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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ring님 '
" 뭐야, 진짜……. "
중얼중얼,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하고의 약속을 지키려면 교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되면 또 한 사람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는 셈이었다. 마음 같아선 어떻게든 김종인과 맞닥뜨리지 않는 상황 쪽으로 가고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김종인을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홧김에 한 고백이라지만, 8개월간의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그날처럼 후련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걱정을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짝사랑은, 극단적인 동기부여가 있지 않는 이상 끝내기 어려운 거니까.
내가 날 알고 있다. 이제 남은 밧줄 하나를 놓으려던 내 손 하나를 덥석 잡아 올리며 다시금 날 언제든지 착각의 늪에 빠뜨릴 김종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상처를 받아야 끝나는 게 짝사랑이니, 그게 참 비참한 약자의 공식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안타까운 약자다. 그게 상처를 받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상처받을 짓을 반복하는 우리는 바보이자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약자다.
짝사랑의 조건 열네 번째 : 상처를 받아야만 짝사랑을 끝낼 수 있다.
" 자, 종례 끝. 반장, 인사. "
" 차렷, 경례. "
" 감사합니다. "
모든 맥이 다 빠진 상태였다. 저마다의 아이들은 가지각색의 이야기들을 꺼내며 찬란한 학교생활의 청춘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서 유일하게 죽어가는 건 다름 아닌 나 혼자인 듯했다. 집에선 엄마에게 재수가 없어지려고 환장했다며 늘 제지당했던 땅이 꺼져라 한숨 쉬기를 무한대로 반복하는 중이었다. 불안감에 요동치는 두 다리도 사정없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딱 세 가지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는, 아까 전 어떻게든 김종인을 피해 다니기로 했던 내 결심이 하루도 채 지나지도 않아 산산조각이 나서였고, 두 번째는 동시에 수업이 끝나고 기다리라는 말을 했던 김종인과 변백현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 어우, 진짜 병신새끼. "
" ……아, 죽을까 그냥. "
" 야, 시발 어이가 없어서 욕도 안 나온다. 이럴거면 아침에 뭐하러 그렇게 김종인 피해다녔냐? "
" ……. "
" 그래, 생각나네. 한 달 전에 네가 김종인이랑 같이 들을 거라면서 방과후 신청했던 게 선명하다 선명해. "
" ……아, 좀 그만하라고 진짜! "
" 너 존나 병신새끼, 진심. "
친구들의 행복은 즉 내 불행인 듯싶었다. 간절하게 스톱을 외쳐대는 내 요구는 들은 체 만 체하고 저들끼리 수군수군 내 앞담을 까고 있는 꼴에 잘 자리 잡고 있던 멀쩡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느낌이었다. 전생에 내가 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했나 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럴 리가 절대 없지. 보미의 말대로 불과 한 달전, 한참 김종인과 막 친해질 단계였을 때쯤 일이다. 우리 학교에선 늘 시험을 2주 정도 앞두고 방과후 특별 수업을 진행하곤 했는데 놈이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그걸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드디어 조금이라도 친해질 빌미를 발판으로 삼아 어떻게든 종인이와 단둘이 짝꿍을 하겠다며 방과후 특별 수업 참석 표에 당당히 혼자 O를 썼던 등신 같은 한 달 전 내 모습이 흐릿한 환상 속에 선명하리 만큼 낙인찍혀오는 거였다.
아, 온 하늘이 까맣게 얼룩졌다. 그 까만색은 점차 내 가슴께로 퍼져갔고, 마지막으론 앞으로 일어날 상황까지 번져 종지부를 찍었다. 엄마, 나 머리 왜 달고 살까. 나 진짜 왜 살아?
