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록
김 동 규 명예교수(생활과학대학, 체육학부)
철없는 교수
정치판에 뛰어들어 분에 넘친 감투를 쓴 교수출신 한 인사가 노인폄하 논란을 잠재우려 “교수라 철없이 지내서”라고 변명을 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철이 없으려면 혼자 없을 노릇이지 가만히 있는 교수들을 끌어들였으니 교수들로서는 난감한 일 아닌가?
자유주의 국가에서 직업선택에 본인 뜻이 우선시되어야 함은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언행에는 나름의 원칙과 범절이 있다. 또한 공직자에게는 냉철한 자아의식과 공동체 문화에의 적응력, 그리고 설 자리 앉을 자리를 구분하는 식견이 요구된다. 대학의 교수라고 해서 이에 자유로울 수 없음은 물론이다. 불행한 건 우리 정치권의 풍조가 이러한 맥락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데 있다. 돌출발언과 막말, 말 뒤집기, 네 탓 타령, 기울어진 진영논리, 아니면 그만이라는 철면피가 용인되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실상이다.
따라서 교수가 정치권에 진입하고자 하면, 우선 조직의 정체성이 교육계와 판이하다는 현실을 간파하는 게 중요하다. 상아탑에서 쌓은 교수들의 관념적인 논리가 분란한 정치권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늘 관건이 되고 있지 않은가? 교수의 임무가 교수(teaching), 연구(research) 외에 봉사(service)도 한 몫을 한다지만, 평소 교수의 대외활동 기회와 범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강의와 연구를 소홀히 하면서 어떻게 교수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그러한 면에서 스스로 철이 없다고 자괴감에 빠진 교수 못지않게 정계진출을 기웃거리다가 아무렇잖게 복귀하는 교수나, 뻔질나게 대중매체를 들락거리며 교정을 비우는 교수들은 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교수출신 정치인의 몰락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교수출신 정치인의 우유부단한 작태도 이제 그만 접하고 싶다. 험난한 우리 정치판에서 교수출신 정치인의 성공 케이스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전문지식의 자문을 폄훼하거나 나무라는 게 아니다. 교수는 교수로서의 본분과 설 자리가 남다름을 자각하고 자존감을 지키자는 이야기다.(2023년 8월 18일).
많이 듣고 말은 줄여라!
요즈음 ‘59분 대통령’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한 시간 회의에서 59분 동안 혼자 이야기한다는 비아냥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다급했으면 그러랴 해 보지만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박사과정 수학 중 지도교수이셨던 은사님은 제자들과 간담회를 할 경우이면 통 말씀을 하시지 않고 주로 의견을 듣고 계셨다. 가끔은 선생님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뜻이 참 깊으신 분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다고 간담회의 성과가 미미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나이가 들더라도 은사님처럼 처신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세월이 흐른 후 동료나 제자들과 담소를 나눌 때면 예전보다 부쩍 말이 많아졌음을 스스로 느껴 놀라곤 한다.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우선 대화할 기회가 줄었으니 밀렸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연장자로서 대화의 주도권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는 옹색한 변명이다.
옛날부터 지식의 습득과 생산은 독자적으로 수행될 수 없음이 만고의 진리다. 학술연구에 있어서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신지식이 탄생하듯이 인간은 물론 동물도 공생적 협력에 의해 생존이 이어진다. 공존을 추구하는 리더는 우선 구성원의 의견을 정성껏 청취해야 한다. 많이 듣고 말은 줄이는 게 성공적인 리더의 비책이다. 의견수합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자기 확신은 상대 입을 닫게 하는 오만이다.
이청득심(以聽得心),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한 처지에 빠진다(老子. 도덕경). 영향력 있는 리더일수록 새겨야 할 선견적인 가르침이다.(2023년 10월 19일).
