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생각하기를 고려 말의 문장과 도덕을 갖춘 인물들이 나왔으니, 김부식(金富軾)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 목은(牧隱) 이색(李穡) ·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등이 중국에 들어가 원대(元代)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이로부터 정주(程朱)의 이학(理學)이 동방에 점점 전해져서 조선 시대에 도덕철학 사상을 크게 펴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서 명현(名賢)과 대덕(大德)들이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선생은 진현관(進賢館)의 대제학(大提學)으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두문동 72현의 한 분〉 여러 현인(賢人)과 뜻을 말하기를 “백이(伯夷)는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데, 우리가 어찌 옛사람에게 많이 양보하겠소?”라고 하고는 드디어 정선의 서운산에 은둔했다.
매월 삭망(朔望)으로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개성을 향해 통곡하고는 시를 지어서 말했다.
“요순의 시대가 머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꼿꼿이 서산을 바라보며 속진(俗塵)을 벗어나리.”
삼가 생각건대 이 채미헌(採薇軒)공께서는 나의 방조(傍祖)이며, 목은 이색은 표숙(表叔)으로, 문학과 절의에서 참으로 철리(哲理)도학(道學)을 얻었고, 항거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니, 참된 은일(隱逸)과 맑은 덕이 백대(百代)를 풍미하도다. 참으로 존경할 만하도다!
[原文]
又按麗季 文章道德輩出 如金富軾 李益齋(齊賢) 李牧隱(穡) 全菊坡(元發) 入仕中國 爲元翰林 自是程朱之理學東漸 丕闡哲理道德思想 於李王朝朝鮮時代 名賢碩德 於斯爲盛
全採薇先生〈五倫〉 以進賢館大提學 入杜門洞〈七十二人〉 與諸賢言志曰 伯夷採薇而餓死 吾輩曷嘗多讓於古人哉? 遂隱旌善瑞雲山 每朔望具朝服望松京痛哭 詩曰 唐虞世遠吾安適 矯首西山繼絶塵
謹按 此採薇公 亦余之傍祖也 爲李牧隱之表叔 而文學行義誠有得於哲理道學 抗節不屈 眞逸淸德 可風百代 旴可欽哉!
◎ 채미헌 전오륜(全五倫, ?~?)
형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역임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가 정선으로 거처를 옮겨 서운산(瑞雲山)으로 들어가, 정선 전씨 채미헌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 矯首
고개를 꼿꼿이 세움, 머리를 듬
唐 杜甫 「又上後園山腳」詩
窮秋立日觀 矯首望八荒
2. 의기양양한 모습
晉 葛洪 『抱撲子 名實』 至於
駑蹇矯首於琱輦,駥驥委牧乎林坰 彼已屍綠 邦國殄瘁 『漢語大詞典』 참조
[출처] 완역 정신철학통편 [전병훈 저, 임채우 역 출판사 인월담]
◎ 국파 전원발 [ 全元發 ]
고려 말~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龍宮)이다. 증조부는 전법총랑(典法摠郞) 전충경(全忠敬), 조부는 판도총랑(判圖摠郞) 전대년(全大年), 부친은 전진(全璡)이다. 고려 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 집현전 태학사가 되었으며, 영록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귀국 후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용궁의 소천서원에 제향되었다.
1342년 전교부령 직보문각(直寶文閣)을 역임하여 <법주사자정국사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師普明塔碑)>의 비문을 썼다. 글씨를 잘 썼으며, 안진경의 서체에 소식의 획법이 가미된 고려 말의 전통 서법을 따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 김부식 [ 金富軾 ]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지냈고 묘청 등의 서경천도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을 지휘하며 난을 제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부식 [金富軾]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이제현 [ 李齊賢 ]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1287년(충렬왕 13)에 출생하여 1367년(공민왕 16)까지 활동한 인물로 당시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더불어 해박한 식견은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사회에서 이미 존경받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100여 년간에 걸친 무인(武人) 지배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련의 시기였다. 이제현은 이러한 시기에 수차에 걸쳐서 원을 왕래하기도 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원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이제현 [李齊賢] - 원 지배기에 고려를 지킨 정치가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 이색 [ 李穡 ]
고려 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방 폐지, 3년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한림학사 [ 翰林學士 ]
정4품으로 정원은 2인이었다. 문한 관서(文翰官署)로는 한림원·사관(史館 : 春秋館)·비서성(秘書省)·보문각(寶文閣)·동문원(同文院)·유원(留院 : 御書院)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림원이 으뜸이었다.
따라서 한림학사 또한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으니, 이규보(李奎報)는『동국이상국집』에서 ‘한림원은 지밀(至密)한 위치이고 학사는 높은 벼슬’, ‘학사는 내한(內翰)의 왕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 ‘학사는 내상(內相)의 높은 자리’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명을 받들어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과거를 관장하며 서적을 편찬하고,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왕에게 강의하고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왕의 거동에 시종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관원 중 정예 가운데 정예였으므로, 한림학사를 역임한 자 중 약 7할이 재추(宰樞)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사림원으로 개칭하면서 정3품으로 올렸으며, 다시 문한서(文翰署)로 개칭할 때 학사를 고쳐 사학(司學)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림학사 [翰林學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曙宇 全秉勳 像
著精神哲學通編
首章天符經記載
中國碩學康有爲
大讚比周易理極
簡明弘益人間主
體思想世界平和
萬邦統一必時到
來
서우 전병훈 상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을 저술하셨으니
제일 첫 장에 천부경(天符經)을 기재하였도다.
중국 석학 강유위(康有爲)가
‘주역의 지극한 이치와 비견될 정도이다.’라는 큰 찬사를 올렸다.
홍익인간의 주체사상을 밝히고
세계평화와 모든 나라가 문화적으로 통일됨이
반드시 올 것이라 하셨다.
[사진제공] 임채우
◎ 캉유웨이 [ 康有爲 ]
자 광하(廣夏). 호 장소(長素). 별명 조이(祖詒). 광둥성 난하이현[南海縣] 출생.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전통적인 유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공양학(公羊學)을 배우고 널리 유럽의 근대사정도 익혔다. 그 무렵에 격렬해진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떠서, 중국에도 국회를 열고 헌법을 정하여 입헌군주제로 하는 정치적 개혁[變法自疆]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고향에 사숙(私塾)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열고 량치차오[梁啓超] 등을 교육하는 한편, 황제에의 상서(上書)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그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은 제사(帝師)인 옹동화(翁同龢 )를 통하여 광서제(光緖帝)에게 받아들여져 무술변법이라 불리는 개혁을 지도하였다.
과거(科擧)의 개정, 실업의 장려, 부정 관리의 정리 등, 그 내용은 시대의 조류에 알맞은 것이었으나 개혁의 추진력이 궁정 내의 일부에 한정되었고, 국민과의 광범한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00일 변법’이라 불리고 있듯이 불과 100일쯤 뒤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배반으로 실패로 끝나고, 서태후(西太后)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모든 것을 원상대로 환원시키자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보황회(保皇會)를 설립하여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틈타 선통제(宣統帝)의 복위를 꾀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차차 쇠퇴하여 쑨원[孫文] 등의 혁명파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등 많은 저서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캉유웨이 [康有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