" 아, 나 방과후 뺄래. 알빠야? 김종인이랑 단 둘이 듣는 거 보단 낫지. "
" 그거 이미 담임한테 명단 넘어가서 너 못 뺄걸, 우리 담임 그런 거 다 검사하잖아. "
" ……집에 급한 일 생겼다고 하면? "
" 앞으로 방과후 8시간이나 남았는데 매일 급한 일 생겼다고 하게? 그냥 어차피 다음에 볼 거 얼굴에 철면까고 들어. "
" 아니,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고. "
" 야, 고백은 걔가 받은……! "
" 아아, 알겠어 알겠어. 애들 들어, 좀 닥쳐 진짜……. "
황급히 한쪽 팔을 들어 생각 없이 나불거리는 윤보미의 방정맞은 입을 막아버리는 나였다. 세상에 적이 수두룩했다. 우선 그중에 가장 큰 적은 지랄 맞은 우연이었다. 막상 김종인을 마주하고 싶었을 때는, 죽어도 작은 교점 하나가 안 생기더만 왜 정작 피해야 할 상황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드라마 같은 우연이 잘도 생기냐 이 말이었다. 오늘 좀비로 빙의한 횟수로만 족히 열 번은 넘는 듯했다. 삐꺽거리는 낡은 소리가 나는 허리를 곱게 펴고 진득하게 내려간 한숨을 한번 크게 토해냈다. 이상한 혓구역질도 나올 것 같았다. 괜스레 과한 긴장을 한 탓일 거라 치부했다. 각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며 제 등 뒤로 가방을 매는 윤보미와 배수지의 얼굴이 꼭 나라를 지키고 온 용감한 전사들로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저들은 나라를 지킨 용감한 전사니 천운을 받고, 난 나라를 팔아먹은 한심한 역적이니 천벌을 받는 것 같지 않으냐.
느릿하게 등을 돌려 무겁기 그지없는 고개를 떨구었다. 모래주머니가 양쪽 두 발목에 묶인 느낌과도 같았다. 두 놈들이 일방적으로 기다리라고 했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우선적으로 겁이 났다. 홧김이 아니라, 욱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 마음을 전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말했던 변백현의 말이 생각났지만, 난 그럴만한 위인이 되지 못 했다. 김종인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감히 상상하기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쪽팔리고 민망하니 피하고 싶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그래서 자꾸만 놈을 멀리하고 싶었다. 그렇게 돼버렸다. 떨리는 감정보단 민망하고 어색한 감정이 더 섣불리 드는 게 문제였다.
[변백현 미안 나 방과후라 수업 끝나고 바로 방과후 수업하러 왔어]
[국어는 내일 아침에 가자마자 줄게]
[그리고 김종인한테는]
아, 이 부분에선 황급히 뒤로 가기를 눌러댔다. 말해도 내가 말하는 게 낫지. 저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김종인의 번호를 꾹 하고 눌렀다. 나 방과후……방과후 수업 들어야 해서, 그러니까……음. 아, 이거 뭐라고 보내 진짜. 격하게 번져오는 자욱한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져왔다. 김종인과 단 둘이 얘기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선택했던 방과후가 한순간에 놈을 피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기막힐 정도로 어색했다.
방과후, 내가 김종인하고 얼굴을 트게 된 계기가 바로 작년 방과후였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지만.
" 존나 귀엽게도 먹네 "
매점에서 고개를 숙이고 코코아를 마시고 있는 내게 어느 이름 모를 남자애가 귀엽다는 말을 해줬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온통 그날의 매점 안에서 본 그 남자아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름도, 몇 반인지도, 심지어는 몇 학년인지도 모르는 무지 상태에서 그놈을 운명처럼 또다시 만난 건 다름 아닌 방과후 시간이었다. 이번엔 성적 좀 올려보려 큰마음 먹고 신청한 방과후에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 남자아이가 떡하니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것 아니냐. 최대한 눈에 튀지 않게 조용히 김종인을 바라봤다. 그렇게 혼자서 쿵쿵거리는 심장이 참 좋았다. 몰래 네가 하는 휴대폰 게임을 따라도 해보고, 네가 집중할 때면 난 또 그때를 놓치지않고 네 얼굴 감상을,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좋아서. 그렇게 방과후가 끝나기 마지막 날을 남겨두던 날, 아마 처음으로 김종인에게 내 이름을 강제적으로 알려야만 했던 사건이 일어났지만.
