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은 진술에는 과연 크게 거짓이 없었을까?

그와 장시간 만나서 이야기해 본 기자와 개인적 소견으로는 그가 거짓을 꾸며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자신이 보고 들었던 대목에 한해 진술하려고 애쓰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가 정말 노회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기자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기자로서는 김형욱 사건과 관련해 가장 의심받던 인물의 일방적인 자기변명을 사실인 것으로 공인해주는 역할을 맡는 셈이 된다.

며칠간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러 취재원을 통해 검증한 뒤 기자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李씨가 김형욱 실종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역 정보책임자인 그가 그 실종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10월7일 서울 퍼시픽 호텔에서 그와 세 번째로 만났다.(*)

김형욱 사건의 코드 네임은 ‘K2’/풍문과 사실사이②
전편에서 오기(誤記)가 몇 개 눈에 띄었습니다. 입력과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첫째, 신용석 특파원의 기사는 1973년이 아니라 1979년입니다.
둘째, 오작교 작전이 실린 매체는 월간문춘이 아니라 주간문춘입니다.

전편에 이어 후속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기자와 취재원과의 관계
10월7일 서울 퍼시픽 호텔에서 이상열씨와 세 번째로 만났다. 저녁 시간대였다. 그는 이날 오후 경기도 이천에서 전임 대사들간의 친목 골프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을 끝내고 서울의 중심가로 들어오느라 무척 애를 먹었던 것 같다. 약 1시간을 기다리다 일어나려는데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다. 그는 앉자마자 맥주부터 주문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은 기자에게 전의(戰意)를 돋구기보다는 인터뷰 작업에 대한 감상적인 회의에 젖어들게 했다. 말문은 이런 식으로 열렸다.

“지금껏 기술된 역사에서 과연 진실의 비율은 얼마쯤 될 것 같습니까? 역사가 권력을 가진 자의 시각으로 쓰여져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사를 작성하는 실제 작업 과정에서 그런 상념이 드는군요. 기자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취재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사를 쓰기 위해 그 사건에 가담했던 취재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취재원은 대개의 경우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흘리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감출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 기자는 정보를 감별하는 능력을 소유했다기보다는 그런 정보를 준 취재원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겠지요?”
그는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내가 여기로 나온 것은 崔기자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왜 만나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崔기자는 김형욱 사건 때문이겠지만 나는 단지 만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나왔다”고 말했다. 그가 맥주를 두 병 비웠을 때 기자는 며칠 동안 심중에 가둬둔 말을 직설적으로 꺼냈다.

“이선생도 피해자라는 말은 인정합니다.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주장만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좀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칵테일 바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기자는 지난번 그와의 인터뷰에서 석연치 않았던 부분에 대해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김형욱과 통화한 적 없다.”
-이선생께서는 김형욱이 중정 부장이었던 시기부터 절친한 관계였다고 하더군요. 1960년대 초 ‘원충연(元忠淵) 대령 반혁명 사건’이 났을 때 그 모의 단계에서 김형욱 부장에게 직보했던 이가 이선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이선생께서는 김형욱의 총애를 받았고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관계로 이선생께서는 파리 대사관 공사시절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충연 사건을 밀고하기 위해 제가 김형욱을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밀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사건으로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살아왔습니다. 제가 죽을 때쯤 회고록을 남기게 될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원충연 사건에 대해서는 그만 합시다.

다만 그 사건으로 김형욱을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그와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제가 김형욱을 만난 것은 1966년 월남 보안부대장으로 파견나가 있었을 때인데 중정부장인 金씨가 방문 와서 인사했던 게 처음입니다.

한해 뒤인 1967년 일시 귀국하니 유병현(柳炳賢) 맹호부대장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볼 게 있다며 김형욱이 남산으로 불렀습니다. 김형욱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가 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상반된 증언
 -김형욱이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 그와 통화를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형욱씨가 파리에 날아가기 직전 이선생과 통화를 했던 기록이 있다는 군요.
“천만에요. 저는 미국에 있는 김형욱씨와 통화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기록이 있다면 갖고 와 보세요.”

