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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봉(羅海鳳) 연보
나해봉(羅海鳳; 1584년 선조 17년~1638년 인조 16년; 향년 55세)
조선 시대 중기 문신·시인
경기전참봉·별제·별좌 역임
조선 시대 나주 지역 의병장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서정시인
조선 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자 응서(應瑞)
호 남간(南磵)
부 궁궐도감 나덕양(羅德讓)
처 이곤(李坤)의 여식 이(李) 씨
5형제의 넷째 아들
1남 형 나해룡(羅海龍)
2남 형 나해붕(羅海鵬)
3남 형 석호공 나해구(羅海龜; 1581년~1660년)
4남 나해봉 본인
5남 동생 나해학(羅海鶴)
자녀 5남
첫째 아들 나준(羅俊)
둘째 아들 나휴(羅休, 처 김운해(金運海)의 여식)
셋째 나임(羅任)
넷째 아들 나탁(羅倬)
다섯째 아들 나인(羅仁)
강항(姜沆)·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584년 조선 시대 중기 선조 17년 갑신년 전남 나주시 금계동 117번지 출생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당시 피란 생활
1605년 선조 38년 22세 사마시 합격
1606년 선조 39년 병오년 23세 진사시 합격(증광시(增廣試) 진사)
1617년 광해군 9년 별시 문과 장원(정론(正論)이라는 이유로 시관 권진(權縉)이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 나해봉이 과거 시험 차 상경해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유배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려다 거부된 후 귀향
1623년 인조 1년 인조반정 때 경기전참봉 제수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당시 나주 공관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격문 「토역괄모의격」(討逆适募義檄)을 돌리고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출정했고, 난 후에는 의병청을 해산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나주 공관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주 출정
1629년 인조 7년 46세 동당 별시 급제, 종6품 숭의랑수성금화사 별제; 계곡 장유가 안정 나 씨 나만갑(羅萬甲)을 구하려다 나주목사로 좌천되면서 나주의 나해봉과 교유하고 나해봉의 첫째 아들 나준의 학업을 도움.
1632년 49세 정5품 별좌
1634년 인조 12년 둘째 아들 나휴(羅休)가 편집해서 『남간집』(南磵集) 간행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 격문 「토노적모의열읍격」(討奴賊募義列邑檄)을 돌리며 나주 지역 의병장 활동; 금은(錦隱) 홍적(洪適; 1595년~1647년)이 나해봉과 나해륜 형제 의병장 및 남간 나해봉과 계수(溪叟) 나준(羅俊; 1608년~1677년) 부자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후에 계간사에 나해봉, 나준과 함께 추배
1637년 1월 30일경 인조(仁祖)의 항복으로 병자호란 종결, 바다 유람
1638년 5월 28일 남간정사(南磵精舍; 전남 나주)에서 서거, 향년 55세
1640년 인조 18년 나해봉의 사돈 벽류(碧流) 김운해(金運海)가 벽류정(碧流亭)을 건립하고, 이 정자에 남간 나해봉의 시 「벽류정」(碧流亭) 편액
1659년 12월 22일 사촌 형 나해륜 사망, 향년 77세
1790년 정조 14년 나주읍성 금계동 서문 밖에 사당 계간사(谿磵詞) 창건하고 남간 나해봉과 계곡 장유 2위 배향
1799년 정조 23년 6세손 나학신(羅學愼) 편 『남간집선』 2권 2책 간(규장각 소장); 『계간수창』(谿磵酬唱)을 후손들이 목판본 1책으로 간행(장서각 소장)
1826년 순조 26년 나해봉의 첫째 아들 나준과 홍적 4위를 계간사에 추배
1833년 나해봉 찬 『남간집선』 권1~5가 후손들에 의해 간행됨.
1863년경 조선 시대 후기 철종조 『열성어제』(列聖御製) 권66~100 『헌종대왕시문』(憲宗大王詩文)(헌종(憲宗) 찬, 조인영(趙寅永) 등 봉교수정) 13종(種) 6책(冊)의 11종 『계간수창』(谿磵酬唱; 나응서(羅應瑞)·장유(張維) 공찬) 1책 38면(面) 수록(장서각 소장본)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계간사 훼철(毁撤)
1971년 계간사를 나주 금계동에서 나주 석현동(石現洞)으로 이전 복원
1994년 나해봉과 장유(張維) 공저, 현대미술연구소 편 『계간수창』 재간행. 본래 이 합동 시집에는 나해봉의 한시 75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2003년 서울대규장각 편 『규장각소장문집해설』 9가 나해봉의 『남간집』의 해설을 포함 25편의 개인 문집 해설 수록
2006년 민족문화추진회 편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속 21』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으며, 개인 저자는 나해봉, 박인, 조우신, 구형, 김광현, 권극중, 김지수, 이상형 8인이며, 2006년 교육부 고전국역사업비 출간 도서이다. 나해봉의 『남간집선』이 영인본으로 수록되었다.