무너져 가는 대학 엘리트스포츠
현대사회에서 스포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스포츠의 중요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가 이미 우리 일상에 그만큼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현상은 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고, 그러한 연유로 개인은 물론 국가와 직장에서도 스포츠를 놀이로서 또는 건강증진의 매개로 활용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엘리트스포츠의 진흥에 이은 프로화에 의해 돈벌이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엘리트스포츠(elite sport)는 교육과 학문의 전당인 각급 학교에서 중요한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이를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 엘리트스포츠의 국제적인 성과는 그렇게 뒤지는 편은 아니다. 문제는 이의 구조와 운영이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어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대학의 엘리트스포츠가 무너져 가고 있음이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다. 대학스포츠의 기반이 든든해야 초중등학교 스포츠에 능동성이 부여되고, 국가 차원에서도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학 엘리트스포츠의 현실은 고사 일보직전에 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재정악화만 도래되면 으레 운동부 존폐부터 들먹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대학 내 운동부의 존재가치가 소멸돼가고 있다는 점이다. 교내 구성원들조차 운동부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오늘날 우리 대학들의 실정이다.
이의 해결책으로서 구기 종목부터 대학 구성원들이 자기 대학 선수나 팀이 출전하는 경기의 관람기회를 갖게 하는 ‘홈 앤드 어웨이(home and away)’ 방식의 도입이 시급하다. 이는 이미 선진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시스템으로서 이러한 운영방식의 구축은 스포츠인들의 현실인식과 대학경영자의 개혁의지에 의해 실현된다. 구성원들의 관심과 애정이 소실된 운동부는 존속해야 할 당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우선 지역의 대학 간 교류전부터 실시해 보는 게 단초가 될 수 있다. 이의 시행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 함께 대학을 비롯한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한 각종 매스컴의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NCAA( 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와 같은 기구를 통하여 대학 엘리트스포츠의 홍보와 운영전략을 구상하고 시행해야 한다. 현존하는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KUSF)의 역할을 보다 강화하고 전문화하여 선수의 학습권 보호와 마케팅 전략, 그리고 홍보업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야 한다.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매스컴의 무관심은 메마른 땅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큼 소중한 게 없다고들 한다. 이는 스포츠계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한 연유로 우수 선수의 고졸 후 프로입단은 당연한 추세일 수 있다. 야구, 축구 등과 달리 농구계에서는 대학을 거치는 게 관례였으나, 이마저 점차 무너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대학스포츠가 프로스포츠 못지않게 활성화되고 있음은 스포츠계는 물론 사회풍조가 대학스포츠의 역할과 가치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조성을 위해서는 각 대학들이 운동선수들에게 대학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는 노력과 함께 프로구단과의 연계 및 협조를 통하여 고졸 선수들이 대학을 거쳐 프로에 도전토록 하는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초중등학교 엘리트스포츠의 구조를 개편하는 논의가 적극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현재 초중등학교의 엘리트스포츠는 소수 전문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학생 운동선수의 학업병행을 권장하고 있지만, 전문선수 중심의 시스템으로는 경기성적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이의 해결방안으로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대항경기가 놀이를 기반으로 한 동아리대회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보호를 위해서도, 저변확대를 위해서도 이는 필연적인 과제다. 이와 함께 고등부에서는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의 구조가 결합된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경쟁성을 전제로 대회를 운영하되, 운동선수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보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고교 야구팀이 50여 개인데 반해, 일본은 4,300여 팀이나 되며, 일본의 남자 고교생 1/2이 운동선수라는 점은 경쟁위주의 스포츠 시스템이 아님을 알게 한다. 대학 엘리트스포츠는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정착될 수 있으며, 더불어 국가 대항전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다.
위에서 제시된 정책들은 대학 스포츠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엘리트스포츠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절실한 과제들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적막한 캠퍼스에 활기를 불어넣어 구성원들의 사기를 충천시키며, 한편으로 애교심을 키우는 촉매역할을 하는 기능이 엘리트스포츠로부터 발현됨을 인지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도 스포츠가 침체된 세상은 불행한 세상이다.(2023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