김형욱의 회고록을 대필했던 김경재(金景梓: 전 민주당의원)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뉴저지주 소재 벨 텔리폰 회사에서 김형욱의 집으로 청구한 영수증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고 했다.

기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미국에 있는 김형욱씨 부인인 신영순(申英順)씨의 집으로 열흘 동안 하루에 두 차례씩 국제 전화를 걸었다. 첫 통화에서 누군가가 받고서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다음날 지정된 시간에 걸었으나 전화자동응답기를 설치해 놓은 뒤였다. 기자는 여러 번 전화자동응답기에 메모를 남겨두었으나 결국 그녀와 통화를 하는 데 실패했다.

-김형욱씨가 실종되기 전에 문제의 회고록 원고를 일부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국내로 들어온 뒤 봤습니다.”

-1979년 봄쯤 김형욱은 평소 취재관계로 친분이 있던 파리의 한 언론사 특파원에게 회고록 원고의 일부인 2백여 매 분량을 보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특파원은 反정부 내용을 담은 이 회고록 원고를 읽어본 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파리 대사관 참사관인 H씨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H씨가 이 원고를 들고 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H씨의 직속상관인 이선생께서 이 원고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정말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회고록의 내용 일부를 읽고서 김형욱을 파리로 끌어 들였다는 추리가 되는 것인데, 그 특파원이 그런 원고를 갖고 있었다는 소리도 처음 듣고 부하였던 H씨가 그 원고를 갖고 왔다는 것도 금시초문입니다.”

-만약 H씨가 그 원고를 갖고 왔다면 이선생께 보고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처리했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가 원고를 입수했다면 제가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기자는 취재 당시 해외공관에 파견돼 있던 H씨와 국제통화를 했다. 그는 “현직에 있는 입장에서 국제 전화상으로 사사롭게 말하기 곤란하다. 우리 회사(안기부)를 통해 정식으로 질의 공문서를 보내오면 언제든지 솔직하게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기자는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래서 기자가 질문하는 두 가지 쟁점에 대해 그가 ‘예스, 노’만을 밝히는 식으로 했다.

-1979년 봄 김형욱(金炯旭) 회고록 원고 일부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노”

-당시 파리의 한 언론사 특파원은 그 회고록 원고를 당신이 갖고 갔다고 말했다.
“노. 정말 없다. 그가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한다면 나를 명예 훼손하는 것이다. 전화상으로 긴 이야기는 못하지만 나는 회고록을 진짜 본 적도 없다.”

-그 특파원이 사실에 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것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공개적으로 그렇게 주장했다면 법적 대응을 해서라도 명예를 회복하겠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특파원은 왜 당신을 지목해 그런 주장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인 것 같다. 그가 고의적으로 그랬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마 기억에 착오가 있을 것이다. 공무원은 발령이 나면 근무지로 가는 법이다. 실종 사건이 났을 당시 내가 파리에 근무했다고 해서 그 사건과 관련지어 보면 안 된다. 계통을 밟아 질문서를 보내면 항상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이번에는 당시 파리대사관에서 이상열 공사의 부하였고 H씨의 선임이었던 최용찬(崔容燦)씨에게 회고록 원고 일부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崔씨 역시 “그런 원고는 결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들의 답변을 듣고 그 특파원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는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입장이겠는가”라고 답변했다.

“난 이미 누명을 쓸 대로 쓴 사람이오.”
다시 이상열씨와 만나는 자리로 돌아온다.