2007년 나주나씨남간공종회 편 『국역 남간집』이 나해봉 저, 이백순 역으로 12대손 나성수(羅性洙)에 의해 국역본 발행(안진오(安晉吾) 발 수록)
2022년 12월 10일 『나해봉 한시집』(나해봉 원작/나종혁 편역) 나해봉 한시 100수 원문과 국역 시 수록
저서
『남간집』(南磵集, 시문집)
『남간집선』(『남간집』의 내용을 선별해서 간행)
『계간수창』(鷄磵酬唱, 나해봉과 장유(張維) 합동 시집, 1799년)
* 『계간수창』: 장유와 교유하며 합동 시집 『계간수창』을 공저로 저술했으며, 계곡 장유와 남간 나해봉의 호를 따서 “계간”이라는 서명을 붙였다. 나해봉과 장유는 둘 다 사계(沙溪)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1606년 선조 39년 진사시에 동방급제 했다. 한편, 1629년 장유가 나주목사 재임 중 나해봉과 친밀히 교유했고, 장유가 나해봉의 첫째 아들 나준의 학업을 도왔다. 나해봉과 장유의 합동 시집 『계간수창』은 권두에 1666년 현종 7년 송시열의 발과 1678년 숙종 4년 김수항의 식(識)이 수록되었다. 한시는 100여 편이 수록되었는데, 나해봉과 장유가 1630년~1636년 인조 8년~14년 서로 교환했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수록했다. 서(書)는 「시서」(詩序) 2편이 수록되었는데, 1631년 인조 9년 7월 16일 나해봉이 장유에게 보낸 서와 1631년 8월 27일 장유가 나해봉에게 보낸 서이다. 권말에는 도암 이재(李縡, 1680년~1746년)의 식, 홍윤보(洪允輔)·오재순(吳載純)·이서구(李書九)의 발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친필 서첩으로 나해봉의 가문 후손들이 보관해 오다가 1799년 간행했다(「계간수창」, 디지털 장서각, <http://jsg.aks.ac.kr> 참조).
* 나해봉의 효성: 나해봉은 지극한 효성으로 유명했으며,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당시 병중의 아버지를 모시고 피란을 떠났다가 왜군에 붙잡혔으나 효성에 감복한 왜장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왜란 후, 집으로 돌아와 곳간 아래 땅속에 묻어둔 쌀을 꺼내 연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나휴의 『남간집』: 1634년 인조 12년 나해봉의 둘째 아들 나휴가 『남간집』을 편집하면서, 저자 자서(自序), 임육(任焴) 서문, 송시열(宋時烈) 발문, 김수항(金壽恒) 발문, 송문술(宋文述) 발문을 수록했으나, 당시 나휴의 편집본에서 발문과 서문의 순서가 뒤바뀌는 혼돈이 있었다고 한다.
* 나주 의병장: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로, 남간 나해봉은 사촌 형 나해륜과 함께 형제 의병장으로 전라 지역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해 의병대를 설치했다. 500여 명의 의병들을 모아 나주 객사 남쪽에 단을 쌓고, 나해봉, 사촌 형 나해륜, 친형 나해구 등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나해봉의 두 아들 나준과 나휴는 각기 의병대 서기와 군관, 그리고 둘 다 군사주서에 임명되었다. 사촌 형 나해륜의 둘째 아들 나경이 17세에 의병에 앞장섰고, 의정부좌의정 송강 정철(鄭澈)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의병을 조직해 나주 의병에 합류했다. 정홍명은 후에 대사성, 암양군수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는 청주에 머물렀으며, 1637년 1월 30일경 인조(仁祖)의 항복으로 호란이 끝났다.
* 나해봉 가문: 나해봉의 첫째 형 나해룡은 나주 진광사에서 학업을 했으며, 나해봉의 형제들은 대부분 강항의 문인이었다. 나해봉의 셋째 형 나해구는 자 응주(應疇), 호 석호(石壕)이며, 나주 출신으로 나주에서 거주했다. 나해봉의 사촌 형 나해륜(羅海崙; 1583년~1659년)은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나해봉과 같이 형제 의병장을 지냈다. 저서로 『송도유적』(松島遺蹟)이 있다. 나해봉의 첫째 아들 나준은 병자호란 당시 의병 활동 후, 천거로 선릉참봉에 제수되었다.
* 한시 「벽류정」(碧流亭): 1640년 조선 시대 인조 18년 벽류(碧流) 김운해(金運海)가 자신의 호를 따라 벽류정(碧流亭)을 건립했고, 이 정자에 남간 나해봉의 시 「벽류정」(碧流亭)이 편액되어 있다. 소재지는 전남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492번지이며, 1992년 11월 30일 전남 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김운해는 나해봉의 둘째 아들의 장인이기도 하다.
* 계간사(谿磵詞): 1790년 조선 시대 정조 14년 남간 나해봉과 계곡 장유를 모신 사당 계간사(谿磵詞)가 전남 나주읍성 서문 밖 금계동에 최초 창건되었다. 계곡과 남간을 배향한다는 뜻으로 계간사라고 칭하고, 남간 나해봉과 계곡 장유 2위를 배향했으며, 1826년 금은 홍적과 계수 나준 4위가 추배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1년 후손 나종성(羅鍾聲), 나용균(羅容均), 나장균(羅章均), 나상균(羅上均), 나윤균(羅鈗均) 등에 의해 복원되었다. 본래 위치는 나주 금계동이었으나 1971년 석현동으로 이전되었고, 이 위치는 나해봉과 나준의 묘지에서 50m 거리이다.