" 윤희나. "
" 희나 안 왔어요. "
" 윤희나 감점 1점, 이거 감점 3개 이상이면 출석부로 넘어가. 이것도 똑같이 출석부에 들어가니까 되도록이면 안 빠지는 게 좋을 거야. "
" 네에. "
" 김종인. "
" ……. "
" 김종인 안 왔니? "
" 죄송합니다. "
" 빨리빨리 다녀, 이거 출석부 들어간다고 못 들었니? "
" 죄송합니다. "
부랴부랴 교실 뒷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오던 김종인이 앉은 건, 늘 공부보단 김종인을 보기 위해 조용한 뒷자리에 앉아있던 내 옆자리였다. 그때의 설렘이 다시금 잔잔히 스며 들어왔다. 손발이 찌릿하게 기분 좋은 전율을 일으켰다. 옆에 김종인이 있다, 진짜 내 옆에 김종인이 있어. 아, 미친 거 아니야? 나 오늘 화장도 제대로 안 했는데! 화장실이라도 가서 틴트라도 바르고 올까? 아님 비비라도? 아, 이러다가 완전 못생긴 애로 낙인찍히면 어떡해? 뭐 저런 못생긴 애가 다 있어? 아, 자리 옮길까. 이런 못생긴 애랑은 같이 앉기 싫은……,
" ○○○. "
" ……. "
" ○○○! "
" 아, 잠깐만 안 되는데! "
" ……. "
" ……. "
" 안 되긴 뭐가 안돼? "
" 네? "
" 집중 좀 하자? "
" 아, 죄송합니다……. "
" 자자, 다 그만 웃고. "
" ……. "
" ……푸흐. "
" ……. "
" 근데 진짜 뭐가 안돼? "
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마냥 좋지 않았던 그날이라도 지나간 추억은 추억인가 보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있는 입꼬리에 애연한 인상이 쓰였다.
[방과후 교실 어딘데? 나 거기 책 안에 모의고사 성적표 있다고 ㅅㅂ]
아까 보낸 내 문자에 대한 변백현의 답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렇게 다시 그날의 그 교실을 향해 걸어가던 두 다리가 우두커니 복도 중앙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김종인을 두 눈앞에서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번에도 역시 놈은 방과후를 듣는 모양이었다. 김효정을 오랜 시간 좋아하던 것처럼 진득하게 한 우물만 파는 그 성격에 딱 어울리는 짓이었다. 꾸역꾸역, 차오르는 여러 개의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갔다. 꽉 다문 양 입술 사이로 조금씩 시린 바람도 들어왔다. 하고 싶던 말이 모두 백지상태로 돌아갔다. 머릿속에선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 수업 끝나고 너희 반 가니까 없던데. "
" 아, 방과후 수업 듣는다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
" 그러고 보니까 너도 방과후는 꽤 꼬박꼬박 듣나 봐? "
" 응? "
" 예전에 출석부 불렀을 때 안 된다고 소리 질렀던 애, "
" ……. "
" 그거 너잖아. "
두 눈이 일시적으로 크게 떠졌다. 간과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은 그것보다 더 확실히 착각하고 있던 문제가 있다. 8개월 동안 잘도 김종인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얼굴을 봤을 거라고, 그저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애로 인식 정도는 하고 있을 거라고. 몇 번 방과후를 들었으니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거고, 또 그날 처음으로 앞에서 했던 실수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설레발을 떨어댔던 내게 친구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간절한 내 희망사항을 잘도 내쳐내며 광기 어린 독설을 하곤 했었다. 그게 모두 우리들만의 착각인 셈이었다. 김종인은 날 기억하고 있었고, 내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내 특징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하나, 내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모를 뿐, 놈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 할 말 있는데 방과후 끝날 때까지는 못 기다릴 거 같아서 지금 말하고 가야겠다. "
" ……. "
" 솔직히 말하면 갑자기 네 고백 들은 것도 그렇고, 네가 나 피하는 것도 그렇고, 또 이렇게 어색해진 것도 그렇고……나 딴에는 많이 당황스럽다."
