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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충격
구조를 만나다
세상이 멸망하고 난 다음 인류의 모든 과학지식이 파괴된 상태에서 신이 살아남은 인류의 대표자에게 문명의 재건에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을 허용한다면 인류의 대표자로 나선 당신은 맨 먼저 무엇을 질문하겠는가? 그것은 가장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인류의 첫 번째 질문은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물음에 대한 나의 자문자답이다. 인류는 이 소박한 물음에 철저하지 않았다. 구조론은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하게 하는 인류의 새로운 도전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처음에 대한 사유다. 사유의 첫 단추를 끼우는 문제다.
세상은 구조構造로 되어 있다. 구構는 목재를 우물 정井짜 모양으로 끼운 것이니 이는 공간의 얽힘이요, 조造의 부수는 '쉬엄쉬엄 갈 착辵'이니 이는 일을 시간에서 착착 진행한다는 뜻이다. 세상은 공간의 구構와 시간의 조造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의사결정이다. 세상은 의사결정구조의 집합이다.
구조를 우리말로 옮기면 '꽉착'이 된다. 혹은 '꽉꽉착착'이나 '끼워끼워 차근차근'이라 하겠다. 그것은 어떤 일의 공간적 연결과 시간적 전달에 관한 것이다. 연결하고 전달하는 것은 탄생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던가? 탄생이 있었다. 탄생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인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신 회피하는 꼼수 논리를 만들었다. 원자론과 인과율이 그것이다. 원자의 쪼개지지 않는다는 설정은 '꿴다'는 의미의 구構와 반대가 된다. 분리가 없으니 결합도 없다. 인과율의 원인은 짓기 전이고 결과는 지은 다음이니 짓는 현재 진행 과정을 회피한다.
인류는 교묘한 트릭으로 문제의 핵심을 피해버렸다.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사이비와 주술과 종교와 음모론과 괴력난신이 난무하는 이유다. 과학을 거짓말로 시작했기 때문에 각종 사이비의 거짓 공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최초의 백지상태에서 과학까지 가는 사유의 빌드업 과정이 사라졌다.
인류는 권태, 냉소, 퇴폐, 염세가 만연했던 19세기의 세기말과 같은 집단 우울증에 걸려 버렸다. 양차 세계대전의 조짐과 맬서스 트랩의 공포 앞에서 지식인의 무기력함을 표현한 것이 세기말 사조다. 인류는 다시 위협받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이제는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과학의 방법론
어렸을 때는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줄 알았다. 1973년도였을 것이다. 호롱불이 전깃불로 바뀌는 것을 봤다. 매일 과학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오직 과학만이 멋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시시했다.
과학이라면 내 존재 이유가 되어주기에 충분하다. 미신을 타파하고, 종교를 제압하고, 세상의 모든 거짓과 싸워야겠지.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고 입씨름할 이유가 없어. 세계의 과학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상온 핵융합만 성공시키면 게임 끝. 인류가 힘을 모아 에너지난 해결, 식량난 해결, 모든 문제 해결. 좋잖아! 정치도 과학으로, 경제도 과학으로, 생활도 과학으로, 문화도 과학으로, 모든 것을 과학으로.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과학의 메커니즘을 다른 모든 분야에 적용해버려.
그만 흥분해 버렸다. 과학 지상주의, 과학 만능주의 사고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깨졌다. 내가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중학생 때는 철학으로 관심이 바뀌었지만, 어렸을 때의 판타지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과학의 메커니즘을 다른 분야에 응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지금도 유효하다.
현시창의 법칙은 어김이 없다. 과학은 과학 안에 갇혀 있다. 사회의 다른 분야와 호환되지 않는다. 인류는 얍삽하게도 과학이 만들어준 열매만 따 먹으려 할 뿐 과학적 사고로 갈아타지 않는다. 안다 하는 논객 중에 과학 특유의 메커니즘적 사고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도처에 주술사가 널려 있다. 저급한 신파에 감성팔이, 눈물 타령, 공감 타령, 성찰 타령, 진정성 타령 하는 사이비 약장수가 넘쳐난다. 과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왜 과학의 방법론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지 않을까? 과학의 방법론이 전파되지 않는 이유는 전파할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인류는 과학을 주먹구구로 하고 있었다. 인류는 과학을 비과학적으로 하고 있다. 과학이 문제를 99퍼센트 해결해도 백 퍼센트 완벽하지 않으면 호환되지 않는다. 과학은 완벽하지 않다.