-김형욱 실종 사건이 중정의 다른 비선(秘線)조직에 의한 공작이었다면 그 현장의 정보 책임자인 이선생께도 당연히 통보를 하겠지요. 가령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공작팀은 국내에서 건너가고 주일 공사였던 김기완(작고)씨에게는 통보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게 상식이겠지요. 만약 김형욱 사건이 중정의 공작이라면 이런 점에서도 공작의 상식을 벗어난 겁니다. 그러므로 중정의 공작이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이 중정 조직이 동백림 사건이나 김대중 납치사건 때의 쓰라린 악몽을 떠올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형욱 사건은 어느 쪽의 소행이라고 봅니까?
“그것은 구름 위에서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감(感)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보인으로서 그 확인되지 않은 감(感)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자와 정보인의 업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기자는 자신이 얻은 정보를 밖으로 내놓는 과정에서 유추하고 과장하는 편이지만 정보인은 불확실한 것을 외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겠습니다. 답변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좋지만 거짓으로는 답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그는 승낙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선생께서는 김형욱 실종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직업 윤리상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정말 알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껏 말했던 내용은 거짓이 없습니다. 저는 김형욱 실종 사건으로 이미 누명을 쓸 대로 쓴 사람입니다. 이제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 와서 崔기자를 만나 사실도 아닌 말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포위하듯이 취재하고 있더군요. 보니까 제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많은 정보를 얻었더군요. 솔직히 호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진심을 崔기자에게 털어놓은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상관은 않겠습니다.”

그의 진술에 반증할 만한 자료를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기자가 당했거나 그의 진술이 옳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현장에 근접해 있었던 중정 책임자가 그 사건에 대해 몰랐다는 주장만큼은 한 번 더 검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현지 중정(中情) 직원의 알리바이
당시 이상열씨와 함께 파리대사관에 파견돼 있었던 다른 중정 직원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그때 파리 대사관의 중정 직원은 이상열 공사 아래로 최용찬 참사관, H참사관이 있었다. 최참사관은 1994년 4월 일본 후쿠오카 총영사직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고, H참사관은 취재 당시 해외공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최씨는 실종 사건이 발생이 된 시점을 전후로 보름간 가뿌 베르데, 끼네 피사오 등 아프리카 나라와의 수교를 위해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출장에서 돌아온 날짜가 휴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루 쉬고 출근해보니(기자注: 그의 말에 의하면 출근 날짜는 10월15일쯤이었다) 대사관 안에서 김형욱이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출장 타이밍이 묘하다. 하필 실종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파리를 비우게 됐는가?
“아프리카 출장을 사건과 연결짓지 말라. 그 출장은 이미 예정돼 있었고, 국가 이익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 김형욱씨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김씨는 파리에 자주 들락거렸기 때문에 그가 실종됐다는 말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디엔가 있다가 다시 나타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김형욱이 실종됐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반한(反韓) 발언을 일삼던 전직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어쨌든 일주일이상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정보인으로서 충분히 호기심을 갖고 추적해 볼 만 한 거리는 됐다고 본다.

“세월이 흐르고 난 뒤 그 실종 사건에 흥미가 붙었는지 모르지만 당시는 김형욱이가 카지노를 하다가 며칠 없어졌다는 게 무엇이 대단한 일인가? 또 이 사건과 관련해 국내로부터 지침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 회사(정보부를 지칭)에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면 끼어들지 않는다.”

-이상열씨 등 함께 근무하던 중정 동료에게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가.
“물어본 적 없다. 우리 회사에서는 바로 옆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또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룰이 있다.”

이들 당시 파리 현지 중정 직원들의 공통된 진술은 김형욱 실종 사건이 발생한 뒤 국내로부터 특별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중정본부는 김형욱 실종 사건의 발생 보고를 접수했을 때 어떻게 움직였을까?

중정 내부의 해외담당망
김형욱 실종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의 내부 분위기 및 대응 모습을 파악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김형욱 사건과 중정(中情) 간에 놓인 함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김형욱의 실종 시점부터 우선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김형욱이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간 날짜는 1979년 10월1일 이었다. 그의 실종 시점은 대략 1979년 10월7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남들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이 날짜였기 때문이다.

