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예찬
정현수
'아! 나는 행복하다.'
뿌듯함이 꽉 찬 마음으로 햇살이 가득히 들어오는 오전의 한때, 커피 한 잔의 여유와 이 가을에 따스한 햇볕의 포근함을 즐기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출근 시간을 저녁으로 옮기고 내가 필요한 나만의 글 쓰는 시간을 갖게 됨은 설레다 못해 차라리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린다.
소박하고 부러움 없는 아침과 점심 겸의 브런치와 함께, 입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케냐의 더불 A의 아라비카 커피의 맛과 향이 풍부하게 다가오고, '쇼팽'의 은은한 피아노 선율은 나를 전율케 한다. 감성 짙은 레드 빛 머그잔 속의 커피를 입안에 머금었을 때, 아로마의 향미가 코와 혓바닥, 목구멍을 통해 느껴지는 미감은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최고의 향이고 맛이다. 방랑자가 여정의 끝에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안정을 취하는 여유로움이고, 그 순간 작은 행복의 가치가 충분히 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바흐'도 커피를 애음했지만, 많은 명곡을 쓴 '베토벤' 역시 커피 광이었다. 그는 간단한 빵과 온숙 달걀, 그리고 커피 한 잔이면 하루 종일 배고픔을 잊었다 한다. 한 번 마실 때마다 한 콩 한 콩 세어 정확히 60알의 원두를 직접 갈아서 약처럼 애음했다 한다. 그는 산보를 나갈 때 가는 곳은 주로 카페였다. 잃어가는 청각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많은 불후의 명곡을 쓸 수 있도록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커피뿐이었다.
시, "가을의 기도"를 쓴 시인 '김현승'은 시의 맛이나, 커피의 맛이나, 고독의 맛은 똑같은 맛이라고 정의했고, '이상'은 커피를 너무나 좋아해 다방을 4개나 운영했으며, 그중 하나를 그의 연인 금홍에게 운영하게 해서 자기 승화를 노래한 그 유명한 단편 소설 "날개"를 탄생시켰다.
커피로 인한 나의 글 작업도 어떤 현상과 자극을 준다. 마심으로써 생리적으로 끌리는 그냥 기본적인 욕구보다는 샘물처럼 차오르는 어떤 의욕을--막 글을 쓰고 싶다거나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하는 촉매제 같은--용솟음치게 한다.
한밤에 덕수궁 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돌담과 가로수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어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까지 걷다가 다시 길을 되돌아 정동 극장 앞 카페에서 다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구석 자리에 앉아 마냥 상념에 젖는다. 제발 아무런 간섭 없이 그저 두 시간만 처절한 고독 속으로 나를 빠뜨리고 싶다. 마력이 있는 이 요술쟁이 커피는 와인처럼 나를 도취 상태로 빠져들게 하고 몽상가처럼 침묵으로 젖게 한다. 센티에 빠지는 이 시간 만은 커피의 쌉쌀한 목 넘김 만이 나를 자극할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커피와 고독과 함께 나를 애잔하게 한다. 내가 선택해야만 했던 지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원인은 원인을 낳고 그 원인은 또 다른 원인을 낳듯이 꼬리가 꼬리를 물고 흑갈색 커피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곧, 또 한 모금의 커피는 나의 심적 고통을 달래주듯 또 다른 상상력을 펼 수 있도록 약간의 여유도 가지게 한다. 매일 같은 꿈을 꾸고 그 꿈이 악몽(?)이라고 생각되는 나는 꿈속에서 보는 어떤 여인이라든가, 산속의 전나무 숲, 또한 언덕 위의 작은 집 등이 파노라마같이 펼쳐지는 것은, 입안 가득히 남았던 쌉쌀 달콤한 기억의 후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도 펴 본다. 커피와 고독은 환상의 조합이고 멋진 어울림이다.
그리움이 묻어날 때 생각나는 그 여인을 빗대어……
내 빈 마음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못하고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있습니다
선뜻 다가온 당신은 애틋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당신의 청순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당신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이제는 당신 생각에 빠지다 못해 처절함에 있습니다
아! 암흑 속에 검은 베일을 휘감은 당신의 자태는 진정 어떤 모습입니까?
연기가 베어 든 스모키 한 불가리의 진한 향수 같은 당신의 내음은 안개에 싸인 듯합니다
감히 근접을 허락지 않고 당신의 옅은 미소만큼 쌀쌀한 냉정은 그대의 쓰디쓴 쌉쌀함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 당신의 향수와 그윽함을 느끼려 합니다
나는, 그 욕구를 더는 참지 못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천천히 천천히 조심스레 포옹하려 합니다
당신의 달콤한 귓속말의 유혹은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퍼져오는 짜릿한 전율은 순수한 상큼함입니다
그래서 내 눈은 힘없이 스르르 풀리고는 하지요
'탈레랑'의 찬미처럼,
'당신은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같이 뜨겁고,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키스와 같이 달콤하다'
함은, 이제는 멀리할 수 없는 진정 내 사랑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언제까지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그 자리에 만 있어줘요
당신의 쌀쌀함에 내 스스로 멀리 갈까 두려운 나는 당신의 그윽한 향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변함없는 냉정을 느끼며, 진한 흑갈색의 어두움만 음미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긴 여행에 지친 나는 한 잔의 쓴 커피와 함께 깊은 사색에 빠져 오랜 그리움에 젖고 싶다. 나는 노스탈자와 같은 마음으로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고독을 느끼고 싶다. 커피의 진한 향과 쌉쌀한 맛이 오래 혀에 감돌며 자극적인 목 넘김이 나를 허전하게 하고, 종내에는 가슴을 메이게 할지라도 나는 그것, 그 순간을 즐기고 싶다. 스피커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 중 "잠자리에 들며"가 커피의 맛을 더 진하게 하고, 아리게 느끼어 온다. 그 고독은 사랑과 갈등, 그리고 온몸에 휩쓸리며 한 번에 밀려오는 연민으로 나를 못 견디게 하고 고뇌에 이르러, 이 한 밤을 새울지라도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기를 청한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의 탄 듯한 진한 향과 쌉쌀함 끝에 오는 단 맛, 그리고 깊은 사색으로……
잠 못 이루는 이 한 밤, 한 잔의 커피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2012.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