* 『남간집선』: 1799년 정조 23년 6세손 나학신 편 『남간집선』 2권 2책 규장각 소장본의 내용은 권1 세계(世系), 연보 각 1편, 권2 시 103수, 부 1편, 사(辭) 1편, 권3~4 시 123수, 서(書) 4편, 격문(檄文) 2편, 서(序) 2편, 기(記) 5편, 전(傳) 1편, 제문 1편, 상량문 3편, 잠(箴) 1편, 권 5 부록 시 14수, 서 7편, 만사 18편, 제문 4편, 행장‧묘표‧행록 각 1편, 권6~7 내편 하도괘설(河圖卦設) 1편, 천문 1편, 인설(仁設) 1편, 외편 등단필고(登壇必考)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위 내용 중에서 나해봉의 격문 2편은 이괄의 난 격문 「토역괄모의격」(討逆适募義檄)과 병자호란 격문 「토노적모의열읍격」(討奴賊募義列邑檄)이며, 나해봉의 여러 서(書) 가운데 김장생과 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상사계김선생서」(上沙溪金先生書)와 시사와 예에 대해 논의한 「상계곡장상국별지」(上谿谷張相國別紙) 등이 있다(「남간집」, 『민족대백과』 인터넷 참조).
* 나주(羅州) 나(羅) 씨 역대보(歷代譜)―1세~5세: 나주(羅州) 나(羅) 씨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금성(錦城) 나(羅) 씨가 라말여초에 시작되었다면, 나주 나 씨는 여말선초에 시작되었다.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따르면, 나주 나 씨의 시조(始祖)는 나부(羅富)이며, 고려 시대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감문위는 고려 6위의 제1위로서 상장군이 감문위 수장이다. 묘역은 1953년 봄 관향(貫鄕, 본관, 선향) 나주 송현동(松峴洞)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 13일 세일제(歲一祭)를 시행하고 있다. 1977년 가을 묘역을 보수했고, 2008년 시조묘 설단을 나주 보산동으로 이설했다.
1세(世)는 나득규(羅得虯)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2세는 나중윤(羅仲允)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3세는 나송기(羅松奇)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4세는 나수영(羅守永)이며, 고려 시대 진사(進士)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1세~4세의 묘역은 실전되었으며,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고,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5세 나위(羅位)는 고려 시대 제 호조전서를 역임했으며, 세칭 금양처사라고 했고, 말년에 나주로 퇴거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2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계(羅桂)는 고려 시대 중서시랑을 역임했으며, 처는 창원 황 씨이고, 후손들은 경기도에 살았다. 시랑공파(侍郎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4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석(羅碩)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令同正) 금성군(錦城君)을 역임했고, 처는 남평(南平) 반(潘) 씨이며, 후손들은 전북에 살았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시조이며, 9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세(羅世)는 고려 시대 문과 한림 상원사 연안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전북에 후손들이 살았다. 연안군파(延安郡派)의 시조이며, 5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원(羅源)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 영동정을 역임했고, 묘역이 나주 송현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나주에서 세거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시조이며, 27개 파로 분파했다. 나주 송현동 개발 때문에 2008년 7세 묘역이 있는 나주 보산동으로 5세 묘역 일부가 이장되었다.
4세까지는 묘역이 실전된 실전 선조이며, 5세부터 묘역이 현존하는 현존 선조이다. 당시 나주 나 씨 선조들은 본관이나 관향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조선 시대 전기 세종 1년 전북 김제 출신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기재(나주인)함으로써, “최초의 나주인”이 탄생했다. 판서공 나득강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이조좌랑, 예조정랑, 의금부지사를 역임했고,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이후부터 전남 나주(羅州)가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 후손들은 나주 또는 나주인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판서공 나득강의 부친은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이며, 고려 시대 후기에 예문관지제고, 춘추관편수관 등을 역임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우의정을 제수받았다. 나중우와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를 거치며 나주 나 씨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중기 사대부 시조 문학을 대표하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를 기록한 호조정랑·승정원좌승지 송암 나위소(羅緯素)는 또한 호남 제일의 부호였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나위소 가문의 재산은 후손 나만치(羅晩致)에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시대 후기 전북 정읍 출신 백봉(白鳳)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이다.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학을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거쳐 제헌의회와 대한민국국회에서 5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장면(張勉)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나용균 가문은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 대한민국 3개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경제 부총리, 통일 부총리 등 장관직 5회, 부총리직 3회를 역임한 나웅배(羅雄培)는 또한 서울대교수와 아주대총장 그리고 중앙대특임교수와 목원대초빙교수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관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나웅배는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사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를 마친 경영학자로서 고도 성장기 한국 경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경영학의 아버지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끝> <나종혁,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
* 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나해봉」,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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