실종 시점부터 열흘이 지난 뒤 당시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인 주섭일(朱燮日)씨가 전송한 기사(1979년 10월16일자)에는 실종 당일 김씨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김씨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웨스트 엔드 호텔에 나타난 것은 7일 상오 10시(기자 注: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한 뒤 처음에는 릿츠 호텔에 묵었다가 이날 웨스트 엔드 호텔로 옮겼다).

김씨는 방을 예약할 때 파리~뉴욕간 비행기표를 보이며 이튿날 뉴욕으로 떠나는 비행기 편을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가 호텔 측에서 ‘내일 떠나는 사람이 방을 5일 동안 잡느냐’고 묻자, ‘뉴욕에 갔다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짐을 풀고 30분 뒤 그냥 나갔다고 호텔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의 지배인은 金씨가 이날 상오 11시30분쯤 나타나 하오 7시까지 온종일 도박을 한 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떠났다고 말했다.”

김형욱의 실종 시점은 대략 10월7일경이었다. 그렇다면 중정의 공식적인 채널 보고에서 김형욱의 실종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언제였을까? 덧붙여 중정 조직의 계통을 통해 실종 사건의 보고를 받았던 김재규 부장의 첫 반응과 그 뒤로 이 사건에 보여준 관심도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김형욱 실종 사건 발생 후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던 국내 본부의 해외담당 상부라인은 해외담당 차장인 윤일균(尹鎰均)씨, 유럽지역 담당국장인 김관봉(金琯奉)씨, 해외담당 부국장 이종찬(李鍾贊)씨로 편성돼 있었다.

김형욱 실종 사건 발생 직후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이 사건의 조치에 대해 직접 명령을 받았던 인물은 김관봉씨였다. 그는 김형욱 실종 사건의 발생을 처음으로 보고받은 경위에 대해 “우리 국(局)에서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이 국내로 전송한 기사를 감청(監聽)해 처음 김형욱의 실종을 알게 됐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중앙일보에 난 기사의 날짜로 미뤄보면 그가 김형욱 실종 사건의 공식 보고를 받은 게 1979년 10월16일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의 기억에 혼동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설령 중정이 특파원의 송고 기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하더라도 시점상 감청 대상은 중앙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의 송고 기사였어야 했다.

중앙일보 특파원이 송고한 시점은 16일 오전이었고, 이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조선일보 특파원이 송고한 시점은 그 전날인 15일이었고 16일字 조선일보에는 이미 이 사건이 보도된 뒤였다.

그러나 당시 해외담당 부국장인 이종찬씨도 “당시 파리 현지에서 우리 요원의 보고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신문의 특파원 송고 기사를 통해 먼저 보고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되지 않지만 비슷한 시점인 것 같다”고 말해 김관봉씨의 기억을 뒷받침했다.

당시 중정 해외망의 간부인 두 사람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파리 현지 중정요원들은 김형욱 실종을 여느 특파원들과 거의 동시에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김형욱 실종에 직접 개입하거나 통보받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그 날짜나 경위는 불확실하더라도 그가 조직의 계통에 의해 김형욱의 실종을 처음 보고받던 바로 그 때, 김관봉은 김재규부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김재규 부장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재규 부장, “정상 루트로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하라”
“김형욱은 정보부장을 지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김형욱을 데려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해외담당국에 속해 있는 부국장, 과장들과의 대책 회의를 가졌고 프랑스 정부와 경찰, 그리고 인터폴에 수사 요청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스위스 정부와 미국 연방경찰 쪽에도 의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김형욱 사건의 코드 네임은 ‘K2’였습니다. 이 암호에 의해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당시 김재규 부장은 실종 사건에 궁금증을 보였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이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김재규 부장이 이 사건과 관련해 특별히 지침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까?
그는 중정 근무 당시 비망록을 찾았다. 용케도 그때의 데모가 나왔다. 날짜를 적고 마구 갈겨 써놓은 메모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김형욱과 관련된 것은 10월 16일부터였다.