" ……. "
" 근데 나 너 진짜 좋게 생각하거든, 내 친구들이랑 네 친구들이랑 다같이 모여서 노는 것도 재밌고, 요즘 부쩍 너랑 친해지면서 장난치는 것도……. "
" ……그래서? "
" 응? "
" 나라고 너랑 장난치고 놀았던 거 싫었을 거 같아? "
" ……. "
" 지금 나 위로해주라는 소리 아니잖아, 대답을 해달라고. "
" ……. "
" 진짜 네 생각을 말……, "
" 나 너랑 정말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어. "
" ……. "
" 지금처럼 편하게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어, ○○아. "
코끝이 찡하게 시큰거려왔다. 애굣살 바로 위론 투명한 안개가 시야 가득 차올랐다. 김종인은 제가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도 분명 짝사랑을 해봤으면서, 저도 분명 고통스러운 거절을 당했으면서, 저도 분명 비정한 결말을 맛봤으면서. 가슴 부근의 욱신거림이 점차 울렁임을 더해갔다. 어깨도 흉측하게 여러 번 흔들려왔다. 친하게 지내자, 그러니 친구로라도 지내자. 언제고 그런 적이 있다. 김종인과 사귀는 단계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친구라도 되게 해달라고, 그럼 소원이 없겠다고. 막상 상황이 닥치니 그보다 더 잔인한 무기는 없는 듯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김종인과 친구로라도 지내는 게 가능했다면, 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렇게 김종인과 아무 느낌 없이 지내는 게 가능했다면,
"……그게 가능하면 너한테 고백 못 했을 거야. "
" ……. "
" 그게 가능하면 너 좋아하지도, 지금 이렇게 네 앞에서 말도 못 했을 거야. "
" ……. "
" 그렇게 따지면 나 진짜 이기적인 년이네, 너도 지금 김효정 때문에 충분히 힘든 상황인데 괜히 내 고백 들어달라고 징징거리는 꼴이잖아 완전. "
" ○○아, 그게 아니잖아. "
" 그래도 너랑 친해지는 기간동안 나 진짜 행복했어, 넌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나한테 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애였고, 착한 애였고, 잘난 애였고……그만큼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 ……. "
" 그래도 결국 친구하자는 말까지 들었으니까 나 완전 성공한 거네. "
" ……. "
" 아, 후련하다. 윤보미가 말한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
" ○○○. "
" 그래도 인사는 하는 거다? 친구하자고는 네가 먼저 말한 거니까. "
그래,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끝났다고 하겠지만 난 이게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은 척, 상처는 받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그 웃음의 의미를 김종인이 모를 리가 없지만 그렇게라도 내 고독한 짝사랑의 끝을 후련하게 끝내고 싶었다. 내 짝사랑은 아예 새드가 아니었다. 항상 몰래 숨어서 봤지만, 그래도 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던 내가 쪽팔리지 않았다. 몇 년 뒤에 왜 그랬을까, 하며 잠 못 드는 밤 이불을 뻥뻥 찰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빠른 미래에 할 후회는 조금 덜었다고 생각했다. 가슴께에선 들여다보기도 겁날 정도로 음푹 패인 상처가 지겹게도 욱신거려왔다. 아, 제대로 된 독침을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지긋지긋한 짝사랑이 끝났다. 수학처럼 공식도 없고, 국어처럼 찾아서 나오는 답도 아니고, 과학처럼 실험을 할 수도 없는 어려움 투성이인 짝사랑이 끝이 났다. 그만큼 지긋지긋했던 8개월간의 고독했던 여정도 마침표를 찍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천천히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는 같은 방향에서 놈을 마주했지만, 지금은 반대 방향으로 놈을 멀리하고 있다. 차라리 더 나쁘게 거절하지, 차라리 더 못되게 싫다고 하지. 저가 김효정한테 상처받은 것처럼,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나쁘게 말해주지 멍청해 빠진 김종인은 나 하나 배려한답시고 또 그러지도 못 했다.