과학의 방법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려면 과학의 상부구조가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 이전의 것이다. 과학 이전에 수학이 있고, 수학 이전에 언어가 있고, 언어 이전에 사유가 있고, 사유 이전에 관측이 있다. 인류는 최초 관측에서부터 막혔다. 윗물이 오염되니 아랫물이 힘을 쓰지 못한다. 잘못된 관측이 잘못된 사유와 잘못된 언어를 낳고 과학까지 오염시켰다.
관측 > 사유 > 언어 > 수학 >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이 서로 호환되지 않고 각자 따로 노는 이유는 언어에서 막혔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학이 중립적인 언어다. 나머지는 자기중심적 언어에 갇혀 있다. 인류는 언어에서 막혔고 그 이전에, 사유에서 막혔다.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다른 과학은 있는데 생각의 과학은 왜 없을까? 그런 비슷한 것도 없다.
보는게 먼저다
과학을 만드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먼저다. 그런데 생각의 과학이 없다. 인류는 도무지 생각할 줄 모른다. 바둑의 수순은 아는데 생각의 수순은 모른다. 생각하기에 앞서 볼 줄도 모른다. 안을 볼지 밖을 볼지, 전체를 볼지 부분을 볼지, 사건을 볼지 사물을 볼지, 탄생을 볼지 전달을 볼지 분간을 못 한다. 일단 눈으로 보는 게 안 된다. 인류는 거기서 막혔다.
안과 밖, 전체와 부분, 사건과 사물, 탄생과 전달은 밸런스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밸런스를 보는 눈이 없다. 균형감각을 타고난 사람에게 앞을 보여주면 자연히 뒤를 생각한다. 부분을 보여주면 전체를 생각한다. 사물을 보여주면 사건을 생각한다. 이런 것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밸런스 감각에 의해 자동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기본이 안 된다. 일단 뒤집어보기가 안 된다. 앞을 보여주면 그냥 앞만 보고 있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반대쪽을 살펴볼 만한데 말이다. 답답한 일이다.
돼지 불까는 요령이 있다. 주둥이를 말뚝에 묶어놓으면 돼지는 몸을 최대한 뒤로 뻗댄다. 농부는 슬그머니 뒤로 돌아가서 불을 깐다. 돼지는 주둥이가 말뚝에 묶여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한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계속할 뿐 중간에 방향전환을 못 한다. 반대쪽으로 돌아온 노련한 늑대에게 잡힌다. 사실이지 인간은 동물보다 나을게 없다.
인간이 봐야 하는 것은 밸런스다. 대칭은 두 방향이다. 밸런스의 두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밖을 보여주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안을 보고, 부분을 보여주면 전체를 보고, 사물을 보여주면 사건을 봐야 하는데 인간이 그렇게 못한다. 마술사 트릭에 속는 이유다. 보이스피싱범은 피해자가 전화를 끊지 못하게 압박한다. 늑대에게 쫓겨 직진만 하는 사슴처럼 다른 생각을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 수법에 당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낚이는 동물보다 낫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보이기를 기다리면 절대 보지 못한다. 등잔 밑이 약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 사건의 등잔 밑은 뭐지?' 하고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 게임판의 호구는 누구이지? 호구가 안 보이면 내가 호구다.' 이런 분석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안 되면 공식을 수첩에 적어놓고 필요할 때 펼쳐봐야 한다.
밸런스를 보라. 밸런스는 둘의 밸런스다. 둘은 대칭이다. 둘을 각각 보면 안 되고 둘을 합친 전체를 봐야 한다. 반드시 둘을 연결하는 코어가 있다. 코어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둘이 하나의 메커니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모든 대칭되는 것은 둘을 통일하는 하나가 있다. 코어는 하나를 움직여서 둘을 결정한다. 두 선수를 동시에 지배하는 주최 측이다. 눈으로는 원경과 근경을 통일하는 소실점을 봐야 하고, 귀로는 이 소리와 저 소리를 통일하는 화음을 들어야 한다. 선과 악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사회성을 보고, 진보와 보수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문명을 봐야 한다.
보려고 해야 그것이 보인다. 마술사의 트릭을 간파할 마음이 있어야 마술사가 보여주는 부분의 반대편에 마술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일단 보는 게 되어야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생각이 먼저다
보는 게 먼저다. 본다는 것은 복제한다는 것이다. 눈이 피사체를 카메라로 찍어서 복제한다. 똑똑한 사람은 동영상을 찍고 어리석은 사람은 정지화상을 찍는 차이다. 인간의 지식은 자연을 복제한다. 자연은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역시 복제한다. 자연의 복제원리를 복제하여 인간의 사유 원리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연역이다. 연역에 통달하면 구조론은 완성된다.