16일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 보도는 막지 말라. 다만 추측 보도는 막도록 하라. 남산(기자注: 국내 정보담당)과 협조해서 하라.’

17일 ‘부장님 지시.’ ‘정상루트로 알아보라. 정상대로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해보라. 다 알아보되 너무 들쑤시지는 말고. 바깥에 이상하게 비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김재규 부장은 혹시 이 사건에 중정이 연루됐다는 소문이 날까봐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백방의 노력을 모두 했던 셈입니다. 16일 언론 보도에 대한 지시에도 보듯이 김재규 부장은 김형욱의 실종 사건에 떳떳한 입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실종 사건 직후 민병기(작고) 파리 대사로부터 ‘프랑스 경찰로부터 참고인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문의가 왔어요. 저는 ‘김형욱을 찾을 수 있다면 프랑스 쪽에 만반의 협조를 해드리는 게 어떠냐’고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런 회신을 보냈던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김형욱의 행방을 정말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외교상 불가침권을 보장받고 있는 閔대사께서 참고인 조사에 응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한 김형욱의 행방을 찾으려는 작업은 언제쯤 그만두게 됐습니까?
“우리가 전문을 보내 요청한 프랑스 경찰 등에서 ‘아무리 찾아도 없다’라는 답변을 받으면서 서서히 손을 놓게 됐습니다. 수사 진전도 없고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로서는 현지 정부나 경찰에서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입장이었지 우리가 직접 찾아 나설 방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재규 부장이 ‘그만두라’는 지시를 하면서, 김형욱을 지칭한 듯 ‘어차피 버러지 같은 놈이니까’라고 혼자 중얼거리더군요.”

중정(中情), 조직 차원에서 개입은 없었던 듯
김관봉의 증언대로라면, 김형욱이 실종된 뒤 중앙정보부의 계선(係線) 조직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는 작업을 했고 김재규 부장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당시 중정의 해외정보 업무를 책임졌던 해외담당 차장인 윤일균씨도 “내가 결재하러 들어갔을 때 김재규 부장이 김형욱 실종과 관련해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즉각즉각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金부장이 김형욱의 행방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으로 읽었다. 그래서 나는 일일보고를 할 때마다 이 사건에 대해 빠뜨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당시 해외담당 부국장인 이종찬씨는 공작(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형욱 사건이 발생한 뒤 해외연락망과의 실제적인 창구 역할을 했다. 그는 “프랑스ㆍ스위스 정부쪽에 협조 전문을 보내고 프랑스 현지 중정요원에게 실종 전말에 대해 보고하도록 연락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서툴게 알아봐서 공연히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형욱 실종 사건과 중앙정보부와의 상관 관계도는 이렇게 그려질 것 같다.

해외지역의 정보 공작을 맡은 중정 라인에서는 김형욱의 실종 사실에 대해 보고를 받고서 알게 됐고 그뒤 행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정이 적어도 계선조직 차원에서 이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다. 김재규 부장이 중정의 계선 조직이 아닌 별도의 팀을 편성해 공작을 지시했으리라는 가정과, 세간의 무성한 추측과는 달리 중정이 개입되지 않았는데도 그런 의심을 받아왔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金부장이 정상적인 계선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별도의 팀에 공작 임무를 맡긴다는 게 원론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중정 관계자들마다 이에 대해 약간씩 견해가 달랐다.

해외부국장이었던 이종찬씨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쪽이었다. 李씨는 1975년 월남 패망 당시 자신이 수행했던 한국 공관(公館)의 철수 공작을 예로 들었다. 그 공작은 조직의 계선과는 상관없이 정보부장이 그에게 직접 내린 오더였다고 한다.