그러나 감정은 두 배였다. 날 배려하는 김종인식 거절에도 전해오는 슬픔은 배였다. 똑같은 눈물이다. 김종인이 김효정에게 거절당했던 그날의 눈물과 다를 것 없는 눈물이다. 또 그날의 김종인이 흘렸던 먹먹함과, 지금의 내 먹먹함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 어, ○○○ 뒤지고 싶냐 진짜? 답 왜 안해, 너 내 모의고사 점수 봤어 안 봤어. "
" ……. "
" 야, 시발 내가 애들한테 교실 물어보느……! "
" ……. "
" 야, 너 또 왜그래? 무슨 일 있어? "
" ……. "
" ……. "
" 야, 나 이제 끝이야 진짜로……. "
" ……왜그래? "
그때와 다름 없이 변백현이 내 두 눈을 가려주는 것, 딱 그 하나의 공통점이다. 놈은 이번에도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 내 뒷머리를 끌어당겨 제 품에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꼭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신호 같았다. 수도 없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이 난 변백현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져내려갔다. 모든 건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에 없고, 상처받은 마음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있다. 어정쩡한 배려로 날 상처 준 김종인은 갔다. 짝사랑은 끝났고, 8개월의 설렘도 갔다. 아픈 건 변함이 없었다. 욱해서 한 고백이든, 진심으로 꺼낸 마음에도 아픈 건 달라지지 않았다. 잘했다, 잘했어. 스스로의 최면을 걸어왔다. 날 위로해주는 그 따뜻한 목소리에 난 또다시 힘겨운 힘을 얻어 갔다.
" 질러 그냥, 그리고 풀어. "
" 아, 지금 내가 노래 부를 기분일 거 같냐? "
" 왜, 나도 작년에 차이자마자 바로 노래방왔는데. "
" 뭐 존나 슬픈 이별 노래 부르고 쳐울라고? "
" 아니, 존나 신 나는 댄스곡 부르고 쳐웃으라고. "
작게나마 인상이 쓰였다. 정신 못 차리고 울어버린 탓에 흉측하게 눈두덩이가 부어버린 날 데리고 노래방에 온 저의가 뭔가 궁금했다. 정말 룰루랄라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며 댄스곡을 부를 거라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 아니냐. 그런 내 탐탁지 않은 표정은 신경도 안 쓰는 듯, 이젠 아예 저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플라워의 애정표현을 불러대는 모습에 기가 찬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거 완전 40년 경력의 변백현 디너쇼에 단독 티켓 표를 내고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삐까번쩍한 조명해, 크게 울리는 마이크 에코에, 혼자 신 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꼴이란……딱이네 뭐.
그래도 보미와 수지를 만났으면, 뭘 해도 김종인 이야기로 흘러갔을 텐데 변백현은 또 그러지 않았다. 그때문에 실연 당한 여자처럼 머리는 산발이 돼서 공포영화를 찍을 것이란 걱정은 한시름 덜었지만.
" 야, 나도 사실 말은 제대로 안 했지만 나 작년에 진짜 별 지랄을 다했어. 걔네 집까지 가서 기다려도 보고, 알바한 거 다 모아서 비싼 목걸이도 사주고, 나 어장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바보같이 좋다고 하고. "
" 니가? "
" 거의 4개월동안 그러다가 한번 마음먹고 고백했거든? 그랬더니 처음에는 좋았는데 날 좋아하는 티를 너무 많이 내서 그게 부담스럽대. "
" ……. "
" 남자든 여자든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 건 좋은 거 아니래, 걔가 나한테 한 말이야. "
" 그거 네가 나한테 한 말 아니야? "
" 나 딴에는 그게 충격이었거든, 나름대로 좋아한다고 표현한 건데 너무 많이 티를 내서 부담스럽다니까……그 이후부터 뭐만 해도 이게 티를 내는 건가, 너무 많이 내면 안 되겠다, 그렇게 세뇌했던 거고. "
놈의 짝사랑에 대해 들은 적은 거의 이번이 처음이었음에도, 공감되는 부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사실 내가 짝사랑하는 그의 이상형에 맞게 변해가는 게 우리들의 의무이자 선택 아니겠냐. 저릿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먼저 꺼내들은 변백현에게 내가 해줄 말은 단 하나였다. 그를 질책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같은 편인 사람을 지지해주는 것.