본 다음은 생각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사결정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유의 우선순위 1번은 자연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자연의 의사결정 원리를 복제한다. 모든 것의 근원에 의사결정 원리가 있다. 그것은 관측된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볼 줄 알아야 본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 자연의 복제 ) => ( 관측 > 사유 > 언어 > 수학 > 과학 ) => ( 인류문명 )
큰 집을 지으려면 바닥부터 다져야 한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 인류문명은 기초공사가 안 되어 있다. 무엇이든 초반 도입부가 중요하다. 꼼꼼한 빌드업 과정이 필요하다. 문명은 과학에 의지하고, 과학은 수학에 의지하고, 수학은 언어에 의지하고, 언어는 사유에 의지하고, 사유는 관측에 의지한다. 관측은 자연을 복제한다. 자연의 복제원리를 복제한다.
어떤 주장을 하기 전에 사전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한다. 관측과 사유와 언어와 수학과 과학으로 검증한 다음에 발언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일단 관측이 안 된다. 사물은 보는데 사건을 못 본다. 부분은 보는데 전체를 못 본다. 정지해 있는 것은 보는데 움직이는 것을 못 본다. 원인과 결과는 보는데 그 사이에 있는 의사결정을 못 본다. 전달은 보는데 탄생을 못 본다.
인간들은 거의 안 보고 있다. 관점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관측이 안 되므로 사유할 수 없다. 사유하지 못하므로 언어가 개판이다. 언어가 엉망이니 전달이 안 된다.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객관적인 부분으로 한정하여 수학과 과학이 발전된다. 자동차가 고장 난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는 수학과 과학으로 잘 해결하고 인류의 합의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피타고라스는 화음을 들었고 르네상스인은 소실점을 봤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봤고 파스퇴르는 현미경으로 봤다. 관측은 자연으로부터 직접 전달받는 것이다. 이때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문제가 있다. 계를 넘어가는 모든 전달 과정에서 거울의 상처럼 방향이 뒤집어진다. 바른 사유와 바른 언어는 계 내부 밸런스의 작용에 의해 방향이 뒤집어진 것을 바로잡는다.
계 내부에서 밸런스를 이루는 자원들은 중심의 코어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다른 계와 마주치는 접점에서 진행 방향이 뒤집어진다. 인간은 이 부분을 놓친다. 진행 방향을 거꾸로 알게 된다. 단계를 건너는 모든 전달 과정에 왜곡이 있다. 관측이 뒤집히고, 사유가 뒤집히고, 언어가 뒤집힌다. 이는 우주의 근본모순이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에너지의 대칭성 때문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가 앞으로 갈 때 반드시 하나가 뒤로 간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딜 때 왼발은 뒤땅을 밀고 있다. 반대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줄을 당기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발로 땅을 밀고 있다. 거꾸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책상물림 지식인이 현실에서 깨지는 것은 당연하다. 수학과 과학의 발전은 관측과 사유와 언어의 방해가 없는 중립적인 부분으로 제한되었다. 문명은 왜소해졌다. 풍성함을 잃어버렸다.
일단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체를 보고, 변화를 보고, 사건을 보고, 의사결정구조를 보고, 시스템을 보고, 메커니즘을 보고, 밸런스를 보고, 대칭을 보고, 코어를 보고 방향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눈을 얻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훈련하여 보는 게 되어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게 되어야 비로소 말할 수 있고, 말하는 게 되어야 과학이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와 호환된다. 과학의 방법을 다른 분야에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언어가 먼저다
일단은 보고, 이단은 생각하고, 삼단은 말한다. 문제는 언어다. 인간의 언어가 일차원이라서 세상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이다. 인류 전체가 합의해서 푸닥거리 한 판을 해야 한다. 언어를 바로잡아야 한다.
황당한 게 자연발생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생'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발생이 뭐지? 미생물에 의해 생물이 번식한다면 쉽다. 발생이 뭐냐고? 그건 미생물에게 물어봐. 문제를 떠넘기면 된다. 그런데 자연발생설로 가면 발생론이라는 새로운 과학과 철학이 태동하게 된다. 이거 엄청나다.