또 金부장이 그에게 국제적인 무기상(商)인 아이젠버그의 대리인을 만나 중정의 월남 공작에 대해 브리핑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만나러 갔을 때 그 대리인은 이미 李씨가 하려고 했던 브리핑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李씨는 ‘金부장이 해외 쪽에도 별도의 라인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별도의 라인을 가동해 공작할 수도 있기 때문에 김형욱 사건이 그런 식으로 공작됐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김재규(金載圭)가 공작을 지시했다면?
반면 해외정보 업무를 총괄했던 윤일균씨는 “설령 별도의 라인에 의해 공작됐다하더라도 내 눈까지 피해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파리대사관의 공사였던 이상열씨도 인터뷰에서 “별동대에 의해 수행되더라도 현지 정보책임자에게 통보가 돼 공조하도록 하는 게 해외 공작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별도의 라인에 의한 김형욱 실종 공작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쪽인 셈이다.

정상적인 계선을 활용하지 않은 채 비선(秘線)에 의한 해외 공작이 가능한가를 가리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입견 없이 김재규 부장을 관찰해 보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중정 관련자의 증언에 따르면, 金부장은 김형욱의 실종에 놀라고 그 행방에 관심을 표명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金부장이 김형욱의 실종을 직접 지시하거나 개입됐을 것이라는 세간의 추정에 한번쯤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金부장이 만약 김형욱의 공작을 지시했다면, 그는 적어도 공작을 수행한 라인을 통해 그 결과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의 공식 채널을 통해 보고가 올라온 김형욱의 실종건(件)은 묵은 정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식 채널을 통해 보고 됐을 당시 金부장을 접촉했던 중정 간부들은 그가 김형욱의 실종을 그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미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金부장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모르는 척 연극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연극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김재규 부장이 사망한 지금 그가 김형욱의 실종에 관계됐느냐 안 됐느냐는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진위와 상관없이 김형욱 사건에 따라붙어 온 인물이 김재규 부장이었다. 실종 사건이 우리 정부 공권력에 의한 공작이라고 가정해 봤을 때, 그 공작을 지시할 수 있는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정보부장 중 한 명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일반적인 추측이었고 이중 金부장이 가장 유력시됐다.

그것은 막연한 심증이다. 중정이 해외 조직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방패 역할을 해온 그늘진 내력 등이 그런 심증을 굳어지게 했다.

특히 조갑제(趙甲濟) 기자가 쓴 ‘회고록 출판을 둘러싼 김재규와 김형욱의 비밀협상’(월간조선 1986년 1월호)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한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그러한 심증을 굳어지게 한 보도였다.

아래 자료도 참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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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미스터리 딱 걸렸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실종 사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이번에 밝혀질까

마침내 과거사가 실험대에 올랐다.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원회-위원장 오충일 목사)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 7건을 선정,
과거사에 대한 참회록 작성에 돌입한 것이다.
7대 사건은 

▲경향신문 강제매각과 부일장학회 사건
▲동백림 간첩단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KAL기 폭파사건 ▲김형욱 실종사건이다.

이중 미궁에 빠진 사건은 김형욱 실종사건밖에 없다. 나머지 6개 사건은 어느 정도 진실추적의 실마리를 갖고 있다. 수사내용에 관한 갖가지 의혹이 이미 제기됐다. 또 의혹과 관련한 여러 자료와 정황, 공판기록 그리고 증인들이 있다. 하지만 김형욱 실종사건은 온통 미스터리다. 미궁의 사건이거나 아니면 완전범죄다. 이번 국정원의 조사과정에서도 김형욱 실종사건은 미로 속에 갖힌 진실로, 출구없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인가.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은 10-26사건 3주 전인 1979년 10월 7일 오후 7시 프랑스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실종됐다. 김전부장 실종을 처음 알린 경향신문 10월 16일자 보도는 다음과 같다.

전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씨(54세)가 파리를 여행 중 행방불명이 된 채 9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 미국에 살고 있는 김씨는 지난 7일 상오 10시쯤 파리시 시내 중심 프레망마토가에 있는 웨스트 엔드 호텔에 혼자 나타나 그날로부터 5일간 머물겠다면서 방예약을 한 다음 짐을 방에 둔 채 즉시 외출을 한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호텔 관계자가 15일 밝혔다.

