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곡지
푹 안기고 싶은 곳이 있다. 분위기가 주는 안온함이 있으면 더 그렇다. 겨울의 두 번째 절기가 지났지만, 가을이 여기저기서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오후다. 몇 번 갔던 곳인데 가는 가을을 붙잡고 싶은 심사 때문인지 발길이 그리로 향했다. 경산시 남산면 반곡리에 위치한 반곡지다. 전국에는 반곡지란 이름을 가진 저수지가 여러 개 있다. 또 이름은 같지 않아도 비슷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저수지도 있다. 반곡지와 비슷한 주변 환경을 가진 곳은 아마도 청송의 주산지가 아닐까?.
성인 세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여 경산을 삼성현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반곡리 뒷산이 바로 세 성인과 관련이 있는 삼성산이다. 삼성산 아래 포근히 자리한 반곡지에는 물과 왕버들 그리고 하늘이 고요히 담겨있다. 저수지 가운데와 가장자리 두어 곳에 청둥오리 떼가 가는 가을이 아쉬운지, 오는 겨울이 반가워서인지 물 위에서 풍광을 그리느라 분주하고, 한 줌 바람이 왕버들 가지를 맴돌고는 저수지 위로 내려앉는다. 삼성산 자락의 갈색의 나무들은 반곡지에 푹 빠져있다. 저수지 주위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은 왕버들의 배경으로 연신 셔터를 누른다.
반곡지는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선정되었고, 2013년 안전행정부 “우리 마을 향토 베스트 30선”에 선정된 곳이다. 봄이면 도화(桃花)가 물속에서 피어난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봄이면 연두색, 여름이면 녹색의 왕버들이 싱그럽다. 가을이면 갈색의 산들이 저수지에 몸을 담그고, 겨울이면 야윈 왕버들 가지에 내려앉는 백설은 어느 캔버스에 담아도 손색이 없는 비경이다. 그러기에 2012년 MBC 사극 “아랑사또전”, 2012년 KBS 사극 “대왕의 꿈”, 2014년 “허삼관매혈기”의 촬영지가 되었던 곳이다.
따사로운 햇살을 등에 지고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반곡지를 한 바퀴 돌았다. 왕버들 몇 나무는 물속에 담긴 가지 때문인지 시린 몸을 떠는 듯하고, 그 가지 위로 윤슬이 영롱하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순간,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물속에 잠긴 산속에 내가 있기도 하고, 물 위를 편안히 유영하는 오리가 되기도 한다. 다시 눈을 깜박거리면 초록이 지쳐가는 왕버들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한 마리 새가 되기도 한다. 분위기가 주는 행복함이다. 다시 눈을 뜨고 몽환의 반곡지를 가슴에 담아 본다.
주위의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유심히 보면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귀를 열고 시선을 맞추고, 입은 잘 열지 않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 반대다. 처음 사람을 만나면 팔짱을 끼고 마음의 빗장을 쉬이 풀지 못하는 답답이다. 어떤 말은 아예 무시하고 때로는 골라 듣기도 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마음 문이 열리면 깊이도 모른 채 빠져들고 마는 괴팍스러운 못난이다.
마지막 가을이 지쳐가는 오후, 주변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품어 안은 반곡지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너그러움이 어떤 것인지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산을 품듯, 왕버들을 품듯, 한 점 더하거나 빼지 않고 추색을 고스란히 품은 반곡지를 떠올리며 작은 가슴을 좀 열어야 하리. 풍광이 아름답고 편안하여 푹 안기고 싶은 곳이 있듯이, 나도 누군가가 푹 빠지고 싶어지는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늦은 가을, 반곡지에 어리석은 질문 하나를 던지고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