발생이라니?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한다는 거야? 발생의 메커니즘이 뭐야? 이쯤 되면 창조설 찜쪄먹고 진화론 압도하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생학이 등장해 주시는 거다. 그런데 왜 아무도 자연발생설을 뒷받침하는 발생론과 발생학을 논하지 않는가? 우주 안에 발생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국가도, 문화도, 생물도, 우주도, 기업도 어쩌다가 발생한 것이다. 그 자궁은 같다. 우주의 발생 원리, 생물의 발생 원리를 알아내면 그것을 국가와 문화와 사회와 기업에 응용할 수 있다.
언어가 과학에 앞선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얼버무리기 없다. 인간들이 말을 참 모호하게 한다. AI 하는 사람들이 요즘 창발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데 창발이 뭐지? 단어의 뜻을 알고 쓰는 사람은 없다. 비겁한 짓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말을 똑바로 하라는 공자의 정명사상에서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혼자 길을 간다면 지구와 대칭이다. 두 사람이 함께 간다면 옆 사람과 대칭이다. 대칭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대칭이 자리를 바꿨다. 창발은 자리바꿈이다. 무에서 유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 숨어 있던 것이 다른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대개 상부구조의 개입이다. 궁극적으로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자리바꿈이고 방향전환이다.
변화는 계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계 내부에는 밸런스가 있다. 그것은 갑자기 개입한다. 밸런스의 축이 움직이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창발이라는 말을 한다. 버스 좌석에 앉아서 졸다가 버스가 출발하면 깜짝 놀라서 '이것은 창발이다.' 하고 소리친다. 자기가 깜박 졸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말이다.
창발은 계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변화는 계 안에서 밸런스의 재조립이다. 창발은 기존에 없던 다른 형태의 밸런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부구조에서 복제된 것이다. 닫힌계 안에서 밸런스의 격발에 의해 존재는 기능을 획득한다.
격발된 것은 전달된다. 발생론을 쓰려면 먼저 전달론을 써야 한다. 전달은 대칭을 따라간다. 첫 번째 도미노의 쓰러짐이 기능의 발생이라면 두 번째 도미노의 쓰러짐은 발생한 기능의 전달이다. 도미노가 둘이면 전달과 발생이 구분된다. 창발은 전달과 발생의 구분이다. 불을 켜는 것이 발생이면 불이 옮겨붙는 것은 전달이다. 인류 대부분의 착오가 발생과 전달을 헷갈린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왜 먼저 발생학과 전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열지 않았느냐다. 신발을 신지 않고 길을 나설 수 없고, 바늘에 실을 꿰지 않고 바느질을 할 수 없고, 음식을 먼저 먹고 난 다음에 나중 조리할 수 없듯이 액션은 수순이 정해져 있다. 초반 빌드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발생학과 전달학에 통달한 다음에 자연발생설을 주장해야 한다.
언어를 똑바로 사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발생이니 창발이나 하는 말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정확하게 계와 밸런스와 축을 논해야 한다.
격발이 먼저다
인류 문명의 토대는 과학이다. 과학의 비빌 언덕은 수학이다. 수학의 버팀목은 인과율이다. 인과율은 결정론적 사고로 발전한다. 결정론이 틀렸다는 사실은 양자역학에 의해 규명되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지축이 틀어졌는데 그대는 잠이 오는가? 인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다시 근본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 변화의 격발.. 열역학 2법칙.. 탄생의 논리
2. 변화의 전달.. 열역학 1법칙.. 전달의 논리
인과율은 변화를 설명한다. 문제는 변화다. 인류는 변화의 격발과 전달을 구분하지 못한다. 격발이 전달에 앞선다. 인과율은 이미 일어난 변화의 전달을 설명할 뿐 변화의 최초 격발지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인과율은 결함 있는 논리다. 변화의 한 부분을 설명하되 사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회피한다. 격발부와 전달부를 구분하지 않고 전달부를 고무줄 늘이듯이 늘려서 격발부를 덮어버린다. 이건 마술사의 트릭이다. 자연발생설이 그렇다. 양질전환의 오류, 무한동력의 오류도 같은 트릭을 쓴다. 거의 모든 거짓말은 구조가 같다. 전달부를 길게 늘여서 격발부를 은폐하고 있다.
