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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登科 亡身煞
張鎭源
1. 글을 시작하며
지금도 어느 산골 절간이나, 혹은 쓸쓸한 讀書室에서 밤을 낮삼아 冊과 씨름하고 계실 많은 同途學兄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이러한 合格記 쓴다는 것이 얼마나 그분들께 부끄러운 일인가 스스로 反省하면서, 그저 그분들의 따뜻한 諒解있으시기만 빌어 마지 않는다. 한편의 詩나 小說이 그러하듯, 筆者 스스로의 피맺힌 체험과 여기서 나온 절규가 아니고서는 共感을 얻을 수 있는 合格記를 쓴다는 것이 거의 不可能한 것인데, 남다른 체험이나 苦痛을 특히 겪었다고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글의 벽두부터 迷路를 헤메는 듯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II. 永遠한 自由에의 念願
大學一年生, 그것은 곧 自由요 浪漫이요, 구김살 없는 푸르름이었다. 四月은 Meeting속에서, 5月은 Bacchus의 祝福을 받으면서, 高校3年間 끊임없이 억제되어 왔던 우리의 ego는 그야말로 新天地를 만난 듯 草原의 情겨움 속에서 마음껏 활개를 쳤다.
大學의 이념이 自由라는 것만 알았을뿐 그 뒤에 숨은 自己責任의 眞理를 認識하지 못했다.
大學에서 처음으로 받아 본 成績表는 나에게 크나큰 失望을 안겨 주었다. 더구나 法大를 志望하고 있던 나에게 있어서, 간신히 學士警告를 면한 그 성적은 無事와 安逸의 奈諾에 빠져있던 나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뒤 간신히 法大에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이때의 唐慌스러웠던 記憶은 언제나 하나의 敎訓으로 내 마음속에 간직될 것이다.
어쨌든 大學1年時節은 3年間의 壓迫으로부터 풀려난 환희의 時節이었고 두려움없이 人生을 바라보았던 自由의 季節이었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순수의 나날이었다.
III. 마이웨이(My Way)
2학년 2학기 때 法大로 進入하게 되면서 系列 때 時間만 때운 憲法學槪論, 民法總則, 刑法總則을 대강 훑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考試에 대한 抽象的인 計劃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윤곽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처음으로 맞는 大學祝祭(1學年 때에는 데모로 祝祭가 없었음)에 빠질 수 없었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S와 만나게 되었고, 처음으로 사귀게 된 女子인 S와의 만남 속에서 工夫는 희미한 옛 追憶처럼 멀어져 갔다.
學年末試驗 끝나고 방학이 되자 주위의 期待와 눈초리를 견딜 수 없어 工夫를 한답시고 한 보따리 冊을 싸들고 大邱에 계신 三寸댁으로 갔다. 滿遡이 되어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叔母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빨래에 방청소까지 시켰으니 그때 叔母의 말 못할 苦生은 어떠하였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나 염치없었던 것 같아 절로 낯이 붉어진다. 그나마 目標한 工夫의 성과도 없이 敗殘兵처럼 한 달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주위에 대한 體面도 그렇고 S에 대한 관계에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考試雜誌에 나온 廣告를 보고 모 讀書室을 찾아 갔다. 잠은 讀書室에서 考試生들을 위해 마련한 旅館房에서 자고 工夫는 讀書室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計劃이나 目標를 세우지 못한 나는 하루종일 房에서 뒹굴다가 저녁때는 집에 가서 밥이나 가져오는 것으로 時間을 때웠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開學날이 닥쳐왔다.
讀書室에서 같이 工夫하던 다른 兄들은 모두 18回 司試 1차試驗에 對備하여 着實히 工夫하고 있었는데, 願書만 내놓은 채 時計불알처럼 讀書室과 집 안을 왔다 갔다하던 나는 法哲學이나 國際私法한 번 읽지 못한 채 경험이라도 얻으라는 학형들의 권고로 마지못해 1차試驗을 치루었으나 좋은 結果가 나올리 없었다.
IV. 大學의 理念과 現實의 葛藤 속에서
3학년이 되어 學校에서 친구들을 대하면서 무언가 모를 壓迫感이 자꾸만 나를 다구치는 것 같았다. 내가 허송세월만 보내는 동안 그들은 얼마나 나를 앞질렀을 것인가 하는 不安感에 사로잡히게 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의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不安感은 점점 잊혀져 갔고 나는 또 게으론 生活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때까지 民法總則을 겨우 2回讀, 商法1回讀, 憲法1回讀, 刑法1回讀 정도가 고작이었고, 行政法이나 訴訟法은 펴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法大는 단순한 考試學院이 아니라는 敎授님의 말씀이 大學의 한 理想과 눈앞에 가로놓인 現實속에서 精神的으로 나를 仿徨케 했다. 더구나 姜求眞敎授님의 “少年登科 亡身煞”이라는 말씀이 나를 考試에만 얽매일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學年初에 高等學校 先輩, 同窓들과 어울려 公法學會를 組織하여 憲法과 行政法을 中心으로 學問的 硏究를 해보려고 하였다. 물론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學會의 先輩가 없었고, 우리들 自身은 아직 法學에 대한 初步의 段階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도 사정은 전혀 동일하지만 어떤 깊이 있는 토론이 오갈 수 없었다. 敎授님들의 反應도 과히 좋은 편은 못되었다.