" 완전 나쁜 년이네 그거. "
" 존나 나쁜 년이지 그거. "
" 김종인도 존나 나쁜 놈이고. "
" 걔도 존나 나쁜 새끼고. "
" 아, 갑자기 빡친다. 마이크 좀 줘봐, 티얼스 부르게. "
" 안 부르신다며? "
" 갑자기 부르고 싶어졌어, 가사에 김종인 넣어서 부를 거야. "
" 오, 찌질한 구썸녀 컨셉임? "
" 썸이기나 했냐, 김종인이랑 나랑. "
크크, 개구쟁이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내 쪽으로 마이크를 건네주는 변백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이크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갑작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버리는 것 아니겠냐.
" 야, ○○○. "
" 응? "
" 솔직히 말하자, 너 진짜 이제 김종인 끝이냐? "
끝이냐고 묻던 변백현의 마지막 말이 노래방 내부 안으로 자욱한 메아리처럼 퍼져갔다. 끝이냐, 끝이냐. 그런식의 질문이라면 답은 하나였다. 응, 정말 끝이야. 사실 짝사랑이 오래 되면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설렘과 떨림이 예전같지가 않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을 오랜 기간 동안 짝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포기하지 못해 좋아하는 거기 때문에. 날 착각하게 하고, 날 시험에 들게 하고, 자꾸만 날 밀어내면서도 끌어당기는 그 사람을 포기하지 못해 계속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는가. 짝사랑은 지독한 순환의 반복이라고. 근데 이제는 그 고리가 중간에 반토막이 나버렸으니 내가 더이상 김종인을 포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고로, 이제 더이상 착각할 이유도, 시험에 들 이유도 없다. 그러니 정말 끝이다. 그게 내 답이었다.
" 응. "
대답했다. 그 뒤를 이을 코멘트는 하고 싶지 않았다. 구차한 이유가 늘어갈 수록 미련이 늘어나는 것뿐이다. 난 오늘 순환의 고리를 끊었고, 김종인을 남몰래 훔쳐봤던 내 절절했던 감정도 모두가 끝이 났다.
2025년, 7월 19일. 어느 한 고깃집에서 모든 이들이 모였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세월의 자글자글함을 얼굴 가득 머금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날의 친숙했던 얼굴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또 어떤 이는 검은 때에 찌들어 인생의 쓴맛을 진득이 묻히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변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그 상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글지글, 고기가 타들어갔다. 그게 꼭 십 년 간의 세월이라도 그대로 비춰오는 듯싶었다.
" 야, 김종인 왔다! "
" 어, 대박 김종인! 야, 얼굴 완전 그대론데? 잘 지냈어? "
" 늦어서 미안미안, 연습이 좀 늦게 끝났어. "
" 야, 이제 ○○○만 남았네? 지가 우리 불러놓고 제일 늦어. 주인공이야, 아주. "
" 야, "
" 응? "
" 네가 ○○○한테 전화 좀 해봐, 언제 오냐고. "
" 아, 이미 전화해봤어. "
" 그래? 어디래? "
" 거의 다 왔대, "
" 안 그래도 지금 데리러 가려고. "
짝사랑의 조건 열네 번째 :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음화 짝사랑의 조건 마지막화 입니다ㅠ.ㅠ
아뭐야....ㅠㅜㅠㅠㅠㅜ
누구야 그래서!! 안 그래도 지금 데리러 가려고. 누규냐고!!!!
아 완전 ㅠ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30 19:1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31 04:10
누굴까여... 다음화 어서 봐야겠어여!!!!
백현아ㅠㅠㅠㅠ
흐어어 마지막화요!?ㅠㅠㅠㅠㅠ아악 백현아아ㅠㅠ
아슬퍼요 ㅠㅠ떨림이예전같지않아도계속좋아하게되는 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16 01:22
두근두근... 누구지
헐 마지막호ㅓ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그나저나 누굴까 짱궁금
백현이랑 이어지면 좋겟구먼..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25 22:17
여주야 잘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종인이도 당황스럽겠지만 잘했어ㅠㅠㅠㅠㅠㅠ그나저나 마지막 대사는 누구인거에요!엉엉
누구일까ㅠㅠㅠㅠ누구지ㅜㅠㅠ
ㅠㅠㅠㅠㅠㅠ누구지
누구야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18 00:20
아 누구야!!!!!!