국가권력 개입 가능성 의혹만
여행용 가방 1개와 골프채 1개를 호텔에 남긴 채 이 호텔을 나온 김씨는 20분 후인 상호 10시30분 개선문 바로 옆에 있는 르 그랑 세르클이라는 카지노에 들어가 이날 하오 7시 30분까지 카드놀이를 하다가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는데 그후로는 카지노에도 나타난 적이 없다고 그곳 관계자가 전했다.

파리발 1신 기사는 실종사실만 있을 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실종됐는지 실종배경과 이유는 오리무중이다. 후속기사는 더 발전하지 못했다. 김형욱 전부장이 큰 키의 동양인과 함께 카지노를 빠져나갔다 그에겐 미모의 연예인 애인이 있었다는 정도가 후속기사였다.

다만 그의 실종이 당시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김전부장이 박정희정권의 표적이 됐던 인물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의혹은 확대재생산됐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돼서 세느강에 던져졌다느니, 청와대로 압송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살해됐다는 등의 억측을 자아냈다. 그런 억측엔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국가권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의혹 같은 게 깔려 있다. 이 사건이 국가정보원의 진상조사에 포함된 이유이기도 하다. 진실위원회는 7대사건 선정배경에 대해 국정원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90여건의 의혹사건 가운데 의혹이 크고 시민-사회단체와 유가족이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사건들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 정황과 관련해 가장 뚜렷하게 시기-상황적 연관성을 갖는 것은 김형욱 회고록이다. 김전부장이 미국에서 실종된 장소인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것은 그가 김형욱 회고록 서문에 사인을 하고 난 9월 30일이다. 회고록 출판이 임박했던 시점이라는 얘기다. 그는 회고록 집필자인 김경재 민주당 전의원(필명 박사월)에게 김동지, 나 여행 좀 다녀오겠소라고 말했을 뿐 구체적인 행선지도 밝히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났다.

김형욱 회고록은 한마디로 배신당한 박정희정권의 심장부에 그 칼끝을 겨냥하고 있었다. 목차만 봐도 그 내용이 짐작되고 남는다. 제1부 5-16 비사와 제2부 한국중앙정보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정군 파동 ▲혁명 예행연습 ▲위기일발 ▲D-day H-hour ▲비상계엄령의 발동 ▲이한림의 체포 ▲혁명은 너 혼자 했나 ▲김종필의 4대 의혹사건으로 이뤄져 있다. 제2부는 ▲사상 최대의 3대 부정사건 ▲정인숙 여인의 살해사건 ▲박정희와 김대중의 쟁패 ▲실미도 사건 ▲오치성 파동과 위수령 발동 ▲김일성-이후락 비밀회담과 남북공동성명 ▲윤필용 사건과 이후락 ▲김대중 납치사건과 이후락의 거세 ▲문세광 사건과 박종규 실각 ▲인민혁명당사건 ▲주한미군의 철수 바란 박정희 ▲미하원 프레이져 소위원회 증언 등이다. 하나같이 박정희정권의 급소를 겨냥한 내용이었다. 박정희가 싫어서 왔다 박정희는 나쁜 사람이다며 공개적인 반(反) 박정희 운동을 선언한 김전부장의 회심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유신정권 회고록 저지 안간힘
이 회고록이 집필되면서 박정희정권은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정희정부는 미국에 7~8차례 중재자를 보내 회고록 협상을 벌였다. 국가권력이 개입했다면 혐의는 일단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돌아간다. 물론 추정일 뿐이다. 당시 박정희정부의 공작정치가 사실상 이들 두 사람에 의해 이뤄졌다는 전제에서 이런 추측은 시작된다.