인과율은 열역학 1 법칙의 논리일 뿐 2 법칙과는 관계가 없다. 1 법칙이 전달의 논리라면 2 법칙은 발생의 논리다. 그런데 발생이 전달에 앞선다. 발생한 힘을 전달할 수는 있어도 전달된 힘에서 발생할 수는 없다. 불의 발화와 전파는 다르다. 인류는 최초 변화의 발생, 사건의 발생, 힘의 발생을 생각한 적이 없다. 발생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격발하는 것은 계 내부의 밸런스다. 우리는 사물에 주목하지만, 사물은 전달자다. 격발자는 사건이다. 존재의 본 모습은 궁극적으로 사건이고, 사건은 반드시 계가 있고, 계는 닫혀 있고, 닫히면 내부가 있으며 의사결정은 거기에서 일어난다. 내부냐 외부냐가 중요하다. 인류의 사고는 닫힌계 바깥을 주목하는 외부 지향적 사고다. 내부 지향적 사고로 관점을 갈아타야 한다.
양질전환의 오류와 무한동력의 오류는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힘의 발생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힘의 전달을 구분하지 못한 데 따른 착오다. 내부에는 격발자가 있고 외부에는 전달자가 있다. 세상은 외부에서 전달하는 원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내부에서 격발하는 탄생의 집합이다. 원자 중심 전달의 논리에서 구조 중심 탄생의 논리로 사유를 갈아타야 한다.
내부가 먼저다
뉴턴 역학이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99.99퍼센트 정확하게 설명하지만, 100년에 43각초가 틀린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오류를 바로잡았다. 비로소 완벽해졌다. 뉴턴 역학이 거시세계에서 맞는데 미시세계에 안 맞다. 인과율도 대충 맞는데 인류는 그것을 잘못 적용한다. 변화의 탄생과 전달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과율은 전달자의 논리일 뿐 격발자의 논리가 아니다.
구조론 - 내부의 논리, 자궁의 논리, 격발자의 논리
인과율 - 외부의 논리, 아기의 논리, 전달자의 논리
'대재앙이 일어나 인류의 모든 과학 지식이 파괴되고 단 한 문장만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다면 인류를 다시 일으켜 세울 그 한 문장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리처드 파인만의 대답은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자론이 틀렸다. 원자론은 아기다. 자궁이 먼저다. 원자는 중간 전달자다. 최초 격발자가 더 중요하다. 세상일의 99.99퍼센트는 중간 전달의 문제다. 산의 정상처럼 뾰족한 부분이 반드시 있다. 사건은 그곳에서 격발된다. 원자론이 대충 맞지만 거기서 잘못된다.
인과율과 원자론은 연결되어 있다. 인과율이 틀렸으면 원자론도 틀렸다. 인과율과 원자론의 공통점은 외부 지향적 사고다. 심부름하는 중간 전달자는 외부에 있다. 사건은 내부에서 격발되고 사물은 외부에 전시된다. 인간은 자연히 99.99퍼센트를 차지하는 외부를 주목하게 된다. 불이 크게 번져가는 부분만 주목하고 최초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놓친다.
원자는 쪼갤 수 없으므로 외부를 보게 된다. 인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인과 일어난 후의 결과다. 역시 외부를 본다. 원자가 공간의 외부라면 인과는 시간의 외부다.
원자론 - 공간의 외부 전달자 논리
인과율 - 시간의 외부 전달자 논리
모든 것은 사건 내부에서 시작된다. 구조는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다. 보려거든 내부를 봐야 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성질이고 성질은 내부에서 격발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밸런스의 복원력이 성질이다. 그러나 인류는 본능적으로 외부를 본다. 노리개를 보고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외부의 것에 홀리기 때문이다.
인과율은 대충 맞지만 틀렸다. 원자론도 대충 맞는데 틀렸다. 전달에 맞고 격발에 틀렸다. 물질이든 성질이든 의사결정단위다. 의사결정단위는 계를 이루고 계 내부의 밸런스를 작동시킨 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눈으로 뭔가를 봤다면 그것은 사건이 격발되고 한참 진행된 다음이다. 최초 탄생 지점은 볼 수 없다. 자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 없다. 그곳을 꿰뚫어 봐야 한다. 보려고 해야 보인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같은 격발 플랫폼을 공유하므로 하나만 보면 다 보게 된다.
인간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오류는 전달의 논리를 탄생의 문제에 잘못 대입하는 것이다. 인류는 외부 지향의 논리에서 내부 지향의 논리로, 전달자의 논리에서 격발자의 논리로 갈아타야 한다. 중간 심부름꾼이 아니라 최초 명령권자를 봐야 한다.