2學期가 되자 公法學會 會長職을 맡고 있던 高等學校 1年先輩되는 0兄이 나에게 대신 會長職을 맡아서 大學祝祭 때 模擬裁判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自身은 行政高試가 임박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리였다. 왜냐하면 模擬裁判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적어도 한 달 이상의 準備를 하여야 하는데 祝祭日字가 약 한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工夫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보름 정도였고, 둘째 경험 있는 先輩가 없었고, 세째 敎授님께서도 바쁘신 나머지 積極的인 後援을 하실 수 없었고, 네째 個人的으로 別로 알려지지 않았던 내가 會長으로서 會員을 團結시키는 데도 숱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名色이 서클활동을 한다면서 模擬裁判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것도 問題가 없는 것은 아니며, 또한 내년 19回 司試를 생각해서는 몸을 사리는 것도 賢明한 方法이겠지만, 그야말로 大學이 考試學院이 아닌 다음에야 考試 때문에 學會活動 한 번 제대로 못했다는 것도 語不成說이고 하여 생각 끝에 무리를 해서라도 模擬裁判을 强行하기로 決心하였다.
그래서 가장 친했고 또 高等學校부터 同窓이기도한 O君의 有力한 도움과 마음씨 좋은 몇몇 친구들의 협조로 模擬國會 常任委員會라는 이름으로 行事를 치루게 되었다. 準備期間에 비해 內容은 알찬 바 있었지만, 觀客動員에 있어서는 별로 成功을 거둔 편은 못되었다.
行事가 끝나고 그럭저럭 終講이 되자 비로소 19回 司試에 대한 具體的 計劃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4달 동안 工夫해서 合格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고, 다만 最善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략 하루에 15시간 정도 공부할 수 있었지만, 行政法이나 商法은 味知의 分野가 많았기 때문에 豫想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1次는 작년에 공부한 것도 있고 하여 보름 정도 期間을 잡고 나머지는 全部 2次에 投入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도 실은 무리였다. 1차試驗 바로 전날까지도 시간이 모자라 쩔쩔매었고 결국 英語, 刑法, 憲法, 民法은 特別히 더 공부하지도 못한 채 1차試驗에 應하게 되었다.
두 번째 대하는 試驗場이라 조금은 낯이 익어서인지 별 어려움 없이 問題를 풀 수 있었으나 英語는 豫想보다 어려워 매우 당황했다. 그저 1차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생각밖에는 들 수가 없었다.
3月26日이었던가, 동네 꼬마를 시켜서 新聞을 사오게 하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사온 신문을 펴 보니 내 이름과 수험번호가 눈에 띄었다. “휴, 일단 체면은 세웠구나”하는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2차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다만 最善을 다하기로 했다.
첫날 國史試驗은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를 논하라는 問題와 開化期以後 日帝侵略過程을 說明하라는 問題가 출제되었는데, 첫 번째 問題는 自信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리라고 생각하고 부담감없이 써 내려갔다. 두 번째 문제는 비교적 잘 썼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둘째날 行政法問題에서 한마디로 피를 보았다. 2問의 2 “財産權의 制限과 그 補償”이란 問題였는데 이는 昨年에 學會에서 模擬裁判의 主題로 다룬 問題였음에도 不拘하고 大失敗를 犯하고 말았다.
그래도 끝까지 쳐야겠다고 마음먹고 마지막날까지 試驗場에 나갔고 특히 刑法은 期待이상의 成績을 올렸다.
그러나 結果는 力不足이었고 平均 1.33의 차이로 고배를 들고 말았다.
V. 過信의 나날들
平均 1.33의 차이는 事實 큰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1년이라는 기간이 남아있다는 생각과 아직은 在學中이라는 安堵感, 그리고 특히 시력이 나빠 군 소집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大學院 試驗負擔이 없었고 또 1차負擔도 없다는 有利함이 나를 過信속으로 몰아 넣었고 나는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이리저리 徘徊하면서 잡담과 運動(體力단련이라는 名目으로) 금싸라기 같은 時間을 허비하였다.
夏期放學 때는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지만 워낙 날씨가 더워 낮에는 高大 圖書館이나 學校도서관에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줄곧 安易한 생각은 버릴 수 없었고 解弛된 狀態에서 더위를 克服하고 工夫를 하기란 사실상 不可能했다. 더구나 여름이 끝날 때쯤 해서는 아무래도 남들 가는 바캉스 한번은 다녀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心氣一轉이라는 名目으로 2박 3일 코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결국 3학년 때보다 工夫를 더 못한 結果가 되고 말았다.