김재규 전부장의 개입의 개연성을 추정할 수 있는 증언도 있다. 회고록을 입수한 김재규 전부장은 김형욱을 잘 아는 김용운씨(작고)를 중재자로 내세웠고 김형욱은 회고록 출판을 포기하는 대가로 ▲150만달러 ▲압류중인 자신의 부동산 반환 ▲한국 여권발급 등을 요구했다(김용운씨 증언)고 한다. 이 때문에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로부터 150만달러를 받기로 한 김형욱이 50만달러는 미리 받고 남은 돈을 파리에서 받으러 갔다가 살해됐다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김형욱전부장은 공작자금을 받을 정도로 궁핍했을까. 회고록을 쓰면서 1주일에 두 번씩 김형욱 전부장을 만난 김경재 전의원은 당시 그의 재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기 집에 절대 데려가지 않았다. 놀랄까봐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그의 집은 뉴저지에 있었고 현찰로 30만달러를 주고 산 저택이다. 벤츠 승용차가 2대였다. 시티은행에 현금이 3백만달러쯤 있었다. 돈 문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말년에는 생각보다 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지노에 가서 1백만달러를 잃는 형편이니 남아 나겠냐고 소상히 설명했다.

어떻든 김재규 전부장에 대한 의혹은 그의 명령 계선상에 있는 당시 파리대사관 이상렬공사와 윤일균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에 관한 이상렬씨의 인과관계에 대한 의문을 일본의 유력한 시사잡지인 주간춘추가 1981년 초에 던진다. 오작교 작전-김형욱은 박정희에 의해 살해됐다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된 것이다. 이 기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몰래 떠도는 김형욱 실종공작의 극비문서를 입수했다면서 한국 중앙정보부는 회고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김형욱에게 2백만달러를 약속했다. 심부름은 이상렬공사가 맡았다. 이공사가 김형욱을 유인한 다음 마취 주사를 놓아 KAL 화물편으로 서울로 보냈다. 박정희대통령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직접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 너무나 소설 같은 얘기다.


 
중앙정보부 2백만달러 약속했다
이상렬씨는 시종일관 나는 물론 중앙정보부와 무관하다며 부인해왔다. 자신을 이미 누명을 쓸대로 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상렬씨는 나는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윤일균씨 역시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세계 제일의 프랑스 정보기관이나 경찰기관의 눈을 피해 김형욱을 납치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우리는 프랑스의 치안능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중앙정보부 개입설을 부인하면서 중정이 개입했다면 내 눈을 피해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지철 전경호실장도 국가권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가 정보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을 별도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 조직 운영 역시 김재규 전부장 등과의 충성경쟁에서 절대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김경재 전의원은 김씨 실종과 관련한 최대 의문부호는 그 배후가 차지철 경호실장이냐, 박종규 경호실장이냐 하는 점이라면서 차씨의 과잉충성일 수도 있고 박씨가 박정희대통령에게 알아서 하겠다고 해놓고 일본 오사카의 유명한 한국계 폭력배를 끌어들여 처리했다는 설도 있다고 주장했다.

권력개입 의혹이 또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하지만 의혹 중심인물은 3주 뒤에 발생한 박정희 시해사건 뒤에 꽁꽁 숨었다. 권력개입 의혹의 핵심에 있던 김재규 전부장, 차지철 전실장 그리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회고록과 김형욱 전부장의 실종에 대한 항간의 믿음은 입증된 것은 아니다. 중앙정보부가 회고록 협상을 벌였고 이미 회고록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형욱 전부장에게 회고록은 박정희정권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장치였다. 회고록집필은 김형욱 전부장의 이중플레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회고록이 직접적인 실종의 원인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돈을 노린 조직폭력배의 살해 가능성 등도 제기되고 있다. 그가 정보부장 시절 북한의 제1암살대상자 였다는 점에서 북한의 소행설도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증거도, 목격자도 없다.

* 자료출처 :
http://cafe.naver.com/yong17711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03
  http://cafe.naver.com/homelin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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