기능이 먼저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 우리가 물질을 쪼개려고 하는 이유는 객체 내부에 숨은 성질을 찾으려는 것이다. 쪼개지면 한 번 더 쪼개야 하므로 곤란하다. 계속 쪼개고 있을 수는 없고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설정은 편리한 도피다. 더 이상 쪼개지 말자는 담합이다. 비겁한 짓이다.
뒤집어 생각하라. 존재의 출발점은 반대로 어떤 둘이 합쳐서 내부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쪼개면 안 되는 것이다. 쪼개면 상호작용구조 내부가 사라지고, 내부가 없으면 성질이 사라지고, 성질이 없으면 기능이 사라져서 존재가 부정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안 되듯이 원자를 낳는 자궁을 쪼개면 안 된다.
틀린 생각 -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
바른 판단 - 탄생의 자궁을 쪼개면 안 된다.
도미노가 쓰러지는 원인을 찾기 위해 각각의 도미노를 쪼개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 게 아니고 쪼개봤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는 중간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심부름꾼을 닦달해봤자 의미가 없다. 최종보스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찾으려는 우주의 바탕은 인간의 쪼개는 행위와 상관없다. 우리가 찾는 것은 성질이고, 성질은 닫힌계 내부에 있고, 내부를 가진 것은 자궁이다. 그것은 의사결정의 단위다. 그것은 쪼개지거나 합쳐지는 것을 결정하는 조절장치다. 계 내부의 밸런스가 코어를 움직여서 사건의 연결과 단절을 결정한다.
인류문명의 두 기둥은 인과율과 원자론이다. 그런데 틀렸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얼추 맞다. 그것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사유의 빌드업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문명의 첫 단추를 다시 끼워야 한다. 사유의 최초 출발점을 다시 정해야 한다. 그것은 중간 전달자 논리가 아닌 최초 격발자 논리다. 인과율과 원자론은 전달자 논리다.
공간의 원자 개념과 시간의 인과 개념을 통일하는 더 높은 단위의 논리는 사건의 논리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태초에 아기는 없었고 탄생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태초에 자궁이 있었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아기의 존재는 그다음의 일이다. 이후 모든 것은 최초의 사건을 복제한 것이다. 우주는 한 번 탄생했고 생명도 한 번 탄생했다.
원자론과 인과율은 탄생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공간과 시간으로 쪼갠 결과다. 쪼개면 안 된다는 아이디어에서 원자론이 나왔는데 그래 놓고 쪼갠다면 모순이다. 복원해야 한다. 쪼개진 원자와 인과를 도로 합치면 그것이 구조론이다.
원자 개념은 편의적인 설정이다. 원자가 있다고 가정하면 이해가 쉬운데 사실과 틀어진다. 건물은 벽돌로 짓는다. 건축자재는 외부에서 들여온다. 원자는 벽돌과 같다. 원자를 쌓아서 우주를 짓는다. 그러나 생명은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은 스스로 건축한다.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고 내부에서 낳는다. 외부 지향적 사고를 버리고 내부 지향적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구조다. 구조는 쪼개고 합쳐지는 것을 결정하는 의사결정의 단위다. 구조가 성질을 만든다. 성질이 물질에 고유하다는 생각은 틀렸다. 성질은 언제라도 조절된다. 성질을 조절하는 것은 객체의 기능이다. 우리가 최후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존재의 기능이다. 객체에서 기능을 찾았다면 다 찾은 것이다.
구조는 기능의 집이다. 기능은 구조 속에 있다. 구조론은 기능론이다. 기능은 조절되므로 우리는 거기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기능을 조절하여 악사는 연주할 수 있고, 건축가는 지을 수 있고, 포수는 명중할 수 있고, 선수는 이길 수 있고, 화가는 그릴 수 있고, 학자는 규명할 수 있고, 당신은 창의할 수 있다.
어떤 주장이든 내부에 기능이 없으면 가짜다. 내부에 조절장치가 없으면 거짓이다. 괴력난신이든 외계인이든 음모론이든 사차원이든 초능력이든 사이비종교든 정치적 극단주의든 그러하다. 모든 거짓말은 내부에 기능이 없고 조절장치가 없다. 극우가 극으로 가고 극좌가 극으로 가는 것은 조절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조절장치 없이 무한으로 발산되는 것은 죄다 거짓말이다. 4차원 위에 400차원 있다. 사상의설 위에 8상의설, 16상의설, 32상의설 있다. 지구 공동설 위에 화성 공동설 있고, 초고대 문명설 위에 초초고대 문명설 있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환빠의 기세를 멈출 수 없다. 적절히 닫아주는 뚜껑이 없으면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