개학이 되어 學校에 나갔으나 講義室은 빈 자리가 많았다. 그래도 例年에 비해 出席率은 꽤 높은 편이었고 나도 마지막 學期였기 때문에 充實히 授業을 들으려고 했다. 授業時間 外의 時間은 그렇게 熱心히 活用하지 못했다. 途中에 아르바이트도 한달가량 해보았다. 11月이 되어 中間고사가 끝나자 무언가 모든 不安感이 나를 사로잡았고 쫓기는 사람처럼 計劃表를 作成하고 可能性을 타진해 보았다. 앞으로 約 5個月餘 그나마 學年末考査니, 卒業試驗이니 해서 學校에 나갈 시간을 빼면 約 4個月餘 그래서 일단 대강의 계획을 세우고 細部的인 計劃은 卒業試驗이 끝난 뒤에 세우기로 했다.
終講이 되자, 本格的으로 計劃을 세우고 工夫에 들어갔다. 1月末까지 全 科目을 精讀하고, 3月中旬까지 Subnote整理를 完成하고 試驗볼 때까지 정리한 것을 3讀하기로 했다. 그러나 時間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 있어 이 계획은 中間에 修正되었고 精讀과 Subnote를 동시에 3月初까지 하기로 했다. 1坎計劃은 順調롭게 진행되었으나 Subnote 정리 이후의 3回讀計劃은 2回讀으로 끝났고 특히 마지막 1週日間의 總整理計劃은 目標에 크게 미달되었다. 工夫시간은 대략 하루에 16시간 정도, 많이 하는 날은 17시간까지 적게 하는 날은 14시간 정도였다. 途中에 포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高校 후배들에 뒤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과 주위의 期待에 부응하여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危機를 克服해 나갔다.
첫날 시험은 順調롭게 치른 편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둘째 날 商法試驗에서 또 苦杯를 드는 것 같았다. 1問이 "發起人組合과 설립중인 會社"였는데 發起人 組合을 엉뚱하게 記述했다. 단답식 문제는 그런대로 잘 쓴 편이었으나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그 생각이 떠올라 다음날 工夫가 잘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至誠으로 절(道詵寺)에 다니시며 부처님께 祝願하시는데 어머니를 볼 면목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서 말 수는 없다. 부둥켜 안고라도 가야지, 제발 科落만 나오지 말아다오라고 기원하면서 마지막날까지 試驗을 치루었다. 試驗이 끝났을 때의 기분으로는 商法에서 科落만 면한다면 合格할 수 있다는 氣分이었다.
VI. 과분한 榮光
초조한 가운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갔다. 緊張을 이기기 위해 친구더러 Meeting을 주선하라고 했다. 그럭저럭 발표날은 다가왔고 어느 정도 합격을 확신하면서도 스쳐드는 일말의 不安感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發表 이틀 앞두고 나는 C와 함께 모레스토랑에서 며칠 전 Meeting에서 만나게 된 H와 野遊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약30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조용한 레스토랑의 정적을 깨뜨리는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원아! 너, 너, 붙었어”
돌아다 보니, O와 J가 흥분된 표정으로 서 있는게 아닌가. 고시잡지사에 전화를 해보니 이름이 있어 즉시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의 그 興奮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O와 J의 그 표정, 그리고 그 레스토랑의 불빛을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날은 정신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이미 전화 연락을 받으시고 너무 기뻐 얼마나 우셨던지 눈이 퉁퉁부어 계셨고 나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통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하나의 고비를 넘는 가쁜 환희의 순간-그것은 잠시 적막의 순간이었다.
ⅦI. 남기고 싶은 말들
熱風은 지나가고 이제 어느덧 거리엔 낙엽도 다 지고 찬바람에 외투깃 올리는 계절의 앞에 섰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이 작은 榮光은 결코 나만의 努力에 의한 報償은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호와 어머님의 精誠이 없었던들 오늘 이런 結果는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들의 실력과 誠意로 充滿된 講義가 없었던들 그 瞬間이 이렇게 빨리 도래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아버님과 고모님들의 後援이 없었던들 이러한 結果는 도래하지 아니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분들께 眞心으로 머리 숙여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이제 나는 나의 길을 가겠지만, 내자신이 과연 앉을 자리에 앉은 것인지, 아직도 나는 서 있는 사람인지 자신은 없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희미한 미래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더듬어 나간다는 것 뿐 ─ 다만 언제나 "少年登科 亡身煞"이라는 말을 敎訓삼아 스스로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끝으로 이 榮光을 함께 나누지 못한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길 없다. 오늘도 희미한 불빛 아래서 고독과 싸우며 精進하고 있을 吳, 林, 安, 鄭, 外試의 金, 行試의 鄭, 會計의 崔 모두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合格의 영광이 찾아와 함께 푸른 하늘을 향해 마음껏 破顔할 수 있기를 바란다.
略歷
◇ 慶北出生
◇ 서울大 法大 卒
◇ 第21回 司法試驗合格
출처: 고시를 향한 집념, 법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